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덴조약 편에 선생님이 없는 if를 배경으로 썼습니다
※ 약피폐?
1 / 5<1>
백지처럼 온통 하얗게 칠해진 방 안에 소녀가 발을 들인다. 소녀가 입은 원피스는 먼지 하나 묻지 않은 것처럼 새하얬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보다도 새까맣게 물들어 있다. 그것은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며, 어느 누구보다 그녀 스스로가 잘 알았다.
"만나서 사과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도 없게 되었어."
분홍빛 머리의 소녀가 침대로 다가갔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있는 소녀의 뺨을 쓰다듬고는, 서서히 손을 올려서 잿빛으로 바래버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소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입은 흰 색의 헐렁한 옷은, 언뜻 보기에는 수의 같았다.
"내가……너무 늦은 거지?"
소녀의 말을 들어줄 이는 아무도 없다. 도달할 곳을 찾지 못한 나긋한 목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허무하게 울렸다.
"저기, 들어줄래? 내가 지은 죄에 대해서 말야. ……그리 길지는 않을 거야."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파도처럼 밀려오고는 잡을 겨를도 없이 빠져나갔다. 결코 거스를 수 없는 그런 시간들을, 소녀는 죽은 눈으로 흩었다. 다행히, 그 날 이후로 그녀는 울지 않았다. 그녀를 대신해 눈물 흘리는 이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비극은, 소녀의 순수함에서 비롯되었다.
***
트리니티 다과회실은 트리니티 종합학원에서 티파티가 차지하는 지위만큼이나 드높은 곳에 위치했다. 넓다란 테이블 위에 배치 된 다양한 다과와 찻잔은 트리니티의 품격을 내세울만큼 고급스럽지만, 은은하게 퍼지는 달콤한 향은 티파티가 고집하는 비밀주의처럼 좀처럼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트리니티 전역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열리는 다과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교양과 품격을 갖춘 평범한 다과회였다. 그러나 역사를 파고들면 이 다과회가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트리니티가 지금 같은 종합학원이 아니었던 과거에, 수많은 분교들은 끝없는 내전과 분쟁을 벌이며 서로를 끊임없이 상처입히고 피흘렸다. 이러한 갈등은 제 1차 공의회에서 사그라들어 갈무리 되었고, 이 대통합을 이끌어낸 시발점이 바로 세 개의 분파, 파테르, 필리우스, 상투스가 개최한 티파티(다과회)였다. 트리니티 학생회의 이름으로도 남은 이것(티파티)은, 오랜 시간동안 확립한 질서와 체제의 상징과도 같았다.
티파티가 개최하는 다과회는 트리니티에서도 고귀한 지위에 있거나, 그에 준하는 이들만이 참석할 수 있었다. 까마득한 저 아래서는 볼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이 곳에서, 트리니티의 수많은 의안과 안건에 대한 결정이 내려졌다.
트리니티의 정치 구조는 수많은 음모를 만들어냈고, 이러한 비밀주의는 학생회장인 세 명의 수장을 감추려하는 것은 물론, 상투스 분파의 수장이자 호스트였던 유리조노 세이아의 사망 소식조차 비밀에 부치게 했다.
서로를 견제하는 동시에 서로를 지탱해야하는 삼두정치 중 한 축이 무너지자, 티파티 내부의 파벌싸움과, 알력은 남아있는 둘에게로 쏠렸다. 티파티의 양극단인 파테르 분파의 수장, 미소노 미카와 필리우스 분파의 수장, 키리후지 나기사는 서로의 위치를 대변하듯 테이블 양 끝에 앉아있었다.
"에덴조약?"
미카는 나기사의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웃음기 가득하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 동시에, 다과회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소꿉친구인 둘은 어렸을 적부터 자주 부딪혔다. 그런 다툼은 말그대로 친구끼리의 싸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세이아가 죽은 뒤부터 그들의 관계는 살얼음같이 아슬아슬하게 변해갔다. 잠깐 동안 침묵이 흐른 뒤에, 미카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그러나 나기사에게 향하는 시선은 차갑기 그지 없었다.
"나기 쨩은 단어 하나로 사람의 기분을 망치는 재주가 있네?"
언제나와 같은 쾌활한 말투와 활발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소꿉친구의 뜨거운 분노를 앞에 두고도, 나기사는 아무렇지 않게 홍차를 한모금 머금었다. 그 모습을 본 미카가 화를 억누르고 말했다.
"그건 총학생회장이 실종 된 뒤로 끝난 얘기 아니었어? 재미없는 농담인 줄 알았는데…….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구나? 나를 기분나쁘게 하려는 의도라면, 뭐어. 칭찬해줄게. 홍차의 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을만큼 기분이 상해버렸거든."
신랄하게 쏟아지는 독설을 듣고도 나기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트리니티의 학생회장, 그리고 대표인 호스트로서 온갖 정치와 음모를 헤쳐나가는 그녀에게 소꼽친구의 독설은 정도는 들어줄 만한 것이었다.
"아뇨.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미 게헨나 측과 협상하고 있어요. 트리니티든 게헨나든, 어느 쪽이 우위에 서는 일 없이 서로 평등한 위치에서 조약을 맺을 겁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를. 미카는 테이블을 뒤엎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맞은 편에 앉은 이가 나기사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그랬을 것이다.
"……누구 맘대로?"
억누르지 못하고 새어나간 미카의 분노는 고스란히 나기사에게로 향한다. 그러나 나기사는 전혀 기죽지 않고 차분한 언사에 권위를 실어 말했다.
"미카 씨. 지금 티파티의 호스트가 누구라고 생각하나요?"
