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의 걱정과 달리, 호시노는 원래의 세계로 무사히 돌아왔다.
순찰을 돌던 골목길에. 처음 서 있던 곳에서 한 치의 떨어짐도 없이 그 장소 그대로 돌아온 호시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학교에서 자신을 보자마자 울고불고 난리치는 후배들을 달래는 것.
24시간이란 시간의 흐름은 두 세계에서 모두 똑같이 적용되어, 두 명의 시로코가 각각 정신적인 의미와 물리적인 의미로 처참한 꼴이 된 데 이어 호시노까지 연락두절 실종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남은 이들이 발칵 뒤집혀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때문에 호시노가 리오에게 선생의 소식을 전할 수 있던 때는 초상집 되기 일보직전 상태던 후배들을 한참을 어르고 달래서 수습한 뒤였다.
"그래서."
호시노로부터 24시간 동안 다른 세계에서 있었던 모든 이야기를 들은 뒤 차분하게, 그러나 끓어오르는 열의가 분명히 새어나오는 어투로 리오는 입을 열었다.
"결국 현재로서는 선생이 카드를 쓰는 것만이 그쪽과 이쪽을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말이구나."
"그런 셈이지. '지하생활자'라 했던가. 그 녀석의 능력을 뚫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그거 밖에 없다고 했어."
시로코의 상태 같은 민감한 부분을 제외하고 세계 간 연결을 위해 노력중이라는 사실을 알린 호시노에게, 느닷없이 손에 쥐어진 싯딤의 상자 속 아로나로부터 간략한 정보를 전달받은 선생은 그 덕분에 어렴풋 가지던 예상을 확신으로 굳힌 뒤 자신의 생각을 전해주었다.
게마트리아에 대해, 그놈들에 대해 최대한 학생들과 접촉을 피하게 하고 싶다는 바램이 연속으로 깨지는 것에 한탄하면서.
현실조작.
그것으로 요약될 수 있는 지하생활자의 능력에 대해 들었을 때 리오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색채 사태 때 조우한 아트라하시스의 방주. 정확히는 그것을 둘러싸고 있던 방어막의 다차원 간섭 기능이었다.
모든 확률적 가능성을 긍정하는 과학적 이론을 실재로 구현해낸 것도 충분히 경악스러운 일이었건만, 오로지 개인의 능력만으로 그 이상의 범주를 해내는 신비에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그런 적이 존재한다는 건...... 저쪽에 머물고 있는 선생의 안위도 장담할 수 없다는 거잖아."
"그건 괜찮을 거야. 선생을 납치한 망할년이 직접적인 위해를 끼치는 것 정돈 막아줄 거라 했거든. 솔직히 확신도 신뢰도 못하겠지만."
"그게 그 작자가 직접 한 말이라면, 선생님을 지키겠다는 말이 허언은 아닐 거에요."
끼어들어 대답한 건 리오가 아닌 히마리였다.
모든 것을 건 차원이동 계획이 실패하고 실의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던 그녀는 리오로부터 호시노에 대한 소식을 듣고 언제 뻗어 있었냐는 듯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어쩌면 태우고 있는 게 증오일지도 모른다고, 초췌한 몰골에서 특히나 눈에 띄는 눈빛을 보는 호시노는 그렇게 생각했다.
"세계를 넘어가는 과정에서 그 여자를 직접 만나봤다고 하셨죠, 호시노 씨."
"그래. 선생님을 끌고 간 게 자기 세계 최후의 기회라나 뭐라다나. 그러고서 한다는 말이 선생님을 지켜달라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지만."
급박한 상황이라 협조하긴 했는데, 역시 그냥 한 방 쏴버리고 왔어야 했나.
호시노가 속으로 다른 세계의 아로나를 잘근잘근 씹어대는 동안 히마리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애초에 그 '최후의 기회'라는 게 뭘까요?"
"발언과 상황 간의 간극이 신경쓰이는 거야, 히마리?"
