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책임질거냐!!!]
전화를 받자마자 다짜고짜 고막을 때리는 괴성에 인상을 찌뿌린 카요코는 일부러 전화를 멀리 떨어뜨리고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시치미 뗴지 마라! 모든 일의 배후에 리쿠하치마 아루가 있던 게 확실한데, 네놈들이 처음부터 우리 카이저를 노리고 사주한 거 아니었냐!]
"그러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대놓고 다 들으라는 목적으로 크게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카요코는 계속해서 통화를 이어갔다.
"애초에 리쿠하치마 아루는 흥신소를 차려서 나온 이후로 사실상 게헨나를 자퇴한 상태였어. 그 녀석이 뭘 하든 우리 관할이 아니니까 관계 없다고."
[헛소리하지 마라, 흥신소를 차린 건 둘째치고 부하들까지 끌고 파우스트 짓을 할 재력과 인맥을 일개 자퇴생이 휘두른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우리가 학교 나간 학생이 일일이 누구랑 연락하는지 어떻게 알아? 애초에 그 말 검증할 수 있어? 리쿠하치마 아루가 허언을 지껄인게 아니라 진실을 말한 거라고 확신할 수 있냐고."
[시치미를...! 오니카타 카요코, 애초에 네년도 흥신소였잖냐!! 전화 받고 있는 거 네년인 거 다 아는데 어디서 모른 척이냐!!]
"내가 누구 덕분에 여기 있고 누구 덕분에 흥신소 때려치게 된 건데? 흥신소 그만둔지 한참이나 됐고 리쿠하치마 아루와 나는 옛 친구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야. 쓸데없는 억측은 삼가해줬으면 좋겠는데."
정말로 불쾌하다는 어투로 상대방의 말을 잘라낸 카요코는 이참에 완전히 못을 박을 작정이었다.
"명심해, 게헨나는 리쿠하치마 아루의 일탈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 이 막장스러운 키보토스에 퇴학자도 나오는 판국에 자퇴자 하나하나 일일이 신경써 줄 시간도 없고. 이런 일로 또 쓸데없는 항의가 들어온다면, 그 땐 내가 아니라 더 높으신 분을 상대하게 될 거야. 아주 골치가 아파질걸?"
[끄, 끄으윽...!]
"그럼 알아서 수고들 하든지 말든지."
뚝-
뒷말은 듣지도 않고 그대로 전화를 끊은 카요코는 이번엔 진심으로 푹 한숨을 내쉬곤 뒤를 돌아봤다.
"저쪽에서 꽤나 독기 오른 것 같은데, 괜찮겠어 아루?"
"당연하지."
카이저 용병 뛰며 입은 추레한 옷을 벗어던지고 제대로 된 교복을 입은 아루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흥신소 사장으로서의 정장을 다시 꺼내 입고, 그 위에 학생회로부터 받은 아비도스 고등학교의 교복 블라우스를 예전의 코트처럼 걸친 모양새.
매우 낯설었다. 카요코 뿐만 아니라 아루 자신도 그런건지, 목에 건 아비도스 고교 학생증과 어깨에 걸친 블라우스를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너희는 괜찮은 거야? 발뺌하는 게 어디까지 통할지는 둘째치고, 그 정도면 카이저 쪽에서 경제적으로 압박이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대비해야겠지. 긴 싸움을 준비해야 될 거야. 내부적인 피해도 상당할테지만, 그 이상으로 망친 위상을 회복하려는 과정에서 너는 물론 아비도스를 집요하게 노릴거고."
"예상하고 있어. 감당하지 못할 일이었다면 시작도 안 했을 거고."
"게헨나는 아비도스를 계속 비호할 거야. 그리고 샬레도......"
순간 카요코는 말을 흐렸다.
"선생은 괜찮은 게 맞아?"
"......"
"아비도스가 자립의 여지를 마련한 게 그 사람의 개인의 목적이었다면 확실히 성공이지만......"
외부적인 측면에서 선생의 입지는 카이저 못지 않게 추락했잖아.
