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정리한 자료를 책상에 탕탕 쳐서 평평하게 만들고, 파일에 끼우고 가방에 조심조심 집어넣었다.
"아비도스로 가십니까?"
"응, 린이 게헨나랑 트리니티 쪽을 중재해주기 전까진 그 쪽에 집중하는 게 좋겠지. 엇, 고마워."
선생은 반사적으로 인삿말을 내뱉으며 오토마타가 건네준 겉옷을 받았다.
"그것들은 저만큼의 인공지능이 없으니 일일이 반응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습관이지 뭐."
태연하게 말하면서도 선생은 뭔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사무실을 돌아봤다.
히마리는 선생의 요청대로 케이와 함께 정비를 마친 5대의 오토마타를 샬레로 보내왔다.
이 세계는 자신에게 한없이 불친절한 세계인만큼 선생은 그것들을 샬레의 경비로 쓰기로 했고, 1층 로비에서 안내 겸 경비를 맡은 2대를 제외한 3대는 윗층 사무실과 휴게실을 중심으로 순찰 및 잡일을 맡겼다.
인원수는 어쨌든 늘어난 덕분에 적막하던 샬레에 생기는 돌게 되었지만, 자신의 세계에선 오토마타가 아니라 학생들의 도움을 받는 것에 익숙했던 선생은 그럼에도 뭔가 삭막하단 느낌을 떨칠 수 없었으니.
유우카의 잔소리.
호시노의 여유로운 목소리.
히나의 나긋한 인삿말.
미카의 침묵을 깨부수는 하이텐션.
시로코의......
누군가와 정답게 나누던 대화를 무심코 그리워하던 선생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젠 내 옆에 케이가 있고, 나름 협력 관계를 맺은 학생들도 있잖아. 난 혼자가 아니야.'
이 세계에 가르치고 이끌 '학생'이 있는 이상 '선생'인 자신의 존재의의는 충분했다.
심호흡을 한 번 크게 내뱉고, 선생은 문 밖으로 걸음을 떼기 전 케이를 돌아봤다.
"그럼 샬레를 부탁할게 케이."
"네, 지시하신 서류 분류 작업은 저나 오토마타도 가능한 간단한 작업이니 걱정 마십시오."
찌이익-
장담하자마자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에 케이는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리자, 로미오와 줄리엣마냥 딱 붙은 두 장의 종이가 찢긴 것을 든 채 이쪽을 보고 있는 오토마타가 보였다.
분명 감정을 표현할 정도의 인공지능이 없는 개체일텐데, 왜인지 눈치를 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렇게 서류에 풀칠 해놓은 것처럼 중간중간 함정 카드도 있으니까, 조심해서 다루는 게 좋을 거야."
"제가 없는 사이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엿을 드신 듯 하군요."
"감당해야지 어쩌겠니, 뭐. 그럼 나 진짜 나간다?"
"네, 수고하십시오 선생님."
사무실을 나선 선생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로비에 어색하게 서 있다 선생을 보자 각 잡은 경례를 선보이는 오토마타들에게 손을 내저으며 선생은 샬레 밖으로 나섰다.
저거 좀 하지 말라고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떼는 선생의 목적지는 말했듯이 아비도스.
그러나, 보다 정확한 목표물은 아비도스 학생들이 아니었으니.
'아루......'
이 세계의 자신으로 인해 아비도스를 배신하고 카이저 측에 붙어버렸다는 흥신소 68의 사장.
카요코, 무츠키, 그리고......
'우선은, 아비도스 아이들 먼저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밀어넣고, 선생은 기차에 올랐다.
애석하게도 저번과 같은 아이들과 마주쳤는지, 중간에 또 커피잔에 맞아버렸다.
* * *
"중간에 소나기라도 맞았나보네요, 선생님."
"익숙해졌어. 그만 익숙해지고 싶긴 한데......"
홀딱 젖은 웃옷은 지금 상황에선 문젯거리도 되지 못했다.
몇 번이고 앉았던 익숙한 자리인데, 공간을 채우고 있는 낯선 사람과 낯선 시선들.