"네. 그 여자의 말의 심각성에 비해서 호시노 씨가 봤다는 그 쪽 세계는... 실제 상황이 최후 운운할 정도로 급해보이진 않아 보이거든요."
"아니, 충분히 급하다고."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호시노가 두 천재 앞에서 반문했다.
"그 쪽 세계도 키보토스고 우리 쪽이랑 차이는 있어도 역사와 사건의 흐름이 엇비슷하게 흐르고 있다니까? 그렇다면 색채의 침공도 그대로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 선생도 그걸 경계하고 있다고 내가 말했잖아."
"그 말이 선생님 입에서만 나왔으면 저도 그러려니 했을 거에요 호시노 씨. 그런데 선생님을 만나기도 전에 그 여자가 먼저 그런 발언을 꺼낸 건. 그 여자 왈 '최후'라는 극단적인 멸망에 대한 경계를 멀쩡한 우리 쪽 선생님을 납치해 가는 걸로 증명했다면, 그건 그냥 흘러넘길 수 있는 말로 끝낼 순 없어요."
"내 생각도 히마리와 같아. 당신이 본 것들에 대한 서술과 당신을 통해 전달받은 선생의 말들을 종합해서 머릿속에서 이미지를 그려봐도, 아비도스가 카이저가 먹히기 직전의 상황...... 이었다는 걸 제외하면 당장 대처하지 않으면 위험하겠단 생각이 드는 위협은 없었어."
"카이저가 키보토스를 집어 삼키려 했던 상황이었는데도?"
"아비도스를 정복하고 전진기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면 그랬겠지. 내가 생각해도 그 순간부터의 키보토스의 미래는, 카이저의 괴뢰국가로 전락한다는 '멸망'의 시나리오의 시발점이 된다 해도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봐. 하지만 호시노 당신이 넘어간 시점은 선생이 그것을 막아냈고, 급한 불은 안전히 껐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지. 그런 상황에서 당신에게 그런 발언, 그런 태도를 보였다는 건 다소 불균형이 존재해."
"불균형이라면?"
"쉽게 말하자면, 호들갑 떠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에요. 실제 상황에 비해서 대비하고자 하는 미래는 너무 스케일이 커보여요."
물론 세세히 따지면 카이저가 절치부심해서 반격을 시도한다던지 하는 변수가 없진 않을 거라 생각되었지만, 다른 학원들은 팝콘 까먹으면서 보고만 있겠냐는 게 그들의 생각. 무엇보다 이미 한 번 선생에 의해 제압당한 시점에서 카이저의 야욕이 성사될 가능성은 한 없이 낮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다른 세계의 아로나가 경계하던 '멸망'은 카이저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선택지 하나가 없어지고 남은 유일한 선택지의 정체도 확실했다.
"이미 호시노 씨가 언급했죠. 색채의 침공...... 저쪽에서 경계할만한 미래의 재앙이 있다면, 그것 말곤 없을 겁니다."
"그건 당연한 거-"
당연한 거 아니냐고 물으려던 호시노는 입을 다물었다.
이미 답이 나와버린 질문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탓이었다.
"...저쪽 세계 사람들이 색채에 대해 알 리가 없겠구나."
"네, 두 세계 간 시간의 흐름이 다릅니다. 물론 선생님이 가서 멸망을 대비하고 있다니, 선생님과 끈이 닿은 몇몇은 색채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을 거라 하는 게 좋겠습니다만, 그건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이 건과는 완전한 별개의 사항이에요."
"그렇지. 그러한 정황을 배경으로 한다면, 저쪽에서 선생을 납치해간건...... 색채를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밖엔 설명이 안 돼."
도돌이표 같이 들리는 리오의 결론.
하지만 거기까지 들은 순간 호시노는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거 결국, 그 납치범 여자가 아직 쳐들어오지도 않은 색채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다는 얘기 아냐...?"