칫, 미카는 혀를 찼다. 세 명의 학생회장은 높은 지위와 권한을 가졌지만, 그 중 대표인 호스트는 더 많은 권한을 가졌다. 전(前) 호스트인 세이아의 부재로 갑작스레 호스트가 된 나기사는, 이전 호스트 임기 때도 그랬듯이 능숙하게 권력을 사용했다.
"굳이 나기 쨩이 말하지 않아도 알거든?"
미카의 볼멘소리와 함께, 나기사의 시선이 찻잔에 담긴 홍차로 향했다. 흔들림 없는 수면은 잔잔한 호수 같았다. 그러나 작은 돌 하나가 만들어내는 파문이 수면을 흔들듯, 허울 뿐인 평화는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찻잔 끄트머리를 가볍게 문 입술이 홍차를 삼킨 뒤에, 달칵-하고 찻잔과 찻잔 받침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미카 씨도 알다시피. 트리니티와 게헨나 사이에는 끊이지 않는 분쟁이 있었습니다. 그간 수많은 증오와 분노, 갈등과 싸움이 존재했죠. 이러한 분쟁은 서로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이제는……."
나기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카가 끼어들었다.
"나기 쨩. 난 나기 쨩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걸. 혹시 호스트 일로 피곤해서 그런 거야? 트리니티와 게헨나 사이에 반목하는게 그렇게 이상한 건가?"
미카는 나기사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화가 났다기보다, 1 더하기 1이 3이라는, 우습지도 않은 농담을 들었을 때 지어보일 법한 표정이다.
"게헨나의 뿔 달린 녀석들과 평화롭게 지낸다고? 오히려 난 이쪽이 더 말도 안된다고 생각해. 분명 그 녀석들, 에덴조약이라는 이름 뒤에서 우리를 배신할거야. 평화를 위해 세워진 기구는 우리를 억압할 도구가 될거고. 그런 미래를 바라는거야?"
분홍색의 장발이 동요하는 마냥 흔들렸다. 미카를 바라보는 나기사의 속마음도 그에 못지 않게 동요했다. 애써 평온함을 가정해보지만, 잔뜩 긴장한 몸은 찻잔을 연거푸 기울였다. 나기사도 미카를 비롯한 파테르 분파가 게헨나를 증오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혐오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미카 씨."
나기사의 말에도 아랑곳 않고, 미카는 계속해서 나기사를 향한 힐난을 이어갔다.
"나기 쨩이 이렇게 바보일 줄은 몰랐는데. 봐. 나기 쨩. 트리니티가 물이라면, 게헨나는 기름이야. 물과 기름이 섞이기를 기대해? 그렇게 억지로 섞으려고 해봐야 오히려 적나라하게 나뉘어질걸?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말야."
미카의 열변에도 불구하고, 나기사는 대꾸도 없이 수저만 휘저었다. 티스푼을 잡은 각도부터 팔의 움직임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는 우아한 동작은 미카를 자극하기에는 더 할 나위 없었다.
"그리고……물이 가라앉고 기름이 떠오르듯, 트리니티는 가라앉고, 게헨나가 우리의 위에 서게 될거야."
미카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더욱 적나라한 말을 내뱉었다.
"나기 쨩은 트리니티를 배신할 생각이야? 트리니티를 그 증오스러운 게헨나의 손에 안겨줄 생각이라면, 최소한 내게는 말하지 않는 쪽이 좋았을텐데."
여태 잠자코 듣고 있던 나기사도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미카 씨!
친구에게는 결코 하지 않을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 이상 선은 넘지 마시죠. 방금 당신의 발언은 호스트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나기사가 호스트의 권위까지 꺼내들자, 미카의 감정도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화가 치밀어 오른 그녀는 몇 번이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다가,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해 겨우 자리에 앉았다.
이래서 호스트가 되었어야 했는데. 미카의 고운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그녀의 눈에 나기사는 정치를 형상화 한 괴물처럼 보였다. 괴물을 막을 이는 누구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디저트가 풍기는 달콤한 향기가, 그들 사이에 흐르는 날카로운 기류에 섞이지 못하고 그대로 흝어졌다.
"……."
미카는 사과하지 않는다. 나기사는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다. 둘은 말없이 홍차를 들이켰다. 미카는 나기사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확인했고, 나기사는 미카의 게헨나에 대한 증오를 다시 느꼈다. 서로에게 둘도 없는 두 아가씨는, 서로의 이견을 뼈저리게 체감했다.
세이아가 있었다면 달랐을까? 둘은 같은 생각을 했다. 황금처럼 빛나는 머리 위로 여우 귀나 난 소녀. 유리조노 세이아는 특유의 꼬여있는 성격과 복잡하기 짝이 없는 언사로, 미카 뿐 아니라 나기사까지 곤란하게 만들고는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중요한 핵심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고고한 이상을 보며, 최대한 올바른 방식을 찾아 행동했다. 그녀는 미카의 무모한 행동을 제지할 수 있었고, 나기사에게 나아갈 이상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제는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다. 나기사는 세이아의 죽음을 막지 못했고, 미카는 세이아를 죽이고 말았다. 둘은 저마다의 이유로 세이아의 부재를 괴로워하고 슬퍼했다. 짧은 애도를 마친 뒤에, 두 사람이 입을 열었다.
"……아무튼, 나는 반대야.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분명……트리니티에 좋지 않을 거야."
"아뇨. 트리니티와 게헨나의 오랜 적대관계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해가 될 겁니다."
둘은 물러나지 않았다. 나기사는 세이아가 꿈꾸던 낙원을 포기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미카는 세이아를 희생한 이유를 포기할 수 없었다.
해가 질 때까지 둘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티파티를 파할 즈음에 미카는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국 티파티는 서로의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로 끝이 났다. 테이블 위에는 손도 대지 않은 디저트가 가득했고, 혼자 남은 나기사는 쓰디쓴 홍차를 삼켰다. 세이아의 죽음으로 무너져가는 것은 삼두정 만은 아니었다. 삐그덕거리기 시작한 톱니바퀴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뒤틀리고, 비틀리며 마모 되었다.
