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호시노의 굳은 표정을 마주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한 번쯤 설명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은 했다. 아니 그걸 떠나서 아예 숨기고 말하지 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럼에도 학생에게 거짓말을 하게 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최대한 흥분시키지 않고 설득시키기 위해 말하려던 찰나.
"괜찮아, 선생."
"...어?"
"뭔가, 선생이면 그럴 거라고 생각했거든."
뭔가 대비했던 것과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선생은 약간 어안벙벙해진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이런 말할 입장은 아니지만 그...... 괜찮은 거 맞아?"
"선생."
한 순간 불길한 빛이 번뜩였다 사라졌다.
자신을 보는 호시노의 표정은 여전히, 아니 분명히 아까보다도 딱딱히 굳어있는 채였다.
"그런 말을 듣고 내가 정말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미안해."
실언에 대해 순순히 사과한 선생의 가슴팍에 머리를 박은 호시노는 선생이 보이지 않게 고개를 숙이고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함. 하지만, 예측하고 있던 가능성에 걸친 결과기도 했다.
"애초에 오고 싶대도 돌아오지도 못하잖아? 그 여자... 년이 순순히 문 열어주고 안녕히 가세요 손님~ 이러지도 않을 거고."
"굳이 안 고쳐도 되는 부분을 바꿔버린 것 같아 호시노......"
"으헤, 난 모르는 일이야. 선생도 나쁜 어른이니 나도 그냥 나쁜 학생 할 거니까~"
선생은 바로 말하지 못했다.
나는 꼭 돌아올 거야. 여기 학생들과 약속을 했어.
너희들을 버렸다던가 그런 게 아니야. 그냥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서 그래......
무엇을 말하든, 호시노가 아닌 그 누가 있더라도 설명과 설득이 그걸로 가능했을 일이었나. 그저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기만 하는 것 뿐 아닌가 싶어져서.
"선생."
"...응, 호시노."
"말했지만, 시로코 쨩은 걱정하지 마. 선생님이 무사하다는 걸 알려주면 분명 기운을 차릴 거야. 해줄 말이 있다면 내가 타임아웃이 외기 전에 알려주기만 하면 되고."
"...고마워."
"그리고 나는 으음, 솔직히 말하자면 당장 그 여자 쏴버리고 선생 데리고 돌아가고픈 심정이 굴뚝 같지만......"
호시노는 왠지 소란스러워진 방향으로, 벽면이 뻥 뚫려 전망이 아주 좋은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떤 트리거를 잘못 눌렸는지 폭탄을 끌어안고 죽겠다며 울고불고 하는 하루카를 바깥의 인원들이 필사적으로 뜯어 말리는 광경이 보였다.
그 사이에 껴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세리카와 아야네가 보였다. 그런 격전을 치룬 직후인데도, 자신이 알던 후배들의 모습과 다를 것 없이 씩씩한 모습들이었다.
자신이 알던 아비도스보다도 더욱 척박했을 세계에서도 기꺼이 아비도스에 찾아와준 기특하고 고마운 후배들.
선생의 무릎에 앉아 회포를 풀 때 유메가 살아있다는 이 세계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물은 덕분에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다.
어른이 어른으로서의 의무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이 세계는, 짧은 시간으로 설명 가능한 단편적인 정보들만으로도 끔찍하다는 것 정도는 예측할 수 있었다.
강제로 끌려온 선생은 결코 그들을,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을 외면하지 못했을 거다.
당장 유메가 폭주한 자리에 선생이 있었다는 것만 봐도 확실했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싯딤의 상자와 어른의 카드. 무슨 일인지 2장이나 있는 카드로 선생이 직접 자신을 지목해 불렀든, 카드인지 아로나인지가 알아서 뽑았든 확실한 것은. 선생이 유메를 구하고자 그 자리에 있었고, 차원이동이라 해도 좋을 기적까지 이뤄낼 정도로 유메를 구하고자 했던 것.
선생은 그녀가 아는 이들 중에서도 선생이라는 자신의 직업이 지닌 의무를, 어른의 의무를 다하고자 누구보다 노력하는 어른이다.
