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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아카이브소설)학대파 선생 세계선에서 살아남기 - 48화/그 꿈이 남기고 간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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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삽화가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해당 화수에 삽입된 삽화는 AI 제작임을 밝힙니다.>

* * *

선생이 테러화라고 부르던 그 때의 폭주는, 울분 어린 집착으로 인한 말로였다.

선배의 죽음에 대한 흔적을 미친듯이 찾아다녔지만, 그 끝에 찾아낸 진실은 허망할 정도로 단순했고 잔인하게도 명쾌했다.

그 어떠한 사악한 음모 같은 건 일체 섞이지 않은, 정말로 단순하고 우연한 사고.

유메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던 자신의 모든 삶이 부정당한 그 순간을.

그동안 쌓아온 서사가, 노력이 의미없음을 깨달아버린 그 때의 허망함을 자신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미쳐버린 자신을 구원하고자 기꺼이 몸을 던진 후배들, 친구, 그리고 선생이 등을 밀어준 덕분에 그 모든 억압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환상인지, 진실인지 모를 유메와 다시 한 번 만나며 찾지 못한 수첩에 대한 미련을 흘려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떨쳐냈다고 생각한 집착의 원흉이. 그토록 찾아다녔음에도 찾지 못해 가까스로 내려놓은 미련이, 거짓말처럼 눈 앞에 들이닥친 이 상황을 호시노는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이미 회장이 되어버린 너에게 도움이 될 내용은 아니겠지만...! 헤헤...! 그래도 내가 회장으로서, 그 이전에 아비도스 신입생일 때부터 썼던 일지 같은 거니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 마음으로 물려주려 쓴 거랄까......"

그토록 갈구했던 수첩의 내용이 유메의 입에서 줄줄줄 흘러나온다.

뭐 그리 대단한 비밀을 기대했냐는 듯.

저건 자신 세계의 그것이 아닌 다른 세계의 물건이라는 진실은, 그러니 내용도 네가 찾는 그것과는 다를 수 있다는 합리적인 판단 따위는, 거대한 아이러니가 눈알에 폭력적으로 꽂혀 넣어진 충격으로 인해 진지하게 판단할 부분이 못 됐다.

호시노는 그저 엄청난 허무함과 탈력감으로 인해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선생님...?"

케이는 마찬가지로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인 선생을 의아한 듯 올려다봤다.

괜찮다는 듯 손을 저으며 선생은 호시노의 안색을 살폈다.

떨쳐냈던 트라우마가 다시금 폭주하는 건 아닌지 걱정됐지만, 호시노는 그저 멍하니 유메의 수첩을 내려볼 뿐이었다.

"어... 그, 호시노 쨩?"

대답이 없는, 그 전에 왠지 눈을 부릅 뜬 모습이 걱정스러울 정도라 유메는 조용히 물어왔다.

"괜찮아? 아, 혹시 너에겐 이미 있는 물건일까? 우우, 그런 거라면 굳이 수첩을 두 개나 들고 다니라고 할 수 없고. 그렇지만 이거 말고는 뭐라도 줄 게 정말 없는데, 어쩌지...!"

"......하하."

"호시노 쨩?"

"하하... 푸하하하하핫! 아하하하하하하하!!!"

"끼약?!"

느닷없이 터진 웃음에 놀란 유메가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갑자기 이마를 부여잡고 웃어제끼는 상황에 뒤에서 숨 죽이고 지켜보던 이들도. 심지어 선생까지도 경악과 당혹감으로 움찔했지만.

이내 느낄 수 있었다. 그 웃음은, 광기라던지 그런 게 느껴지는 불길한 웃음이 아닌.

"하하하...... 하아, 갑자기 놀래켜드려서 죄송해요 선배."

후련함.

그런 느낌을 호시노의 표정에서 읽은 선생은, 안도해도 될 거라는 확신을 얻고 물러섰다.

"어? 아, 아니. 아니야. 그것보다 괜찮아 호시노 쨩?"

"네, 정말로 괜찮아요."

후련한 미소를 지은 호시노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유메가 주춤주춤 건네준 수첩의 감촉이 손 끝에 닿는 순간, 호시노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 정말로 괜찮은 거였어.'

