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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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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한자사전을 읽은 적이 있다.

책장에 있던 책은 전부 읽어버렸고 내용도 다 외워버렸기에 일부러 다시 열어볼 필요도 없었다. 어린 나이 탓에 계속 부풀어 오르는 탐구심과 활자에 대한 갈망으로 내가 손에 든 것은 한자사전이었다. 사전은 도구이지 책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익숙한 한자조차도 몰랐던 읽는 방법이 있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개중에는 억지로 끼워 맞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내력이 펼쳐진 두께 5센티미터 정도의 세계에, 다른 책을 읽을 때는 얻을 수 없었던 또 다른 종류의 고양감을 그 당시의 나는 가득 품고 있었다.

<껍질을 벗겨서 표면을 닦은 후, 금속으로 깎아 문자로 만들어 고정하는 것에서 유래>

『록錄』이라는 글자의 유래에 다다랐을 때, 다음을 원하며 계속 페이지를 넘기던 내 손이 문득 멈춘 기억이 떠오른다. 근처에 있던 『예銳』나 『주鑄』를 보던 것처럼 스쳐 지나가던 눈이 일부러 돌아와 『록錄』이라는 한자 항목을 그야말로 눈동자에 새겨 기록하겠다는 듯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서기가 된 지금과는 달리, 당시의 나에게 『기록』이란 말은 낯설었다. 지금은 이미 매일, 매시 마주하는 단어가 되어버리긴 했어도. 그래서 애착이 있었다거나 그렇지는 않겠지만, 이 단어는 특별하게 여겨도 손해는 없을 거라고 직감적으로 이해했다.

어제, 오랜만에 다시 한자사전을 펼쳤다.

그것은 단지 흥밋거리로 읽었던 지난 날과 달리 명확하게 그 한자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서.

<두 가지 마음과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입 밖에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 여러가지 생각을 떠올리는 것>

『기억』과 『기록』은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실제 내가 예상했던 대로 한자사전을 찾아본 바로는 소리가 비슷한 『억憶』과 『록錄』은 전혀 달랐고, 나는 그것을 음미하며 한숨 돌리고 조금 버거운 크기의 사전을 닫았다. 그 때는.

『기억』은 세 단계로 나뉜다. 『기명』, 『유지』, 『상기』. 마음에 적고, 그것을 간직하고, 떠올린다. 결국 이 중 명銘이라는 글자가 금속으로 이름을 새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어떻게 해도 그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기억』이 마음에 『기록』하는 것, 『기명』하는 것을 포함한다면, 나는 마음의 표면을 벗겨서 닦고, 거기에 잊지 않으려고 무기질적인 차가운 바늘로 도려내, 정성껏 상처를 내며 기억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지금은, 그래.

지금은 이미 확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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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 운동화를 신은 발걸음이 시야 끝에서 보여 바라보던 휴대전화를 슬립 모드로 만들었다. 신호에 눈을 돌리자 아직 빨간색 그대로였기에, 액정이 꺼진 휴대전화와 함께 싫어도 느껴지는 도시의 바쁨을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파란색으로 변한 신호와 따라오는 혼잡한 발소리를 보내며, 잠시 멈춰선 채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바뀌었는데, 라고 말하고 싶은 모습으로 내 얼굴을 의아한 듯 바라보며 앞질러가는 사람. 신호대기 중인 차 안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하품하는 기품있는 늙은 개. 퐁, 퐁 리드미컬하게 울리는 『보행 가능』을 알리는 음향. 다섯 번째 그 소리를 듣고 난 후에야 비로소 사람들의 물결을 타고 걷기 시작했다.

가끔 괜히 이런 시간을 갖고 싶을 때가 있다. 특별히 무언가를 하는 게 아닌, 그저 멈춰서서 세상을 관찰하는 시간이. 최근엔 300 페이지 가량의 책을 다 읽은 뒤 의자 등받이 천천히 기대 가만히 창밖으로 비치는 하늘을 바라보던 그 한 순간이 기억에 남아있다. 이 습관...... 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빈도가 낮은 습관은 항상 혼자 있을 때 일어났다. 그것이 밖에서, 그것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이레귤러적인 상황을 깨닫고, 자신의 일이지만 조금 우습다고 생각하게 된다.