그렇게 두자니 한없이 간략해지는 문장을 가슴에 품고 실제로 실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어른은커녕 후배들을 고생시킨 전적이 있는 꼬맹이에 불과한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어른의 일면이야말로, 언젠간 어른이 될 수 밖에 없는 자신이 바라는 이상향이었으니.
"선생님은 그런 사람이니까."
호시노는 질투와 짜증과 연민, 여러가지 감정을 담은 손에 아까보다도 힘을 꽉 줘서 선생의 어깨를 안았다.
윽, 소리와 함께 선생의 몸이 움찔 떨리는 순간의 진동이 손 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왔다.
약간의 통쾌함과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죄책감이 일었다.
"선생이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가 선생을 다시 본 순간 기뻤던 것도, 선생이 여기 남겠다고 했을 때 화가 날 일도 없었을테니까."
그는 그런 어른이었다.
아이는 필연적으로 어른을 통해 세상을 접하고, 어떤 어른의 모습을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성장한다.
호시노는 어느 날 다른 세계에서 키보토스로 선생직을 맡기 위해 찾아왔다는 어른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받았다.
책임과 의무를 진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체감하게 되었다.
타인을, 세상을, 자기 자신을, 좀 더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애초에 왠지 느껴졌다고 할까. 만약 지금 당장 우리 쪽으로 넘어올 방법이 생긴대도, 선생님은 여기 계속 머물 생각인 거지?"
"티가 많이 났어?"
"선생은 거짓말 잘 못하는 타입이니까 말야."
"그래도 어른의 포커페이스라는 게......"
"으헤, 쿨가이 나쁜 남자로 이미지 체인지를 꿈꾸고 있던 거라면 하루 빨리 생각 접는 게 좋을 거라고? 선생이랑 전혀 안 어울린다고?"
"쳇."
거기서 둘이서 마주보고 푸핫, 웃어버렸다.
너무 좋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할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과, 즐거운 대화를 나눈다는 건.
이렇게나-
"선생."
"응, 호시노."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왜 좋은 사람들한테만.
신이란 작자는, 세상에 천벌 받아야 할 나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려 노력하는 이들에게 이토록 가혹하기만 한걸까.
"......그러게."
그 당사자인 선생은 쓴웃음을 지으며 의도치 않게 질문에 대한 답을 말한다.
"나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확실한 건 알고 있어."
"뭔데?"
"좋은 사람은 힘든 일을 겪어도 여전히 좋은 사람일 수 있어."
호시노의 표정이 순간 멍해졌다.
"물론 언제까지고 버틸 순 없겠지. 깎이고, 마모되다보면 결국 무너지고 말테니까. 한 번의 실수로 선을 넘어버리는 사람도 있을테니까. 그래도 옆에 그런 사람이, 자신처럼 정직한 노력을 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어."
"그래서 남겠다는 거야? 이 세계의 학생들을 위해서?"
"너희들에게 해준 것처럼-"
그렇게 말하는 선생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학생이 어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기꺼이 그럴 수 밖에 없어. 너를 포함한 내가 만났던 많은 아이들처럼......"
아이들의 고통에 책임을 지는 어른이 없다면.
어른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짊어지지 않는다면.
"그렇게 해주기로, 이미 약속을 해버렸어. 그러니 난 약속을 지키기 전까지 돌아갈 수 없어, 호시노."
"......"
"미안하다."
호시노는 깊은 숨을 들이켰다.
"사과할 필요 없어."
"나는-"
"선생, 사실 나는 지금 무서워하고 있어."
"응?"
"유메 선배를."
뜬금없이 주제를 틀은 호시노의 손에서부터 미세히 떨리는 느낌이 전해지는 것을, 선생은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유메 선배를 보러 가는 게 무서워."
"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
전부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과거에 묶여 있던 지독한 속박을 풀고, 지금 내 곁에 있어주는 소중한 사람들과 미래를 볼 수 있게 되었다고.
그렇게, 어른으로 한 걸음 더 성장하는 해피엔딩을 맞았을 뿐이라 믿었다.
아니었다.
자신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 다를 것 없는 멍청이고 겁쟁이였다.
"웃기는 소리인데, 정말 모르겠어. 애초에 세계도 다른 유메 선배한테 어떤 말을 해야할지. 위로를 해야 하는 건지, 위로를 받고 싶은 건지......"