꾸며진 웃음 정돈 띄어주는 유메를 제외하면 조금의 웃음기도 없이 싸늘하기만 한 회의실 안에서 선생은 진땀만 삐질삐질 흘렸다.
"오쿠소라 양, 내가 샬레에서 했던 말들 잘 전해준 거 맞지...?"
"네, 그 때 샬레에서 들은 것들 전부 잘 전달했으니 걱정 마세요."
그 뒤까진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싸늘하게 말하는 아야네의 태도는 그나마 양반이었다.
"아야네 쨩, 꼭 이렇게 해야 해? 기억을 잃었든 딴 세계에서 넘어왔든 '선생'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저도 내키진 않지만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걸로 보여요. 선생의 시체를 확인했다는 총학생회장과 밀레니엄의 그 아케보시 히마리가 보증까지 해줬다면 더더욱요. 그 사람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선생'의 편에 설 리가 없잖아요, 세리카 쨩."
"무엇보다 우리들, 이대로 버티기엔 이미 한계야 세리카 쨩."
여전히 웃는 낯인, 그러나 무르지 않고 단단한 목소리로 유메가 후배를 달랬다.
"더 이상 아비도스 안에서 우릴 도와줄 사람은 없다 해도 무방한 상황에 총학생회와 인근 학원들까지 돌아다녀도 성과랄 게 없었잖아."
"그렇다고 해서 하필 선생을! 샬레를 끌어들이는 건...!"
"그러니까 세리카 쨩, 난 그냥 물자 좀 받았다고 이런 게 아니야. 어찌됐든 이 사람은 우릴 나락으로 빠뜨린 그 선생과는 무관하고, 조금이라도 반격이 가능할 변수를 만들 수 있는 건 이제 샬레 말곤 없으니까."
"그렇게 말해봐야 모르겠다고 난...!"
끝까지 납득 못하겠다는 듯 세리카는 선생을 맹렬히 노려봤다.
선생은 그 눈길을 슬쩍 피했다.
마침 자신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으니 끄덕없다...... 고 생각하기엔 살의와 증오가 지나치게 듬뿍 담긴 시선이었다.
선생은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가, 장난이 아니라 진짜 자신을 물어 죽이려고 으르렁거리는 시선을 피해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하던 노노미 쪽을 바라봤다.
호시노와 시로코를 잃은 유메도 그렇지만, 노노미의 상황도 좋다고 할 순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건진 모르겠지만 네프티스 사를 박살낸 여기 선생 때문에 노노미의 경제적 기반이 완전히 망가졌다 했으니.
'노노미 쨩은...... 저 같은 거보다도 우리들을 지탱해주는 리더 같은 아이랄까요. 그쪽한테, 아니 그 사람한테 그런 일을 당하고도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으니까요. 위로해주려다 덩달아 우리가 힘을 얻는, 그런 고마운 동료에요.'
유메가 말해준 바로는 그럼에도 자신 세계의 노노미처럼 밝음을 유지하고 있는 듯 했지만.
"유메 선배."
"으응, 노노미 쨩."
"이번만은 저도 세리카 쨩 의견에 찬성이에요."
"어, 어어...?"
"시로코 쨩 때랑 같은 실수를 하는 거라고요, 선배. 뭐하는 짓거리에요 대체."
그녀마저도 이미 속이 곪아 문드러져 있음을, 선생은 그녀가 제대로 입을 연 순간 알아챌 수 있었다.
"호구 같이 그걸 또 덥썩 물고 여기까지 오면 어쩌자는 거냐고요 선배. 샬레 가서 뭘 봤는진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선생을 이렇게 빨리 믿고 태도를 바꿀 수 있는 거였나요 선배?"
"자, 잠깐만요!"
생각보다 높은 수위의 발언에 당황했는지 아야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유메 선배 뿐만 아니라 저도 같이 그 자리에서 듣고 판단한 거에요! 아니, 애초에 유메 선배가 아니라 제가...!"
"아야네 쨩. 하지 마."
