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삽화가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해당 화수에 삽입된 삽화는 AI 제작임을 밝힙니다.>
* * *
선생은 그 뒤로도 나기사와 좀 더 이야기를 이어갔다.
카즈사가 미처 못 받은 치료를 마저 받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러고보니까."
그러다가, 선생은 문득 여기까지 와서 보지 못한 한 명의 학생을 떠올리고 말했다.
"아직 미카... 미소노 양을 한 번도 못 본 것 같네."
"그렇네요. 사실 방금 전에 호출했을 때 소개시켜드리려 했는데, 할 일이 있다면서 먼저 가버리는 바람에."
"괜찮아. 티파티가 바쁜 건 알고 있으니까."
이 시점의 미카는 아직 실각되기 전이니, 티파티의 임원으로서 나름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겠지.
무엇보다 딱히 나를 보기 싫어한다 해도 이상할 것도 없고......
그런 생각으로 선생은 약간, 정말 약간의 어색함을 느낄 뿐. 나기사의 애매한 표정을 포함한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나중에 또 연이 있겠지."
"네... 그렇겠죠."
업무 내용으로 인한 긴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그럼."
비운 잔을 탁, 내려놓으며 선생은 굳이 확인사살을 가했다.
"혹시 더 이야기 할 게 있었던가?"
"아니요, 우선은 이걸로 충분한 것 같군요."
사실 충분하지 않게 느껴졌다.
이번 일 외에도 물어보고 싶은 것들은 많았다.
게헨나와의 관계 개선은 잘 풀리고 있는지.
세이아는 살아 있기는 한 게 맞는지.
너는, 괜찮은 게 맞는지......
"수고가 많아, 키리후지 양."
그 많은 감정들을, 딱 한 문장에 압축해 내밀었다.
이곳의 나기사와 자신의 사이가 그 정도는 아니라 생각됐기에,
"선생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죠."
"진심이야."
가벼운 격려를 주고 받은 선생과 나기사는 잠시 대화를 끊고 각자의 잔에 담긴 차를 머금었다.
따로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겹친 행동.
나기사는 합이 딱 맞는 모습에 뭔가 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
그리고, 한 박자 늦게 더 할 말이 남았다는 것을 떠올린 나기사가 선생이 일어날까 서둘러 말을 꺼냈다.
"카즈사 씨에 대한 일은-"
"사과하지 마. 네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내 부주의로 인한 사고였을 뿐이야."
카즈사의 처참한 모습을 떠올린 선생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피곤해보였다. 나기사 또한 그러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응?"
그런 와중에 말이 그렇게 나와버린 건 무슨 연유에서였을까.
동정?
동질감?
아니면...... 위로?
무엇이든간에, 말을 시작한 이상 어색하게 끊어낼 수도 없었다.
"선생님은 충분히 잘하고 계십니다."
"...그런가."
머리를 넘기며 드러난 살짝 초췌한 안색 위로 입꼬리를 피식, 올리는 모습.
냉소적인 반응에도 말을 이었다.
"네. 그저, 불행한 사고일 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셔도 될 듯 싶습니다."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상황이었어. 카즈사가 다치지 않아도 됐었다고."
"으음..."
여기선 뭐라고 해야 할까.
스스로를 계속해서 자책 속으로 빠뜨리는 어른 앞에서, 나기사는 당혹스러운 심정이었다.
호스트로서 많은 이들을 상대해온 그녀도, 어른과 이런 식으로 자리를 갖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리고 이 대화를 무언가를 얻어내고 빼앗기는 것을 막아내고... 그녀에겐 훨씬 익숙한 목적의 수단으로 끌고 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왜인지 강하게 들었다.
"...그래도."
그렇기에, 신중히 말을 고른다.
"그렇게 인연이 이어진 덕분에 카스팔루그를 잡을 수 있었죠."
"......"
"그... 이상하게 들렸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만, 선생님이나 카즈사 씨를 이용한 결과라는 식으로 말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보는 시선이 서늘해진 와중, 다급해진 속을 드러내지 않도록 애쓰며 말을 이었다.
"카즈사 씨가 그런 일을 겪고도 곧바로 제 무리한 제안을 수락해 주신 것이...... 감사하면서도 의아했었거든요. 저에게 욕설을 내뱉어도 무방할 상황에 그렇게 나서준 건, 어딜 봐도 저 때문만은 아니겠죠. 그건 순전히 선생님을 위한 일이었을 겁니다."
카즈사가 선생을 볼 때의 시선을 나기사는 기억했다.
어른에 대한 신뢰와 애정. 선생 못지 않게 짙게 느껴지는 자책감.
