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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4실버 불릿
‘밀레니엄 사이언스 스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정문 바로 위에 큼지막하게 홀로그램으로 글자가 떠 있다. 아~. 정신 사납게. 나도 알아. 내가 선택했으니까. 입학식 때도 봤고. 학교 건물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전시회마냥 사람들이 늘어서 있어서 소란스러웠다. ‘같이 더 좋은 학교를 만들어 보시지 않겠어요?’ 전혀 관심 없어. ‘로봇이야말로 미래를 여는 열쇠!’ 뭐 어느 정도 공감은 된다. 다만 아쉽게도 내겐 그럴 시간이 없다고. ‘1년 안에 결과를 내렴’. 낮게 울리는 목소리. 부모님이 했던 말이다. 갑자기 플래시백이 일어나더니 권유하는 목소리 속에 섞여 들어간다.
그렇다. 나는 올 한 해 동안 성과를 내야만 한다. 물질공학의 최고 권위자 아래 태어난 나는 온갖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지금까지 자라왔다. ‘분명 부모님의 연구를 이어받겠죠.’ 아니, 티타늄 합금에 그렇게까지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데. ‘그럼 당신은 무엇을 발명할 건가요?’
교실 문을 지나쳐 근처에 있는 안내 로봇에게 부모님의 이름을 댄다. 그러자 로봇은 과장스럽게 자세를 바로잡더니 특별동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메인 교과목 건물에서 15분. 호객꾼이고 길 잃은 신입생이고 뭐고 아무도 없는 길을 따라가니 이윽고 푸른 하늘 아래로 나왔다. 내가 학창시절에 몸담게 될 곳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담벼락 같은 벽으로 구분된 금지구역 ‘폐허’ 중 하나.
학생증을 스캔하고 문을 열자 건조한 공기가 얼굴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사진으로 봤던 아비도스 자치구처럼 사방이 모래로 뒤덮인 대지. 그리고 버려진 산업 설비들이 즐비하다. 몸을 굽혀서 한 줌 움켜쥐자 햇빛을 반사해 반짝거리며 손가락 사이를 통과해 흘러내린다. 아주 고운, 질 좋은 모래다.
태양열 등급 실리콘. 내가 목표로 삼은 결과물은 이 모래를 전부 고순도 실리콘으로, 궁극적으로는 태양전지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도 완전히 자동화된 설비를 통해. 그리고 그 부모의 딸이라는 쐐기를 빼내고 한 개체로서 인정받는 거다. 1년이다. 이 1년이 내 운명을 결정짓는다고 할 수 있다.
안내가 끝나자 로봇은 서둘러 이 외진 곳을 떠나갔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지름 약 7미터, 높이 5미터의 전기로와 마주했다. 이 전기로는 안에 있는 탄소 전극에서 아크가 방출되어 이산화규소와 탄소를 고온에서 반응시키는 역할을 가진다. 이렇게 얻을 수 있는 저순도 금속 실리콘을 양산한다면 기반으로 삼기 딱 좋으리라.
모든 준비를 마치고 용광로가 가열되기를 기다리던 중에 어떤 시선이 느껴졌다. 아까 전 그 안내 로봇이 아직 있는 걸까. 뒤돌아보니 그곳에 서 있던 것은 로봇이 아니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는 소녀였다. 밀레니엄 교복을 입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전도사 같은 딱딱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한 손에는 자동소총, 다른 한쪽 손에는 두툼한 책. 길을 잃었나? 그렇다 하더라도 너무 멀리 왔잖아. 외견도 그렇고. 이런 곳까지 올 리가 없다. 의아해하면서도 나는 무시한 채 실리콘의 등급을 높이기 위한 시설로 향했다.
“신학에 관심이 있나요?”
다시 뒤를 돌아보니 그 녀석은 의외로 가까이, 바로 옆까지 와 있었다. 나보고 하는 말인가? 아니, 나 말고는 아무도 없으니 그건 자명하다. 그렇다면 결론도 자명하다.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밀레니엄에 온 학생들 중에서 신학에 관심이 있는 녀석이 별로 없겠지. 트리니티라면 많이 있겠지만.
“그걸로.”
이온화 장치의 차단기를 올린다.
“그걸로 내 연구를 뒷받침할 수 있다면 관심 있어.”
“그럼 신학에 관심이 있다는 말씀이시네요.”
“내 말 제대로 들었어?”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신이 과학을 진보시킬 수 있다면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도 없다고, 그렇게 말한 거다.
그러자 그 소녀는 자동소총을 하늘을 향해 겨누었다. 탕, 하고 둔탁한 충격음이 울렸고, 그 음파는 모래에 흡수되어 급속하게 멎어들었다. 두툼한 책―그것은 성전이었다―을 옆구리에 낀 채로 천천히 몸을 숙여 발밑의 모래를 살핀다. 아무것도 없는, 방치된 구역이었을 땅에서 소녀는 새빨간 사과를 집어들었다. 숨을 훅 불더니 한입 베어 문다. 과즙이 흘러내려 모래에 진한 자국을 남겼다.
“잘 만든 마술이네.”
나는 일단 박수를 쳐 줬다… 규소를 더욱 고순도로 정제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양의 염화수소가 필요했다. 염소와 수소를 혼합할 필요가 있는데, 그 염소는 염화나트륨 수용액(소금물)을 전기분해해서 생성한다. 요컨대 바닷물을 전기분해하면서 발생한 수소 가스와 염소 가스를 세정 및 탈수하고, 조염화수소를 압축기와 증류탑을 거치며 순도를 높여 염화수소를 얻는다. 이렇게 해도 취화수소와 이산화탄소가 다소 혼합되나, 태양광 등급 실리콘을 만드는 목적에 부합한다면 무시할 수 있는 양이다.