이렇게 한 없이 시원해도.

눈물 한 번 쏟아내니 후련한 마음이 드는 것도.

예전이었으면 한 없이 집착했을지도 모를 과거의 잔재를 차분하게 마주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래도 괜찮은 거였다. 오히려 그게 좋은 거였다.

'나는, 후배들과 선생님에게 폐를 끼친 그 날 이후로 성장한 거였어.'

어른이란 건 대체 뭘까.

언젠가부터 품었던 의문에 대한 답의 실마리를 자신은 그 때의 경험으로 이미 잡은 것이었다.

지키기 버거울 터인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근처에 쓰러져 있는 이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 수 있는 이타심에 구원받은 전적이 자신에게도 있지 않는가.

그거면 된 거였다.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었다. 선생은, 별다른 수업도 없이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제 눈 앞에서 쌓아가며 알려준 것이었다.

어른이면 그래야 한다고. 그것은 딱히 어렵고 복잡한 일도 아니니, 너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모든 아이는 언젠가 어른으로 성장한다.

그 필연적인 과정에서 요구되는 댓가나 희생 따윈 없다.

성장이라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며, 상처가 아물며 새 살이 돋는 과정 또한 그러했다.

그래, 간단한 일이었다. 마음 속 깊숙한 상처도, 시간과 사랑이라는 약으로 치유될 수 있는 거였다.

지금의 자신이 괜찮은 이유는, 정말로 말 그래도 괜찮아졌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상처를 딛고 현재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과 미래를 볼 수 있게 된 거였다.

-어때? 호시노 쨩? 훌륭한 선배는 되었어?

-후배들과 함께 씩씩하게 미래로 나아가고 있어?

-또 그러면서 가끔씩은 으헤~ 하고 웃고 있을까?

이전에 폭주했을 때, 환상인지 진실이었는지 모를 공간에서 그렇게 물어온 유메의 질문.

훌륭한 선배, 라기엔 지나치게 사고를 많이친. 그래서 그 아이들에게 갚아야 할 게 아비도스의 빚보다도 많이 쌓인 글러먹은 선배라지만.

적어도, 미래를 향해 제대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말을 남긴 선배가, 자신의 등을 보며 흐뭇하게 웃을 정도로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마워요 유메 선배."

그러니까, 나는 오늘의 이 보상을 덤덤히 받아도 된다. 그래도 되는 거였다.

나는 이미 모두의 격려로 앞으로 나아가기로 마음먹지 않았나. 그러니 이제 와서 과거의 흔적을 발견해도 얶매이지 않게 되어버린 거다.

"최고의 선물이에요. 정말로......"

그럼에도.

한심하게도 끝말에서 울먹이고 만 자신을 보며 안도하는 환한 미소를 마주하니.

아직 멀었구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나와버려서.

"으헤~"

그렇게.

멋쩍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 * *

"읽어보지 않아도 괜찮은 거야, 호시노?"

"괜찮아."

샬레로 돌아온 뒤에도 호시노는 이 쪽 세계의 유메에게 받은 수첩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

쌓여 있는 서류 더미를 보자마자 혀를 차며 다가가더니, 말리기도 전에 의자에 앉아 수 많은 당번 일로 숙련된 익숙한 작업을 할 때 책상 위에 내려놓은 게 유일한 예외였다.

인간의 삶이란 걸 아슬아슬하게 유지할 정도로만 차 있는 냉장고 안을 보고 기함을 하고 쓰러지더니, 선생의 손을 잡아끌고 외식이라고 하자고 칭얼거릴 때도.

길 가다 커피에 맞는 게 일상인 이 세계 선생의 위상을 다시 한 번 알려주며 동시에 전임 선생만큼 끔찍한 D.U. 주변 상권의 실상을 알려주자 뜨악한 표정으로 귀 기울여 들을 때도.

결국 선생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쪽으로 컵라면 두 개를 끓여 나눠먹으며 못 다한 이야깃거리들을 풀 때도.

그럼에도 수첩을 펼쳐보지 않는 것에 의아해서 물어보자 그렇게 말하며 호시노는 웃었다.