즉, 나는 기대하고 있었다. 형식상으로는 이미 춘분을 맞이했지만, 전혀 생명의 숨결을 느낄 수 없었던 회색빛 거리 풍경이 드디어 물들기 시작하는 것을. 심호흡하고 일부러 이쪽에서 찾으러 가지 않아도, 그저 걷고 있는 것만으로도 희미하게 꽃향기가 콧구멍을 간지럽히는 것을. 계절을 만들어내는 윤곽이 점점 뚜렷해지며 아련하기만 했던 봄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새로운 한 해의 시작만이 내가 기대를 거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 조금 쌀쌀한 바람을 타고 봄――이라기 보다는 새 학기――에 어울리는 냄새가 났다. 온화한 날씨의 상쾌함과는 정반대인, 탄내나는 화약과 그을음 냄새.

"어이! 폭파하라는 말은 안 했잖아!"

"시끄러! 가게를 열지 않는 게 잘못이야!"

따스한 햇살에 녹은 것은 눈뿐만이 아니다. 겨우내 어디서 숨어 지냈는지 알 수 없는 불량배들이 이 계절을 기다렸다는 듯 원기왕성한 모습으로 오른손에 횃불을, 왼손에 총을 들고 식당 문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을음을 들이마시고 눈물을 흘리는 아이도 있는 걸 보고 어째서 횃불을 선택했는지 조금 의문이 들었지만, 결국 말하자면 슈프레히콜* 같은 것으로 『우리는 지금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날뛰고 있다!』라는 걸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데모나 집회에서 여럿이 구호나 요구 조건 등을 외치는 일. 또, 그 외침)

어차피 5분도 지나지 않아 경찰이 와서 제압당할 텐데라고 생각하며 한숨쉬고 올려다본 빌딩의 전자게시판에 있는 뉴스가 딱 눈에 들어온다.

『총학생회장, 실종 후 후임인가?』

검은 실루엣에 물음표가 붙은 인물상 옆에 고딕체의 붉은 글씨로 큼직하게 적힌 제목. 동영상 게시 사이트에서 사용되는 「조잡한 썸네일」 같은 것을 보며 비슷한 가짜 보도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잘도 질리지 않고 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최근 며칠 간 불량배 수의 변화는 「따뜻해져서」 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움직임이다. 급격한 증가세를 보인 그 그래프는 분명히 총학생회장 실종이 기점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자치구 밖을 걷고 있는 것도, 횡단보도아세 일부러 멈춰버린 이유 없는 기대감의 원인도 모두 거기에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오랜만이라는 생각과 함께 주변보다 한 층 더 높은, 조금은 색다른 존재감을 내뿜는 빌딩으로 들어선다. 무기질적이고 시스테매틱한 입구 벽에는 「총학생회」라고 적힌 로고가 곳곳에 붙어 있고, 입구 정면의 카운터에 앉아 있던 소녀가 내가 들어오는 걸 보고는 애교 섞인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총학생회 본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떤 용무로 오셨나요?"

"우시오 노아입니다. 나나가미 린 행정관의 연락을 받고 왔습니다."

총학생회에서 내 앞으로 온 편지에 나나가미 린의 이름은 없었지만, 학생 개인에게 연락하는 건 틀림없이 그녀에게서 온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그렇게 말했다.

"어, 그러니까. 아행에..... 아, 이, 우, 「우이」, 「우에이시」......"

접수처 소녀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스크롤하면서 액정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명단의 처음부터 찾고 있다는 건 조금 큰 혼잣말에서 전해지지만 검색 기능을 사용하지 않는 그 모습에서 이곳에 배속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점까지 금방 알게 된다. 요컨대 총학생회 내부에서도 체제가 완전히 정비되지 않았고 인사쪽도 인력부족이라는 거겠지.