"색채의 침공에 대비해야 하며, 그것을 이미 성공적으로 막아낸 경험이 있는 선생님을 납치를 빙자한 초빙으로 데려와 해결하려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많은 것들이 맞아 떨어집니다. 그쪽 사람들한텐 낯선 이방인일뿐인 선생님 한 분 데려간다고 뭘 할 수 있는건지, 그 이전에 대체 거기서 이쪽 세계를 어떻게 관측한 건가 하는 신경쓰이는 점들은 우선 제쳐 두고서요."
직접 키보토스로 침공해오기 전까진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던 외계의 존재.
분명 이 세계보다 과거의 시점일 저쪽 세계에서 색채를 아는 이가 있다는 건, 칼을 들고 싸우던 고대 시대에 총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이가 있는 것과 같은 비상식적 기이였다.
말이 안 되는 상황. 만약 그런 게 가능하려면......
"미래를, 예지했다...?"
"혹은 회귀자일수도 있지."
"선생님을 차원을 넘어 납치할 정도의, 그것도 아무나 마구잡이로 손에 잡힌 거 끌고 간 것도 아닌 하나의 세계만을 콕 집어 데려간 게 분명할 정도의 초월적 능력을 지닌 AI입니다. 만약 그런 능력조차 편린에 불과하다면...... 이미 멸망해버린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오거나, 혹은 아예 시간을 되돌려 리셋시켰다는 가설도 배제할 순 없겠네요."
미래예지든 회귀든 시간여행이든.
머리가 아파진 호시노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엄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듣는 그녀도, 말하는 두 사람도 모두 느끼는 황당한 부분은, 그것들을 비합리적 망상으로 치부하기엔 키보토스는 이미 너무 많은 불가능을 현실로 겪어왔다는 것.
그 모든 것이, 말하고도 어처구니 없는 가설에 합리적인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 * *
그 뒤로도 대화가 이어졌지만 이렇게 논의해도 결국 이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여전히 없으며, 저쪽에서 선생이 부를 수 있는 수단도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는 결론만이 나올 뿐.
어차피 이런 분야에선 자기가 열 명이 있어도 도움이 전혀 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던 호시노는 대화 중 자신이 끼어들만한 건덕지가 없게 된 시점에서 자리를 빠져나왔다.
이제는, 미뤄두었던 다른 일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기차를 타고 아비도스 역에 내리자 어둑어둑 해 질 무렵이었다.
학교로 돌아오는 길마다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네온 사인의 빛이 눈을 때리며 지나가는 듯 했다.
[어서오세요, 부흥의 거리 아비도스! 오늘도 영업 중입니다]라는 홍보 문구를 시작으로- 사막횡단 투어 시작, 비나 꼬치 판매 중, 모래축제 명물 모래철판구이 영업 재개......
'수익의 일부는 모래축제 부흥재단의 축제 복원 및 지역문화 진흥 사업에 사용됩니다...? 하하...'
간판 바로 밑에 다른 색깔로 강조된 글귀를 보자 저릿함이 느껴진 동시에 쓴웃음이 나왔다.
모래축제라, 아직 빚도 가 갚지 못한 마당에 모래축제의 부활을 바라는 소리를 일반 거리에서 듣게 되는 날이 오다니.
까마득한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 아비도스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저런 말을 들어본 적 있었나?
편의점조차 없어서 한참을 걸어야 했던 기억은 이미 까마득해진지 오래였다.
선배의 계약서가 얶힌 그 사건 이후 네프티스와 하이랜더의 협력으로 교통망이 개선되고, 사막횡단철도 채권에 사모펀드로서 참여했다 도산하는 바람에 그대로 아비도스에 정착한 이들로 인해 상권까지 회복되었다. 불량배들의 소굴인 몰락한 학원도시의 치안도 좋아졌고, 과거의 영광을 묻어버린 모래 사막이 아예 아비도스의 아이덴티티로서, 심지어는 잊을 만하면 지하에서 튀어나와 모래폭풍을 일으키는 망할 기계 뱀까지도 좋은 관광 요소로 활용되기 시작한 시점에선 정신이 대략 멍해지기까지 했던가.