두 번째 총소리가 들린다. 이번에는 또 뭘 하나 싶어서 쳐다보니 커다란 무언가를 모래에서 꺼내려 하고 있다. 그야말로 ‘커다란 순무’*다. 끙끙 소리를 내는 그 움직임이 무시하기에는 어지간히 시끄러워서 나도 뽑는 걸 도와주기로 한다. 그러다가 이건 당기는 것보다 파내는 게 더 빠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끝부분에 보이는 스테인리스 스틸 손잡이 주변의 모래를 파헤쳐 본다. ‘커다란 순무’에 이어 이번에는 ‘꽃피우는 할아버지’**에 나오는 개인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그 전모가 드러났다―오래 사용한 가스 봄베다. ‘HCl’, 산업용 규격으로 G3, 고순도라고 인쇄되어 있다.
*러시아 동화. 크게 자란 순무를 할아버지, 할머니, 손녀, 동물들이 뽑아내는 이야기
**일본 동화. 노부부가 키우던 개가 땅을 파헤쳐서 금화를 찾아냈다는 내용으로 시작함
설마. 압력 조절기를 설치하고 조심스럽게 pH 시험지를 가져다 댄다. 산성 반응. 그것도 강한. 부채질해서 냄새를 맡아보니 자극취가 난다. 끝부분에 달린 노즐을 물에 넣고 쇳조각을 던져넣었다. 작은 기포가 발생한다. 아, 충분히 거리를 두고 불을 붙인다. 펑, 하고 가벼운 폭발이 일어났다. 수용성, 강산, 자극취. 거의 틀림없이 염화수소다.
소녀는 온화하게 웃고 있다.
“아직도 마술 같으신가요?”
불타오르며 금속 실리콘을 생성하는 용광로를 바라보며 나는 두 가지 가정을 세웠다. 첫째, 눈앞에 있는 이 소녀는 힘들게 이 자리에 사과와 염화수소 봄베를 묻은 바보다. 바보 중에서도 특출난 바보. 둘째, 오늘날의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마치 신이 일으키는 기적처럼. 즉 눈앞에 있는 이 소녀는 내가 모르는 세상의 이치를 알고 있는 것이다.
‘사물의 신비를 탐구한다는 것은 종교적인 감정에 가깝다’. 언젠가 부모님이 말했다. 어쩌면 과학과 신학은 의외로 이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뒤따라왔어요. 정문으로 들어올 때 신학이 필요해 보이는 표정이었거든요.”
신학이 필요해 보이는 표정이라고? 뭐야 그게.
“재밌네.”
나는 손을 내민다.
“이야기 정도는 들어줄 수도 있는데.”
악수로 화답한다. 살이 얇아서 피부 사이로 뼈의 모양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마른 체형이다.
“당신은 좋은 제자가 되겠네요.”
뭔가 입장이 뒤바뀌어 있다.
“나는 교수고, 그쪽이 조수인데.”
“...그게 중요하시다면 그래도 좋아요.”
휙 돌아서는 소녀를 보니 이제는 후회가 밀려왔다. 아… 분명 귀찮은 1년이 될 것이다.
“탄피를 보신 적이 있나요?”
단결정 실리콘이 성장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소녀가 말했다. 증류를 통해 침전된 고순도 실리콘은 이 액체 실리콘으로 채워진 수조 안에서 크고 차가운 결정으로 굳어 간다. 이를 절삭하여 태양전지의 기초가 되는 반도체로서의 단결정 실리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있어.”
여차하면 편의점에서 살 수 있다. 탄피다! 그런 의도로 사지는 않겠지만. 내 표정을 보더니 소녀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의외로 과학자들은 관찰을 게을리하는군요.”
“관찰은 측정하는 사람들이 할 일이야. 나는 굳이 말하자면 이론가.”
그랬나요, 하면서 자동소총을 겨눈다.
“잘 보세요.”
총알이 발사됨과 동시에 총에서 배출된 탄피가 모래밭을 향해 떨어진다. 땅에 닿은 그것은 모래에 묻혀 보이지 않게 된다. 무엇 하나 이상할 게 없는 사격. 거기 있잖아. 그러자 소녀는 또 다시 한숨을 내쉰다.
“그럼 주워서 찾으시면 알려주세요.”
저는 실리콘을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요. 그러더니 소녀는 수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입장이 뒤바뀌었다. 왜 내가 이런 짓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노트를 옆에 끼고 몸을 숙였다. 어차피 결정이 형성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시간 때우기도 못 된다. 손으로 모래를 가볍게 털어냈지만, 나오지 않았다. 어라, 분명 여기였을 텐데. 피벗 턴*을 하듯이 빙글 돌면서 1미터 반경 정도를 빠짐없이 털어냈지만, 그래도 나오지 않았다. 더 깊은 위치에 있나? 용광로 옆에 세워두었던 삽을 집어들고 슥 퍼내 올린다. 흔들면서 떨어뜨려 봐도 그 황동색 원통은 보이지 않았다.
*다리 하나를 중심으로 해서 몸을 회전시키는 동작
첫째, 마술이다. 떨어지기 직전에 신발 뒤꿈치에 숨겼다. 이건 아니다. 탄피는 배출 직후에 온도가 높다. 둘째, 더 깊숙이 묻혔다. 이것도 아니다. 9mm 탄피는 아무리 크게 잡아도 5그램 이하일 것이다. 그러니 삽으로 닿을 수 있는 깊이보다 더 깊게 묻혔으리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총격전 잔해를 처리하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나요?”
수조를 바라보며 소녀는 말한다. 없을지도 모른다. 전혀 의식해본 적이 없었다. 그보다 오히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소비된 것은 사라지고, 뇌가 인지하는 영역 밖으로 나간다.
