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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아카이브소설 핫산) 고슴도치와 언죄(言罪)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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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비 #VL #미스터리 #순애 #세리카 #?????

원본 by 蜂の字

===========================

가끔 마법이 인생을 바꿔버리곤 한다.

그것은 사람마다 크기도 제각각이며 종류 또한 다양해서,

예컨대 단 하나의 회화와 마주한 경험만으로 이후의 삶이 결정되어 버린 이를 본 적이 있다.

같은 미술관에서 같은 그림을 본 나는 매점에서 산 그 그림의 엽서를 어떤 책 사이에 끼워두었지만,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마법의 효력에는 이토록 차이가 있다.

그러니 내 인생을 바꿔놓은 그 마법조차, 아마 다른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일일지도 모른다.

만약 실제로 그런 말을 듣는다면 조금은 상처받겠지만.

나는 그 마법을 ‘사랑’이라 불렀다.

인생을 한 권의 노트라 할 때,

그것을 청춘의 한 페이지로 갈무리하는 사람.

종이에 번진 얼룩 정도로 여기며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

지우개로 아무리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유성펜으로 적어버리는 사람.

그런 이들과 비교한다면 그래, 분명 내 안에서 마법이란 ‘사랑’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어 불렀던 그날의 풋풋함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인생을 바꿔버리는 마법의 크고 작음이 다양하고 사소한 계기조차 존중받아야 한다면,

어찌할 도리 없이 추락해 버린 나도,

나를 추락시킨 이 감정조차도 그 누구도 비웃을 권리는 없을 것이다.

계기는 그의 손이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머니를 아직 ‘마마’라고 부르던 시절, 나는 타인의 손을 빌려 그 온기를 느끼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아무래도 내 몸은 남들보다 체온이 낮은 편이었는지, 누군가의 손을 잡을 때마다 자주 “차갑네”라는 말을 들었다.

개미가 꼬일 만큼 익어버려 썩어 문드러진 그 세 글자는,

초등학생 때는 체육 시간의 손잡기에서,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는 괴롭힘의 이유로 얻어맞은 뒤의 변명으로 쓰였다.

내게는 그녀들이 끼얹은 급식 우유가 더 차가웠고, 끝내 닿을 수 없었던 그 녀석들의 마음이 그 우유보다 더 차가웠으리라 확신한다.

그런 나였기에, 그가 내민 손을 잡았을 때 그 차가움에 놀라고 말았다.

그대로 “차가워”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는 내 손을 가만히 바라보며 “따뜻한 손이네”라는 말을 건네왔다.

줄곧 핍박받으며 열기를 잃어갔던 마음이, 그보다 훨씬 차가운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아, 지금 이 순간.

나는 인생을 바꿔버릴 마법에 걸렸음을 분명히 이해했다.

이 이야기를 그 사람이 듣는다면 웃을까. “너다워서 좋네” 같은 말을 해줄까.

그런 의미 없는 상상을 이어가던 날들도 오늘로 끝이다.

이 마법을 그 또한 ‘사랑’이라 불러주길 바랐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 고백 뒤에 남은 것은 생각해 보면 당연한 사실뿐이었다.

그렇게나 손이 차가웠으니, 분명 그는 누구의 손이라도 따뜻하게 느꼈을 테지.

어째서.

비 내리는 가로등을 등진 채 그저 흐느끼는 나를 부감하듯 바라본다.

왜 나는 이런 쓰레기 같은 꼴로 비에 젖어 있는가.

고백하고, 거절당했으니까.

아스팔트가 차갑다.

감기 걸려, 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럼 왜 거절당한 거지.

그는 자신이 선생이고, 선생은 누구에게나 평등해야만 하니까, 라고 말했다.

그럼 『선생』이란 게 뭔데.

『평등』이란 게 대체 뭐냐고.

모르겠다.

멍해졌던 머리는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무엇이 적인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선생』이라는 단 고작 두 글자의 라벨이 나의 『사랑』을 이긴다는 것인가.