사막의 모래에 묻혀 있던 도시 위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자신은 몰라도 지금의 아야네와 세리카는 졸업하기 전에 빚을 다 갚는 것을 보면서 졸업할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희망이 어느 때보다도 크게 보였다.
문득, 이렇게 바뀐 일상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단 사실에 호시노는 잔잔한 충격을 받았다. 모든 것이 바로 잡아지고 있었다. 유메 선배가, 내가 만난 평행세계의 유메 선배가 아닌 내가 떠나보낸 이 세계의 유메 선배가 바라마지 않던 꿈 같은 일이 현실로 벌어지고 있었다. 슬픔과 고통을 견뎌내며 쉴 새 없이 발을 놀렸던 자신의 노력들이 보답받고 있었다.
선생이 온 이후로 일어난 기적들.
괜시리 마음을 간질거리게 하는 빛 사이를 지나, 학교에 도착한 호시노를 기다리고 있던 세 사람이 맞아주었다.
"시로코 쨩은?"
"그게......"
왠지 머뭇거리는 표정들.
호시노는 직접 확인하기 위해 시로코가 있다는 회의실 문을 열었다.
"시로코 쨩."
"......호시노 선배."
힘 없이 고개를 드는 눈에서 여전히 빛은 보이지 않았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자, 노노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선생에 대한 소식을 전했는데도 이렇다는 뜻이었다.
"얘기는 들었지? 선생님은 무사하니까, 너무 걱정 안 해도 된다고."
대답 없이 힘 없이 주억거릴 뿐인 고개.
어째서 후배들이 그런 안절부절 못 하는 반응들이었는지, 호시노는 알게 된 동시에 난감해졌다.
오히려 지나치게 조용해서 무서울 정도.
여기서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때, 목소리가 들렸다.
"...있었지?"
"응?"
"나한테 화나 있었지? 구하지 못했다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시로코 쨩."
"그래서, 그래서 내가 아닌 호시노 선배가 불려간 거잖아. 응, 나라도 그랬을 거야. 나 같은 건 꼴도 보기 싫어서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시로코 쨩......"
도저히 그 시로코 입에서 나오리라 상상도 못할 소리에 뒤의 세 사람의 표정이 어두워진 동안.
호시노는 눈을 끔뻑였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그런 소리를 한 후배를 빤히 보다가.
호시노는 그대로 손날을 들어 시로코의 머리를 내리쳤다.
딱! 하는 경쾌한 소리가 방 안에 시원하게 울려퍼졌다.
"...아야."
"호, 호시노 선배?!"
"뭐... 뭐하는 거야 선배!"
"선생이 시로코 쨩한테 전해달라 했던 말 첫 번째."
당황하던 이들도, 갑작스런 충격에 당황하던 시로코도 한순간에 멈춰섰다.
"뭘 생각하든 그거 아니니까 괜히 혼자 자책하지 말 것."
"어...... 어?"
"그리고 두 번째."
시로코의 손목을 잡고 어어 하는 기색의 그녀를 벌떡 일으켰다.
"가끔은 일어나서 바람도 쐬고, 자주 돌아다니면서 뭐라도 하기."
"자, 잠깐-"
"세 번째는-"
시로코는 거기서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나가는 호시노에게 당황하면서도 아무 저항도 못하고 끌려갔다.
호시노의 입을 대신해 전해지는 선생의 말엔, 그 정도의 마력이 있었다.
밖으로 나와 얼마나 걸었을까.
익숙하다 못해 눈 감고도 걸어갈 수 있을 목적지...... 에서 살짝 떨어진 거리에 있는 가게에 들어가자, 낯익은 이가 대책위원회를 맞아주었다.