"그래도, 보고 싶었잖아?"
"당연하지. 기쁘다고. 오늘이 내 인생 최고의 날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기뻐. 기쁜데...... 모르겠어......"
그렇게 지독하게 자신을 얽맸던 과거가.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던 편린들이.
정작 그것들을 내려놓고 홀가분해진 순간 언제 멀리 있었냐는 듯 눈 앞에 들이밀여졌다.
혼란스러웠다. 이것은 고통받는 이에 대한 삶의 보상인가, 혹은 조롱인가. 그것이 호시노의 심정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시간을 끌고 있는 거야. 이렇게 겁쟁이인 나라서......"
"그래도 만나러 가야지."
"갈 거야. 안 가면 안 되지, 꿈에서나 이뤄질 만남이 현실로 이뤄졌는데."
선생의 품에서 떨어진 호시노가 힘겹게 웃었다.
"선생, 선생이 지키고자 하는 사람에...... 유메 선배도 포함인 거지?"
"물론이지."
"그래, 유메 선배가 나처럼 저런 모습에서 돌아온 것도 선생님 덕분이겠지."
어른이 불신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이 세계에서도, 선생의 지휘에 따라준 학생들이 있었다.
유메의 심상 세계에 들어가 그녀를 구해낸 인원들 중에 분명 선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호시노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불합리한 재앙에 끌려온 상황에서도 할 일을 잘 해내고 있다고.
이 어른은, 변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호시노에게 그 어느 것보다 큰 안도감을, 감히 말하되 평행세계의 유메를 보게 된 것 이상의 기쁨을 주었다.
너무도 그다운 모습을 보여주며 이 세계에 남겠다는 말에 분노하지 않을 수 있었다.
"고마워 선생."
"나야말로 고맙지."
용기를 얻은 호시노의 표정은 한결 편해져보였다.
아직 선생과 이야기할 시간은 많이 남았으니.
지금은. 마침내.
다른 세계의 유메를 제대로 마주할 때였다.
* * *
"아, 그러니까...... 호시노 선배라고 했지?"
그렇게 인사를 건넨 것이 그 누구도 아닌 아루라는 사실에 호시노는 더 없는 심란함을 느꼈다.
그저 몹시 곤란한 기색으로 볼을 긁적일 뿐이었다.
"...응, 아루 쨩."
"하하."
호시노의 어색한 반응에 아루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어깨에 걸친 아비도스 교복 자켓을 보는 눈을 보아하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세계의 흥신소는 그럭저럭 잘 돌아가는 모양이네."
"뭐...... 그렇지."
호시노는 살짝 진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들을 마지막으로 봤던 게 선생이 실종되기도 전인, 하루카가 아루를 모욕했다며 의뢰인의 면전에 부착식 폭탄을 붙여버려 단체로 지명수배자가 되어버리고 잠적했던 때였던가.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될 진실은 조용히 숨기는 쪽이 좋으리라.
"......잘 됐구나."
무언가 말하고픈 것을 애써 참는 기색이 역력한 채. 아루는 유메가 있던 방을 손수 열어주었다.
폐건물 내에 몇 없던 멀쩡한 의자에 앉아 노노미와 이야기하던 유메와 호시노의 눈이 마주쳤다.
동공이 크게 확장되며 떨리던 눈을 잠시 감더니, 웃는 얼굴로 노노미를 올려본다.
고개를 끄덕인 노노미는 유메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일어섰다.
문 앞에서 비켜준 호시노와 스쳐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눈이 마주했다.
감사와 부탁- 선배를 잘 부탁한다는, 그런 의미로 느껴지는 시선으로 고개를 살짝 숙여준 그녀가 밖으로 나가 문고리를 잡았다.
탁, 하는 가벼운 문 닫는 소리.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며.
방 안에는 마주보는 두 사람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어떡해.'
유메는 그런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고 싶은 말을 준비해놓았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제대로 마주한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게 되었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들이 소용돌이친다.
그 뜨거운 폭풍 속에서 어떠한 말도 꺼낼 수 없어 전전긍긍하던 유메의 속마음은.
와락, 하고 먼저 안겨든 감촉에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배."
"...어?"