얇은 종이 위에서는 그저 잉크 자국에 불과하고, 컴퓨터라면 고작 32비트.

입 밖으로 내면 1초도 걸리지 않는 두 글자가 지금도 수량을 불려 가는 이 감정을 가로막는다는 것인가.

『차갑다』라는 고작 세 글자의 말이 한 사람의 청춘을 짓밟고, 『사랑』이라는 겨우 두 글자에 의존하게 할 정도의 힘을 가진다는 것인가.

아아, 그러니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말이다.

내가 괴롭힘을 당한 것은 『차갑다』라는 말 때문이다.

내가 선생님을 좋아하게 된 것은 『따뜻하다』라는 말 때문이다.

내가 선생님에게 거절당한 것은 『선생』이라는 말과 『평등』이라는 말 때문이다.

『차갑다』라는 말이.

『따뜻하다』라는 말이.

『선생』이라는 말이, 『평등』이라는 말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나와 함께 가자.”

목소리에 놀라 뒤돌아보았다.

상대의 정체를 살피듯 발끝에서 위로 옮겨가던 시선은 노출된 손끝과 머리에 못 박혔다.

언뜻 보면 파티의 사회자라도 맡았을 법한 턱시도를 걸치고 있는 것은, 낡아빠진 나무 인형이었다.

현실은 물론 책 속에서조차 본 적 없는 기괴한 모습에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누가 봐도 위험하다.

본능은 필사적으로 경종을 울리고 있었지만, 그와는 반대로 발은 제멋대로 그를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요구받는 대로 나는 그 손을 잡았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전혀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 그것이 오히려 기분 좋았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으니까.

“이름은?”

머리가 무겁다.

눈꺼풀도 무겁다.

그럼에도 사고만은 지독히도 맑았다.

“로고스라고 불러.”

너희가 그 방법으로 나를 상처 입힌다면, 나 또한 그 방법으로 복수해 주마.

말이 나의 의미를 지워버렸다.

그러니 나는 말을 지우겠다.

다시는 차가운 손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지 않도록.

1 / 3

그날, 키보토스에서 『말』이 사라졌다.

2 / 3

『 』

눈꺼풀이 이질감을 밀어내듯 떠진다.

이질감이라고는 했지만,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떠오르는 비일상적인 일이라곤 머리카락이 평소보다 조금 더 부스스하게 꼬여있는 정도였다.

오늘도 창가로 스며드는 따스한 햇살에 눈을 떴으니 ‘운석이 떨어져 키보토스 붕괴!’ 같은 엄청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안심할 수 있다.

하품하고 침대에서 내려와 양치하는 것도 평소와 다름없었다.

리본으로 머리를 묶고, 아침밥을 먹고, 채비를 마친 뒤 집을 나섰다.

그 무렵엔 이질감 따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기에, 분명 나는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생각한다.

역에 도착하자 승강장에는 이미 모두가 모여 있었다.

“세리카 짱, 안녕하세요!”

“안녕, 모두들.”

“들어보세요, 세리카 짱! 호시노 선배가 어제 길가에서 돌을 발견했대요.”

“돌?”

나도 모르게 엉뚱한 목소리가 나온다.

돌이라니, 딱딱하고 회색빛이며 옛날에 자주 발로 차며 놀던 그 돌인가.

아르바이트 일정을 보며 길을 걷던 내 머릿속에선 아비도스가 안고 있는 과제에 대한 토론이 한창이었다.

그곳에 갑자기 던져진 것은 길가에 떨어져 있었다는…모양인 돌.

장엄한 분위기로 진행되던 뇌 내 회의는 그 소식에 놀라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여전히 이곳은 평화롭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데도 작고 이상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으며, 그런 대화에 태클을 걸고 함께 웃는 아침의 이 시간을 나는 좋아했다.

“굉장하다니까~ 지금까지 본 적 없을 정도로 평평하고 매끄러워서.”