"이건 돌아가서 얼마든지 볼 수 있잖아. 지금 선생이랑 마주볼 수 있는 시간이 나한텐 더 중요해."

"그렇게 돌직구로 말하면 꽤 쑥쓰러운데 말이지......"

"으헤, 선생이 평소에 숨 쉬듯 하는 짓이라고? 조금이라도 역지사지를 느껴보라고?"

호시노는 수첩을 꼭 안은 채, 샬레 바깥의 풍경이 잘 보이는 사무실에 비치된 소파에 앉은 선생의 어깨에 기댔다.

이 넓은 사무실에 단 둘 뿐이었다.

케이는 샬레까지만 에스코트한 뒤 일손이 필요할테니 거들어주고 오겠다며 다시 아비도스로 돌아간 뒤였으니.

선생도, 호시노도 그런 배려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24시간 타임 리미트가 가까워짐에도 두 사람은 단 한 숨도 자지 않았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각각 업무와 순찰로 인한 밤샘이 일상인 그들에게 겨우 하루 버티는 게 별로 힘들지도 않은 일이던 것도 있었지만.

잠으로 서로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을 낭비하기엔 24시간이 너무도 모자랐다.

선임의 부조리를 뒤집어 쓰며 힘겹게 일하는 선생의 부담을 덜어주고, 간식거리도 없는 조악한 환경에서 있는 음식 없는 음식 다 끌어모아 간신히 끼니를 때우고, 그 외의 시간은 수다를 떨며 보냈을 뿐인데. 무슨 놈의 하늘 색깔이 이리도 휙휙 빨리 바뀌는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끊기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 간의 대화 주제가 마침내 바닥을 보일 때 쯤부터 두 사람은 원래 세계, 그러니까 선생이 언젠간 돌아와야 할 세계에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혼란을 수습할 방안을 논의했다.

"결국 우리 쪽에서 이 세계로 올 방법은 없다는 거네."

"응, 아로나와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해봐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내 쪽에서 카드를 사용해야만 너희 중 한 명을 조건부로 부를 수 있는 것 같아."

"마구마구 써서 팍팍 불러줘, 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호시노는 침음을 삼키며 선생이 꺼내보인 카드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선생은 지금껏 어른의 카드의 '대가'에 대해 그 어떤 학생들에게도 정확히 설명한 적이 없었지만, 이 세계의 카드에 한정한다면 사정이 달랐다.

"어떤 커다란 대가가 필요하다고 했지."

"그렇게 알고 있어. 무엇을 대가로 하는 건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으음......"

어른의 카드에 대해 '기적을 일으키는 어른의 수단'으로, 두루뭉술하게만 알고 있는 호시노도 어렴풋 인지는 하고 있었다.

그 정도 기적을 일으키는 카드가 무제한으로 사용 가능한 치트키 같은 거일 리가 없을 거라고.

그러니 그녀로서도 선뜻 카드를 써서 불러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불합리 속에서 좀 편한 수단 하나는 만들어줘도 상관 없지 않나.

그런 심정으로 원망스럽게 카드를 쏘아볼 뿐이었다.

"일단 그렇게 전달해둘게. 우리 쪽에서도 커다란 시로코 쨩과 싯딤의 상자의 능력을 써서 넘어올 방법을 찾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선생."

"그 애들한테도, 히마리한테도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전해줘. 세계를 넘나드는 일인데, 절대 쉽게 시도할 일이 아니야."

호시노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시도했다가 잘못돼서 시로코가 피를 쏟으며 의식불명이 되었고, 히마리는 절규하다 실신해버렸다는 이야기 따윈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

그래도, 희망을 잡았다.

호시노는 선생의 손을 꽉 붙잡았다.

이 손을 언제까지고 잡고 있고 싶었다.

그렇지만 허락된 시간은 더 이상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난전 상황에서 넘어오느라 정확한 시간을 알지 못했음에도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선생."

"응, 호시노."

좋아해, 라는 말이라도 해볼까.

...아니, 여기서 괜한 부담을 주긴 싫었다.