그녀는 관자놀이를 감싸쥐었다. 소꿉친구에게는 닿지 않을 말을 피곤에 쩌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방법 밖에는 없어요. 미카 씨."
세이아를 암살한 세력의 정체는 아직도 파악할 수 없었다. 특히 침입한 흔적 조차 남지 않은 바람에, 배후를 찾는데는 큰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다음 표적이 누구일지는 일목요연했다. 티파티의 호스트, 키리후지 나기사.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일목요연하다.
나기사도 죽음은 두려웠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욱 두려운 것이 있었다. 나기사는 그녀가 암살 당한 뒤에 혼자 남을 미카에게 닥칠 일들을 상상했다. 트리니티의 권모술수와 음모에 휘둘려서,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파멸의 길에 빠지는 소녀. 결코 그렇게 두지 않으리라. 트리니티의 정치 괴물도 한 명의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 친구 때문에 괴로워하고, 친구를 아끼는 그런 소녀 말이다.
나기사는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황금빛을 머금은 시선이 눈꺼풀에 잠겨들고, 소중한 친구를 위해 기도했다.
그러나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두 번째 비극이 싹을 틔웠다.
***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미카는 아리우스와 또 다른 만남을 가졌다. 미카는 트리니티를 위해, 그리고 게헨나에게서 트리니티를 지키기 위해 나기사를 끌어내리려 마음 먹었다.
비극이 닥쳐오는 이유는 다양하다. 하지만 그 시작은 모두 같았다.
<2>
하얀 방에는 여전히 소녀와 소녀, 단 둘 뿐이다. 창 밖으로 스며드는 따스한 햇빛이 침대 위의 소녀를 비춘다. 침대 옆에 앉은 소녀가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기 쨩 말야. 어릴 적에는 춤을 엄청 못 췄다? 그래서 내가 엄-청 열심히 가르쳐줬었어."
소녀는 마치 누군가와 춤을 추듯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춤을 춘다기보단 흉내내는 동작인데도 불구하고, 손가락 한 개 조차도 세련되어 보일 정도였다.
"같이 손잡고, 빙글빙글 돌면서 춤추고. 처음에는 내 발을 계속 밟았는데. 나중에는 나 못지 않게 잘 추더라구. 드디어 실수없이 춤을 추고 난 뒤에는 어찌나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던지! 사진으로 찍어뒀어야 했는데. 세이아 쨩한테도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웠어!"
소녀는 꺄꺄- 웃으며 손뼉을 쳤다. 한참동안 재잘거리던 그녀는 대답없는 소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초점 없는 시선과 시선은 서로 맞닿지 않았다.
"……어디부터 꼬여버린 걸까?"
그녀는 계속해서 기억을 흩었다.
"언제……였지?"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보다 더 깊은 잠에 든 소녀는, 헤어나올 수 없는 꿈 속을 정처없이 헤매고 있었다.
영원히.
***
티파티 호스트 집무실은 그 이름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에 비해서는 오히려 조촐했다. 검은 문을 열고 들어선 방 안에는 책장과 키보토스 전도, 손님 맞이용 소파, 집무를 보기 위한 책상 외에 대단한 것은 없었다.
나기사가 집무를 볼 때마다 쓰는 만년필의 촉이 조명 아래서 빛났다. 책상 위에는 트리니티의 모든 학생에 대한 정보가 담긴 서류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누가 트리니티를 배신할 수 있을까? 누가 트리니티를 배신할 능력이 있을까? 누가 트리니티를 찌를 날카로운 창이 될까? 트리니티는 키보토스에서 가장 거대한 학원이고, 그렇기 때문에 티파티조차 트리니티의 모든 것을 컨트롤 하지는 못했다. 하물며 호스트였던 세이아도 비명에 간 마당에, 지나칠 정도의 의심이라는 말은 의미가 없다. 나기사는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생각했다.
'배신의 이유를 에덴조약에 대한 반발이라 생각하면, 게헨나에 적대적인 이부터 후보에 넣어야겠지.'
나기사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의심했고, 머리 속에 떠오르는 모든 가능성을 의심했다. 그녀가 보기에는 트리니티의 모든 이들이 배신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모두가 배신자라면, 애초에 무슨 수를 써도 맞서지 못할 테니까. 그 끝은 파멸 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방향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트리니티의 배신자를 색출하는 게 아니라, 우선 트리니티를 배신하지 않을 사람부터 하나씩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기사는 전교생의 정보를 빠짐없이 수집했다. 명백한 인권 침해였으나, 더욱 커다란 대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나기사는 호스트로서 바쁜 일상을 보내는 동시에, 남들 모르게 학생들을 글자 수천개와 문장 수십줄로 가늠하는 일을 반복했다.
'이 사람은 아니야. 이 사람도 아니고……이 사람도, 아니군.'
처음에는 상층부와 어떠한 연도 없는, 권력과는 거리가 먼 학생들의 서류가 파쇄 되었다. 소리를 내며 쉴새없이 돌아가는 파쇄기를 보는 나기사의 눈동자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석양을 연상케 했다.
나기사는 속으로 그들에게 사죄하려다가 그만뒀다. 닿지도 않을 사과로 죄책감을 덜어낸다고? 그녀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웠다. 정치는 항상 영광스럽지 않았지만, 그녀가 하는 행위는 정치 조차도 아닌, 추악하기 짝이 없는 '작업' 이었다.
'그러나 해야 하는 일이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결국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만다며, 나기사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나기사는 세상에서 미카의 얼굴을 떠올렸다. 천진난만한 공주님. 만일 일이 무사히 끝난다면, 앞으로도 미카가 세상 물정 모르는 순수한 공주님으로 남을 수 있다면. 나기사는 어떤 대가라도 치를 작정이었다.