"으헤, 데려왔다고 마스터."
"음. 수고했네 호시노 씨. 시로코 씨도 오랜만에 보는군."
"마스터?!"
뜻 밖의 장소에서의 전혀 예상 못한 만남에 가장 당황한 것은 역시 세리카였다.
"어떻게 된 거야? 그것보다 아직 이른 저녁 시간인데 왜 손님들이 하나도 없는 건데?"
"문을 좀 일찍 닫았네. 오늘따라 재료가 빨리 소진됐거든. 아, 다섯 명 정도 먹을 분량 정도만 빼고 말이지."
"이래서 나 오전까지만 일하라 한 거였어?! 괜찮은 거 맞아? 아니 가게 새로 연 지 얼마나 됐다고...!"
"걱정해줘서 고맙지만 이 정돈 괜찮아 세리카 씨. 한 번 정도 이런다고 큰일 나진 않아."
태연하게 말하지만 그는 오직 대책위원회를 위해서 손님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피크타임 수익을 포기한 셈이었다.
음식 장사하는 사람에게 그게 얼마나 큰 결단인지 모를 리 없던 대책위원회가 당혹스러워하는 것처럼, 부탁한 호시노도 미안함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무리한 부탁을 한 것도 미안한데, 들어줘서 고마워 마스터."
"내가 받은 게 얼마나 많은데, 이 정도는 보답이라 하기도 쑥스럽지. 금방 준비되니 우선 자리들 앉게나."
"나, 나도 도울게!"
팔을 걷고 나선 세리카까지 붙은지 불과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수많은 접시들이 턱, 턱, 턱하고 탁자 위에 수북히 쌓이기 시작했다.
"아야네 쨩, 거기 접시 좀 더 밀어주세요! 이거 올릴 데가 없어서요!"
"마스터, 다른 음식들도 할 줄 알았던 거야? 뭐가 엄청 많은데?!"
"라멘으로 정착하기 전까지 이것저것 많이 시도해봐서 말야. 간만에 실력 발휘 좀 해봤네."
아무렇지 않게 말하며 마지막 접시까지 내보낸 마스터는 후, 한 번 숨을 내쉬고 주저 없이 앞치마를 풀었다.
"떨어진 재료를 채워야 해서 말야. 잠깐 나갔다 올테니, 가게 좀 봐주겠나?"
곧바로 이어진 대책위원회 학생들의 열렬한 감사가 쑥스러운듯 평소보다 빠른 잰걸음으로 마스터가 나간 뒤.
호시노는 바로 옆에 앉은, 여전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안벙벙한 시로코에게 수저를 내밀며 못 다한 말을 이었다.
"밥부터 든든히 먹고, 자기 '출장' 갔다 올 때까지 몸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볼 것."
"......"
"세 번째 말이고 가장 강조해서 한 말이야."
특정 단어에서 힘 주어 말한 호시노를 멍하니 보던 시로코가 떨리는 손으로 수저를 잡았다.
손이 비게 된 호시노는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럴 때 타이밍 못 맞춰서 미안하지만 먼저 먹고들 있어. 아저씬 잠깐 바람 좀 쐬고 싶어져서 말야~"
"정말 갑자기인데요...?"
"아, 호시노 선배 설마 화장-"
"세리카 쨔앙?"
"히익......"
스산한 눈빛에 세리카는 실언이 나오려던 입을 황급히 닫았고.
서늘한 미소로 후배를 제압(?)한 호시노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다 멈칫했다.
"앗, 미안. 네 번째 말이 있는데 까먹었어."
"...?"
"샬레에서의 약속, 잊지 않고 있으니까 돌아오면 같이 하자고."
순간 눈이 동그랗게 떠진 시로코를 보는 표정이 상당히 음흉했다.