"「우지이에」, 「우시오」 .......아, 있다! 우시오 노아 씨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뒤쪽 엘리베이터를 타고 13층으로 가시죠!"

『현재 자리를 비웠으니 기다려주세요.』 라는 삼각 팻말을 접수대에 놓고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입니다.」 라는 안내를 따라가 엘리베이터에 들어서자 바깥 경치가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온다. 서서히 펼쳐지는 그 경치를 곁눈질하며 접수...... 겸 엘리베이터 걸 쪽으로 얼굴을 돌리자, 조금 전 명단을 보던 것과 마찬가지로 창문에 빨려들어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앞으로 기울어진 자세를, 하지만 눈동자는 보석처럼 반짝이며 거리의 모습을 일편단심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여기 엘리베이터를 타는 건 처음이신가요?"

"흐에!? 네, 네! 처음이에요!"

소녀는 창문에서 손을 놓고 옷깃을 여미며 정말 알기 쉽게 헛기침을 했다.

"사실 이 총학생회 본부에 배치된 이후로 어제까지 6일동안 제 담당은 접수뿐이었는데, 엘리베이터 담당자가 다른 부서로 옮겨져서요. 오늘부터 1인 2역으로 엄청 바빠요....."

"그렇군요...... 분명 앞으로 여러 번 볼 경치라고 생각합니다만, 당신의 첫 번째 동승자가 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굉장히 멋진 얼굴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기, 기록인가요!? 어, 영광.... 입니다......?"

당황하면서도 똑바로 선 뒤 매뉴얼대로 고개숙이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온다. 지루하지 않은 사람이다. 놀리는 보람도 있고.

"여, 여하튼!"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등 쪽에 있던 문이 열렸다.

"13층입니다, 좋은 시간 되시길!"

소녀는 문을 열며 배웅해주었다.

분명 매뉴얼이 아닌, 활짝 웃는 얼굴로.

"기다리게 했습니다. 나나가미 린 행정관."

"아뇨. 5분 전이에요, 우시오 노아씨. 그리고..."

나를 맞이한 것은 총학생회장 산하의 행정위원회와는 구분되는, 총괄실에 배치된 수석 행정관 나나가미 린 『뿐』 이었다. 이 상황은 대체로 예상대로라면 예상대로였지만, 일대일로 대화할 확률은 낮다고 생각했기에 자연스럽게 등줄기가 펴진다.

"성까지 부를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뜻하는 『합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겠죠?"

"어머, 저는 『합리와는 거리가 먼』 아이스 브레이크를 끼워 넣어도 상관없어요. 린 행정관. 제가 5분 전에 온 건 아이스 브레이크 때문입니다만. 필요하다면 날씨 얘기라도, 라고 생각해 잠잘 시간을 아껴서 생각한 것을 세 가지 정도 준비해왔으니까요."

나나가미 린의 눈썹이 살짝 올라간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얼굴에서 감정을 읽기 힘든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 가면을 무너뜨리는 건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엄청 신경쓰이는 내용이지만 이번에는 사양하겠습니다. 그보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이쪽으로."

나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걸어가는 나나가미 린을 따라 방 오른쪽 구석에 있는 출입구를 지나자 흰색 바탕의 방과는 달리 검은 벽면과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가 있었다. 조금은 넌센스, 라기보다는......

"악취미적, 이죠."

자신의 사고가 소리로 들려왔다는 것에 놀라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옆을 걷던 목소리의 주인은 아주 조금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희망에 부응하는 형태인 것 같습니다. 만약 환영받게 된다면 레드카펫을 걸어보고 싶다는 모양입니다."

".....그건 어떤 분이?"

나나가미 린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런, 틀림없이 노아씨는 전부 예상하신 줄 알았습니다만."

꽤나 고평가된 듯하다. 홀려서 멈춰선 나는 더 이상 페이스를 잃지 않기 위해 그녀보다 먼저 한 발 내디뎠다.

"저는 탐정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어떤 분이 말씀하신 건가요?"

"선생님입니다."

"선생님, 인가요?"