'예전 그 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기사는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대고서 눈을 감았다. 낡은 기억은 미카와의 말다툼에서 시작한다. 예전에도 종종 있던 일이었지만, 거기에 세이아까지 끼어들자 반농담 삼아 삼두정의 내부붕괴까지 비화 될 수도 있는 심각한 다툼으로 진화하고 말았다.
트리니티의 안정까지도 위협했던 언쟁은,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마침내 막을 내렸다. 세 명의 소녀들은 패닉룸에 숨겨진 다락방에 모여앉고는, 나이대에 어울리는 웃음꽃을 피우며 응어리를 풀었다. 그들은 한 이불을 덮은 것 같은 따스한 기분을 느꼈다. 나기사도, 미카도, 세이아도, 다과회실의 다과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조촐한 다과회를 즐기던 와중에, 나기사가 미카에게 말했다.
'저는 항상, 미카 씨를 믿고 있답니다.'
그 어느 날에, 나기사는 소중한 친구를 향해 진심을 말하며 웃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기사는, 그 때와 같은 미소를 짓기를 고대한다.
그녀의 소원은 이루어질까? 나기사는 글씨로 가득한 서류를 펼쳐서, 감정 없는 얼굴로 내용을 살폈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아직 많았다.
신중함이 지나치면 의심이 된다. 의심은 바닥 없는 늪과 같아서, 늪에 빠지기 시작한 이는 정당한 신중과 의심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키보토스에서도 손꼽을 만큼 정치적인 학생인 나기사는 결국 자신이 판 의심의 늪에 스스로 빠지고 말았다.
***
"티파티의 패닉룸은 87개. 하지만 로테이션의 순서를 알고 있으면, 목표를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지."
나기사의 둘도 없는 친구는, 어둠 속에서 그녀를 사로잡을 음모를 꾸민다.
"그리고 로테이션 외에도 먼저 찾아야 할 곳은……바로 여기야. 나기 쨩은 종종 이 다락방에 머무르거든."
"알겠습니다."
방독면을 쓴 아리우스 분교의 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간 비밀스런 대화가 오고간 뒤에 아리우스로 돌아가려는 분교생을 미카가 잡아 세웠다.
"이번에는 제대로 해. 만일 저번 같은 일이 또 벌어진다면, 키보토스에서 지워지는 쪽은 게헨나가 아니라 아리우스 쪽이 될 거야. 알아들었지?"
어여쁜 얼굴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웃지 않았다. 수많은 가혹행위를 비롯해 지옥 같은 훈련을 받은 분교생도, 그녀가 내뿜는 선명한 분노 앞에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혼자 남은 미카는 분교생이 사라진 어둠 속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처음 아리우스와 화해하자는 말을 꺼낼 때만 해도, 이런 미래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한 번 출발한 기차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그 끝이 그녀가 바라는 것이라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이번에는 절대, 세이아 쨩 같은 일은 없을 거야.'
미카는 세이아의 죽음을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며 합리화했다. 하지만 그녀도 마음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그건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비극이었다. 수없는 자기합리화와 자책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가슴 속에 남은 죄책감은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에는 그녀가 직접 나설 차례였다. 이전처럼 손놓고 바라보고 있다가는, 비슷한 일이 반복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똑같은 비극이 반복 될 가능성이 높았다. 미카 스스로도 친구인 나기사에 비해 스스로의 정치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그녀도 나름의 정치력은 갖추고 있었다. 처음 접선했을 당시만 해도, 미카에게 아리우스 학원은 화해해야 할 친구이자 게헨나에 맞서는 동료였지만, 이제는 언제 사고를 칠지 모르는 동업자에 지나지 않았다. 전투력에 있어서 트리니티의 탑을 달리는 그녀가 직감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세이아와 나기사는 미카를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아가씨로 여겼지만, 엄연한 삼두정의 일원이자 한 분파의 수장이 마냥 순수할 리가 없었다.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미카는 펼친 손바닥을 내려다 본다. 그녀는 종종 손이 피로 흠뻑 젖어든 착각을 한다. 그녀는 주먹을 쥐었다 피며 계획을 정돈했다. 쿠데타가 성공하면, 미소노 미카는 티파티의 새로운 호스트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트리니티는 또 다른 세력을 얻을 것이고, 게헨나는 최대의 적을 맞닥뜨릴 것이다. 평화를 가장한 위협도 사라질 것이고, 세이아의 희생은 빛을 볼 것이고……나기사는 평범한 학생으로 평화롭게 지낼 것이다.
"미안. 나기 쨩."
미카는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 듣는 이 없는 사과가 그대로 흝어져 사라진다.
"그치만, 가증스런 게헨나에게서 트리니티를 지키기 위해서는……이 방법 밖에는 없는 걸."
다른 방법은 없었다. 아니, 없어야 했다. 그게 그녀의 가장 큰 버팀목이었다. 미카는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세이아의 목소리, 나기사의 얼굴, 그리고, 그리고……머리 속에서 불협화음처럼 뒤섞이던 온갖 것들이 어느 순간 깨끗히 사라졌다.
'그리고……파테르가 필리우스와 상투스 위에 있는 건 당연하잖아?'
어둠 속에서, 미카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
글자 몇 개로는 누군가의 외로움과 괴로움을 모두 표현하지 못한다. 나기사는 차마,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들여다 볼 수 없었다. 찻잔을 비우고, 다시 찻잔을 채우기를 수차례 반복한 뒤에야, 비로소 그녀는 종이 위의 가장 큰 글자를 눈에 담았다.