선생이 무엇 때문에 선생과 학생 간 관계에 선을 긋고 다니는지 그녀라고 모르는 게 아니었다.

이해가 가면서도 유치하게도 서운할 때가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 섣불리 고백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호시노는 선생의 손을 더욱 꽉 붙잡는 쪽을 택했다.

마찬가지로, 무의식적으로 이별의 때를 직감한 듯 떨리기 시작한 손을.

"괜찮아, 선생님."

"호시노..."

"할 수 있어. 이런 불합리한 세계 따위에 지지 마."

이렇게 말해도 되는 걸까.

내가.

나 따위가.

그럼에도, 홀로 남겨져야 하는 누구보다 소중한 어른을 위해 소녀는 전력을 내어 응원하지 않으면 안 됐다.

"나는, 우리들은. 당신이 만들어준 기적 덕분에 꺾이지 않을 수 있었어. 마냥 빛나지는 않고, 엉망진창에 리셋해버리고 싶은 흑역사도 한가득이지만, 그래도 모두가 함께라서 그럭저럭 괜찮은...... 그런 청춘을 보내고 있어. 그건 선생님이 만들어준 미래야."

"내가 아니야 호시노. 그 미래는 너희들의 선택으로 개척된 길이야."

"당신이 빛을 비춰주고, 용기를 불어넣어줬으니까. 설령 당신이 없었고 우리끼리도 가능한 일이었다고 가정한들...... 무의미해. 선생님이 우리를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이제 우리에게도 선생님이 없으면 안 돼."

호시노는 선생의 품에 안겼다.

손을 잡았을 때보다 더 큰 떨림이 느껴졌다.

두려워하고 있구나.

어른도, 이렇게 두려워하는 존재일 수가 있는 거구나......

"미안해 선생님. 선생님은 나에게 많은 것을 해줬는데 나는, 이것 밖에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그렇지 않아. 네 덕분에 유메를, 이 세계의 아이들을 구할 수 있었어.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와준 덕분에 가능했던 거야......"

"이 세계에 남기로 한 선생님은 앞으로도 이것보다도 큰 난리에 휘말릴지도 모르지. 그 카드에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다면, 무한정으로 우리를 부를 수도 없을테니 홀로 맞서야 할 거야."

"그렇, 겠지."

"선생님."

"응."

"억지 하나 부려도 될까?"

"...뭔데?"

"반드시 돌아와준다고 약속해줘."

"당연히 그럴 거야."

한심하지 않나, 하고 두려움을 들켰음을 자각한 선생은 자책했다.

학생을 격려하지 못할망정 되려 걱정시켜버린 것 같아서.

"이길게. 불합리한 세계에, 이런 세계를 만든 나쁜 어른 따위한테 지지 않을 거야. 그렇게 이겨서,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이겨서...... 돌아올게. 아무렴 너희들 졸업식도 못 보고 가버릴까, 내가."

"으헤, 그래도 이 정도면 졸업 선물은 엄청난 걸로 기대해봐도 좋은 거지 선생?"

"내 3번 척추를 뽑아서라도 어마무시한 걸로 보답해줄테니 기대하라고, 호시노."

"아니 그 정도 정성까진 필요 없는데......"

풋, 웃어버리며 호시노는 선생을 안은 팔에 힘을 주고 얼굴을 더 깊이 파묻었다.

"기다릴게. 그러니까, 몸 건강히 돌아오기만 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든 호시노의 삐져나온 머리가 선생의 볼을 가볍게 간질였다.

손으로 뺨을 부드럽게 쓸어주는 감촉.

그 감촉이 사라진 순간, 선생은 팔과 가슴이 눌린 듯한 감촉 또한 사라진 것을 알아챘다.

방 안에, 샬레 건물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 혼자 뿐이었다.

처음부터 그런 것처럼.

혼자만이, 이 세계에 남았다.

"......으윽."

그렇게 혼자 남아버리고서야 억눌러두었던 공포가 몰려왔다.

호시노는 무사히 돌아간 게 맞을까?

카드는, 아로나는 제대로 할 일을 한 게 맞을까?

만약 그게 아니면?

왔을 때 문제가 없어도 갈 때 문제가 생겨서.