"유메 선배...! 선배...!"
차가운 물기가 느껴진다.
그렇게 강인해보였던 다른 세계의 후배가, 자신보다도 먼저 무너져내릴 줄은 몰랐던 유메는 반응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껴안아버렸다.
"보고... 보고 싶었어요."
"나, 나는 호시노-"
"알아요."
고개를 주억거린 후배가 젖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본다.
"알아요. 그래도, 선배가 제가 아는 선배가 아니더라도...... 보고 싶다고 밖에 할 수 없어요. 그게 진심이니까! 그냥, 그냥 보고 싶었다고요...!"
"호시노 쨩......"
"선배도, 그렇잖아요......"
유메의 눈에 보고 싶었던 후배가 한 눈에 들어온다.
상상하던 것보다 머리가 더 긴 후배.
자신이 지키지 못했던.
옆에서 성장을 지켜봤다면, 정말로 이렇게 든든하게 컸을지 모를...... 후배가.
눈 앞에, 있었다.
기적이었다.
'그렇구나.'
다른 세계에서 온 후배가 자신이 지키지 못하던 선배를 그리워하듯.
나 역시 똑같이, 지키지 못한 후배를 그리워했으니.
서로의 본질이 사실 서로가 아닌 소중한 이가 아니더라도 상관 없는 것이었다.
다른 세계의 인물이라해서 밀어낼 이유 따윈 없는 것이다.
그저, 눈 앞에 다가와준 이 기적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무심코 호시노를 껴안던 유메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안 보고 싶었을 리가 없잖아, 호시노 쨩."
자신의 목소리도, 물기에 젖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으읏...! 나도 계속...! 내가, 윽...! 나 때문에 호시노 쨩을 잃어버려서...!"
내가 조금만 더 책임감 있는 선배였으면 호시노는 사막에서 죽지 않아도 됐을텐데.
내가 조금만 더 똑똑한 선배였다면 시로코를 그런 식으로 떠나보내지 않았을텐데.
"나 때문에. 아아, 아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
"선배...... 으으으...! 으아아아아아...!"
"흐윽, 미안해, 이런 한심한 선배라서...! 쓸모없고 바보 같은 선배라서...!"
"흐으윽...... 아니, 아니에요 선배."
그렇지 않아요.
라고 호시노는 선배의 자책을 저지한다.
자책하는 자신의 손을 잡아준 선배가 그랬듯이.
"힘들었죠, 선배."
어떻게 모르겠는가.
"많이 힘들었을 거에요. 쭉 혼자 힘낸다고...... 선배라면 누구보다 열심히 했을 거에요. 저는 믿어요."
설령 다른 세계의,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선배일지라도.
어떻게 자신이 쿠치나시 유메라는 인간을 모르겠는가.
"잃고 싶지 않았어! 후배들을 지켜주는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어른이 되어서......!"
"선배......"
"그런데, 괜찮을 리가 없잖아. 그런 일을 겪었는데, 그런 실패를 겪었는데......! 그건 열심히 한다고 갚을 수 있는 빚이 아니잖아......"
어른스럽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다.
실패에서 배운 것으로 성공하는 것이다.
이상적인 어른이 되길 원했던 쿠치나시 유메는.
그 어떤 것도 충족시키지 못했다.
스스로, 그렇게 여겨왔다.
"모르겠어 호시노 쨩, 모두의 격려로 이렇게 돌아왔지만, 무서워. 겁이 나. 어떻게 해야 괜찮아질 수 있는 건지, 어떻게 해야 참을 수 있는 건지 모르겠어...!"
"괜찮아요 유메 선배. 저도... 저도 여전히 안 괜찮아요."
그런 일을 겪고도.
그런 사고를 치고도.
여전히 악몽을 꿀 때가 있다.
잠이 오지 않아 가만히 누워 있다 갑자기 감정이 올라올 때가.
여전히 있었다.
"그렇게 눌러 참다가...... 결국 크게 터져서 사고를 쳤어요. 오늘의 선배처럼. 모두를 다치게 했고, 심지어 제 폭주에 휘말려 죽일 뻔하기도 했어요."
"그건......"