머뭇거리면서 이어지는 말에 아루는 차마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일련의 과정에 깊이 연관된 히나, 나기사 등의 수뇌부는 전말을 알고 있을테고, 그만큼 새로운 선생을 높이 평가하고 있을 터였다.
그만큼 나중에 마음을 먹으면 서로 협력할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할 수 있었지만...... 대중으로부터 보는 시선은 별개였다.
일반 시민들이나 학생들에겐 과욕을 부리다 망한 카이저나 머리를 다치고도 카이저에 붙어보려던 선생이나 거기서 거기였으니.
미래에 대비하려는 선생의 계획까진 몰라도 바깥에 나올 때마다 조롱과 멸시를 당하는 선생의 상황이 좋을 리가 없다는 것 정도는 그들도 알고 있었다.
"......도울 기회가 있겠지."
모든 것이 끝나고 선생이 어떤 결과를 맞이했는지 알아버렸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애초에 알았더라한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긴 했을까.
아비도스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카이저까지 가며 동분서주하는 선생도 자신의 안위 따윈 생각도 안 한 것처럼 행동했는데.
그런 사람에게 갚아야 할 은혜, 은혜라......
아루는 속으로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곱씹었다.
은혜를 갚아야 한다. 무조건 그렇게 해야 하긴 하는데......
"카요코, 지금 와서 선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표현할 말이 여럿 있긴 하지만 추려보면...... 영리하고, 정치적이고, 노련한 어른이라 할 수 있겠지."
아루는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선생을 평가하는 긍정적인 단어와 달리, 카요코의 표정은 어두웠으니까.
"이전 선생처럼 말야."
"아직 선생을 완전히 믿을 순 없다는 거구나."
"물론 여기까지 와서 마냥 배척하는 건 경솔하다못해 어리석은 짓이겠지. 그렇지만......"
"어리석은 건 아니야."
툭 내뱉은 아루의 입가에 힘 없는 미소가 걸려져 있었다.
"특히, 우리라면 말야."
"......그렇지."
아비도스가 그랬듯, 어른에 대한 믿음 때문에 파국을 맞이한 또 다른 피해자들이던 자신들이었기에.
그들은 여전히 어른에게 온전히 믿음과 신뢰를 준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잘못됐다고 할 순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언젠가는 떨쳐내야 할 감정이었다. 그랬지만......
"뭐, 그쪽은 차차 고민하는 걸로 하고."
카요코가 어깨를 으쓱하며 아루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뭐냐는 눈빛으로 보다 상자를 연 아루의 눈빛이 흔들렸다.
"무츠키랑 내가 같이 산 거야. 아이디어는 무츠키가 냈고. 슬슬 헤질 때 됐을 거라나 뭐라다나."
"지갑......"
처음 흥신소를 열었을 때 자신을 따라준 세 명이 마련해준 소중한 지갑과 비슷한 디자인.
묵묵히 고급스러운 가죽을 쓸어본 아루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아직 완전 멀쩡한데. 너희가 사 준 거......"
"언젠가는 헤질거니까 그때 바꿔. 별 거 아니지만 우리가 준비한...... 전학 기념 선물이야."
카요코는 웃었다.
자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얼마만에 짓는 건지 모를, 편안한 미소가 나왔다.
"무츠키가 너만 괜찮으면 저녁에 하루카 보러가자고 하던데......"
"미안하지만 무리지. 이런 상황에 흥신소끼리 붙어서 가는 모습이 나오면 저쪽에 꼬투리 잡힐 수도 있고......"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끄덕이는 카요코였지만, 아루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있다가 학생회 대책 회의가 있거든. 전학 와서 첫 회의부터 빠져버리면 모양 안 살잖아?"
"아무리 들어도 어색하네, 진짜."
"나도 그렇지만 어쩌겠어."
제너럴 앞에서 그랬듯, 아루는 카요코가 보란듯 목에 건 ID 카드를 툭 튕겨보였다.
카드에 적힌 아비도스 고등학교의 문양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젠 여기가 '우리' 학교인데, 전학생인 내가 잘 적응해야지."
"......그래."