실증 실험이다. 나는 라이플을 꺼내 삽 위에 두고 총구를 하늘로 향한다. 탕, 발사되고 남은 껍데기는 삽을 향해 떨어진다. 깡, 깡 소리를 내며 튀어오른 탄피는 세 번째 바운드 째에 갑자기 무수히 많은 빛나는 알갱이로 분해되어 사라졌다.
“기적론 제1법칙, 총탄은 신앙을 상징한다.”
‘기적론’이라고? 참 거창한 이름이다.
“...신학 연구자들은.”
한참을 고민한 결과, 나는 그저 말꼬리를 잡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관찰은 잘했을지 몰라도 센스만큼은 없었던 모양이네.”
“제가 이름을 지었으니까요.”
자랑스레 가슴을 펴고 말한다.
그런 건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계속해서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명하지 않은 현상이다. 그렇다면 지난달에 낙하했던 탄피는 원자 단위까지 분해되어 사과, 혹은 염화수소 봄베로 성분부터 재구성되었다는 말일까. 그럴 리 없다. 탄피의 소재인 황동은 단순한 구리와 아연 합금이다. 반면에 사과에 함유된 포도당은 탄수화물이다.
그렇다면 탄피를 촉매로 삼아 공기 중에서 생성되었을 가능성이 있을까. 이것 또한 없다. 포도당뿐이라면 이산화탄소와 수증기로 만들 수도 있겠지만, 염화수소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공기에 염소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출현했다’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이미 있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이곳이 폐허가 되기 전, 좀 더 활기를 띠었던 시절에 생긴 폐품인 염화수소 봄베가 모래 속에 묻혀있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야 발견되었다. 누군가 폐허에 침입해 사과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이 넓은 범위 내에서 그 위치를 정확히 짚어낸다.
확률이 너무 낮다. 차라리 생각하지 않는 게 나을 만큼 이해할 수 없는 생각에 빠져들어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약간 넌더리가 났다.
“제1, 이라고 했는데.”
생각이 막혔다. 기분 전환할 겸 화제를 바꾸고 싶다.
“제2, 제3법칙은 있나?”
내가 찾아가자 소녀는 수조를 가리켰다.
“그건 다음 기회에 다시 이야기하죠. 이제 슬슬 실리콘 웨이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P와 N은 무슨 뜻인가요?”
소녀가 용광로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린다.
“패시브와 네거티브야.”
급격하게 흥미를 잃었는지 그렇군요, 하고 대꾸하더니 어슬렁어슬렁 걸어가 버린다. 기체로 만든 불순물을 실리콘 웨이퍼*에 침투시킨다. 이것이 세 번째 공정이다. 이렇게 만든 P형 반도체와 N형 반도체를 접합시키면 태양광의 충격을 받아 전위차**가 발생하게 된다.
*기판. 전자기기 및 웨이퍼 기반 태양광 전지에 사용되는, 결정질 실리콘 등의 반도체를 소재로 하는 얇은 조각
**두 지점 사이 전위의 차이. 기준점에서 다른 점으로 단위당 전하를 옮기는 데 필요한 일의 양
“세 번째 공정이라면.”
온도계와 시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는 물었다.
“기적론 제1법칙 이야기인가요?”
소녀는 폴짝 뛰면서 다가왔다.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는 그 이름을 되새기며 귀를 기울인다.
“제가 아는 오빠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총을 쏘신 적이 있어요. 탄피는 어떻게 됐을까요?”
추론으로 도출할 수 있는 범위다. 문제로 냈다는 건…
“소멸하지 않았다, 아닐까.”
“정답이에요. 그분은 개인데요, 탄두와 탄피 모두 소멸하지 않아서 그 잔해를 확인할 수 있었어요. 그 외에도 여러 사람들을 거쳐서 실험한 결과 ‘기적’의 실행 조건을 알게 됐어요요.”
제어장치를 멈췄다. 다시 진공화를 거친 뒤 풀림을 통해 변형을 제거한다.
“그게 대체 뭐지?”
소녀는 머리 위를 가리키며 말한다.
“헤일로의 유무예요.”
납득이 되었다. 그 말대로 학원도시에서 생활하는 존재들 중에 ‘개 오빠’에 속하는 그룹에게서 광륜을 본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 안내 로봇도 ‘기적’을 실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적론 제2법칙. ‘기적’의 실행은 신비를 가진 자에게만 허락된 행위이다.”
다만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도 있다.
“왜 ‘기적’이 실행되는 모습을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없지? 뉴스에 나올 만한 좀 더 기이한 사건들이 계속 터져나올 텐데.”
소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빙글 돌아서더니 핸드폰을 꺼냈다.
“보이고 있어요. 너무 당연하다 보니 모르고 있을 뿐이에요.”
건네받은 핸드폰을 보니 밀레니엄 자치구에 있는 라이브 카메라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여긴 이제부터 우리 거야!’
아…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이름이…
“불량집단 ‘총질하는 양아치들’이에요.”
끔찍한 이름이다. 이 녀석보다 더 센스가 없다. 그리고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C&C가 와서 제압당했다. 이딴 건 뉴스거리도 못 된다.
“이게 ‘기적’이라고?”
농담하다시피 묻는다.
“네.”
나는 뒤집어진다. 농담하는 거지? 좀 더 숭고해지라고.
“‘총질하는 양아치들’은 가게를 점거하겠다는 의지를 담아서 사격을 했어요. 그때 첫 번째 ‘기적’은 실행됐고요. 이어서 C&C는 불량배를 제압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사격했어요. 그렇게 해서 제압했죠. 그게 두 번째 ‘기적’이에요.”