“‘매지컬 스톤’이라고 하면 세리카가 덜컥 살 법한 돌이었어, 틀림없어.”

나도 모르게 상상하고 만다.

누가 봐도 수상쩍은 모습의 점술가에게 붙잡혀, ‘매지컬 스톤’ 한 개에 800엔을 주고 기뻐하며 사는 나의 모습.

아니, 아니지.

기묘한 항아리라든가, 정체불명의 부적 같은 것들을 사 왔던 나지만, 길가에서 주울 수 있는 평범한 돌을 사는 일 따윈 없을, 것이다.

…설득력은 없지만.

“아니 아니! 아무리 나라도 그건 안 산다고,

『 』취급 하지 마.”

윽, 하고 목이 막힌다.

어라, 뭐라고 말하려 했더라.

‘나라도 그건 안 산다고.’의, 그다음에 놓여있어야 할 것이 없다.

무언가 이상한가 싶어 다시 한번 작게 웅얼거려 본다.

‘안 산다고’까지는 유창하게 말하던 입이, 그 너머에 다다르자마자 먹이를 구하는 유조처럼 그저 뻐끔뻐끔 움직일 뿐인 장난감이 되어버렸다.

가방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듯 사고를 굴려본다.

분명 두 글자 정도의 가볍게 말할 수 있는 단어.

목에 걸려서 평소엔 말하지 못하는 단어라면 사방에 널려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더 쉽게 말할 수 있는 그 단어…인데.

‘게슈탈트 붕괴’나 ‘일시적인 건망증’ 같은 게 아니다.

깊고 어두운 바다속에서 손잡이째 놓쳐버린 그물을 힌트도 없이 찾아 헤매는 듯한, 그런 막막함을 느꼈다.

미지의 감각이 갑자기 흘러 들어와 몸이 굳어버린다.

지금까지 마음을 전하는 데 있어 무언가 생각할 필요 따위 없었다.

그저 마음에 떠오른 것을 말하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는다.

그런 당연한 일이 어째서인지 지금은 되지 않았다.

“저기, 세리카 짱……?”

“감기라도 걸린 걸까요……?”

발밑의 지면이 쑥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계속 떨어지는 듯한 감각만이 있었고, 그런데도 지면은 생각보다 가까웠기에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걱정스럽게 다가오는 발들이 시야 구석에 보인다.

“왠지, 몸 상태가 안 좋은…것 같아. 열이라도 있는 걸까.”

이건 분명 말해도 이해받지 못할 것 같다.

게다가 애초에 지금의 나에게 전달할 힘이 있기는 한가.

그렇게 생각하자 주변에 보이던 친구들의 존재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세계에 나 혼자만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강렬한 고독감에 휘저어지던 머릿속은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날 생각만 하고 있었다.

“오늘은 미안, 나는 돌아갈게.”

집으로 향하자 비로소 친구들은 보이지 않게 되었고, 몸은 더욱 무거워진다.

사실은 누군가 도와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도움의 요청조차 내뱉으려 수도꼭지를 틀어봐도 나오지 않았다.

메스꺼움과 두통을 참으며 귀갓길을 걷는다.

아주 조금 남아있던 이성의 부분으로 생각을 거듭한다.

이건 분명 평소 사용하던 말을 잊어버린 게 무서운 게 아니다.

내가 평소에 얼마나 말에 의지하고 있었는지 그것을 역설적으로 들이밀어진 것이 두려웠던 것, 이라고 생각한다.

손 닿는 곳에 있는 ‘목에 걸려서 평소엔 말하지 못하는 단어’.

그것은 ‘고마워’라든가 ‘축하해’처럼, 주변의 모두가 당연하게 말하고 있는 단어들이었다.

나른함이 더해가는 몸을 이끌고 겨우 집에 도착해 침대 위로 쓰러진다.

외롭다.

누군가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머릿속에서 나오려 하지 않고, 말이 되지도 않은 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나오는 일도 없다.