"지금은 행방불명된 총학생회장이 실종되기 전 직접 연방수사동아리 『샬레』의 고문으로 지명한 선생님입니다."

『샬레』. 소문일 뿐이지만 들어본 적이 있다. 연방조직의 초법적 기관으로 학생들은 각 학원의 울타리를 넘어 참여가 허용되며, 거기에 참가 학생을 병력으로 움직일 수 있어 세계 경찰로도, 전략 예비로도 될 수 있는 동아리다. 이런 무질서한 동아리 활동은 구상 단계에서 기각된 줄로만 알았는데 이미 설립까지 했다는 건 다소 계산 밖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우시오 노아씨는 선생님의 비서가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이유를, 알려주세요."

분명히 말해 선생님이라는 존재의 이야기가 나온 시점에서 우선 틀림없이 내가 그 보좌로 부름받았을 거라는 결말까지는 짐작했다. 하지만 비서라는 건 너무 비약적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나 이외에도 적임자가 있다. 연방조직에 있는 기관이기 때문에 그 고문의 비서를 뽑는다면 총학생회에서 택하는 게 우선 자명하다. 만약 『학원의 울타리를 넘어선』 동아리 활동의 책임자를 특정 학원에서 뽑아 버린다면 다른 학원은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억측과 모략이 생겨나고 그 끝에 있는 건 전쟁의 두 글자, 오직 그것뿐이다.

아니, 혹은 그 의도를 가지고 내가 뽑혔을 수도 있다. 총학생회장의 실종으로 백지화된 에덴조약. 그로 인해 다시 대립관계로 되돌아가는 게헨나와 트리니티 두 학원이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도록. 반면 『두 학원을 향한 공동반격』 이라는 선택을 어렴풋이 느끼게 하기 위해 밀레니엄이라는 제 3자에게 권력을 갖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나가미 린은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내던지는 듯한 대답을 했다.

"후보가 될 수 있는 모든 학생 중 당신이 적임이라고 과반수가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추가적인 설명을 요구합니다, 라고 항의하기 위해 입을 열던 나를 제지하고, 이제 행정관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그 여자는 닫혀있는 문에 손을 댔다.

"이건 결정사항이기에. 그럼, 부탁드렸습니다. 우시오 노아 비서."

문을 연 채 빨리 가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행정관을 뒤로 하고 붉은 카펫 끝에 있는 문턱을 넘었다.

어둡다, 라고 생각했다. 검은색 일색이었던 조금 전까지의 복도에서도 전체적인 광량이 적었지만, 천장에 매달린 간접조명 세 개만으로는 방의 넓이에 비해 밝기가 부족하다. 분명 책장이 있으면 서재 같은 차분한 분위기가 연출됐을 텐데, 방 한가운데 있는 안락의자 외에는 가구가 없어 정돈된 느낌을 넘어 어딘가 쓸쓸한 느낌을 받는다. 그 싫어도 눈길을 끄는 안락의자에는 누가 앉아 있었고. 그런 모습이 왠지 굉장히 환상적인 죽음의 연출이라고 느꼈다.

"밀레니엄 사이언스 스쿨, 세미나 서기, 우시오 노아입니다. 오늘부터 비서로서 신세지겠습니다."

말을 걸자 탁, 하고 책을 덮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복도를 레드카펫으로 하고 싶다』라는 단 하나의 정보로 구성된 인물상을, 그 일어서는 모습을 보면서 고쳐 쓸 필요가 있었다.

〈『선생님』은 조용한 사람〉이다, 라고.

책을 덮는 몸짓, 의자에서 일어서는 몸짓. 그리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몸짓. 일거수일투족이 지금까지 만나온 누구보다 조용했다. 과거 트리니티와의 교류회에서 만났던 『아가씨』들도 몸짓이 철저하고 조용했지만, 이 사람의 그것은 뇌 속에 기억하고 있는 어떤 말도 딱 들어맞지 않아 그 몸짓을 위해 새롭게 의성어를 생각해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돌아서서 다가오던 선생님은 쿵! 하고 넘어졌다. 그것도 화려하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어... 괜찮으신가요?"