"그렇다고 안 오겠단 말은 아니고. 출발 시간이 달라서 다른 시간에 갔는데 우연히 마주한 건 어쩔 수 없잖아. 무슨 말인지 알지?"
"당연하지."
"안 그래도 하루카 병실에 풀 화분 몇 개 더 놔줄 생각이었거든. 그 동안은 내가 보관하고 있었는데, 나보단 주인 옆에 있는 게 더 좋을테고 그리고......"
흥신소 시절만큼은 아니었지만.
특유의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보이는 모습에 카요코는 꺼내려던 다른 걱정을 슬며시 밀어넣었다.
그녀가 아는 리쿠하치마 아루라면 잘 해낼 것이라 믿었으니까.
아직 악연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아비도스 학생회와도...... 잘 해낼 것이라고.
카요코는, 아루를 믿어보기로 했다.
* * *
[두고 보게나 선생. 이번 일에 상응하는 보상이나 대응책을 마련해오지 않는 이상은...... 카이저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지옥을 맛보게 해줄테니.]
"잠시만요 제너럴. 제너럴? 여보세요? 젠장, 제너럴! 잠시 제 말을!"
뚜- 뚜-
전화가 끊기자마자 표정을 싹 바꾼 선생은 뒤에서 지켜보던 두 사람을 돌아봤다.
"어땠어?"
"선생님이 그 선생 아닌 거 몰랐으면 찍어서 우울할 때마다 꺼내볼 영상으로 딱이었을 것 같아요."
"집구석 비상금 다 긁어가서 도박했다 꼴아박은 다음 마누라 바짓가랑이 붙잡고 찌질거리는 한심한 한량 말투였습니다. 정나미 떨어뜨릴 거 노리고 한 연기라면 아주 제대로 먹혔을 겁니다."
"왜 어째서 묘사가 그렇게 구체적인...... 에이 됐다, 뭐 상관없지! 이걸로 됐어! 자유다! 도비는 자유에요!"
후련한 표정으로 영문 모를 환호를 뱉는 선생을 케이는 뚱하게, 유메는 쓴웃음으로 바라봤다.
엄밀히 말하면, 사실 아니긴 했다.
사실상 대놓고 반목하기 어려운 대형학원 게헨나의 비호를 받고 있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아비도스를 함부로 건들 수 없게 된.
그래서 화풀이 제물로 노리던 파우스트 아루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하고 놓쳐버린 그들의 새로운 제물이 선생이었으니.
나중에라도 카이저에서 압박해온다면 상당한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괜찮으시겠어요?"
"물론이지, 카이저의 기세를 한 번 꺾은 것만으로도 큰 성과야."
"아뇨, 저희가 아니라 선생님이요."
"분명 대비는 필요하겠죠."
대답을 받은 케이는 슬쩍 옆 쪽을 돌아봤다.
바쁘게 서류 분류 작업을 하고 있는 오토마타 두 기.
거기에 1층에서 경비를 보고 있을 네 기.
지난 폭동 때 파괴된 4대를 대신해 6기를 보충했다지만, 이제부터는 여기서 오토마타를 더 가져올 수도 없으니 경비론 한참 부족했다.
폭동 때 전부 깨지다시피 했던 창문도 방탄으로 둘러야...... 했지만 키보토스의 창문은 기본 패시브가 방탄이라 예외.
그만큼 방탄유리 가격이 과장 보태 휴지 조각 수준인 키보토스의 현실이 다시금 실감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샬레 못지 않게 아비도스도 아직 완전히 안정화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응, 게헨나도 언제까지나 머물러줄 순 없을테니까."
오후 학생회 회의에 앞서 선생과 차후 계획에 대해 논의하러 온 유메가 선생에게 시선을 돌리며 본론을 꺼냈다.
"우선 채광장 주변을 정리하는 데 집중할 거에요."
이로하로부터 전권을 부여받고 온 선도부는 현재 카요코의 지휘 아래 희귀광물이 묻힌 장소에 전진기지를 짓고 있었다.