그런 감정을 눈에 띄고 있던 이였기에 자신이 카즈팔루그 잔당 소탕을 입에 올렸을 때 불꽃이 튀겼던 건, 그것이 만회할 기회라고 생각해서였을 게 분명했다.
선생을 곤란하게 한 것에 대한 보상 심리...... 대체 어떤 인연을 쌓아야 그런 눈을 할 수 있던 걸까.
그녀에게 선생이란 어떤 사람이기에 제 몸이 억울한 사건에 휘말려 다쳤음에도 그를 위해 선뜻 나섰던 걸까.
선생은 자신의 세계에서 학생들과 어떤 시간을 보냈기에, 카즈사와 아비도스의 호시노란 여자도 선생을 위해 전심을 다해 싸우려 나섰던 거였을까.
"어른 앞에서 주제 넘은 말입니다만, 선생님. 모든 선의가 밝은 미래로 이어지는 건 아니더군요. 티백을 지나치게 오래 두면 오히려 떫은 맛이 나는 것처럼...... 그것은 이따금 변질되어,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결과를 내기도 합니다. 참으로 불행한 아이러니죠."
선생이 자신도 모르는 원리로 카즈사를 불러온 것도.
카즈사가 24시간 후엔 다시 홀로 남겨져야 할 스승의 안위를 걱정한 선의로 바깥에 나선 것도.
선생에 의해 소중한 일상이 망가진 레이사가 그런 카즈사와 엮여버린 것도.
그 누구도 악의를 가지고 행동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최악의 결과가 나와버렸다.
더 골치 아픈 류의 일이다.
악의를 지니고 행한 일을 판단하기란 어렵지 않기라도 할텐데.
자신이 봐도 황당한 결과인데, 당사자에겐 어떤 심정일까.
그런 과정, 그런 결과로 절망해버렸을 사람을 그냥 두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 것도 이상한 건 아닐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것마저도 트리니티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해버린 것에 대한 개인의 책임감일지도.
"초보자들이 자주 하는 실수지만, 사실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다보면 꽤 흔히 생기는 일이기도 한답니다. 익숙한 일을 하더라도 손이 미끄러지는 경우도 없진 않으니까요."
"뭐... 그렇지. 손님맞이용 티백을 다시마로 잘못 사서 그걸로 차를 우려 대접한 경우도 봤으니까."
"......아니 그건 좀."
말을 받아주려고 꺼낸 거였는데, 나기사의 얼굴이 진심으로 일그러지는 바람에 선생은 당황했다.
그녀에겐 선생의 경험이 티타임 자체를 모욕한 악질적인 행위로 보였다.
"아니 정말로요. 그 정도면 실수가 아니라 고의 아닌가요?"
"어? 아, 아니. 그것도 실수라면 실수였달까......"
"설마 선생님이 겪으신 건 아니겠죠? 하, 누군진 몰라도 참 지독하네요. 그럼 케이크와 다시마를, 그 두 개를 같이 먹으라고 내밀었다는 거 아닌가요? 홍차를 즐긴다는 사람이 품위도 없이, 어쩜 그런 짓을 할 수가...!"
"......"
선생은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닫는 쪽을 택했다.
세상에는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되는 진실이 있는 법이었으니.
그동안 제가 다시마차를 들이킨 것처럼 분통을 터뜨리던 나기사는 그런 선생의 눈빛을 다르게 의식한듯 흠칫 멈춰섰다.
그 뒤 최대한 자연스럽게 잔을 들어 따뜻한 차를 마시고, 다시 잔을 내려놓고서야 그녀는 안정을 되찾았다.
"후우, 죄송합니다. 계속 결례를 저지르는 느낌이군요."
"괜찮아. 이것도 선생의 일인데 뭐."
"감사합니다."
"편하게 대해줘. 아,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줘도 되고."
"알겠습... 네?"
그 말에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던 나기사의 말이 일순간 끊겼다.
"괜찮은 건가요?"
"응? 당연히 괜찮지."
"아, 아뇨. 그게 아니라......"
"?"
선생은 어수선해진 나기사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냐고 묻는 듯한 그 태도는 나기사를 더욱 당황스럽게 할 뿐인 걸 그가 알 리 없었다.
"그, 예전에..."
"응."
"제가 조금, 실례 되는 말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만......"
"...아아."
감을 잡았다는 듯, 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담장에서 말한 거 말이지?"
"네, 저는... 선생님이 내민 손을 이미 매정하게 쳐낸 적이 있었죠."