마음이 불안했기에 눈을 꽉 감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

이마가 서늘하니 차갑다.

이상을 나타내듯 달아오른 몸에 갑자기 닿은 그것이 내 의식을 깨운다.

“아, 깨버렸네.”

이건 선생님의 손이다.

이미 더운데도 체온이 더 올라가는 것이 느껴진다.

그와는 반대로 마음속은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의 존재를 천천히 확인하듯 안심되어 갔다.

“깨워서 미안해, 체온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럴 거면 체온계를 쓰면 되잖아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선생님의 손에 밴 땀방울에서 체온계를 찾을 여유조차 없었음이 엿보였다.

“호시노에게 연락을 받고 왔어. 사정은 자세히 듣지 못했지만.”

“…고마워.”

중얼거린 뒤, 내가 아무런 꾸밈없는 말을 거부감 없이 내뱉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미열이 있는 모양이네. 별일 없어서 다행이다.”

그렇게 말하며 선생님은 나에게 등을 돌려 의자에서 일어나려 한다.

그에 호응하듯 아까 엄습했던 그 강렬한 외로움이 다시금 마음을 갈기갈기 찢으며 들어오려 했다.

다시 혼자가 되어버린다.

싫다.

반사적으로 뻗은 내 오른손은 정신을 차려보니 선생님의 옷소매를 붙잡고 있었다.

붙잡아 버렸다.

뭐라도 말해야 해.

하지만 내 손안에 있는 이 말은 부끄럽다.

…부끄럽지만, 분명 열 때문이라고 핑계 댈 수 있다.

지금이라면 열 탓을 할 수 있으니 조금 어리광을 부려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가지, 마.”

익숙하지 않아서 모르겠다.

이게 어리광을 부리는 걸까.

선생님은 난처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돌아보고는 의자에 다시 앉아 주었다.

“괜찮아. 마실 걸 준비하려고 했을 뿐이니까. 불안하게 해서 미안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겠니?”

다행이다.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니었다.

반동으로 피로가 확 몰려온다.

울 뻔했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억눌린 눈물 대신 솟구쳐 오른 것들을 그대로 쏟아냈다.

“오늘 아침부터 말이 잘 안 나와서. 하고 싶은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데,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아.

평소처럼 말하려고 하면 늘 있었던 말이 어디에도 없는 것 같고, 대신 생각나는 말들은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두서없었을 텐데도 선생님은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내가 말을 마친 것을 확인한 뒤, 잠시 기다리라며 따뜻한 코코아를 타 주었다.

“그거라면 짚이는 데가 있어.”

선생님은 주머니에서 문고본을 꺼낸다.

겉모습은 아무런 특징 없는 평범한 문고본이었는데, 펼쳐보니 구절구절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기계적으로 검게 칠해져 있었다.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책이야.

그중 한 구절이 나에게 용기를 주기에 매일 아침 다시 읽곤 하는데, 오늘 아침 펼쳐보니 이렇게 되어 있었어.

요컨대,”

팔랑팔랑 넘기던 손을 멈춘다.

“하룻밤 사이에 키보토스에서 누군가의 손에 의해 특정 단어들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아.

그건 종이로 된 책뿐만 아니라 우리 머릿속에도 적용되고 있다는 걸 세리카 덕분에 이해할 수 있었어.

나는 여기에 채워져 있던 단어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해 내야만 해.”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싶어 고개를 드니 선생님의 눈이 똑바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 정말로 일어나고 있구나.

농담 같은 이야기지만 나 또한 그것을 실감하고 있기에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온다.

목이 죄어오고 돌연 숨 가쁨이 돌아왔다.

“세리카가 그걸 도와줬으면 좋겠어.”

내 이름이 불려 움찔한다. 나는 지금 의지 받고 있다.

“그거, 나라도 괜찮은 거야?”

고집을 피우고 싶어 하는 뇌 내 상황과는 반대로, 나온 것은 잔뜩 갈라진 목소리였다.