“그러니까 ‘기적’의 실행이란 소원을 담아 방아쇠를 당기는 거다, 그 말이야?”
소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이 제3법칙이에요.”
날 바보 취급하고 있다. 너무나도 비과학적이다. 나는 라이플을 꺼내 하늘을 향해 발사했다.
“모래여, 태양광 패널이 되어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웃기고 자빠졌네. 아니, 이론을 부정했던 것보다도 부끄러움이 훨씬 앞선다. 신학은 무슨. ‘기적’? 결국 그냥 그럭저럭 잘 만든 마술이었다. 젠장.
“좀 더 현실에 맞는 소원으로 해 보세요.”
소녀가 웃음을 참으며 말한다. 이 망할 꼬맹이가. 나는 현실에 충실하니까 사막을 태양전지로 만드는 거라고.
“...이 녀석의 발밑이 함정이 되어라.”
방아쇠를 당긴다. 총소리와 함께 소녀는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짓을…”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소녀는 휘청거리더니 자세가 흐트러진다. 모래가 개미지옥처럼 몰아치면서 움푹 패인 구멍 속으로 소녀는 빨려 들어간다.
나는 라이플을 집어던지고 급히 손을 뻗었다. 어떻게든 늦지 않게 손을 잡았다. 등 뒤로는 3미터 정도 움푹 패인 구멍이 지금도 모래를 계속 빨아들이고 있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정말!”
“아니, 설마 정말로 될 줄은 몰랐는데…”
끌어올리면서 두 달 전에 했던 생각이 되살아난다. ‘이미 함정은 그곳에 있었다.’ 이것이 옳다. 구멍으로 떨어지는 모래 틈 사이로 보이는 벽면은 매끄럽고 광택이 있었다― 다시 말해 금속으로, 인위적으로 만든 함정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나는 이걸 만든 적이 없다. 그렇다면 잘 만든 마술조차도 아니다.
“하아, 하아… 이제 믿어주시겠어요?”
숨을 헐떡이며 소녀가 말한다.
“믿을 수밖에, 없어.”
이제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힘을 ‘기적’으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모래가 순식간에 태양전지로 변화하지는 않았다. 원자 단위로 구성이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일상 속의 ‘가능성’, 그 연장선상에 머물러 있는 현상만이 일어난다.
“기적의 원리를 알고 있는 거야?”
소녀는 고개를 젓는다.
“모르겠어요. 신이 존재한다면 어디에 있는지도요.”
내가 이제부터 생각해야 할 것은 두 가지다. ‘기적’의 원리 규명, 그리고 당장 이 대규모 태양전지 설비를 어떻게 자동화시키고, 어떻게 소형화할 것인지.
‘왜’와 ‘어떻게’. 이성과 신앙. 과학과 신학. 이 물음을 공유한 우리는 둘 다 지성의 탐구자였고, 이제서야 처음으로 학문의 문을 두드렸다.
중간 발표는 그럭저럭 괜찮은 반응을 얻었다. 제설차 같은 기계로 사막 위를 달려 흡입한 것들 중에 자갈과 그 이외의 것들을 송풍기로 분리한다. 마이크로파를 통한 가열로 실리콘을 추출하고, 그 과정에서 존멜팅*으로 고순도까지 정제를 한다. 소자는 스퍼터링으로 막 형성까지 가져간다. 이 모든 과정을 한 대의 기계에 집어넣는다.
*불순물이 포함된 물질에서 순수한 단결정을 정제하는 방법. 결정체 일부를 녹여서 녹은 부분을 옮길 때 불순물이 같이 끝부분으로 밀려나는 작용을 이용함
…어디까지나 이론이 세워졌을 뿐이다. 앞으로 반 년 안에 실현할 수 있을지는 내게 달렸다.
학생증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이미 그 녀석은 와 있었는지 입구 쪽에 가방이 던져져 있었다. 증류탑 앞, 모래 위에 대자로 누워서 뒹굴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나는 걸음을 멈췄다. 얼굴에 멍이 가득하다. 자세히 보니 허벅지에도 멍자국이 있고, 울었는지 눈가가 부어 있다.
급히 달려갔지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랐다. 그저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내 모습을 보더니 연약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가느다란 실타래 같은 말을 내뱉는다.
“특별하다는 건 나쁜 걸까요.”
그렇다고, 생각한다. 튀어나온 말뚝은 망치에 맞는 법이고, 나는 특출나게 유명한 부모님의 영향으로 과도한 기대를 짊어진 채 자랐다. 나에게도 동경이 있었다. 학생회라든가, 로봇 개발부라든가. 손가락만 빨면서 그 부실들을 지나쳐 이 사막에 계속 드나들었던 건 분명 내가 특별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평범해질 수도, 당연해질 수도 없다.
“학교 건물 뒤에서 폭행을 당했어요. 계속 괴롭혀왔는데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나 봐요.”
어째서― 내 의문에 답하듯 소녀는 성전을 가리켰다.
“밀레니엄에서 신학을 지망하다니, 라면서요.”
“그 녀석들 이름이 뭐야.”
떨듯이 내뱉은 내 목소리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열기를 띠고 있었다.
폐허를 뛰쳐나와 나는 솟구치는 열기에 몸을 맡긴 채 달렸다. 아… 분명 평소 같았으면 하지도 않았을 짓을 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 진심이었다. 이론과는 거리가 멀고, 바란다면 구할 수 있는, 그런 기도가 아니다. ‘기적’이란 무엇일까. ‘신’은,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신비는 미지이고, 미지 또한 과학자에게는 아름다움을 지닌 신비다. 어느 쪽이든 세계의 구성을 고민한다는 깊은 부분에서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그에 대한 탐구심도 똑같이 강했다.