'자퇴서'
트리니티에서 자퇴는 극히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학원 내에 존재하는 계급제에 질려버린 학생,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 학원의 엄격한 규율을 갑갑해하는 학생, 상류층에 팽배한 가식과 권모술수에 질려버린 학생 등 몇몇 학생들은 자퇴를 신청했다. 하지만 이번의 자퇴생은 그들과는 사뭇 달랐다.
나기사는 자퇴서를 집어들었다. 보통 자퇴서는 힘주어 글자를 쓴 흔적이 역력하거나, 후련하게 갈겨진 필체로 쓰여지거나, 구겨진 흔적이 역력하거나, 메마른 눈물 자국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번의 자퇴서는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자퇴서는 그러한 흔적도 없이, 꼼꼼한 글씨체의 글씨만 남아 있었다. 나기사의 느릿한 시선이 자퇴서를 흩었다.
우라와 하나코.
나기사는 하나코를 만난 적이 있다. 미카보다 좀 더 밝은 톤의 분홍색 머리의 소녀는, 티파티 뿐 아니라 시스터후드에서도 영입하려 할 정도로 우수했다. 심지어는 나기사도 하나코를 필리우스의 후계자이자 차기 호스트로 점찍을 정도로, 하나코는 확실히 뛰어난 인재였다. 나기사는 어쩌면 하나코가 그녀의 뒤를 이어서 뛰어난 호스트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하나코는 연이은 낙제 끝에 우등생에서 낙제생으로 전락했다. 그 이유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그런 수상한 행동 탓에 나기사는 최우선적으로 하나코를 의심했다.
그 결말이 바로 이것이다.
이미 파악하고 있던 개인정보와 자퇴 사유를 써내린 글씨는, 언뜻 보기에 어떤 사심도 담겨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기사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자퇴는 트리니티에서의 자살과 같으니, 하나코는 스스로 트리니티에서의 삶을 그만두었다.
2 / 5하나코가 트리니티의 배신자가 맞다면, 이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배신자가 아니라면, 이는 그릇 된 일이다. 나기사는 자퇴서를 구겨 쥐었다. 서식에 알맞도록, 최하단에는 죄인이 누구인지 쓰여 있었다. 트리니티 종합학원 티파티 호스트 귀하. 선명하게 새겨진 글씨는 그녀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낙인과 같았다.
"세이아 씨. 이게 옳은 거겠죠……?"
나기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쓰러지는 거목처럼, 그녀는 천천하지만 분명하게 무너져간다.
"……제가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주세요. 제발……."
나기사는 마른 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긴장을 풀기 위해 마셔댄 홍차 때문인지, 몇 주 동안 깊이 잠들지 못 한 눈이 뻐근했다. 하지만 남들 앞에서 이런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트리니티의 최상단에 군림하는 호스트 키리후지 나기사는, 타의 모범이 되는 학생회장이고, 존경받는 분파의 수장이며…….
'희생도 서슴지 않는, 음험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지.'
나기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텅 빈 허공을 향했다. 이윽고 흐려졌던 눈동자에 회광반조처럼 총기가 서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배신자 후보는 여전히 남아있고, 에덴조약은 마침내 체결을 앞두고 있다. 에덴조약은 트리니티 뿐 아니라 미카를 지켜줄 방패가 될 것이라고, 나기사는 굳게 믿었다. 미카는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애시당초 이해를 바라고 하는 일은 아니었다.
나기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에서조차 편히 쉬지 못 한 눈망울에 피로가 가득했다. 오랫만에 쉴 곳을 찾아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얼굴은 더없이 어두워서, 마치 죽음을 앞둔 것처럼 처연했다.
<3>
쫓겨난 자들의 후손이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왔다. 억압과 핍박을 받으며 자라난 자들의 군홧발이 증오스러운 고향 땅을 짓밟았다.
티파티의 학생회장인 미카가 수를 쓴 덕분에, 정의실현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쿠데타를 방해할만한 전력은 패닉룸을 호위하는 소수의 인원이 다였고, 이 정도로는 아리우스의 병력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미카와 아리우스는 서로 동상이몽을 꾸고 있었다. 그들의 최종 목표는 쿠데타의 성공이었지만, 미카가 나기사를 온전히 확보하려 하는 반면, 아리우스는 확실하게 나기사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자, 조급해진 미카는 엄지 손톱을 깨물었다.
아리우스에게 보급품을 제공한 것도 그녀였고, 트리니티에 잠입할 루트를 제공한 것도 그녀였다. 분명 계획을 주도하는 것은 그녀일텐데, 알 수 없는 초조함이 그녀를 안달나게 했다. 나기사가 세이아처럼 되면? 미카는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결국 그녀는 계획보다 일찍 나서기로 했다.
"나기 쨩. 금방 갈테니까, 착한 아이처럼 기다리고 있어줄래?"
샐쭉, 미소 지은 미카는 소꿉친구를 향한 집착을 숨기지 않았다.
***
나기사는 눈을 떴다. 의자에 기댄 채로 잠이 든 탓인지, 머리 속이 핑핑 돌았다. 메슥거림을 참지 못한 그녀는 가슴을 부여잡고 헐떡거렸다.
짧은 꿈 속에서, 그녀는 꿈에도 그리던 친구들을 만났다. 홍차의 향도, 찻잔의 감촉도 모두 현실 같았지만, 세이아의 미소를 보자마자 나기사는 이게 한낱 백일몽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차라리 꿈이란 걸 몰랐다면……그랬다면 좋았을 것을.'
나기사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연신 눈을 깜빡거렸다. 에덴조약의 체결에 가까워질수록, 그녀는 스스로 파놓은 구멍으로 자꾸만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나기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바닥 없는 진창 위에 선 것 처럼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고, 돌아갈 수도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가라앉는 그녀에게 남은 것은 부여 받은 의무와 감당해야 하는 책임 뿐이다.