자신이 테러화 되었을 때의 기억이 희미하게나 기억나던 유메의 표정이 다시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살의와 분노와 폭력...... 자신이 추구하지 않으려 했던 모든 부정적인 감정에 휘말렸을 때의 고통.
아니, 그 순간 스스로가 해방된 듯한 해방을 느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유메 선배."
"응, 호시노 쨩."
"선배는 저와 달랐어요. 오늘 제가 오지 못했더라도 선배는 그 누구도 죽이지 않았을 거에요."
"......응?"
그렇게 단언하는 후배의 말에 유메는 당황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의식이 전혀 없이."
"그때의 저는 화를 내고 있었어요. 그걸 넘어서 분노하고 있었고, 고통스러워서 뭐든 파괴하고 싶었어요. 죽이고 싶기까지 했어요."
"그거는, 나도."
"그런 심정을 가진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살의가, 선배한테선 느껴지지 않았어요. 전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멍하니 보는 선배의, 너무도 선배다운 모습에 호시노는 웃었다.
이 세계의 유메도 산전수전 겪을 수 있는 난전은 꽤나 많이 겪었겠지만.
우트나피쉬팀의 배를 타고 우주에 나가고, 다른 세계의 선생과 시로코와 총을 맞댄 경험까지 있던.
세계의 명운을 건 싸움에 참여한 적도 있을만큼 더욱 크고 많은 격전을 치뤄온 그녀는 유메와 부딪히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선배는 무의식적으로 살의를 억누르고 있었을 거에요. 누구도 죽이지 않도록. 스스로가 넘지 않기로 결정하고 그은 선을, 그런 상태에서도 넘지 않은 거에요 선배는."
선생과 같은 말이었다.
유메의 눈이 한층 더 세차게 흔들렸다.
"그런 건 폭주라고도 할 수 없어요 선배. 그냥 투정 부린 것 뿐이라고요."
"아니, 그냥 투정이라기엔 나 이것저것 많이 부신 것 같-"
"잠자코 들어요."
"네."
호시노는 유메를 합죽이로 만들어버리기 위해 싸늘하게 만든 눈초리 위를 다시 포근한 웃음으로 덮었다.
"......선배는 정말로 투정 부린 것 뿐이에요."
선생이 해준 말을 똑같이 해주는 호시노의 미소가.
어른스러워보였다. 그 무엇보다도.
자신이 바라던 모습......
"아니야."
"선배?"
"아니야 호시노 쨩, 나...... 나 선생님을 때린 적 있어......"
알아채버렸다.
어째서 호시노를 보자 말문이 막혔는지.
그건, 자신이 선생에게 저질렀던 원죄들에 발이 걸린 탓이었다.
"선생님을 시로코 쨩을 팔아버린 쓰레기로 착각해서 때렸고, 그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고 두려워한다는 이유로 때렸어.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는 불합리하고, 한심한 이유들 때문에 주먹을 휘둘렀어...! 겨우 총 한 방에 목숨이 위험해지는 사람을......!"
그래서 두려웠던 거다.
원망하는 기색 하나 없이 묵묵히 자신의 억지를 받아줬던 선생에게.
선생을 위해 차원까지 넘어왔을 저 호시노에게.
"나는...! 나는 네가 아는 그런 좋은 선배가 아니야! 나는, 나는...!"
"선배."
"미안해, 미안합니다. 죄송-"
"선배!"
차마 눈을 마주칠 수도 없던 유메의 생각과 달리 호시노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 대신, 더욱 힘을 주어 선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한 가지만 물어볼테니까, 정직하게 대답해주세요."
"응, 으응...!"
"선생님이 그거에 대해서 화를 낸 적 있나요? 선배를 원망한 티를 조금이라도 낸 적 있나요?"
"......없어."
"그랬을거에요. 그 바보가."
유메에 대해 어떤 악감정도 없어보이는 선생을 떠올리며 호시노는 쓴웃음을 지었다.
화가 나지 않냐고 묻는다면 거짓말이었지만.
그렇지만......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어, 얼마든지...!"
"유메 선배는 한번이라도, 선생님에 대한 악감정으로 주먹을 휘두른 적 있었나요?"
"어, 없었어. 그냥 내가 멋대로 이상하게 생각해버린 바람에 늘-"
"그럼 됐어요."