찾던 교실을 발견해 달려 들어갔다. 교실 한가운데에 모여있는 집단. 알기 쉽다. 이 녀석들이다. 이름은 입학하기 전에 나눠준 서류에서 한번 본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배치를 확실하게 외우고 있는 나 자신에게 감사하면서, 기세를 몰아 두들겨 팼다.
“신학도 학문이라고.”
위에 올라타려고 했지만 다른 녀석들에게 팔을 붙잡혀 내던져졌다. 갑자기 시야가 천장과 나를 둘러싼 발들로 가득 차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하. 바보같네. 망할 년들, 그리고 그 망할 년들에게 걷어차이고, 맞고 있는 가장 망할 년. 이딴 게 특별할 리가 없잖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의식이 끊어졌다.
눈을 떠서 사막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저녁이 되어 있었다. 온몸이 아프다. 젠장. 문을 열고 들어서니 녀석이 다소곳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서 성전에 메모를 하고 있었다.
“봐라, 똑같이 멍들었어.”
나는 내 얼굴을 가리키며 히죽 웃는다. 제대로 웃었을까. 그런 모습을 보더니 그 녀석은 성경을 어디론가 던져버리고는 달려들었다.
“특별한 증표, 성흔 같은 거지.”
나보다 더 얼굴을 엉망진창 망가뜨리고는 울면서 껴안는다. 아프다고, 바보야.
“바보 아니에요?”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걸 그렇게 휙 던져버리면 어떡하냐.”
알고 있었다. 유명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한들 특별하지는 않다. 결과물을 냈다고 해서 그 특별한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서로를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을 원했다. 서로를 받아들이고, 서로의 존재를 무조건적으로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을 원했다. 그것은 ‘기적’을 행하지 않더라도 이미 오래 전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나는 남은 반 년을 어떻게 쓸 것인지를― 나 자신의 운명을 결정했다.
“어떻게 ‘기적’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지?”
내 팔 속에서 떨고 있던 소녀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잠시 어리둥절해하며 눈을 돌리더니 이내 슬픈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예전에도 똑같이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었어요. 그 애들이 주장했던 내용만이 유일하게 지금과는 달랐는데요.”
소녀는 내 머리 위, 그곳에 있을 광륜 너머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네 헤일로, 모양이 이상하다고. 그러면서요.”
바람에 모래가 흩날려 부드럽게 뺨을 스친다.
“주위에 떨어진 총을 집어들고 아무것도 모른 채로 방아쇠를 당겼어요. 헤일로 같은 건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면서요. 하늘과 땅이 깜빡이는 것 같더니 그 순간부터 갑자기 모든 헤일로의 형체를 볼 수 없게 됐어요. 단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는, 그런 상태로.”
나는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헤일로는 예전부터 보이던 것이다. 분명히 광륜의 형상을 명확하게 표현한 그림이나 작품이 있다. 분명 눈에 보였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라이플을 하늘로 들어올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우리끼리만, 서로 헤일로가 보이게 해 주세요.”
수명이 짧은 형광등이 드문드문 켜지듯이, 각자의 머리 위에서는 광륜이― 신비의 상징이 구체화되었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는 잠시 멈춰있다가, 우리는 웃었다.
“이상한 모양이네요.”
“너야말로.”
“최종 발표.”
“자동화 태양전지 설비의 개발, 을 수정하여.”
“광륜과 기적론 3법칙에 대하여, 라는 제목으로 밀레니엄 사이언스 스쿨 신학연구실에서 발표하겠습니다.”
눈이 내리는 가운데 폐허를 향해 걷는다. 짊어지고 있던 짐들을 모두 내려놓아서인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싶을 만큼 기분이 들떠 있었다.
다시 떠올려보면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간다. 내 생애 가장 엉망진창인 발표였다. 공들여 만든 연구 성과 발표자료를 찢어버리는 경험은 두 번 다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듣고 있었던 부교수와 부모님의 얼빠진 표정. 빨리 그 녀석에게 말해주고 싶다. 최종 발표를 바꿨다는 사실은 그 녀석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니 일단 놀라겠지. 분명 바보인가요, 그런 말을 들을 것이다. 그래, 맞아. 완전 바보야. 빌어먹게 멍청하다고, 우리는. 하지만 신학은 내 운명을 맡길 수 있을 만큼 재미있었다.
학생증을 꺼내려고 손을 뻗었다가 나는 멈칫했다. 잠금이 풀려 있었다. 그 녀석, 잠그는 걸 깜빡했나.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열었더니 평소에 보던 그 모래밭은 그곳에 없었다.
50명 정도의 어른들이 원형으로 정렬해 있었다. 그 중에는 내 부모님의 모습도 보인다. 뭐 하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행렬 틈새로 들여다본 광경에 숨이 막혔다.
원 중앙에 그 녀석이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머리 위의 헤일로는― 이상하면서, 또 사랑스러운 모양의 헤일로는 엉망진창으로 부서져 있었다.
가방을 집어던진다. 몸을 비틀어 줄을 끊고, 밀고 들어가서, 안아들었다.
“야.”
대답이 없다. 그리고 기계의 차가움이 연상될 만큼, 차가웠다.
“그 여자냐?”
어른 중 한 사람이 말한다.
“세상의 신비를 접한 건.”
닥쳐. 그게 지금 뭔 상관이야.
“일어나라고.”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대답이 없었다. 평소처럼 웃어 보라니까.
철컥, 하고 총을 겨누는 소리가 주위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무수한 총구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너희들은 ‘기적론’이라 부르던데.”
또 다른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 원리를 알고 있는 게냐.”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냐고. 모르니까 규명하려는 게 학문이잖아.