세계라고 칭할 수도 없을 차원 사이의 어딘가를 표류하게 되어버린다면.

자신 때문에, 학생이 죽음에 가까운 위험에 처한다면.

"아, 아으윽......"

그리고, 홀로 남겨져버렸다는 공포.

괜찮았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세계에서 불어온 온기에 닿자 그 외벽에 현실도피라고 쓰였을 방벽은 너무도 간단히 허물어져 향수라는 약점을 드러내버렸다.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되어버려서.

학생에게 꼴불견 같은 모습을 보여줄 걱정도 할 필요가 없는 완벽한 공간에서.

선생은 한참을 신음하고, 괴로워하고, 두려워했다.

다시금 하늘의 색이 변하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의 색이 변할 때까지.

누군가, 자신이 온 이래 언제나 열어둔 샬레에 선뜻 발을 딛기 전까지.

"호시노 쨩은 무사히 돌아갔나요, 선생님?"

"......쿠, 치나시."

분명 급격히 초췌해졌을 자신의 몰골을 봤을 유메는 말 없이 웃어보일 따름이었다.

"아비도스는...? 할 일은 다 마친 거야?"

"네, 카요코 씨와 무츠키 씨 도움으로 얼추 다 수습 됐어요. 이제 카이저를 샌드백처럼 신나게 때릴 일만 남았달까요."

야구 배트를 붕, 휘둘러 치는 시늉을 해보이는 유메의 밝은 모습에 선생은 그제서야 웃을 수 있었다.

그래, 호시노가. 자신이 구해낸 학생이다.

저 밝디밝은 모습이 이 망할 평행세계에서 자신이 거둔 첫 승리이자 거대한 트로피나 다름 없었다.

"고마워, 쿠치나시 양."

"엣."

거기서 그런 말을 들을 줄 몰랐다는 듯 유메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건 제가 선생님한테 해야 되는 말인데요...? 그것보다 제가 뭘 했다고. 이번 일에서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민폐만 저질렀는데......"

"그런 게 있어. 어른 눈엔 학생은 밥 잘 먹고 잘 뛰어다니고 건강하기만 하면 그만인거야."

"뭐에요 그게."

역시, 이 어른은 이상하다.

푸핫 하고 웃어버린 유메는 문득 그렇게 생각해버렸다.

학생을 돕지 않고 떠나버린 어른다움만을 보았다.

시로코를 팔아버린 주제에 냉정을 유지하라 헛소리를 늘어놓는 어른다움만 보았다.

학생을 억압하고, 골수까지 짜내고 폭력을 휘두르며 우위에 서려는 어른다움만 보았다.

그것만이 자신이 봐온 어른이었다.

이 어른은, 정말로 명백하게 이상했다.

이런 어른이 되고 싶긴 했다.

그런데, 정말로 눈 앞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평생의 이상으로 삼았던 어른이 다가왔음에도 믿지 못하고 자신이 밀어낼 정도로 지쳐 있던 것도.

참 한심하고 못 써먹을 인간이지, 나도.

그에 비해서 호시노 쨩은 정말로, 어른스러워보였지.

이상적인 어른인 선생을 보며, 그런 어른의 모습에 가까웠던 듬직한 후배의 모습을 떠올린다.

후배가 평탄한 길을 걸었을 거라 생각치 않는다.

이 세계에서 후배를 잃은 내가 고통스러웠던만큼, 저쪽 세계의 자신을 잃은 그녀 역시 괴로웠을거다.

하지만 그 아이는 훌륭히 극복해낸듯 했다.

그것은 눈 앞의 어른이 비춰준 빛을 따라 앞으로 나아간 결과였겠지.

"그러고보니까 선생님."

"응?"

"저랑 다른 아이들은 성으로 부르면서 호시노 쨩은 이름으로 부르던데, 원래 그랬었나요?"

"으응, 그랬지.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온 바깥 세계에선 성으로 먼저 부르는 게 초면에 예의가 맞긴 한데, 키보토스에선 신기하게도 이름으로 안 부르는 게 오히려 이상한 취급이더라고."