"세이아 씨. ……미카 씨."
항상 그랬지만, 오늘 따라 그녀는 무척 두 사람이 보고 싶어졌다. 세이아에게 조언을 듣고 싶었고, 미카의 천진난만한 말에 웃음 짓고 싶었다.
그러나, 나기사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티파티의 호스트가 해야 할 일은 이뤄질 수 없는 소원을 비는 게 아니었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최대한의 이상을 좇는 것이 그녀가 할 일이었다.
나기사는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등불 하나 없는 주위를 흝었다. 세이아가 죽은 뒤부터 그녀는 항상 어두운 밤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몰아낼 길 없는 밤에도 언젠가는 해가 뜰테고, 눈부신 햇빛에 어둠도 물러나리라고, 그녀는 굳게 믿었다.
커텐 틈 사이로 달빛을 받은 문고리가 은은하게 빛났다. 나기사는 문 앞에 서서 문고리를 잡았다. 그 순간, 나기사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나기사는 벽에 등을 기대고 몸을 숨겼다. 사위가 조용한 가운데, 신경을 곤두세운 그녀의 귓가에 정체 모를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 그녀에게로 찾아왔다.
***
쿠데타는 순조로이 진행 되었다. 나기사를 찾는 것은 시간 문제였고, 얼마 안 가 트리니티는 새 호스트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미카는 도무지 불안감을 견딜 수 없었다.
오늘 그녀가 맞닥트린 아리우스 분교생들은, 모두 끝없는 증오를 발산했다. 그들의 걷잡을 수 없는 증오는 게헨나에게 향하기 전에, 먼저 트리니티에 향했다. 게헨나를 배제하고 에덴조약을 무너트리려는 일에 집착한 탓에, 미카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만 것이다.
달리는 내내, 미카는 결국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했다. 그녀가 꿈꿨던 평화, 트리니티와 아리우스의 유대와 연합은 처음부터 틀린 선택이었다. 트리니티와 게헨나가 물과 기름이라면, 트리니티와 아리우스는 물과 불이었다. 어느 한 쪽이 사라지지 않는 한, 둘은 결코 사이좋게 섞일 수 없었다.
'아니. 나는 틀리지 않았어.'
미카는 떠오르는 생각을 부정했다. 아리우스가 트리니티를 증오하니 마니 하는 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급박하게 흘러가는 상황 속에서 미카는 두 가지 결론을 내렸다.
하나, 나기사를 호스트에서 실각 시키고, 유폐한 뒤에 아리우스를 트리니티의 공식 무력집단이자 티파티 휘하의 병력으로 삼는다.
둘, 만일 아리우스가 그녀를 배신한다면, 트리니티의 힘으로 아리우스를 찍어 누른다.
어느 쪽이든 에덴조약이 백지화 되고, 트리니티와 아리우스가 연합하여 게헨나에 맞선다는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좋은 생각이야. 어설프게 서 있던 아리우스 분교생이 미카에게 밀려 넘어졌다. 정작 넘어진 당사자는 미카의 기백에 밀려 소리도 내지 못했다.
세이아의 희생을 헛되게 해서는 안된다. 나기사를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 미카는 걸음을 재촉했다. 패닉룸 바닥을 두드리는 구두굽 소리가 군화 소리에 섞여들었다.
***
나기사는 최대한 숨소리를 죽였다. 먼 곳에서 발소리가 들리고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소리가 잦아들다가는, 다시 발소리가 들린 뒤에 총성이 울렸다. 일련의 과정이 반복 되면서, 소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이 다락방은 패닉룸에서도 외진 곳에 숨겨져 있건만, 침입자들은 망설이지 않고 이 쪽으로 다가왔다. 숨겨진 방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역시……배신자가 있었군요.'
누군지는 몰라도 대담한 전략이라며, 호스트 키리후지 나기사는 솔직히 감탄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번 사건으로 얻을 정치적 이득을 빠르게 계산했다. 그러나 계산서에 홀로 남겨질 미카를 넣는 순간, 모든 계산은 가치 없는 것으로 전락했다.
나기사는 테이블로 만든 임시 엄폐물 뒤에 쪼그리고 앉은 채로 허리춤에 찬 권총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편의성이 우선시 되는 권총은, 다수의 적과 맞설 무기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녀는 미카나 정의실현부의 츠루기 같은 강자도 아니었으니, 적습에 직접 맞서기보다는 어떻게든 정의실현부의 지원을 기다리는 쪽이 상책이었다.
'그렇다 한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기사는 소중한 소꿉친구를 떠올렸다. 권총 손잡이를 잡은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미카의 얼굴이, 목소리가, 미소가 나기사의 머리 속에 떠올랐다.
'미카 씨.'
미카에게 솔직하게 말했어야 했다. 차라리 다툴지언정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았다면, 그랬더라면…….
'미안해요. 미카.'
최소한, 뒤늦은 후회는 하지 않았을텐데. 나기사는 섧게 웃었다.
***
쿠데타의 주역이 다락방 안으로 위풍당당하게 들어섰다. 셋이서 만났던 방은 미카의 기억 속의 방과 똑같았다.
"아하하하. 나기 쨩도 차암. 정말 여기 숨어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는데 말야."
잠든 것처럼 기절해 있는 나기사 주변에 아리우스 분교생들이 서 있었다. 다행이네. 미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쿠데타의 성공 유무보다는, 나기사가 무사하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더욱 기쁜 소식이었다.
'이제 게헨나의 뿔 달린 년들에게 배신당할 일은 없겠지.'
"일어나. 나기 쨩. 아니, '전' 호스트라고 해야 하려나?"
미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으면서 쾌활하게 재잘거렸다. 나기사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녀는 얼마든지 맞받아칠 작정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옳은 길이라고, 그녀는 굳게 믿었으니까.