"어?"
품에서 떨어진 호시노의 표정은 정말로 괜찮아보였다.
"괜찮다고요. 선생님은 학생에게 악감정을 품을 사람이 아니고, 선배는 고의적인 이유로 폭력을 휘두를 사람이 아닌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제가 거기에 대고. 어느 쪽이든 소중한 사람들 간에 있던 일을 두고...... 이래라저래라 하고 싶지 않아요."
소중한 사람들의 일이라 억지로, 외면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며 어색하게 웃어보이는 호시노를 유메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응시하다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어떻게, 그렇게......"
그럴 수 있는 거야?
그렇게, 어른스러울 수가 있는거야?
대견하면서도, 의아해하는 그녀에게.
호시노는 웃어주었다.
"말했잖아요. 안 괜찮았다고요. 그래서 모두한테 민폐나 끼치는 선배가 되어버리고...... 그래도 덕분에 알게 됐어요."
"어떤 걸?"
"제 세계에서 선배가 있었다면, 선배는 제가 어떤 모습이길 바랬을지를요."
아무리 노력해도 학교를 억누르는 빚을 갚을 길이 없어 고통스러웠고, 분노했고, 좌절했다.
그런 와중에도 선배와 보낸 시간들은 행복했고, 소중했고, 그 무엇보다도 빛났다.
"선배라면 제가 주저앉아있길 원하지 않았을 거에요. 선배와 함께 남긴 모든 추억들을 안고, 미래로 나아가길 원했을 거에요."
그것을 깨달은 순간 알게 되었다.
여전히 수첩의 행방을 좇으며 잃어버린 선배를 놓지 못하고 헤메던 한심한 선배던 시절에도.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극한에 몰렸음에도 인간의 긍정적인 면만을 바라보던 선배의, 선생님의 가르침을...... 저는 저도 모르게 해내고 있었으니까."
노노미와 시로코를 받아들이고, 아야네와 세리카와 만날 때까지.
유메를 잃은 뒤, 복잡한 머리를 안고 정처없이 헤메는 듯 하면서도 다리는 굳건히 서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은.
유메가 웃으며 보내준 바람이, 자신의 등을 밀어주었다는 것.
그녀가 미래를 그리며 뿌렸던 씨앗이 결실을 맺었다는 것.
그녀가 바라던 신념을 이어받아 자신의 곁에 서준 선생으로 인해, 자신은 이곳에 서 있을 수 있었다는 것.
"그러니까 확신할 수 있어요 선배. 이 세계의 저를 만나보진 못했지만, 분명해요. 쿠치나시 유메가 타카나시 호시노가 씩씩하게 나아가는 뒷모습을 보고 싶어했던 것처럼, 이 세계의 저도 똑같이 선배의 뒤를 보고 싶었을 거라고. 그건, 시로코 쨩도 마찬가지일 거라고요. 그러니까, 으헤......"
유메의 두 손을 꽉 붙잡았다.
따뜻했다.
그 온기는,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눈물이 주륵주륵 흐르고 있는 그 눈가를 보며, 호시노는 자신이 심상세계에서 만난 유메에게 위로받았던 것처럼 미소지어주었다.
"선배님이 아는 타카나시 호시노가 이 자리에 있었어도 했을 말을 대신 할게요, 선배- 이제 그만 그 사막에서, 그 메마른 사막에서 헤메지 말고......"
빠져나와요.
수첩을, 소중한 사람을,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렸다는 죄책감에서.
스스로를 쓸모없는 이라고 몰아세우며, 하지 않아도 될 자책을.
스스로를 얽맨 굴레에서......
나오기를.
진심으로, 그렇게 바랬다.
* * *
"헤헤, 왠지 쑥쓰러워."
그 뒤로도 유메는 한참을 울었다.
호시노는 조용히 울다가, 꺽꺽대며 울다가, 다시 끅끅 흐느끼던 선배가 진정할 때까지 한참을 안아주고, 등을 쓰다듬어주고, 위로해주었다.
그 끝에서 눈가가 퉁퉁 부어버린 유메는 부끄럽다는 듯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도 그랬어요. 울지는 않았지만, 그만한 민폐를 저지르고나니 눈 앞이 깜깜해져서."