"그런데 저희는 왜 성으로 부르는 건데요?"

"그...... 전에 먼저 묻겠는데, 혹시 내가 이름으로 부르거나 그러면 불편하지 않아?"

"어...... 전 선생이 떠올라서 좀 그렇긴 했는데요."

"그렇지? 거진 다 그런 반응이길래 그랬지. 이름 좀 불렀다고 경기 일으키는 애도 봤다니까 내가......"

"그렇다면 선생님."

결심한 듯, 기다렸다는 듯 유메는 힘차게 말했다.

"앞으로는, 유메라고 불러주세요."

나도.

나도 호시노 쨩처럼 빛을 따라가도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르고, 바보 같은 선한 인간성을 지킨 끝에, 그렇게 버틴 덕분에 후배가 볼 수 있던 빛을 나 역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여기서는 조금 욕심을 가져봐도 되는 게 아닐까?

이 정도라면, 그래도 길게 산 내 인생의 작디작은 보답 정도로 여겨도 되는 거 아닐까.

되고 싶었던 이상적인 어른을 똑바로 마주하는 심장이 두근거린다.

왠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저 멍하고 웃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최선을 다해 웃어보였다.

알고 있다, 이런다고 내 과오가 없어지는 건 아닐거다.

선생님이 받아준다고한들 내가 하루아침에 호시노 쨩처럼 듬직한, 한발짝만 내딛으면 어른이 될 수도 있을 정도로 성장한 학생이 되진 못할 거다. 절대로.

나는 여전히 바보 같고, 멍청하고, 순진해빠지고, 학생회장답지 않은 학생회장인 쿠치나시 유메다.

긍정적인 것보단 부정적인 게 더 많이 달려 있을 가망 없는 새싹이다.

그런 짓눌린 새싹에, 어느 날 갑자기 따뜻한 햇살이 멋대로 와서 빛을 비췄다.

싫다고 도망치고 밀쳐냈음에도 끈질기게 쫓아와 어둠 속에서 끄집어내줬다.

나는 여전히 주변의 커다란 나무처럼 자랄 자신이 없는데.

그래도 어떡해.

이 햇볕이 얼마나 따뜻한지, 이젠 너무 잘 알아버렸는걸.

저 믿음에 보답하고 싶어졌고, 뻗어준 손을 언제까지나 잡고 함께 있고 싶어졌는걸......

그렇게.

쿠치나시 유메는 베풂을 위해 열어두었던 마음 속에 처음으로 자신만의 욕심을 품고 잠궜다.

은근한 죄책감으로 마음이 쿡쿡 찔리면서도.

신기하게도 꼭꼭 닫은 문을 도로 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 * * * *

다음편으로 챕터 1이라 할 수 있는 아비도스 편이, 대단원 하나가 마침내 마무리될 듯 싶음

원래는 이 세계 아로나와의 대담을 넣으려고 했는데, 쓰고 보니 끝내야 할 타이밍에서 조금 늘어지는 듯한 느낌이라 해당 화에선 간략한 언급으로만 남기고 다다음화 즈음으로 넘기려 함다

긴 여정이었는데, 앞으로 이보다 더 큰 산을 넘어야 한다 생각하니 눈 앞이 하얘지네요......

보내주신 댓글과 응원에 힘을 내보며, 여건이 되는대로 성실히 걸어나가보도록 하겠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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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블루 아카이브·25.10.13창작

소설)학대파 선생 세계선에서 살아남기 - 48화/그 꿈이 남기고 간 흔적

#선생#소설
좋아요 0댓글 9저장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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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DC
Baksam작가
게시물 65개
외부 링크디시인사이드
게시일2025.10.13 04:13
조회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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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9

나
ㅇDC
ㅇㅇ125.10.13

이름을 부르다니 이건 야스네요

ㅇDC
ㅇㅇ225.10.13

화이팅

ㅇDC
ㅇㅇ325.10.13

새벽에올라오네 안자고잇길잘햇다

ㅇDC
ㅇㅇ425.10.13
디시콘
ㅇDC
ㅇㅇ525.10.13

개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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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학대파 선생 세계선에서 살아남기 - 44화/제약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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