대외적인 명분은 혹시 모를 뇌제의 유산의 추적 및 정리를 위한 아비도스-게헨나의 합동 조사였지만, 주목적은 당연히 최대한 카이저의 눈을 피해 채굴을 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었으니.
"이미 온천개발부가 거하게 파다 못해 들어간 곳에 입구만 숨겨놓다시피 해놨으니 다시 여는 건 문제 없죠."
"그 때 아비도스 외곽까지 이어진 갱도까지 파버렸다고 했지?"
"네, 이미 카요코 씨랑 시범수송도 마쳤어요. 소규모 채굴하고 수송하는 것까진 분명 문제 없을 거에요."
"역시 온천개발부라 해야할지. 아, 만마전과 티파티에서 따로 연락 온 건 있어?"
"확인 차로요. 지난 회담 때 짜 둔 시나리오대로 움직이기 전의 최종확인이랄까요."
상황이 안정된다면 조사 막바지에 아비도스 측에서 '우연히' 희귀광물의 흔적을 발견하고, 사전에 협의한대로 인접한 게헨나와 트리니티의 인력이 카이저가 끼기 전 치고 들어와 채광장을 가득 채울 예정이었다.
게헨나에는 '온천개발부'라는 개연성이 존재했고, 트리니티는 모처럼 생긴 게헨나와의 협력 무드를 막무가내 수준으로 밀고 들어올 예정이라 카이저 쪽에서 어떤 논리로 공격해온들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선생의 미래 지식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희귀광물 채굴에, 세 학교의 수뇌부들이 머리를 맞대 짜 둔 시나리오였다.
원수지간이나 다름 없는 아비도스가 카이저에 채굴권을 순순히 내 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으니, 카이저의 반격을 감안하더라도 아비도스의 경제적 성장을 충분히 기대해봐도 좋으리라고. 선생은 기대했다.
"그렇다면......"
"네, 완전히- 라곤 할 순 없겠지만."
손뼉을 짝 치며, 유메는 싱긋 웃었다.
"일단은, 끝났네요."
"그렇네."
"긴 싸움이었어요."
"앞으로 더 길 겁니다만."
옆에서 초를 치는 케이를 샐쭉한 표정으로 째려보는 유메.
케이도 지지 않으려는 듯 째려보며 두 사람 사이에서 불꽃이 튀겼다.
선생은 친한 듯 안 친한 두 사람을 보며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허튼소리로 한 건 아니었습니다."
먼저 물러난 케이가 태연하게, 하지만 진지하게 대답했다.
"무엇보다 이제부턴 사실상 샬레의 백업은 불가능합니다. 선생님은 흥신소를 잃고 복수를 꿈꾸며 파우스트로 암약한 리쿠하치마 아루의 계략으로 본전도 못 찾고 아비도스에 쫓겨났으니까요."
'그런 설정이니 말입니다' 라며 끝난 케이의 말에 유메는 무거운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러니까 이제부턴 바보에 폭력녀에 다른 건 쥐뿔도 없으면서 쓸데없이 가슴 사이즈만 크면서도 일단은 아비도스의 리더인 유메 씨의 역할이 중요하단겁니다."
"뭔가 개인적인 사감이 엄청 들어간 것 같은데?!"
"기분탓입니다."
"그럴리가!?"
"자, 자."
선생은 땀을 삐질거리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쨌든 쿠치나시 양, 미안하지만 케이의 말이 틀린 건 아니야. 물론 도움을 요청한다면 언제든 달려갈 준비는 되어있지만......"
"그러니까 선생님, 그 여지 자체를 줘선 안 된다는 겁니다. 이젠 샬레가 아비도스 일에 대놓고 낄래야 낄 수가 없는 판국이란 말입니다. 애초에 유메 당신이 이 시점에 샬레로 찾아온 것도 솔직히 위험합니다. 알고 계셨으리라 믿었는데요."
"그건 괜찮을 거야 케이. 마지막으로 얼굴 보고 논의할 서류가 있다든지, 티배깅 목적으로 왔다던지 하면 설명은 되니까-"
"무엇보다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이 문제는 양보할 수 없다는 유메의 태도에 케이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 와중에도 사람이 지나치게 쓸데없이 좋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안 드는 점을 차치하고, 아무리 봐도 리더 타입인 여자는 아니었다.