너무나 여유 없는 자신을 깨닫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응, 부탁해도 될까?”

“그렇다면야. 뭐, 어쩔 수 없네.”

평소의 내 말투란 분명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얼굴은 절대로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조금 미지근해진 머그잔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단어를 떠올리는 건데?”

“말은 라벨이야. 상징이지.

그건 다양한 사물과 꽁꽁 묶여 있어서, 세계를 아름답게 채색하는 힘이나 반대로 싫은 것으로 바꿔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어.

특히 우리의 추억은 모두 단어가 표면에 붙은 채 기억되고 있지.

예컨대 이미 떠올린 단어가 있는데,”

설명하며 가슴 주머니에 있던 메모지를 한 장 찢어 거기에 한자를 써 내려간다.

『女』 『疾』 『女』 『石』.

알고 있다. 나는 이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들어있어야 할 서랍을 열어도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었고, 그저 공백만이 그곳에 있었다.

“내가 아직 중학생이었을 때였나, 같은 반에서 늘 시험 점수나 달리기 속도 같은 걸 겨루던 상대가 있었어.

주변에선 라이벌이라고들 해서 서로 으르렁댔지만, 속으론 나도 그 친구도 서로를 인정받는 게 기뻤지.”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말을 잇는다.

“어느 날, 그 친구만이 문예 콘테스트에서 입상했어.

국어 과목은 내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었기에 그 결과를 보고는 담임 선생님께 항의까지 하고 말았지.

선생님은 심사위원이 아니니 알 턱이 없는데 말이야.

그때부터 변해버렸어.

나의 승리로는 마음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게 됐지.

그 친구가 나보다 좋은 결과를 내는 걸 보았을 때, 그곳에 있었던 건 그저 분함뿐이었고,

그 친구의 승리가 늘어날 때마다 내 이빨로 깨문 입술의 상처가 늘어갔어.”

선생님이 메모지를 손가락으로 훑는다.

마침내 나도 떠올렸다.

이 감정을 나타내는 것은 『질투』다.

“처음엔 청춘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지금에야 생각해.

하지만 결국 그것을 ‘질투’라고 불러버렸기에, 예전에는 학생다운 산뜻한 우정이었던 그것은 이제 아주 깨끗하게 더러워지고 말았어.

내가 ‘질투’라고 부름으로써 더럽히고 만 거야.”

선생님은 창밖을 향하고 있었다. 옛날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선생님은 말이야.”

드문 모습이라 바라보고 있자니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향해 돌아본다.

“여기 오는 길에 공원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을 보고 떠올렸어.

설마 이제 와서 그런 옛날 기억이 되살아날 줄은 생각도 못 했지만.”

전혀 몰랐다.

선생님에게 그런 일면이 있었을 줄이야.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선생님이 선생님으로서 사람 앞에 서기 위해 그런 것까진 가르쳐줄 필요가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인간답고, 진흙탕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는 걸 새삼 남에게 털어놓는 것.

나라면 무서웠을 테고 무척 괴로웠을 거다.

검지로 뺨을 긁적이며 말한다.

“그걸 떠올렸을 때 괴롭지 않았어?”

“괴로웠지. 하지만 나는 이 추억을 단 한 번도 지우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어.”

나는 아이고, 이 사람은 어른이다.

싫어도 그것을 알게 된다.

강한 척이 아니라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그 뒷모습이 무척이나 멀게 느껴졌고, 무척이나 부러웠다.

나에게도 있었을까.

온종일 머릿속을 지배하고 마음속에 대못을 박은 듯 아무리 잡아당겨도 떨어지지 않는 것.

시간이 지나도 계속 거스러미처럼 남아있고 누가 봐도 상처인데, 그런데도 절대 잊고 싶지 않다고 우길 수 있는 그런 추억.

생각하며 시선을 굴리던 중,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응시하는 선생님이 비쳤다.