"아하하, 미안. 도와줄 수 있을까?"

내가 손을 내밀자 그 사람은 그것을 가볍게 잡고 일어섰다. 크고, 투박한 손. 그리고 키가 크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서야 『선생님』은 남자라는 걸 알았다.

"우시오 노아씨, 라고 했나. 오늘부터 잘 부탁해."

바닥에 부딪힌 무릎을 쓰다듬으며 말하는 선생님을 보고 선생님에 대해서라는, 자신의 평가를 덧붙인다.

〈『선생님』은 조금 얼빠진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 의도가 어떻든 간에,

〈비서로서의 일은 아무래도 지루하지 않을 듯 합니다〉 라고.

"선생님, 좋은 아침입니다."

"우시오 노아씨, 좋은 아침."

"『노아』면 돼요. 그보다 선생님, 오늘 일정 말입니다만......"

나와 선생님의 하루는 어김없이 이 대화로 시작된다. 분명 선생님만의 유머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치고는 조금 넌센스라고 느끼게 된다. 전날 밤에도 전한 하루의 예정을 매번 「사막......! 즐거울 거 같네.」 라거나 「사막!? 사막인가......」라는 리액션을 돌려주면서, 선생님이 내린 커피를 둘이서 마신다. 그날그날 천차만별의 반응을 보이는 선생님도 커피 맛만큼은 한결같고 변함없이 안정적이었다. 그런 뒤 엘리베이터를 불러 집무실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사이, 생텀타워나 하늘에 떠 있는 헤일로를 새롭다는 듯, 그러나 노인이 연못의 잉어를 바라보는 듯한 고요함으로 바라보고 현관 앞에서 헤어진다. 나는 밀레니엄 사이언스 스쿨로, 선생님은 매일 다른 장소로. 나는 이미 익숙해진 엘리베이터의 가상 버튼이나 현관의 스캔 게이트에 대해 선생님은 만지는 모든 게 신선한, 처음 도시에 온 아이같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는다.

밀레니엄에서 세미나 업무를 마친 뒤에도 집으로 돌아가기 전 샬레를 경유한다. 비서용 카드를 스캔해 집무실에 입실한 뒤 선생님의 하루 일정과 일일 기록에서 샬레로 돌아오는 시간을 계산해 방에 비치된 안락의자를 빌려가며 가방에 넣어둔 책을 읽는다. 도착 예정 시각 10분 전에는 책을 갈무리짓고 선생님이 이곳에 방문하는 시간에 딱 맞는 좋은 냄새로 맞이할 수 있도록 끓인 물과 커피 그라인더를 준비한다. 그와 특별한 약속을 한 건 아니지만, 이 생활이 시작된 지 둘째 날에는 벌써 아침에는 선생님이, 밤에는 내가 커피를 내리는 습관이 생겨 있었다.

문이 미끄러지는 무기질적인 소리가 들린다. 계산대로, 시간에 맞게.

"수고했어, 노아. 혹시 커피 만들어?"

"네. 제가 마시고 싶어서 준비했지만, 지금은 2인분을 내릴 수 있어요. 마침 타이밍이 딱 맞았네요."

"오, 오늘은 내가 운이 좋은가 보네. 그럼 부탁할게."

항상 선생님은 그렇게, 운이 좋다고 말한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선생님』은 조금 얼빠진 부분이 있습니다〉

라는 평가를 바꿀 수 없는 것은 이런 부분에서. 딱 한 번 「아뇨, 오늘 선생님 운세는 최하위였어요.」 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지만, 조금 슬픈 표정을 지은 뒤 「지금 운이 좋았으니까 상관없어.」 라고 중얼거렸기에 그 이후 그걸로 놀리는 건 그만뒀다.

"네, 기꺼이. 끝난 뒤에는 이야기를 기록하게 해주세요."