“과거와 미래는 모든 사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의 수만큼 무수히 갈라져.”
“그리고,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해 지금 이 세상에 덮어씌우는 힘이 바로 ‘기적’이다.”
폐허에 사과를 떨어뜨렸던 녀석이 있는 과거와, 그것을 모래 속에서 찾아내는 미래를 선택했다. 염화수소 봄베가 남겨졌던 과거와 그것을 찾아내는 미래. 함정이 만들어졌던 과거와 그것이 발밑에 있는 미래. 모래가 순식간에 모두 태양전지로 대체되는 미래는 존재할 리 없었다. 그래서 선택할 수 없었다.
아… 이제 알겠어. 알겠다고. 그럼 뭐야.
이 분노는.
이 슬픔은.
이 증오심은, 대체 누구에게 부딪쳐야 하냐고.
“알려지면 곤란해. 우리는 그걸 이용해서 이익을 내고 있으니까.”
“너는 이걸 ‘기적’이라면서 잊어버린 다음 자기 연구로 돌아가면 돼.”
“그러기로 한다면 존재하는 것을 허용하지.”
이 녀석은 선택했겠지. 잊지 않기로. 정말로 바보같은 녀석.
특별해질 수도 없고, 평범해질 수도, 당연해질 수도 없었다.
“잊어버리면 풀어준다는 거지.”
라이플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그래, 약속하지.”
그리고 나 또한 마찬가지로 바보다.
줄곧 생각했다. 신에게 신이 사라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어떻게 될까.
신앙 그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것일까.
이 우주 전체를 뒤덮는 신앙 같은 것이 있을까.
실증 실험이다.
“모든 헤일로와 총이 사라지기를.”
하늘을 가르는 총성이, 울린다.
“신학이 필요해보이는 표정이라니, 그거 거짓말이지.”
“사실 나한테 말을 걸었던 진짜 이유는 뭐야.”
“친구를 갖고 싶었어요. 그래서, 기적을 행해서 당신을 만났어요.”
“뭐야, 그게.”
“그걸 기적이라 부르지 말라고.”
우주선 뒤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안내받은 대로 석관에 다다라 뚜껑을 연다. 그 녀석이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헤일로는 이제 떠 있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이름을 물어보는 것을 잊었다는 사실을, 모든 것을 떠올린 지금 마침내 알았다. 그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니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세일 463만・노드 11만 7천 기 사출 완료. 현재 99퍼센트 형성. 착륙 개시.’
본체에서 떨어져 나간 궤도가 먼저 별에 착륙했다. 그것들은 부수적인 수신기로서 파라볼라를 전개하면서 각지에 묻히기 시작한다. 이게 그것인가. 착륙 태세를 취하는 우주선 안에서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선택한 미래였나. 미래는 가능성이고, 가능성이란 곧 상상력이다. 나는 키보토스에서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 있는 행성계를 상상해 보았다. 그곳에는 나를 닮은 사람도, 이 아이를 닮은 사람도 있고, 분명 밀레니엄을 닮은 학교도 있을 것이다. 다만 헤일로도 총도 없다. ‘기적’을 알지 못하는, 그런 세상이다. 이 사람들은 ‘기적’을 알아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그 태양전지 설비에서 만들어낸 태양광 패널을 무수히 날려보내 오르트 구름*을 덮었다. 돛을 펼친 태양전지가 항성의 광압을 받아 나아가는, 우주의 정어리다. 헤엄쳐 나가는 수백만 마리의 정어리들이 외우주를 격리한다.
*태양계를 마치 껍질처럼 둘러싸고 있다고 여겨지는 가상의 천체 집단
후세에는 차갑다고들 말할까. 이 사랑을. 그럼에도 바보가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후회는 없다는, 그런 후회가 중력과 함께 몸을 짓누른다.
진행 중인 우주선은 수직으로 대지를 향해 깊숙이 파고들었고, 이윽고 탑으로 변형되었다. 소녀를 안은 채 해치를 열자 수신기의 정점으로 나왔다. 나는 상상한다. 천 년, 혹은 그 이상. 그보다 더 먼저 이 별에 넘쳐날 생명을. 특별하다거나, 평범하다거나, 그런 구분이 없는 세상을.
하늘을 올려다보니 고리가 떠 있었다. 마치 신앙의, 혹은 과학의 잔상처럼 여러 겹의 고리를 형성하며 펼쳐져 있다.
원심에 다가서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마이크로파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 별을 향한, 기계보다도 더 차가운―
생명이 없는 것의 차가움보다도, 더 차가운 사랑을 담아서.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있으면서도 냉정하게 이론을 구성한다. 과학자구나, 넌.”
“놀랐어. 시라이시 우타하(白石ウタハ)랑 똑같이 생겼네, 너.”
“이쪽에서 나는 시라이시 우타하(白菱歌羽)야. 그쪽 세계의 나는 잘 있나?”
“별로 엮인 적은 없었는데, 아마 중간 발표 때 ‘냉동수면’이 아니라 ‘냉동 최면총’을 개발 중이었던 건 기억나네.”
“그거 참 어지간히 쓸데없고… 멋진데. 내가 먼저 생각했으면 좋았을 걸.”
“너도 마이크로파에 들어갔어?”
“그거 진짜 재밌는 경험이었다니까!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하고 싶어서 못 참겠더라. 그래서 지금 대화 상대가 생기니까 두근거린다고.”
“그나저나 내 소원은 이루어졌어?”
“그래. 그 누구의 머리 위에도 헤일로는 떠 있지 않고, ‘기적’의 존재도 몰라. 총이라는 메커니즘도 최소한 내가 살았던 시대에는 없었어. 대포는 있었지만.”