"선생이랑 무슨 비밀 약속을 한 거야 시로코 쨩? 선생한테 캐물어도 둘만의 약속이라면서 절대로 말 안해주려 하고. 으헤, 아저씨 질투나는걸. 선생 출장 갔다오면 나도 부탁해볼까나. 같이 낮잠이나 한 번 자자고~"
시도 때도 없이 샬레에 기어들어가 낮잠 자던 과거는 싹 잊은 표정으로 손을 저으며 호시노는 정말로 밖으로 나갔다.
왠지 덩그러니 남겨진듯한 모양새에 잠시 어색함을 느끼던 찰나.
노노미 쪽에서 먼저 달그락 소리가 나왔다.
"음, 이거 맛있네요! 역시 마스터 요리 솜씨는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어...... 그럼 저도 한 번."
"아야네, 그 앞에 거부터 먹어봐. 마스터가 강하게 추천하더라고!"
노노미를 따라 두 사람도 식사를 시작했다.
여전히 수저만 쥐며 굳어버린 시로코를 최대한 자극하지 않으려, 자연스럽게.
여전히 선생의 전언을 곱씹고 있을 그녀가 자연스레 참여할 수 있도록. 쓸데없이 자극하지 않도록.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식사를 이어갔다.
마침내 시로코가 수저를 들고 국 한 술을 떴을때도, 그녀들은 서로의 그릇에서 눈을 떼지 않고 아무 일 없는 듯 식사를 이어갈 뿐이었다.
원래 그게 맞다는 것처럼. 일그러진 일상의 조각을, 조금씩 되돌려 놓기 위해서.
그러기 위한 기다림이었다. 외면이 아닌 따뜻한 침묵일 뿐이었다.
......크흑-
몇 번 뜨거운 국물을 목으로 넘기던 시로코가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을 때도.
폐가 될까 울컥한 감정을 제대로 억누르지 못해 흘러나오고 마는 흐느낌도. 국물의 김에서 나오는 아직 뜨거운 온기로 조심히 덮여졌다.
옆에 앉은 노노미가 조심스레 손을 잡아주고, 세리카와 아야네도 필사적으로 감정을 참아내며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런, 조금의 차이만 있을 뿐인 대책위원회의 평범한 일상의 식사가 한동안 이어졌다.
* * *
"들어와서 같이 먹어도 되는데 말야."
"응, 괜찮아. 계속 누워있었는데도 신기하게 배가 안 고파."
밖으로 나온 호시노는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다른 쪽 시로코가 서 있는 벽에 등을 기댔다.
"언제 일어난 거야?"
"얼마 안 됐어. 츠카츠키 리오에게 사정도 들었고."
"그럼 능력을 써서 여기까지 왔다는 말인데...... 괜찮은 거 맞아?"
"응, 완전 괜찮아...... 라고 말하고 싶긴 한데."
이곳으로 오는 포탈을 열려다 토해버린 피가 묻은 손을 뒤로 숨기며, 시로코는 말을 이었다.
"좀 많이 피곤하긴 하네. 능력을 쓰는 건 자중해야 할 것 같긴 해."
"으헤, 그렇게 무리해서 올 필욘 없었는데."
"응, 약한 나의 상태를 보러 온 거였어. 그런데... 다행히 괜찮을 것 같네."
두 사람은 잠시 입을 닫았다.
미약한 흐느낌 소리가 가게 밖까지 들려왔다.
"선생님은, 괜찮아?"
"응, 걱정할 필요 없어. 출장 좀 길게 갔다 오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
"정말로?"
"......그럼."
확신이 담긴 진심이 아니라는 건 말하는 본인도 알 수 있었다.
길게 한숨을 내뱉은 호시노의 표정에 음영이 졌다.
"선생은 잘하고 있어. 잘하고 있지만...... 모르겠어. 그 세계는 선생에게 너무 적대적이거든."
"그 세계의 아비도스가 선생의 아군이라고 들었어."
"으헤, 맞아. 거긴 내가 죽고 유메 선배가 살아있는 세계였거든. 시로코 쨩은...... 뭐하고 있을지 모르겠네."