비서라고 들었기에 그건 이제 다양한 업무를 떠넘긴다는 얘기인 줄 알았지만 실제로 선생님께서 부탁하신 일은 단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매일 아침 하루 일정을 확인하는 것. 또 하나는 퇴근 후 선생님이 말하는 그날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는 것. 전자를 들었을 때는 과연 비서답다고 수긍했지만 후자는 비서라기보다는 세미나 서기의 업무에 가깝다고 느꼈다. 순간적으로 「과연, 그래서 내가」 라고 납득하기는 했지만 수많은 서기 중 밀레니엄 사이언스 스쿨 학생을 뽑는 이유가 뒷받침 되지 않아 의문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았다.

그리고 고양이 혀인 선생님이 커피를 식히며 그날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나는 맞장구치며 기록한다. 회의록을 담담하게 써내려가는 것과 달리 평소 기억으로만 간직하는 사소한 말의 억양과 재빠른 표정의 움직임으로부터 역산해 그의 마음속에 있는 감정까지 읽어 노트에 적었다. 선생님은 그 밀도에 대해 「대단하네」 라고 말했지만, 감정을 읽는 행위는 모든 인간이 평소 무의식적으로 하는 일이다. 다만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게 나고, 의식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게 다른 사람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계기는 사소한 실수였다. 평소에는 끓는 물을 조금 둬서 온도를 낮춘 뒤 커피를 내렸던 나는 그날, 익숙해졌다고 책을 읽으며 준비하다가 끓인 직후의 물로 커피를 내리고 말았다. 원두의 잡맛이 많이 녹아내린 커피를 조금 맛봤더니 그것은 이미 혀가 놀라 움츠러들 정도로 씁쓸했다. 그런데도 문득 선생님은 어떤 반응을 할까 하고 흥미를 느낀 나는 대체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시기에는 너무 쓴 그것을 그대로 따르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내놓았다.

반쯤 건성으로, 그래도 필요사항은 꼼꼼히 기입하면서 선생님이 그걸 마시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영복 복면단이라는 낯선 단어를 말하는 과정에서 두 번 깨물었고, 진정하기 위해 선생님은 컵을 들고 마침내 입에 넣었다.

눈이 크게 떠지는 게 보이고 컵을 바로 뗀다. 한동안 안에 든 검은 액체를 흔들며 바라보던 선생님은 딱 한마디,

「너는 굉장히 쓴 커피를 내리는구나.」 라고 중얼거렸다.

약간의 뒤엉킴이었다. 지금까지는 아침에 선생님이 내리는 커피와 거의 동등한 것을 계속 만들고 있었다. 분명 그게 선생님에게 익숙한 맛이니까. 기억으로서 그것이 전제에 있기 때문에, 과거의 맛과 비추어 「오늘의 커피는 쓰네.」 라는 감상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런데 「너는」. 「너는 굉장히 쓴 커피를 내리는구나」 라고 말했다. 왠지 내가 주어가 된 그 한 문장에서 크레^바스로 떠밀려난 것 같은 차가움과 깊은 어둠을 느꼈다. 그 바닥의 깊이를 헤아리며 왠지 걸렸던 점은 선생님에 대한 평가로 썼던 〈얼빠진 부분이 있다〉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혹시 더 다른 말로 표현되어야 할 사실이고, 무언가 크게 간과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부터 조금씩 나의 검증은 시작되었다. 매일 커피에 설탕과 우유를 넣는지 묻고 그 반응을 개인 노트에 계속 기록해 나갔다.

〈1일째, 커피에 설탕을 두개 넣은 걸 마신다.〉

〈2일째, 「설탕도 우유도 다 사도야~!」라며 아무것도 넣지 않고 마신다.〉

〈3일째, 아무것도 넣지 않고 마신다.〉

〈4일째, 「아침에는 블랙이었으니 저녁에는 밀크로」라며 우유를 넣은 걸 마신다.〉

〈5일째, 설탕과 우유를 모두 넣어 마신다.〉

〈6일째, 아무것도 넣지 않고 마신다.〉

〈7일째, 「사실 나, 블랙밖에 안 마셔.」라며 아무것도 넣지 않고 마신다.〉

날에 따라 기분이 달라진다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블랙밖에 마시지 않는다는 말도 장난으로 한 농담이라면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아무래도 위화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이 위화감과 지금까지 쌓아온 작은 요소들을 결합하여 나는 이미 어떤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그것을 참이라고 한다면 모든 수수께끼가 맞물린다. 맞물리지만, 그것은 주판으로 도출되는 단순한 이론 위에 있는 게 아닌, 숫자보다 무기질적인 사실..... 그런 생각이었다.