유메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아야네의 변호를 잘라냈다.
"모든 판단을 내린 건 학생회장인 나야. 서기인 너한테 결정권한 같은 게 어딨다고 그래, 당장 앉아."
"그러니까! 그런 거 좀 하지 말라고요, 선배. 능력도 없는데 추진력만 좋다고 좋아질 상황이었으면 진작 다 풀렸어요."
"선배!!"
"까놓고 말해서 선배가 나서서 한 거 중에 잘 된 게 뭐가 있긴 했나요? 매번 다른 학교까지 넘어가서 고생하는 거 아니까 이런 말까지 하기 싫었는데, 노력이 아니라 성과가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요. 죄송하지만 유메 선배의 방식은 틀렸어요. 앞으로도 맞을 거란 생각도 안 들고요."
"노노미 쨩."
"계속 그러다 최후의 최후인 보루까지 전부 막혀버리면 어쩌시려고 그러는 거에요."
"알았으니까 그만-"
"그땐 저도 시로코 쨩처럼 팔아버리시게요?"
"노노미 선배!!!!"
"그만!!!!!!!!"
콰앙!!!!
처음 화를 냈음에도 격앙되는 상황에 안절부절 못하다 그 말에 경악해 내뱉은 세리카의 외침도 책상을 내리치는 아야네의 분노에 묻혀버렸다.
"그만!!! 그만 하라고 했잖아!!! 사람 말이 말 같지가 않냐고!!!"
"아야네 쨩."
"최후의 보루까지 다 없어져서!! 더 이상 시도할 방법조차 안 보여서 이러는 거 아녜요 지금!! 우리끼리 대책 찾아보잡시고 지금까지 회의해서 나온 거 있어요 그동안?! 아무것도!! 정신 차려요, 학교를 지키긴커녕 동네 불량배들한테 얻어 맞고 다니는 게 지금 아비도스 고등학교 실정이라고요!!!"
"......"
"......"
"독을 삼키더라도-"
숨이 찬 듯 허억, 하고 아야네의 말이 끊겼다.
그리고,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책상 위로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들.
"독을 삼키더라도...... 뭐라도 처먹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라고요, 우리...... 흑, 흐윽......."
"......"
"......"
회의실이 침묵에 잠겼다.
한동안 아야네의 흐느낌만이 이어졌고, 보다못한 세리카가 일어나 그녀를 달래는 사이 노노미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유메 선배. 실언이었어요."
"아니야, 노노미. 그러지 마, 네 말이 맞아. 전부... 전부 내 잘못이니까-"
"아니, 그렇지 않아."
그제서야 들려온 어른의 목소리에 그들은 순간 방 안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사라진 기분을 느꼈다.
아야네와 세리카, 유메와 노노미는 선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동정과 고통, 그 이상의 확신과 신뢰를 눈에 담아 학생들을 하나하나 바라본 선생은 하고 싶던 말을 다시금 입에 담았다.
"너희들 중 잘못이란 걸 저지른 사람은 아무도 없어."
* * *
선생이라고 그 자리가 고통스럽지 않았을까.
오히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애통함을 느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결집해 싸워내며 역경을 극복했던 대책위원회는, 학생회의 이름을 달고 있는 이 세계에선 그 이상으로 비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이 정도로 격하게 폭언이 오갈 정도로, 물론 자신의 존재가 트리거가 되어버려 이들의 울분을 터뜨려버린 것이겠지만......
'잘 된 건 아니지만...... 차라리 잘 됐다.'
차라리 자신을 겨냥해 묵히고 썩어 있던 것들을 쏟아냈기를.
무거운 마음을 추스리며 선생은 재차 입을 열었다.
"나쁜 건 학생이 아니라 어른이었다. 여기까지의 상황에 너희가 잘못한 건 분명 아무것도 없어."
"어른의 값싼 동정 따윈 필요 없어요, 선생님."
노노미는 한치의 믿음도 없는 눈으로 싸늘하게 내뱉었다.