전임 선생을 비롯한 추악한 어른들을 보고, 어른이란 존재를 믿지 못해서 쳐냈다.
그 자리에서 어른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면서 자신이 뭐라고 했었나.
오만하다고 했던가?
그 이후로는 아비도스와 갈등까지 있다고 들었는데, 자신 때문에 상황이 꼬일 수 있던 일도 아니었나.
"뭘 그런 거 가지고."
"...네?"
홀로 싸워야 했을 그 힘겨웠을 경험을, 정말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선생의 태도에 나기사는 거듭 벙쪄졌다.
"그때와 지금의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지. 그건 당연한 거고,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야."
"아, 아뇨. 저는 그러니까......"
혹시 자신의 감정을 끌어내 조롱하려는 어른의 전략일까?
만약 그렇다면 박수를 쳐줄 수 밖에 없다 생각하면서도, 나기사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감정적인 영역을 물어본 건데...... 저는 하다못해 선생님이 정당한 피해보상이나 우회적인 압박을 넣을 거라 생각까지 했습니다만."
"누가 그래?"
"네?"
"아니, 그런 일이 일어나긴 하는데... 어떤 정신나간 어른이 학생 보고 그런 걸 요구해?"
"...???"
선생과 나기사 둘 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겠단 표정으로 쳐다본다.
혼란에서 먼저 벗어난 건, 남겨졌을 카즈사를 뒤늦게 떠올리고 번쩍 정신이 든 선생이었다.
"그, 미안하지만 키리후지 양. 나중에 이야기하자. 혹시라도 샬레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바로 메일로 쏴주고."
"...네?"
"그, 다시 말하지만 상황이란 건 언제든 달라질 수 있는 거거든. 네가 거기서 그랬다고 내가 딱히 무슨 감정 있고 그런 거 전혀 없으니까, 정말로 편하게 대해줘도 돼. 티타임 초대라도 해주면 더 고맙겠고. 내 세계에서 너랑 몇 번 해봐서 익숙하니까!"
"아, 아니."
"그러니까 미안해할 필요도, 조심스러워할 필요도 전혀 없어. 나는 괜찮아. 정말 괜찮으니까 하는 말이야!"
"에?"
"미안, 내가 지금 마음이 급해서...!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시간 못 내줘서 미안해!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오늘 고마웠어! 여러 의미로! 그럼!"
정말로 아무것도 담아두지 않고 다 잊어버린 사람처럼 시원하게.
선생은 횅하고 떠났다.
"......에?"
포커페이스 따위 다시마로 묻어버린 듯한.
곧바로 뇌를 이해시키기 어려운 무언가를 봐버린 것처럼 멍하니 내뱉는... 나기사를 남겨두고서.
* * *
"그러니까 금발 긴머리 검은 스타킹 기품 있는 스타일의 권력자 여자가 취향이라는 거지, 선생님은?"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거니 카즈사."
"아니면 머리에 날개 달린 흰색 장발 니삭스 취향? 아니면 그냥 분위기가, 흠... 지금 생각해 보니 둘 다 수상할 정도로 인상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흐음......"
"아니아니 진짜 얘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건데 카즈사."
"흐응, 다친 학생을 그렇게 길게 혼자 놔둘 정도로 이야기를 길게 하는 거면 분명 엄청나게 소중한 관계라는 건데 말이지."
"죄송합니다."
선생은 얌전히 백기를 들었다.
뒤따르던 카즈사가 킥킥대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D.U.로 돌아오는 길까지 기차를 타고 오지 않았다.
나기사는 그들을 위해 티파티가 이용하는 리무진을 제공하며, 선생에게 중고라도 차를 구해 이동할 것을 넌지시 추천하기도 했다.
제 세계에선 생각도 않던 일이었지만, 여기선 진지하게 검토해야겠다고. 선생은 생각했다.
케이는 처리 못한 서류가 있다면서 그들보다 앞서 샬레로 향했다.
자신 세계의 학생과 시간을 보내라는 배려가, 선생은 고마웠다.
그렇게 선생과 단 둘이 오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 한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한 것이라고, 선생은 왠지 그렇게 느꼈다.
카즈사가 평소의 텐션을 되찾은 것도 리무진에 내린 뒤였으니.
"그래서, 그 녀석은 괜찮은 거야?"
딱히 지칭하진 않았지만 누구에 대해 물어보는지 유추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괜찮을 거야. 스즈미라면 마음을 추스리는 대로 바로 자경단으로 돌아갈테니까. 그렇게 되면 레이사의 마음도 좀 더 편해지겠지."
"믿음이 강하네. 스즈미란 사람한테."