"아하하. 걱정마. 나기 쨩. 한동안은 좀 불편하고 화도 나겠지만, 조금만 있으면."
피아노 선율처럼 흘러가던 발랄한 목소리가 뚝, 멎었다. 웃는 낯이었던 얼굴도 서서히 굳어갔다. 아리우스 분교생들이 그녀에게 무어라 말하는데도, 미카는 그들을 무시하고 나기사에게로 향했다.
"……나기 쨩?"
많이 다쳤나 봐. 구호기사단을 불러야, 하고 미카는 생각했다. 그녀는 앞을 가로막는 분교생을 거칠게 밀쳐내고, 나기사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들리는 소리는 불협화음 같아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눈동자가 나기사를 쫓았고-
-새하얀 원피스 제복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헤일로가……."
꺼져 있었다. 정말이지 지독한 장난이라고 미카는 생각했다. 그래야만 했다.
"……이거, 나기 쨩이 꾸민 음모지? 트리니티의 배신자를 색출해내려고 이런 일까지 꾸민 거야? 정말 생각지도 못했네. 역시 나기 쨩이야."
미카는 한 방 먹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나기 쨩. 장난치지마. 이런 흉내를 내도 변하는 건 없어. 그러니까……."
소꿉친구를 힐난하던 목소리는 어느새 애원으로 변해갔다. 이미 쿠데타니 에덴조약이니 하는 건 미카의 안중에도 없었다.
"아냐. 그럴리가……없는데."
미카는 힘없이 주저앉았다. 트리니티에서도, 키보토스에서도 손꼽히는 강자는 누구보다도 약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거짓……말."
무릎으로 기어가던 미카는 나기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소중하게 다루던 기관단총도 바닥에 내버린지 오래였다.
"일어나. 나기 쨩. 어서. 제발……."
미카는 나기사를 품에 안았다. 오랫만에 맞닿은 친구의 몸은 차갑게 식어갔고, 감지 못한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영혼 없는 눈동자를 본 미카는,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과거는 돌릴 수 없다. 간단하고도 확고한 세상의 이치가 미카를 짓눌렀다.
"이런 건……싫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소녀의 뒤늦은 후회가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나기 쨩……. 제발 돌아와. 내가, 내가 잘못했어……."
비극적인 결말 앞에서, 결국 미소노 미카는 무너졌다.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배신자는 울었고, 마녀는 자신의 죄를 품에 안고서 웃었다.
3 / 5미카는 주변을 둘러봤다. 방독면을 뒤집어 쓴 아리우스 분교생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것들은, 그녀에게는 마치 생명 없는 기계처럼 느껴졌다.
"……너희들. 나기 쨩을……죽였지."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카도 구태여 대답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애시당초 대답을 바라고 한 말도 아니었다.
"세이아 쨩도 이렇게 죽었을 거야."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그들은 미카를 무시하듯 외부와 무전을 주고 받았다.
"배신자가 배신을 당하다니. 정말……우스운 일이야."
미카는 나기사를 조용히 바닥에 내려두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허공을 더듬었다. 떨리는 손이 그녀의 총에 닿았다. 새겨진 문구가 미카의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누가 하느님 같으랴?'
"……그렇네."
미카는 예전부터 자비송을 싫어했다. 음색도 지루한 데다가, 가사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자비를 받을 필요가 없었고, 불쌍하게 여겨지는 처지가 된 적도 없었다.
"그러면 되는 거였어."
이제, 그녀는 자비를 베푸는 법을 영원히 알지 못 하리라.
"나기 쨩을 죽인 너희들도, 여기서 똑같이 죽으면 되는 거야. 그렇지?"
총격음이 울리고, 불쾌한 불협화음과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린다. 길고 긴 악몽의 시작이었다.
***
미카는 나기사를 조심스럽게 안아올렸다. 피투성이가 된 몸이 추욱 늘어졌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기 쨩. 같이 춤……출래? 오랜만에 말야."
미카는 나기사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붉게 물든 댄스홀에서, 그녀는 혼자만의 왈츠를 시작한다.
"나기 쨩은 정말이지. 여전히 춤을 잘 못 추네. 내가 엄청 열심히 가르쳐줬는데. 벌써 다 까먹었나 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파트너를 대신해 유려한 스텝을 밟으며, 우아하게 춤을 이끌었다.
찰박. 바닥에 고인 피가 튀었다. 군청색의 구두가 수많은 죄인들이 흘린 피로 물드는데도,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기사의 고개가 미카의 어깨 위로 자연스레 기울자, 미카가 속삭였다.
"나기 쨩. 나……죄를 저질렀어."
미카는 세이아를 혼내주려 했다.
그래서, 세이아는 죽었다.
"세이아 쨩을 죽였고."
미카는 나기사를 혼내주려 했다.
그래서, 나기사는 죽었다.
"그리고, 너까지 죽이고 말았어."
찰박. 찰박. 찰박. 미카가 발을 옮길 때마다 계속해서 피가 튀었다.
"그리고, 나……앞으로도 더 많은 죄를 지을 거야. 그래도, 용서 해달라고 하지는 않을게."
미카는 게헨나를 혼내주려 한다.
"그야, 세상은 헤아릴 수 없는 죽음으로 가득하니까."
그리하여 게헨나의 목숨 붙어있는 것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그렇지? 나기 쨩."
미카는 웃으며 울었다. 그리고 울으며 웃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방 안에서, 미카는 마지막 춤을 추었다.
영원할 것만 같은 춤도 결국 클라이막스에 다다른다. 미카는 파트너의 허리를 받쳐 든 채로 몸을 기울였다. 나기사의 몸이 힘없이 뒤로 젖혀져서, 초점 잃은 눈이 눈물처럼 피를 쏟았다.