"있어보이게 포장할 필요도 없고요. 우린 어리고, 못 배우고, 미숙하고, 사람 함부로 믿어서...... 그래서 이 꼴 난 거에요. 우린 당신 못 믿어요."
"믿지 않아도 돼. 어른 때문에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건 다른 어른인 내가 할 일이니까. 하지만 그 전에 내 말을 들어주고 이 학교를 살릴 가능성이 있는지 면밀히 판단해줘."
선생은 유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굉장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소리를 들었음에도 유메는, 여전히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쿠치나시 양?"
"네, 선생님."
"애들한테 희귀광물에 대해서도 설명 해줬니?"
"네, 대략적으로는요."
"아주 좋아. 잠깐 화이트보드 좀 빌릴게."
선생은 깨끗하게 지워져 있는 보드에 아비도스 전역의 지도를 간략하게 그리고, 먼 외곽 쪽의 사막 곳곳에 별표를 쳐놓았다.
"쿠치나시 양과 오쿠소라 양이 설명했겠지만, 여기 표시한 부근이 내 세계에서 희귀광물이 묻혀 있던 곳들이야."
"그래서요?"
"이 세계 아비도스 상황에 대해서 이전에 있던 '선생'의 신분으로 조사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조사해봤어. 아비도스를 부흥시킬 수 있는 대책, 무너지고 빼앗긴 것들을 되찾을 수 있는 계책...... 이미 몰릴대로 몰릴 아비도스에 숨통을 틔울 수 있는 수단은."
한 번 숨을 몰아쉬고 선생은 착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없었어, 미안하지만. 이전 선생 그 인간이 아주 단단히 망쳐놔서 손 쓸 방법이 없더라고. 그래서 현재로서 수익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이 희귀광물을 캐내는 것뿐이라는 판단을 내렸고-"
"못 해."
딱 잘라 말한 세리카가 적의가 사라지지 않은 시선으로 노려보며 반문했다.
"우릴 바보로 알아? 저거 다 캐내려면 그만한 장비가 있어야 될 거 아냐. 엄청 깊숙히 묻혀 있다면서. 그리고 만약 당신이랑 여기 세계가 달라서, 기껏 팠더니 아무 것도 없으면 어떡해?"
"나도 100% 확신을 못 해줘서 미안하지만, 현재로선 내 키보토스와 이곳 키보토스를 내가 비교한 결과 지형지물을 비롯한 큰 부분은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는 주관적인 판단 외엔 근거가 없어."
"그리고 누누히 강조했듯이, 우리 쪽에서 돈을 만들 방법도 이젠 없다시피 한다는 것도요."
눈 주변이 빨갛게 달아오른 아야네가 선생의 말을 받아 이었다.
"세리카 쨩, 그리고 노노미 선배. 샬레에서 저와 유메 선배는 그 인간이 꽁꽁 숨겨놨던 자료들을, 지금까지의 일은 장난으로 여겨질 수준의 최종계획안까지 전부 훑어 봤어요."
"최종계획안?"
"아비도스를 카이저에게 완전히 넘기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키보토스 전역을 카이저 손에 넘겨줄 계획이요."
"하, 완전히 미쳤네!"
"네, 미쳤죠. 미친놈이었고요. 하지만 아무리 망했다지만 우리를, 학원도시 하나를 파산으로 몰아넣은 인간이에요. 그리고 여기 있는 이 사람은, 그런 인간의 자리를 차지해서 우리를 억죄던 무기를 그대로 카이저를 억죄는 데 쓸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고요."
"오쿠소라 양 말대로야. 그 선생이 만든 자료는 카이저에 충성하기 위해 만든 계획안만은 아니었거든."
선생은 이미 유메와 아야네에겐 샬레에서 보여준 적 있는 서류를 다시 꺼내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 선생은 샬레의 힘으로, 심지어 외부 학원들의 협력을 받아서 카이저를 공격할 방안까지 짜놨거든. 토사구팽 당하고 싶지 않아서인지 뭔진 모르겠지만 덕분에 우리로서도 숨 트일 구멍 하나 만들 방안이 생긴거지."