새삼 선생이 엄청난 학생들과 인연을 맺고 있다는 것을 카즈사는 새삼 체감했다.
수백, 수천이나 되는 학생들과 교류하면서도 그들의 성격과 인간상을 전부 꿰고 있는 사람이라니.
"카즈사."
"응."
"돌아가면 바로 병원부터 가. 리오나 히마리 만나기 전에 꼭 검사 받아야 해."
"어디 부러진 것도 아닌데 뭐. 걱정 마, 알아서 할테니까."
"...그래."
"그리고-"
선생은 뭔가 말하려던 것을 도로 집어넣었다.
그러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걱정하는 말이 괜히 또 카즈사의 상처를 자극하는 말이 될까봐.
그래서 대신 눈에 보이는 다른 주제로 대체했다.
"그거 아까부터 무거워 보였는데 나 좀 줘. 같이 들자."
"무겁긴 무슨. 간식이 이게 무거워봤자 얼마나 무겁다고."
나기사로부터 정말로 간식을 한 봉지 가득 받아낸 카즈사가 히죽 웃었다.
마치 승리의 미소인 양 밝디 밝은 표정이었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미소였다.
"나 괜찮아. 이 정도면 고생한 보상으론 차고 넘치지. 프레데리카 셈라도 끝내주게 맛있었는데, 다른 것들은 얼마나 맛있을까."
"고생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그 정돈 당연히 받아야지. 나도 나중에 돌아가면 맛있는 거 사 줄게."
"괜찮...... 잠깐만, 그건 좀 떙기려나."
"비싼 거 시켜도 돼."
"약속했다?"
"당연하지."
"술도 마신다?"
"되겠니."
"쳇."
"어른 돼서 오던가. 그것보다 나랑 마셔서 뭐하려고."
"아니 뭐, 가능성의 영역이랄까. 이것저것 뭐...... 그것보다 지금 어른 되고 오라고 말한 거지?"
"아이고."
평범한 대화가 이어졌다.
많은 일을 겪고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아니, 오히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잊어버리려는 것처럼.
괜찮아 보이는 사람들처럼-
"아무튼 줘봐. 그 비싼 간식 나도 한 번 들어보자."
"뭘 그렇게 궁금해 해. 선생님은 티파티 높으신 분들이랑 매일 같이 먹는 거 아냐?"
"아니 나도 거길 매일 가는 건 아니거든. 걔들 바쁘다고......"
"그런 거 치곤 분홍머리 티파티 임원이 틈만 나면 샬레로 쳐들어간다는 괴소문이 있던데 말이지."
"샬레로 오는 학생들이 한두명이 아닙니다만 카즈사 씨."
"그렇게 빠져나가시겠다?"
그래, 괜찮았다.
괜찮은 걸 넘어 엄청난 결과였다.
선생은 티파티와 아비도스 쪽 회장들과 이야기가 잘 풀린 모양이고, 자경단도 재기의 여지를 남겨두었고, 선생이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까지 도왔으니.
"어쨌든 해피엔딩이네."
"...그런가?"
"그렇지. 어딜 봐도 좋은 결과밖에 없잖아."
선생의 시선이 카즈사의 온 몸을 한 번 흘깃 쳐다봤다.
"그... 런건가."
"그런 거라고. 나쁠 게 뭐 있어. 나도 뭐, 우자와 그 녀석이 죽을 상 짓는 거 보기 싫었는데 마지막엔 좀 후련해 보였고...... 근데 돌아가면 운동은 좀 해야 되려나. 좀 뻐근하긴 했네. 하도 맞아서......"
카즈사의 말끝이 흐려졌다.
병실에서, 자신을 처음 봤을 때의 선생의 표정이 떠올라버려서.
밀어 넣었다.
꾹꾹 우겨 넣어, 생각이 다시 빠져나오지 못하게 틀어 막았다.
"조금, 고생은 했어도......"
고개를 숙이자 길게 뻗은 제 다리가 보인다.
정의실현부가 준 새 스타킹으로 가렸음에도 보이는 수 많은 반창고들.
다 터진 옷에, 끝부분이 헤지고 찢어진 치마에......
외출할 때 신경 써서 꾸미던 얼굴과 피부에 난 갖가지 상처들이 느닷없이 쓰라려 죽겠다고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다. 얄궂게도, 보아버린 그 순간에.
"뭐, 과정이 어쨌든 결과만 좋으면 다 좋은 거지."
그래도, 자신은 선생과 여기에 서 있다.
해피엔딩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선생님도 그 놈의 걱정 좀 그만-"
삐끗-
표정을 관리했다고 생각해 고개를 든 순간에 발이 걸렸다.