아비도스, 정말 이대로 맡겨도 괜찮은걸까.
"괜찮을거야, 쿠치나시 양이라면."
거기서, 선생이 그렇게 말했다.
"누가 뭐래도 지금까지 아비도스를 지켜온...... 히어로니까."
"네?"
무슨 소리냐는 듯 보는 두 사람에게 선생은 싱긋 웃어주었다.
"내 세계에서, 호시노가 그랬던 것처럼."
순간, 유메의 표정이 굳어졌다.
"호시노 쨩이라면......"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뱉은 유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분명. 할 수 있었겠죠. 호시노 쨩은 할 수 있었을 거에요, 충분히."
"쿠치나시 양이라고 다를 거 없어."
"진심이세요 선생님?"
"진심이야. 설마 쿠치나시 양, 호시노처럼 강한 전투력이 없다는 이유로 혼자 폄하하려는 건 아니지?"
"비교대상이...... 완전히 다르잖아요!"
"하지만 결과는 같지."
유메의 귀에는 사탕 발린 말로 들렸다.
이미 그녀는 선생의 세계에서의 후배가 얼마나 노력하고 분전했는지 들은 바 있었다.
호시노도, 시로코도 없는 이 세계에서 아비도스를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은 자신이.
같다고? 그 엄청난 후배와?
"같아, 쿠치나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재차 그렇게 단언하는 선생의 표정에서 유메는 희미한 공포마저 느낄 정도였다.
"호시노를 잃었을 때, 그리고 시로코를 잃었을 때...... 두 번의 실패를 겪었고 절망했겠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비도스는 내가 오기 전까지 끝까지 버텨냈고, 그래서 지금 우리가 웃을 수 있게 된 거야."
"과장이에요 선생님. 저는......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요."
"이따금 이자요이 양과, 쿠로미 양과, 오쿠소라 양과 이야기하면서 느낀 게 있어."
모두 너무도 쉽게 흔들리는 유메를 언제나 불안하게 바라보고, 걱정하고 있으면서도.
그들 중 누구도 유메의 자리를 부정하는 기색은 비치지 않았다.
모두가 자신에게 적대적인 동시에 진심을 숨기려는 상황에서도, 평행세계에서도 변하지 않은 그들의 본성을 알고 있는 선생의 눈에는 학생들의 진심이 보였다.
"그 아이들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너를 믿을거야, 쿠치나시 양. 그리고 그 바탕엔 쿠치나시 양이 그 아이들에게 보여준 믿음과 신뢰가 쌓여있겠지."
"그...... 건."
"크게 상처 입었으면서도. 믿음에 배신당했으면서도...... 그럼에도 너는 아비도스로 와 준 후배들의 앞에서 언제나 방패를 들고 앞에 나서줬겠지. 절대 그걸 부정하지 마, 쿠치나시 양이 스스로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모두가, 지금까지 아비도스를 지탱한 학생회장 쿠치나시 유메의 무기야."
두 번의 배신으로 두 명의 후배를 잃었다.
그럼에도 유메는 무너지지 않았다.
설사 그녀가 억지로 버틴 것이라 한들. 그래서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한들.
꺾이지 않고 서 있는 그녀는, 분명 그녀 나름의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선생은 모두가 부정하는 그녀의 자질을 분명 한 학교의 학생회장답다 단언하고 있었다.
"......나조차 내가 회장감이 아니라는 게 아닌 걸 아는데."
샬레에서 나와 돌아오는 길에, 열차 빈 자리에 앉은 유메는 선생과의 대화를 곱씹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당장 선생의 면전에 입 바른 소리 집어치우라 말하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는데.
선생의 얼굴을 보니 그럴 수 없었다.
그 진지한 얼굴...... 그게 선의의 목적이란 걸 제외하면 전임 선생과 같은 거짓과 기만이 아니란 법이 없었음에도.
왜인지, 값 싼 동정 한 점 없이 온화하고 따스하기만 한 눈길이 거짓이라고 믿고 싶지가 않았다.