"우우... 애들을 어떻게 봐야할 지 모르겠어......"
"그 아이들이 괜찮다고 하는 말은, 정말 괜찮다는 뜻일 거에요 선배. 그러니까, 더 이상 담아두지 않고 떨쳐내는 게...... 중요해요."
그 시점에서야 쿡쿡 찔리기 시작한 심장의 고통을 느끼며 호시노는 말끝을 흐렸다.
유메를 위로한답시고 이런저런 말을 한 것 같긴한데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위치에 있는 건가.
이래도 되는가.
뒤늦게 양심이 찔려와서 주눅이 들려던 호시노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미래로,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왜, 선생도 그랬을 거 아니에요. 앞으로 나아가라는 식으로 뭐, 그렇게 말했을텐데......"
"......"
"선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돌아본 유메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선배? 괜찮아요? 어디 열 나는 거 아니죠?"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유메 선배?"
"선생님이."
"선생님이?"
"그렇게 말하기보단 날......"
호시노의 언급으로 인해 떠올려버렸다.
선생이 무슨 말을 했는지.
선생이 어떤 고초를 걲고도 자신을 구해냈는지.
자신의 이상향이며, 자신을 구한 히어로는 분명, 따뜻하게 웃어주며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 때의 웃음이-
"책임져 준다고 했는데......"
너무도 밝았기에.
열이 올라와 눈 앞이 흐려진 유메는 눈치채지 못했다.
걱정스럽게 올려보던 호시노의 눈에서, 한순간에 빛이 꺼져버린 것을.
"아, 아니! 물론 그런 아앙하고 므훗한 그런 뜻이 아니겠지! 어른스럽게 챙겨준다는 그런 뜻으로 말하는 거겠지!"
"그렇, 겠죠."
"그 선생님, 전부터 말을 이상하게 해서. 나보고 아비도스를 지키는 히어로라니 어쩌니 하면서! 세상에 나보고 히어로라니, 그 사람 진짜 이상한 생각으로 그러는 거 아니지? 학생 꼬시려고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 아니지? 그냥 어른스럽게 챙겨준다는 게 왜 설레,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
"네."
"진짜 이상한 어른이라니까 그 사람? 어른인데도 막 오해받을 행동만 골라서 하고! 여고생 앞에서 옷을 벗어제끼질 않나 수영복을 입히려 하질 않나...!"
"으헤에......"
"설마 호시노 쨩한테도 막 그런 식으로 말 하는 거 아니지? 그럼 문젠데! 분명 존경할만한 어른이지만! 유능하고 잘생기고 아 이건 아니고 막...! 받은 게 너무 많아서 어디부터 보답해야할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어쩌지! 어떻게 사람이 너를 구하러 왔다고 막, 면전에 대고 그런 식으로. 느끼하게 보여야 되는데 느끼하지가 않고 감동적이고 가슴이, 아니 그러니까 뭐랄까. 그게. 음...... 으음......"
거기까지 횡설수설하던 유메의 말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대답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 상황에 뒤늦게. 너무 늦게 위화감을 느낀 유메는 입을 여는 대신 다른 세계든 뭐든 상관 없이 소중한 후배에게 시선을 돌렸다.
"호시노 쨩...?"
"네, 선배님. 왜 그러세요?"
"그......"
어째서인지 물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예감을 애써 밀어넣는다.
그럴 리가 없는 착한 후배인데도.
유메는 땀을 삐질거리면서 쥐어짠 용기로 머뭇머뭇 입을 열어야 했다.
"혹시... 화난 거 아니지...?"
"......제가요?"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이 자신을 빤히 올려보며 듣고 있던 호시노가.
그 말에 싱긋 웃었다.
"그럴 리가요."
그래, 그럴 리가 없는.
그저 그토록 보고 싶었던 걸뿐인, 후배의 맑은 웃음이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어째서 이렇게 공포스럽게 보이는 것인지.
어째서 입이 웃는데 눈이 웃지 않을 수 있는 건지.
유메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 * * * *
'유메' 당하고 싶은 것이냐
댓글 10

이게 명절음식이지
후배와 선배의 기싸움은 아비오도스의 전통

이제는 선배 도 패드리게스로 개명하려 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