당황해서 팔을 휘젓게 되었다.
그녀의 눈에, 종이봉투 맨 위에서 빠져나오는 빵 한 덩이가 보였다.
"아-"
철퍽-
빌어먹게도 투명한 포장지에 싸인 빵이 지면과 충돌한 순간 끔찍한 소리를 내며 형체를 잃고 일그러지는 순간, 카즈사는 자신을 잡은 강한 힘을 느꼈다.
"괜찮아?"
선생이 받아준 덕분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하나의 빵을 제외한 간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카즈사의 눈은 떨어진 빵 하나에 계속해서 꽂혀 있었다.
"카즈사?"
"아, 아... 어어. 괜찮아. 고마워 선생님."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카즈사가, 느닷없이 강한 힘으로 자신을 보는 선생의 팔을 잡고 돌려 억지로 앞을 보게 했다.
"참 나, 자꾸 이런 실수를...... 진짜 미안, 선생님. 하나 잃어버려서."
"겨우 하난데 뭐. 많이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
선생은 뒤에서 보이도록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기사에게 그랬던 것처럼, 정말로 괜찮다고 말해주려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자, 가자! 돌아가자! 사실 나도 안 먹어본 티파티 간식 꽤나 되거든! 어떤 맛일지 궁금하니까 가서 하나하나 까보면서 시간 보내자."
"......응. 으응. 그래야지."
"오고 있지 카즈사?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거 말고도 먹을 거 많이 있으니까. 같이 먹고 남은 거 나 혼자 먹어도 일 주일은 먹을걸?"
"으... 응."
힘겹게 대답하며, 신발을 끄는 소리가 뒤쪽에서 들렸다.
"많이, 넣어줬으니까."
툭, 하고.
머리가 등에 닿는 느낌이 났다.
선생은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게 되어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거보다도 많이, 더 많이 있었는데......"
"카즈사."
"다 떨어뜨려서-"
결국, 막지 못한 감정이 흘러넘쳐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지기 시작했다.
"미, 미안해 선생님."
"카즈사."
"내가 괜찮다고 했는데, 어울려달라고 한 주제에......"
선생은 눈을 질끈 감았다.
주먹 쥔 손이 강하게 떨렸다.
"선생님 말 들었어야 했는데......"
"카즈사, 괜찮아."
해피엔딩 아닌가.
해피엔딩이잖아.
"내가 실수로 부른 거였지만 결과적으로 잘 끝났고, 너도 너무 잘해줬어. 미안해. 너를, 아무 상관도 없는 세계로 끌려오게 하고 다치게 해서-"
"잘 하고 싶었는데."
"너 잘 했어."
"이것보다 더, 더 잘 하고 싶었는데... 선생님을,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카즈사."
"죄송해요."
몸도, 마음도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린 자신.
그런 자신 때문에 편안하던 집 밖으로 나와 무릎이 꺾일 정도의 풍파를 맞고 지쳐버린 어른.
눈에 보이는 보상이라곤 간식 봉다리 달랑 하나.
뭐가 해피엔딩이야 이게.
해피엔딩이면 어째서 이런 눈물이 나오는 건데.
어째서 이렇게 부끄럽고, 죄스럽고, 미안한 마음 밖에 없는 건데.
이것보다는, 나아야 했는데......

"죄송해요......"
"......"
"죄송해요 선생님......"
그렇게 한참을, 정적 속에서.
선생은 뒤를 돌아보지 못한 채, 끅끅거리며 우는 소리를 등으로 버티며 받아주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누구도 원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다치고 긁힌 끝에 도달해버린, 그런 엔딩.
자신이 제대로 지켜주지 못해서, 상처 입은 학생의 울음을 등으로 받아낼 수 밖에 없는 엔딩.
참으로... 빌어먹을 새드엔딩.
선생이, 가장 싫어하는 유형의 엔딩이었다.
* * * * *
카즈사와 선생의 후일담으로 2화 정도 더 쓰면 2부가 마무리될 것 같슴다.
사실 2부는 2부보단 1.5부 느낌 나게, 트리니티를 배경으로 여러모로 망가진 키보토스 모습을 짧고 빠르게 훑고 넘어가고자 하는 게 목표였는데 이 정도 분량이면 잘 된 건지 모르겠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생각보다 길게 썼다는 느낌인데...... 분량 조절 좀 더 신경 써봐야겠네.
댓글 9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머리가 등에 낳는 -> 닿는 의 오타인가?
해당 부분 수정 완료해슴다
다행히 소소한 해프닝이었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