그게 거짓이라면, 그 날이야말로 정말로 사람을 못 믿게 될 것 같아서.
"이러나저러나 지긋지긋한 어른들."
앉은 의자 바로 옆 철봉에 머리를 기대며 유메는 쓴웃음을 지었다.
한산한 시간대라 소수의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아 있을 뿐인 지하철 내에, 유메의 앞자리에 앉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정면을 응시하는 유메의 눈에는 보였다.
"계속 의지하게 만들고...... 의지하고 싶게 만들고......"
피투성이의 얼굴로, 표정이 잔뜩 헝클어진 머리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후배들을 안심시키려는 듯 유메는 재차 웃었다.
"악의든, 선의든...... 목을 죄어오는 건 똑같은데."
유메는 마지막까지 선생에게 자신이 보는 환상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이미 아야네와 이야기를 나누며 증상에 대해 반쯤 확정짓고 있는 선생이 심리치료를 알아보고 있는 건 몰랐지만, 알았다한들 그녀는 도움의 손길을 뿌리치고 뛰쳐 나왔으리라.
"역시, 이래서는 안 돼."
자신이 더더욱 작아지는 느낌에 유메는 이를 앙다물었다.
선생의 말이 허언 뿐인 가식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어른의 말 하나하나에 휘둘리는 자신의 모습이.
안 그래도 한심한 자신이 더더욱 초라해지는 것 같아서.
"그 사람이 언제까지나 내 곁에 있어줄 수도 없는 거잖아......"
사실은 두려웠다.
일상에선 능글맞고, 변태갖고, 작전 때는 현장의 학생들을 걱정해 굳은 표정, 굳은 목소리인 선생이 더 이상 옆에 없다는 것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신의 삶에서 너무도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 그 남자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이.
말하는 게 옳았던 걸까?
자신의 환각 증세를 말하고, 끝까지 도와달라고 울고불고 부탁하는 게...... 맞는 길이었을까?
"......알아. 그럴 린 없다는 거."
그 사람은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바보 같이 계속 잊게 된다.
그 사람 세계에서 살아 있을 호시노 쨩도 선생의 귀환을 바라고 있을텐데.
언젠간 돌아가버릴. 그래야만 하는 사람을 계속, 언제까지고 담아둘 순 없는 법인데.
"그렇게 질척거리고 찡찡대는 어른 따위, 없겠지."
그러니까, 자신이 해야 했다.
선생 없이 홀로 서는 법을 배워야 했다.
할 수 있겠죠, 선생님?
저보고 히어로라 해주셨으니까......
저, 할 수 있는 거겠죠?
그렇게 믿어도 되는 거겠죠?
"그래서 시로코 쨩까지 팔아넘긴 거였나요, '후배님'? 시로코 쨩이 끌려간 건 순전히 그 선생의 짓이었지만, 당신 책임도 없다고 할 순 없을텐데요?"
"노, 노노미 쨩!"
"이 쪽도 그 작자 때문에 하루카를 잃을 뻔했어. 애초에 속아서 넘어간 거기도 했다고. 분명 가해자인 내가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계속 공격받는 것도...... 그렇게 좋게 들리진 않는데, '선배님'?"
"두, 둘 다 진정해...!"
그런 유메도, 그리고 선생도 인지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아직 아비도스와 아루 사이에 존재했던 감정의 골을 만든 전임 선생의 농간이.
자신이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컸다는 것이었다.
* * * * *
선생이 의도한 것 : 유메 너도 호시노 못지 않은 아비도스의 히어로다 라는 식으로 치켜세워주며 잔뜩 나데나데 격려해주기
유메가 받아들인 것 : 승상센세가 호시노 쨩이랑 비교하며 나보고 버러지라 하시는구나! 더 살아 무엇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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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추
쿠치나시 순욱;
나기사 이상으로 구제불능 의심암귀가 여기 있었구나
드디어 나왔다!!
시로코는 완전 리타이어구나 2장 호시노 포지션인 줄 알았는데
근데 이거도 알바삭 당하려나 백업 필요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