"응, 나라면 어떻게든 살아 있을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선배는, 괜찮아?"
"응? 뭐가?"
"......그냥, 괜찮냐고."
호시노는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가져갔다.
선생의 부름을 받아 넘어가기 전엔 비었으나, 지금은 손 끝에서 그 세계의 유메에게 받은 선물의 무게가 담긴 것을 느끼며.
"신기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아."
"응, 정말 괜찮아 보여. 다행이네, 그거 때문에 또 폭주하면 또 어떻게 때려 잡아야 하나 걱정했잖아."
"으헤, 말하는게 상당히 자유분방해졌네 시로코 쨩. 내가 정신 차리고 싸우면 승패를 장담하긴 어려울텐데 말이지~"
"응, 그래봤자 어느 세계서든 내가 이겨. 허접 선배."
정색한 선배와 뻔뻔한 후배 사이에서 오가는 유치한 눈싸움.
그러다가, 무언가를 눈치챈 호시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시로코 쨩도 괜찮아보이네."
"......응."
아주 괜찮진 않지만, 이라 덧붙이며 시로코는 말을 이었다.
"이제는, 전처럼 아프진 않아.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여전히 청산해야 할 업보가 너무 많은데."
"착실히 갚아가고 있잖아, 시로코 쨩은."
"이래도, 되는 걸까."
"그래도 되는 거야. 시로코 쨩은 올바른 마음을 잃지 않으면 되는 거고, 그런 시로코 쨩의 마음을 알아주는 우리가 있으니까."
시로코는 호시노를 쳐다봤다.
여유로운 미소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그 모습이, 왠지 어른스러워 보였다.
원래도 후배들에게 든든한 선배였지만.
왜인지 모르게,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선배에겐 설명하기 힘든 훨씬 단단한 무게가 느껴졌다.
'어른, 인건가.'
스스로를 희생해 자신을 구해낸 어른을 떠올렸다.
자신의 선생님의 유지를 이어받아, 자신과 호시노를 구해낸 기적을 만든 어른도.
몸은 어른이지만, 여전히 학생인 자신이 언젠가 도달할 수 밖에 없는 이상향......
"...음?"
호시노는 문득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머지 않아 그쪽 방향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들도, 호시노를 발견하고 살짝 놀란 눈치였다.
"흥신소? 으헤, 여기서 보게 된 걸 보니...... 쫓기던 일은 잘 해결됐나보네."
"흥, 당연하지! 우리가 그런 잡졸들한테 당할 리가 없잖아? 시원하게 반격해줬다 이 말이야!"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해버려서 죄송합니다죽을게요."
"그, 그러니까 진정하라니까 하루카, 진짜 괜찮으니까...!"
"...뭐, 그런 의미로 저녁이라도 먹으려 온 건데."
그렇게 말하며 카요코가 문이 닫힌 시바세키 라면 정문을 흘끗 쳐다봤다.
"오늘은 좀 일찍 닫았나보네."
"미안하지만 그렇게 됐어."
그렇게 말하며 문득 뭔가 이상하다 생각한 호시노가 방금 전까지 시로코가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최대한 남들과 접촉을 피하고 싶던건지, 그녀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인사 좀 시켜주려 했더니. 호시노는 왠지 입맛이 썼다.
"거기 뭐라도 있어?"
"응? 아니야, 아무것도. 그것보다 아루 쨩......"
"으, 응?"
갑자기 친근한 듯 부르는 모습에 살짝 당황한 아루였지만, 다른 세계의 그녀의 모습을 겹쳐보고 있던 호시노는 실실 웃고만 있었다.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아루 쨔앙."
"가, 갑자기 뭔데 이 거리감은? 우리 이런 사이까진 아니었잖아?"
"혹시라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아비도스 전학을 희망하고 있다면 말야, 우리는 신입생이든 편입생이든 언제든지 환영이라고?"