“다행이야. 헛수고가 아니었구나.”
“두 번째 소원도 이렇게 이루어진 모양이네.”
“...두 번째?”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소원이었나. 두 번째는 아마도 너와 그 아이의 ‘영원’일 거야.”
“그렇군… 다만 ‘원리’가 생각나지 않아. ‘기적’으로는 내 상상력을 뛰어넘는 미래를 고를 수 없었을 거야.”
“광자에 정보를 기록하는 기술이겠지. 어디까지나 내 가설에 불과해.”
“그건 가설로 끝내고 싶지 않은데. 실증 실험을 해보고 싶어.”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물론 나도 그래. 방법도 생각해 봤어.”
“말해 줘.”
“알다시피 이 성계의 전력은 모두 수신기가… ‘다이슨 스피어’라고 했으려나? 거기서 보내주는 에너지를 받아서 공급하고 있어. 즉 광자는 케이블을 통해 모든 전자기기에 침투할 수 있어.”
“...그리고 컴퓨터 내부에서 빛은 정보로 변환돼. 그렇군.”
“침입한 곳은 메일 서버. 발신자도 짐작이 가네. 내 귀여운 후배야. 그녀에게 전하지 못한 말도 많이 남아있고, 마침 잘 됐네.”
“이진법 같은 건 쓸 수 있어?”
“아니? 아쉽지만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아… 그러면 처음부터 부호 이론이니 뭐니 그런 것까지 만들어야 하나?”
“그렇겠지. 과학자들은 하나같이 눈치가 빨라서 편하네.”
“이 광자 정보 공간에서 종이는 못 만드나?”
“종이는 없지만 기록은 할 수 있어. 시간도 넘쳐나지. 그리고 여기 있는 건 그 무엇보다 과학을 좋아하는 두 사람이고. 자, 그럼 뭐부터 시작할까?”
“안 돼. 생각만 해도 얼굴이 하얗게 질릴 것 같아.”
“그럴 리 없지. 소녀를 아름답게 만드는 건―”
“화장이 아니라 열정, 이잖아? 이쪽에서 네가 발표할 때 말했어.”
“훌륭하네. 목표, 항성계 표준시로 천 년 이내.”
소녀는 5교시를 하고 있을 교실로 향하기 위해 노트북을 닫으려 했다. 그 손을 멈추게 만든 것은 메일이 수신되었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달에는 아무것도 그릴 필요가 없다. 부장도― 우타하(歌羽) 부장도, 분명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 메일에 상처받은 그녀가 원하는 말이 적혀있으리라는 확신은 조금도 없었다. 다만 그때는 왜인지 그 한 통의 메일에 관심이 갔다.
제목은 없음. 열어보니 글자가 깨져서 도무지 읽을 수 없었다. 소녀는 반쯤 자포자기했는지, 아니면 고집이었는지 문자 코드를 특정해서 다시 인코딩을 시도했다.
예상대로 메일은 이윽고 복원되었다. 내용은 마이크로파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해서 PEEK 로켓의 추진 방식, 그리고 넘쳐나는 에너지의 비밀에 관하여.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인물로 소녀는 단 한 사람이 떠올랐다. 사실 별은 가짜고, 다이슨 스피어 꼭지점의 반사광이다. 평행세계라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코누리 마키라는 이름의 너를 닮은 아이도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말하지 못했지만 혼자 떠난 것, 미안하게 생각한다. 이래저래 핑계를 댔지만 이제서야 진짜 이유를 알았다.
너만은 어른이 되지 않았으면 했다.
그리고 네가 달에 무엇을 그리는지 보고 싶었다.
문장은 <WhiteForge>로 끝맺어졌다.
틀림없이 발신인은 부장이었다.
“나도.”
흘러내린 부호화되지 않은 소망이 허공을 맴돈다.
“나도, 보여주고 싶었는데.”
코를 훌쩍이며 소녀는 소매를 걷는다. 모듈 조작 화면을 띄우고 팔을 기동해 달 표면을 향했다.
스프레이 캔은 파란색 하나뿐. ‘위’라는 지시를 입력하자 이진법으로 변환되어 38만 킬로미터 떨어진 캔버스 쪽의 팔로 전송된다. 일 년 동안 있었던 이런저런 추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머리 위의 전경에서 사라지기 전에 소녀는 색으로, 선으로, 그림으로 만들어 나간다. 절대로 놓치지 않겠어. 이 기억을. 이제는 내 기억 속에서만 살아 있는, 가장 냉정하고 멋지던 어른, 가장 제멋대로였던 아이를. 전해지지 않을 줄 알면서도 이 달 표면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을, 차가운 이진법으로 담아낸다. 분명 아이로서 내가 그리는 마지막 그래피티일 것이다.
꽃은 시들기 때문에 아름답다.
조용히 해. 당연히 계속 피어있는 게 더 좋잖아.
달에 그림을 그린다니, 말 그대로 그림 속 이야기다.
그럼 지금 내가 그리는 이건 뭐지.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냐고.
언젠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네.
지금이야. 지금.
빨리 어른이 되어야지.
싫어. 아직은 아이로 남고 싶어. 계속, 영원히 이대로 있고 싶어.
울먹이면서, 소녀는 달 표면에 마지막 선을 그었다.
그것은 어른과 아이의 경계선.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덧없고 아름다운 푸른색이었다.
소녀는 노트북을 닫았다. 그리고 여전히 무거운 스프레이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넣고 가방을 챙겨, 5교시도 이미 끝나 아무도 없을 교실로 향했다.
부장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푸른 궤적―블루 아카이브
사이언스 스쿨 자치구에 있는 작은 과학 교실이 내 일터였다.