"하, 어른이란 게 그런 식이지 뭐. 음흉하고 비겁하기 짝이 없는 족속들 같으니라고."
"저기 세...... 쿠로미 양? 나도 어른인데...?"
"시끄러! 당신 아직 못 믿겠다고! 어른들은 다 똑같아!"
"어쨌든 이것들은."
대화가 거기까지 진전되자 희망의 끈을 다시 잡은 것일까.
선생이 넘겨주던 자료를 살펴보던 노노미의 눈에서 꺼졌던 빛이 돌아왔다.
"확실히 이용할 수 있겠어요. 특히 이거."
노노미는 제목부터 '불법 점거 방안'이 대문짝만하게 적인 서류를 들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저들이 어떤 식으로 아비도스 토지를 불법적으로 갈취해왔는지 상당히 세세히 조사해놨어요. 분명 그 사람 솜씨가 맞긴 하네요. 그러지 않고선 설명이 안 되니까요."
"주민들 쫓아내고 유휴지에 대한 법적 소유권 주장, 공익 명분으로 사유지 개발...... 하, 명단 한 번 참 휘황찬란하네!"
"하지만 모든 서류에 마지막에 공통적으로 적혀 있는, 우리가 저들의 불법 점거를 주장하고 토지를 빼앗아오게 할 수 있는 '결정적 실증 없음'......"
"상관 없잖아! 그냥 이걸로 총학이든 크로노스든 어디든 뿌리고 우리의 억울함을 주장하면-"
"그건 안 돼요 세리카 쨩, 상대는 카이저라고요. 그것도 옛날의 대기업 정도가 아닌, 키보토스 전체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국가적 기업을 상대로 무턱대고 행동하는 건 개미가 인간 앞에서 저항하는 거나 다름없는 짓이에요."
"아야네 쨩 말대로, 우리가 이걸로 카이저를 제대로 공격하려면 최소한의 저항을 할 힘 정도는 꾸려야 해요. 하다못해 다른 학원에 망명을 신청하는 신세가 되더라도 언제든 재기할 수 있음을 보여주지 않으면."
"이자요이 양 말대로야."
선생은 노노미의 말에 동조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방금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의 공기.
자신을 보는 시선들엔 이제 불신뿐만이 아닌 희망이, 마지막으로 끌어올려 타오르는 불꽃이 담겨 있었다.
한 명을 제외하곤.
"그래서, 우리의 첫 걸음은 희귀광물을 캐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거야. 카이저에 대한 반격은, 미안하지만 좀 먼 미래의 일이겠지."
"그걸 안 물어봤네요, 선생님."
학생회장 유메.
시로코가 사라진 그 날 이래 처음으로 찾은 희망 속에서 모두의 얼굴이 조금이라도 밝아진 와중에도, 학생회를 이끌고 있는 리더인 그녀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채 팔짱을 끼고 되물었다.
"일이 잘 풀려서 광물을 캘 기반을 마련한다 쳐도, 그걸 누구에게 팔지에 대한 설명이 없었어요."
"쿠치나시 양은 우리가 광물을 판다한들 주변에서 구매해주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이 키보토스의 카이저의 눈치를 보지 않는 학원은 이제 없으니까요. 우리가 광물을 캐서 팔면, 아니 어쩌면 제대로 캐기도 전에 카이저는 우리의 움직임을 눈치 챌 거에요. 그쪽에서 작정하고 쳐들어오면 4명으론 뭘 해도 막을 방법이 없고, 애써 만든 채굴장도 허무하게 넘겨주는 걸로 끝이겠죠."
"타당한 지적이야."
선생은 유메의 지적에 달콤한 이상을 걷어내고 현실로 돌아온 눈을 하는 학생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먼저 일시적으로 카이저를 몰아낼 방법...... 은 얘기가 좀 기니 있다가 설명하는 걸로 하고. 장소를 만들기만 하면 보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 밀레니엄에서 경비 로봇들을 한 100대? 정도 가져올 수 있게 됐거든."