결국 이긴 것은 호기심이었다. 아직 태양도 잠들어있을 무렵, 나는 첫 기차를 탔다. 틀림없이 그것을 확인하면 결정적이 되고, 어쩌면 비서라는 계약도 끝나 버릴지 모른다. 하지만 전철 문이 닫혀도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고 샬레 앞에 와서도 익숙한 손놀림으로 비서 카드를 스캔하고 있었다.

일단 이유는 「약점을 잡고 싶어서」 라고 정했다. 다만 사실은 키보토스라는 세계 밖에서 온 가장 큰 변수로, 그 존재가 안고 있는 가장 큰 취약성으로, 그 선생님을 둘러싼 세계의 움직임을 기록하고 있는 그 중 가장 작은 나라는 존재의 크기를 선생님이라는 자로 재보고 싶었다.

5시 59분. 집무실 안쪽, 지금까지 들어간 적 없던 침실로 들어간다. 이곳도 총학생회 본부, 13층 방과 마찬가지로 놀라울 정도로 간소했다. 침대와 그 옆에 놓인 엔드 테이블만 덩그러니 있고 테이블 위에는 자명종과 장부만 놓여 있다. 남자의 침실에 혼자 침입하고 있다는 상황은 나이를 생각하면 아마 좋지 않겠지만, 이 호기심은 그런 이론의 한계 밖에 있었다. 여섯 시 정각, 나갈 때라는 듯이 울리기 시작하는 자명종을 멈추고 나는 선생님의 어깨를 흔든다.

"선생님, 선생님. 일어나세요."

뭔가 중얼거리더니 선생님은 천천히 눈을 뜨고 두어번 깜박였다.

"아침이에요, 선생님."

그리고 피가 통한 뺨부터 귀까지 단번에 붉어졌고, 평소에는 조용한 선생님이 벌떡 일어나며,

"너는...... 누구야?"

라고,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아아, 역시 그렇구나.

『아비도스 사막』이라는 단어에 대한 반응이 매일 다른 것도,

엘리베이터에서 보이는 키보토스의 풍경을 매일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도,

매일 같은 타이밍에 커피를 내리는 것에 대해 운이 좋다고 말하는 것도,

「너는 굉장히 쓴 커피를 내리는구나.」라는 말도,

그리고 나, 『우시오 노아』가 선생님의 비서로 뽑힌 것도.

그의 기억이 일몰과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소설모음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projectmx&no=2463136

원본 https://www.pixiv.net/novel/show.php?id=19090713

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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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블루 아카이브·23.06.04번역

소설핫산) 기억록

#소설
좋아요 0댓글 21저장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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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P
8nozhi작가
게시물 8개
ㅇDC
ㅇㅇ번역
외부 링크디시인사이드pixiv
게시일2023.06.04 22:11
조회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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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1

나
ㅇDC
ㅇㅇ123.06.04

노아소설은 선개추하고 읽기지

ㅇDC
ㅇㅇ223.06.04
ㅇDC
ㅇㅇ323.06.04

메멘토 주인공마냥 단기 기억상실증이라니 설정 독특하노

ㅇDC
ㅇㅇ323.06.04

근데 이거 뒷부분이 있음? 픽시브 가보니 하나밖에 없어서

ㅇDC
ㅇㅇ작성자23.06.04

이건 샘플이고 본편 팔던건데 0엔으로 내림

ㅇDC
ㅇㅇ323.06.04

오 ㄱㅅㄱㅅ 기대합니노

ㅇDC
ㅇㅇ423.06.04
디시콘
ㅇDC
ㅇㅇ523.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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