분명 선생님도 단어를 떠올리려 하고 있을 것이다.

아까 생소하게 느꼈던 건 평소 선생님은 마주 보고 이야기해 주기 때문인 걸까 하고 문득 생각한다.

그리고 그 날카로운 옆얼굴에는 어딘가 낯익은 데가 있었다.

선생님과 옆얼굴.

겨울과 단어와 가시와 나.

아아, 떠올랐다.

그해 겨울, 컵라면을 먹으며 스케이트장을 바라보던 때의 옆얼굴이다.

마음속 깊이 눌러두었던 기억이 이미 목구멍까지 차오른 것이 느껴진다.

‘거스러미’ 같은 수준이 아니다.

여태껏, 아니 앞으로도 결코 낫지 않을 상처에 몇 겹이고 대고 있던 붕대를 천천히 풀어나갔다.

생생하고 처참한 상처 자국이 붕대 아래로 보인다.

겉으로 드러난 상처가 다시금 욱신욱신 아파지기 시작하는 것을 참아냈다.

“선생님, 메모지 좀 빌려줘.”

펜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가슴이 답답하다.

이게 고작 15획이라니, 절대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xxxxx

벌써 세리카가 이 상황에 적응해가는 모습에 놀라며, 메모지 위를 미끄러지는 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증상과 비교하면, 제 컨디션이라곤 할 수 없어도 안정을 되찾고 있다고 느낀다.

우선 무사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다음에 생각하고 있던 것은 지금 막 다 써가는 단어에 대한 것이었다.

단어는 기억과 함께 있다.

그렇다면 너는 도대체 어떤 기억과 함께 어떤 단어를 떠올린 걸까.

렌즈는 아직 새것이라서 아무런 흐림도 없다.

그런 계절에 앨범에 넣어갈 사진들을 세리카는 아비도스라는 장소에서 찍고 있다.

이곳은 거친 파도에 계속 노출된 듯해서,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쉬는 동안 문득 어른인 내가 압도당하는 분위기를 느낄 때가 있었음을 기억한다.

이래서는 금세 렌즈가 흐려지고 만다.

마음이 마모되지 않도록 완충제가 되어주고 싶다.

그래도 빛이 바랜다면 내 마음이 대신 부스러지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로서는 힘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미덥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펜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 정신을 차린 것도 잠시.

건네받은 메모를 보고 심장이 크게 한 번 쿵 하고 요동친다.

『실연』

메모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울창한 숲을 빠져나와 평원에 다다른 끝에 그곳에 덩그러니 남겨진 듯한 기억을 손에 들고 바라본다.

아아, 알고 있다.

나는 분명히 이 단어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메모에 적을 때 그녀가 힐끗 보였던 그 표정을 알고 있다.

잊어서는 안 될 기억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잊었다는 말로 용서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에 박힌 가시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 가시를 보았던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우리들은 『실연』한 것이다.

3 / 3

To Be Continued : 『실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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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블루 아카이브·26.02.27번역

소설 핫산) 고슴도치와 언죄(言罪) 『 』

#소설
좋아요 0댓글 4저장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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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P
8nozhi작가
게시물 8개
[DC
[캐서린]번역
외부 링크디시인사이드pixiv
게시일2026.02.27 22:13
조회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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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나
ㅇDC
ㅇㅇ126.02.27
디시콘
ㅇDC
ㅇㅇ226.02.27

와 느낌좋다

ㅇDC
ㅇㅇ226.02.27
디시콘
ㅇDC
ㅇㅇ326.02.28

더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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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핫산) 호기심에 카즈사의 귀를 만졌더니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된 이야
Kkkk_kkks026
창작
소설) 유우카쨩이랑은 만나고 싶지 않으시데요
Ccoly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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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핫산) 선생님이 좋아하는 학생의 이니셜이 KK라고 발표됐다.
Mmimino0314057
창작
소설) "내게 사랑을 가르쳐 줘, 선생." (사오리)
타타케루토0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