"아케보시 히마리가 작정하고 망쳐놓고 샬레에 내다 버렸다는 그 깡통이요?"
"......그것도 얘기하자면 좀 길긴 한데, 겉모습만 그렇지 웬만한 카이저 부대는 충분히 꺾어낼 수 있는 정예병들이야. 거기다 총학생회 쪽에서 SRT 특수학원의 지원까지 약속 받았고."
"SRT라면...?"
"재액의 여우를 체포했다던 최정예요원들이 있다던...!"
"거기 근데 폐부 썰 돌고 있지 않았어?"
여기서도 와카모는 똑같이 잡혔나보구나......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심정을 느끼며 선생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마지막 세리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쿠로미 양. 확실히 약속 받았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남은 문제는 캐낸 광물을 어디에 어떻게 파느냐인데......"
띠링!
학생회에게 양해를 구하고 타이밍 좋게 울린 폰에 온 모모톡을 확인했다.
선생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띄는 것을, 유메는 살짝 굳어버린 표정으로 응시했다.
그 선생과 비슷한, 그러나 어쩐지 다른 느낌의 미소......
감상에 빠진 유메를 대신해 아야네가 물었다.
"여기 일과 관련 있는 내용인가요?"
"응, 가장 중요한 관문이었는데 일단 첫 단추는 잘 꿰인 것 같아."
모모톡이 떠 있는 화면을 학생들 쪽으로 내밀며 선생은 자신 있게 말했다.
"게헨나 선도부와 트리니티 티파티와의 협상 테이블을 만들었어. 거기에 아비도스 학생회장 쿠치나시 양과 보좌관으로 오쿠소라 양까지 동행해서 나갈 생각이야."
"그, 그 둘을 만나게 한다고?!"
"그게 가능하다니...... 대체 어떻게요?"
에덴조약의 ㅇ자도 나오지 않는 두 학원의 수뇌부가 함께 있는 자리라니.
이 세계에선 색채 침공보다도 충격적일 광경에 경악하는 세리카와 노노미 앞에서 선생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간단해. 총학생회장 대리를 통해 선도부장 소라사키 히나와 티파티의 키리후지 나기사에게 이전 선생의 죽음과 내 정체를 알려주도록 했거든."
"그렇다 하더라도 어떻게...?"
"히나와 나기사의 사람됨을 잘 아는 나라서 시도할 수 있는 한 수가 있었다고 할까. 걱정 마, 전부 설명해줄테니까. 그 전에 내 쪽에서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계획을 위해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었으니.
선생은 조심스레 이들에겐 민감할 이름을 댔다.
"리쿠하치마 아루에 대해서 묻고 싶은데, 혹시 최근에 연락한 사람 있어? 아니다, 괜찮아. 응, 대답 안 해줘도 뭔 상황인지 알겠어......"
이전 선생만큼은 아니라지만 아니나다를까.
눈에 띄게 굳어지는 얼굴들에 선생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신경써야 할 걸림돌은 '선생'만은 아닌 게 분명해보였다.
* * *
"리쿠하치마 사장?"
이름이 불리자 드러나는 스산한 안광.
학생이 보이기엔 너무 날카로운 눈빛에도, 그녀의 이름을 부른 오토마타는 같잖다는 듯 낄낄대며 웃었다.
"아, 미안하군. 이젠 사장이 아니지? 흥신손지 뭔지 망한 지 한참 지났는데 나도 참."
"야야, 그러다 뒤통수 쏘인다. 조심하라고."
"같은 편인데 무서울 게 뭐 있다고! 동료랍시고 있던 것들 통수치고 강한 데 붙은 건데 여기 카이저보다 강한 데 있냐? 샬레?"
"너 말 잘했다, 전부터 말하고 싶던건데 팀장. 그쪽 면상이나 인상은 여기보다도 샬레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 악명인가 그거 쌓는데도 더 좋지 않겠어? 크하하!"
"닥치고 집중이나 해 멍청한 깡통 자식들, 우린 지금 작전 중이고 여긴 적진 한복판이야."