"……안녕히. 나의 소중한 나기 쨩."
미카는 오랜 친구에게 작별을 고했다. 눈물이 말라붙은 눈은 언젠가의 과거로 향했다. 셋이서 웃으며 즐겁게 떠들던 시절이 미카의 눈 앞에 아른거렸다. 이제 그런 기억은, 추억이라는 사진으로 삼아 과거라는 이름의 앨범에 담아두어야 한다.
낙원을 좇던 발걸음도, 소녀들의 우정도, 모두 이렇게 허무하고 덧없이 끝났다.
그러나 마녀의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그렇게 되버린 거야. 세이아 쨩."
들어줄 이 없는 고해성사를 마친 미카는 표정 없는 친구의 얼굴을 찬찬히 흝었다. 오랫만에 본 세이아의 얼굴은 초췌했지만, 미카의 기억 속 얼굴과 여전히 비슷했다.
"정말 바보같은 이야기지? 후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쓴웃음을 지은 미카는 세이아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세이아는 살아있었다. 하지만 죽은 것도 맞았다. 그 때 보았던 나기사처럼 세이아의 헤일로는 허무하리만치 꺼져 있었다.
어찌보면 죽음보다도 더 끔찍한 결말이다. 생명유지장치에 매달려 목숨만 겨우 붙어있는 꼴이라니.
"그래도 다행이야."
미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윽고 그녀의 귓가에 수많은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 날 이후로 미카는 단 하루도 편히 쉬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피로 물든 기억이 떠올랐고, 마녀에게 살해 당한 희생자들의 비명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트리니티의 마녀가 벌이는 전쟁도, 내 이름으로 벌어지는 학살과 전쟁범죄도, 키보토스에 가득한 죽음과, 절망과, 모든 것들이 황혼처럼 아스라이 사라지는 광경을……."
미카가 눈을 뜨자마자 환각도 환청도 사라졌다. 대신 견인곡사포의 포성이 울렸다. 이번에는 환청이 아니었다. 그녀의 악몽은 에덴전쟁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되었다.
"세이아 쨩은 보지 못할 테니까."
미카는 세이아의 푸석푸석해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수많은 미래를 헤매던 소녀는, 이제 현재에 갇혀 현실이라는 이름의 지옥을 헤매고 있었다. 그녀를 구원할 방법은 단 하나 뿐이었다.
"……낙원은, 있을까? 만일 낙원이란게 실제로 있다면. 나기 쨩은 그 곳에 있겠지? 착한 아이잖아."
미카는 멋쩍은 미소를 짓고는, 먼저 떠나보낸 친구를 떠올렸다. 무엇보다도 소중했던, 소중히 여겨야만 했던 친구를.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정에 휩쓸리던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나지막히 말했다.
"세이아 쨩. 나기 쨩한테 안부 전해줄래?"
피로 물든 손으로는 낙원에 들어갈 수 없다. 그녀가 닿을 결말은 미카 스스로 잘 알았다. 기나긴 악몽 끝에 다다를 종착지는 오직 지옥 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소중한 친구만큼은 지옥에서 구해줄 것이다.
미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리를 숙여서 세이아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두번째로 떠나보낼 친구를 향한 작별 인사였다. 인사를 마친 미카의 두 손이 세이아의 목덜미를 감쌌다.
상냥한 손길이었다.
"잘 자. 세이아 쨩."
소녀는 또 다른 죄를 짓는다.
***
어느 날의 다락방에서, 나기사는 미카에게 진심을 전했다. 미카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는, 곧이어 해맑게 웃었다.
"나도 나기 쨩을 믿고 있는 걸?"
부끄러워하는 나기사와, 그걸 보고 즐거워하는 미카. 언제나와 같은 풍경이었다. 잠자코 그들을 바라보던 세이아도 입을 열었다.
"믿음은 무언가를 절대적으로 확고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라네."
오밀조밀하게 움직이는 입술이 내뱉은 건, 평상시 세이아가 쓰는 어려운 말투의 말이었다. 나기사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고, 미카는 또 시작이네, 라는 표정으로 세이아를 바라봤다.
"무조건적이며 이해타산도 상관관계도 가정하지 않은, 무언가를 향해서 가지는 최대한의 마음이지. 신뢰와는 비슷한 단어처럼 보이지만, 둘은 엄연히 달라. 신뢰는 어떠한 조건과 기대에 기반을 두고 있으니 말이네."
미카는 벌써부터 불만 가득한 표정이다. 굳이 이렇게 어려운 단어를 빙빙 돌려서 말해야 하나? 그러나 불만을 품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세이아의 말을 끝까지 들으려 했다.
"예컨데……우리가 미래에 어떤 처지와 상황에 놓이더라도 서로를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이야말로 바로 믿음인 걸세."
세이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미카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세이아 쨩은 항상 그렇게 어려운 말만 골라서……."
"나기사. 미카."
미래를 보는 금안이 두 사람을 향하고, 두 여우 귀가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쫑긋 거렸다. 나기사는 물론, 미카조차도 순간 그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대들을 믿고 있다네."
그들은 누구라고 할 것없이 웃음꽃을 피웠다. 봄처럼 따스한 햇빛이 소녀들을 비췄다.
미카가, 나기사가, 그리고 세이아가 낙원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었던 시절의 일이다.
4 / 5낙원에서 지옥으로 -完-
예전에 올렸던 것을 새벽 감성으로 고쳐 쓰고, 합산해서 새로이 올려봤습니다.
귀엽게 봐주세요...
5 / 5댓글 54
선생이 없는 세계관인듯 ㄷㄷ
선생이 있으면 절대 저렇게 안댈듯...
개맛있다 더 줘
소설 응원해
좋다

암살당한 마코토 보고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