나는 과학을 좋아하고, 가르치는 건 더 좋아했다. 나를 포함해서 지도교사가 여럿 있지만, 그 중에서도 빨간머리를 한 마키(真希) 선생님은 밝은 성격에 뛰어난 그림 실력, 그리고 가끔씩 보여주는 말썽꾸러기 같은 면모로 제일 인기가 많았다.
어느 날, 나는 마키 선생님에게 불려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은사님께 부탁을 받았는데, 멀리 떨어진 근무지에서 선생님을 해 달라는 말이었다.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기뻤고, 나에게도 마키 선생님은 은사님이시다.
“상관없어요. 어디인데요?”
내가 묻자 마키 선생님은 쑥스럽다는 듯이 혀를 내밀었다.
“음~. 20광년 멀리 떨어진 곳? 미안! 잘 모르겠어!”
역시 당황스럽다. 20광년? 잘 모르겠다고? 평소처럼 조크 모드인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잠깐만! 진짜야, 이거.”
일단 성계의 방향만큼은 알아. 그렇게 설득력 없는 말을 덧붙이면서 마키 선생님은 이어서 말한다.
“거긴 말야, 이 별이랑 비슷한데 딱 두 가지가 달라. 소원을 빌면서 총… 휴대할 수 있는 대포 같은 거? 그걸 쏘면 소원이 이루어져.”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나쁜 어른들만 그 힘에 대해 알고 있어. 아이들이 자유롭게 꿈을 선택할 수 없는, 그런 세상인 거야.”
기득권이 지배하는 차디찬 세상이라는 말일까.
“그래서 말인데, 이끌어 줬으면 좋겠어. 그 아이들이 올바른 소원을 담아 방아쇠를 당길 수 있게. ‘기적’을 아름다운 채로 간직할 수 있게.”
그렇다면야, 아마도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 앞에 서는 것이 어른의 역할이니까.
“근무지 이름은요?”
“‘키보토스’. 좋은 이름이지?”
“저는 뭐라고 불릴까요?”
“세계선의 앞(先)을 올바르게 선택할 수 있게 도우려 살아가는(生) 존재. 한 마디로 하면, 글쎄…”
“선생, 은 어떨까?”
작가 후기
“다시는 소설 따위 쓰나 봐라, 멍청아~~~~!!!!!!”
2023년 5월 5일 트윗입니다. 몹시 부끄럽습니다만 이번에도 또 하나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하치노지입니다.
이 모든 것은 같은 해 11월, (타 게임을 언급해서 죄송합니다만) 아크나이츠의 <고성>이라는 SF 스토리를 읽었을 때 무너졌습니다. 너무 재밌더라고요. 사람이 하늘을 이만큼 극적으로 묘사할 수 있구나 싶어 감동했던 기억이 납니다.
원래부터 호시 신이치를 좋아하기도 했고, 또 Minecraft의 Project Ozone이나 Dyson Sphere Program, Outer Wilds 같은 게임들을 통해 SF를 접할 기회는 많았습니다만, 다시금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너무 재밌어요.
그 뒤로 관심 있었던 SF에 차례로 손을 뻗었습니다. <삼체>, <프로젝트 헤일메리>, <인터스텔라>, 그리고 다양한 SCP들― 어느새 제 머릿속은 우주가 되어버렸습니다. 이쯤 되면 이미 인간으로서 끝장입니다. 같은 해 3월에 ‘블루아카 2주년 기념 아트’에 투고했던 <차가움에서 사랑을 담아>를 원형으로 이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한 달 뒤, 두 달 뒤, 반 년이 지나고 중간에 <침묵의 플라이바이>, <미도리이세키>를 읽고 최종적으로 10월 말의 5일 사이에 집필을 마쳤습니다. 1년이 지났는데도 글을 쓰는 방식이 달라지지 않아서 안심했습니다. 블루아카의 세계관에 대한 해석을 담은 책을 마지막으로 쓰게 되어 기쁩니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큰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후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친구 M. 드라이브를 하다가 <SL9>(스키마 스위치)를 부르며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내가 우주에 있는 것 같다고 중얼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Digital Love>(Daft Punk), <문살토> <새틀라이트>(시속 36km), <달의 무희>(팝 시나나이데)는 저를 우주로 보내주는 노래입니다.
그리고 집필 과정에서 저는 매일 밤마다 불려나가 과학 애호가들끼리 열띤 토론을 벌였습니다. 허접 둘이 모인다 해서 지혜가 생길 리는 없고 허접이었을 뿐이지만, 티끌 모아 태산이 되어 결과적으로 좋은 힌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싯포야키 씨. <삼체>, <프로젝트 헤일메리>, <침묵의 플라이바이>와 같은 작품들을 추천해 주셨고 저를 SF의 늪으로 밀어넣은 장본인입니다. 공동 회지를 진행하시면서도 제 초고를 검토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책의 전체 디자인을 담당해주신 고미바코 선생님. 이번에도 원고를 꼼꼼하게 읽어 주셨고 하나에서 백 가지 의미를 이끌어내어,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해석이 담긴 제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뒷면까지 각별히 신경 써 주셔서 깊은 감사 말씀 드립니다. 디자인이나 특정 사항에 대한 주문을 드리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훌륭한 책이 나왔습니다. 창작자로서, 그리고 개인으로서 진심으로 존경합니다(책을 읽으신 뒤에는 꼭 커버를 제거해서 표지를 즐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2 / 4언젠가 다시, 떠올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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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소설은 개좋은데 내가 빡대가리라 이해를 못하겠다
나도 두번 더 읽었어 ㅋㅋ 조만간 본문에 못담은 이야기랑 내 개인적인 해석 같은거 정리해서 글 하나 올려보려고
정히 기대하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