철컥, 하고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그 용량 적은 깡통 CPU로도 잘 알아듣게 박아줬으니 다 알거라 여기지. A팀은 좌로, B팀은 우로 돌입해 친다. 빠져나오는 놈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너희들은 물건 안 상하게 찾아서 가져오는 일에나 집중하고."
"아이고 예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사장님!"
"무려 사장님 말씀인데 새겨 들어야지. 야야, 가자! 어차피 허접들이니 후딱 끝내고 윤활유나 한 잔 하러 가자고!"
"좋지! 미안해 사장, 미성년자라 술은 다 크면? 응? 그때 같이 마시든 하자고! 하하하하!"
"크헤헤헤헤!!"
분명 지휘권자인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저들끼리 웃고 떠들면서도 움직이는 발걸음은 둔하지 않고 기민하다.
소녀는 자신의 포인트로 향하기 위해 지면을 박찼다.
저들이 자신을 낙하산 취급하듯, 애송이 취급하듯, 하다못해 성희롱을 하든 관계 없었다.
저래뵈도 저들은 작전에 들어가면 지시를 허투루 듣진 않았고, 그거라면 놈들이 자기들 공을 부풀리고 자신의 공은 축소해서 보고하든 말든 전혀 상관 안 썼다.
분명 갑과 을을 따지면 자신이 갑일텐데 한낱 계약직보다도 못한 취급 받더라도......
소녀는 뛰어오르던 발을 멈춰세웠다.
발이 너무 무거워서 다 때려치고 싶어질 때 쯤 저격 포인트에 도달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격을 위해 잡은 총이 무겁다.
카이저로부터 받은 방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좁고 열악한 사무실이, 거기서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동맹이었던 학교의 사람들이.
그리고 어른이......
타앙!!!
난리통 속에서 선두에서 튀어나오던 적이 쓰러졌다.
망설임 없이 사격을 가한 소녀의 표정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후회인지, 분노인지 모를 표정으로 총을 쥔 손에 방아쇠를 우그러뜨릴 기세의 힘이 가해진다.
타앙!!!!!
"......재미없어."
타앙!
탕!
타앙!!
어느새 무표정으로 돌아온 리쿠하치마 아루는 이후로 그저 기계적으로 방아쇠를 당길 뿐이었다.
그곳에 하드보일드한 무법자를 꿈꾸던 소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저, 계약에 묶여 권태롭게. 할 일을 성실히 해내는 일개 회사원이 있을 뿐이었다.
* * * * *
어떤 웹소설 작가가 무려 나무위키 정치 항목 같은 것들을 참고해서 개쩌는 소설을 썼다는 썰을 봤다.
나무위키 뒤져가며 소설 써 본 여태까지의 심정으로, 기회가 된다면 그 분께 정말 여쭙고 싶다.
어케했냐시ㅂ(검열)
댓글 21
퇴근시간을 녹여주는 미식
이 소설 선생은 본편성생인데 본편보다 대가리 잘돌아가서 재미있음 ㅋㅋ
막줄 언급 내가 아는 소설 같은데 그게 맞다면 패러디에 그만큼 노력 들이는 게 대단하긴 하다고 생각함
무슨 소설임??
@ㅇㅇ(115.22) 피아조아 작가의 임기 첫날에 게이트가 열렸다
@Baksam 아 다른 소설이네 난 다른 블아 패러디인줄
@Baksam ㄱㅅㄱㅅ
권력에 중독되면 절대로 헤어나오지 못하고 더 큰 권력을 위해 더 큰 악행을 한다는 얘길 누누히 들었는데, 이게 게임 2차 창작 소설에서도 적용이 되네. 아무튼 매 화를 올라올 때마다 보는데 이에 ㅈㄴ게 맛있단 말이에요, 소설에만 집중하게 해줘서 안좋은 생삭들이 싹 없어져. 이런 다른 블아 소설은 몇개 못봤거나 없었는데 앞으로도 올려주면 야무지게 먹겠습니다
왔구나 내 마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