"진짜 갑자기 무슨 소린데?!"
"헤에, 아루 쨩.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거야? 뭐, 나는 재밌어보이니 찬성!"
"아니거든?! 우, 우리가 전략적 협력 관계라지만 전학까진 그래도...!"
"그렇다면 협박 받고 있는 건가요."
"......어?"
그 와중에 또 이상한 곳에서 버튼이 눌린 하루카의 표정이 험상궂게 일그러졌으니.
"가, 감히 아루 님을 협박해서 납치하려고...!"
"하루카? 그거 아니거든? 그것보다 일단 진정하고 폭탄부터 집어넣-"
"아루 님을 납치하려는 죄, 주... 죽음으로 갚아주세요!!!"
"그니까 그거 아니라고! 그것보다 진짜 안 돼! 여기서 터뜨리면 여러모로 아웃이라고 하루카!!!"
"죽어주세요죽어주세요죽어주세요!!!!!!"
"하루카아아아아아!!!!!"
"아하하! 역시 이런 전개가 재밌다니까!"
"하아, 진짜......"
급작스레 폭탄을 들고 날뛰는 하루카를 기겁해서 말리는 아루와 웃으면서 말리는 무츠키를 보며 골치 아픈 듯 미간을 누르던 카요코의 날카로운 시선이 호시노를 향했다.
왜 굳이 쓸데없는 말을 했냐는 힐난의 의미가 명백한 시선을 호시노는 으헤, 웃으며 받아넘길 뿐이었다.
역시, 성장했다지만 아이는 아이일 뿐.
아직 자신이 어른이 되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남은 듯 했다.
'그러니까, 무사히 돌아와만 줘 선생님.'
아직은 어른에게 배우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으니.
존경하고, 좋아하는 어른의 무사귀환을 바라며, 호시노는 같은 달을 올려보고 있을 선생의 모습을 그렸다.
* * *
호시노의 바람대로, 샬레에서 보이는 창문으로 달을 올려보며.
잠시 마음을 다잡는 시간을 가진 선생은 싯딤의 상자를 들었다.
자신의 세계의 상자와 같은 비밀번호를 입력해 싯딤의 상자에 접속하고 눈을 뜨자, 익숙한 공간이 다시 한 번 선생을 맞아주었다.
익숙하지만, 낯선 사람까지도.
"선생님."
"아로나."
아로나가 성장한 그대로의 모습이라 생각될 정도로 성장한 소녀가 덤덤히, 그러나 두려워하는 눈빛을 숨기지 못하고 선생의 시선을 받았다.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던 선생은 눈을 감았다.
침묵.
아로나의 입장에선, 그조차 형벌로 느껴졌다.
그러면 안되었음에도 그녀는 그것이 기꺼웠고, 사실이기를 바랬다.
설령 선생이 자신을, 학생을 증오한다한들 그 모든 것은 자신의 원죄였다.
"......선생님."
"아로나."
다시금 같은 대화가 이어지고, 선생이 눈을 떴다.
할 말을 정했다는 듯.
그 표정은 함부로 감정을 재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덤덤했지만, 차갑게 굳어있지도 않았다.
그런 얼굴을 한 선생이 말했다.
"나는, 너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구나."
이미 각오한 바였음에도.
아로나의 표정은 너무도 쉽게 무너져내렸다.
* * * * *
TMI) 선새니는 애를 때려서 정신 차리게 하라는 말은 하지 않으셔따
호쪽아......
좌우지간 이걸로 1부라 할 수 있을 아비도스 편은 끝.
지금까지 작품을 사랑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림다.
앞으로도 작품이 사랑받을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보겠으며, 선생이 선생아니야 돼버려도 할 말 없는 상황을 선생답게 어떻게 풀어낼지 기대해주시면 감사하겠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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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주마 아루나
모든 세계의 아로나는 쿠소아로나구나

아로나 초기화 필요
쵸오모시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