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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절대 안 됩니다."
나나가미 린은 단호했다.
아무리 어렵고 곤혹스러운 상황이라지만, 선생의 제안은 쉬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컨디션이 저조하실 뿐이라면야 구태여 말리진 않으려고 했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며, 린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병원 침대 위의 선생.
저번에 쓰러졌던 때와 비슷한 구도, 비슷한 모습.
한 가지의 다른 점.
나나가미 린의 시선은, 선생의 이불덮인 다리에 향해 있었다.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저도 린 대행의 말에 동의해요."
우시오 노아 역시도, 쓰디쓴 약을 먹은 것 같은 표정으로 선생을 바라본다.
이렇게 된 선생을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이니만큼, 그녀의 마음은 묘사할 수 없을 만큼 무겁겠지.
"...너희가 그러는 건 이해해. 하지만, 나는--"
"--그 다리로 어디를 가시겠다는 겁니까. 무리입니다."
원인 불명의 하반신마비, 라고.
급히 후송된 선생을 진찰했던, 의사가 내린 진단이었다.
급작스러운 외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신경에 영향을 주는 지병이 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두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선생은 입원을 거부했다.
스스로 무언가에 대해 크게 확신한 것인지,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서 샬레로 돌아가고자 했다.
"휠체어가 없으면 움직이실 수도 없습니다.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어디론가 가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 몸으로 어딜 가시겠다는 겁니까."
"...그래도,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어."
말이 좋아 신념이지, 린에게 있어 그것은 고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비대위, 오늘이지?"
"......네. 말씀하셨던 대로, 최대한 빠르게 일정을 잡았습니다."
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며, 생각하고 있는 일들을 해치우기 위해선 모두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선생은 린에게 비대위의 개최를 요청했다.
만약 린에게 부담이 가는 선택지라면, 모두에게는 본인이 이야기하겠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그렇기에 나나가미 린은 곧바로 비대위 소집 통보를 지시했고,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 주사위의 눈금이 1일지 6일지, 오늘 결판이 나게 될 터였다.
"솔직히, 내가 했던 말들을 믿기는 쉽지 않아."
선생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세 사람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의 개연성을 스스로 지적한다.
"꿈, 게마트리아, 어른의 카드, 싯딤의 상자. 그리고 내가 치르게 될 대가. 하루아침에 믿기엔 너무 허황된 이야기야."
린과 노아는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하고 싶어도, 그가 내뱉은 말은 틀린 것 하나 없는 정답 그 자체였으니까.
"......차라리 잘 됐어."
혼잣말같이 작게 중얼거리며, 선생이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다.
"비대위에 참석할게."
"......네?"
"내가 참석하면, 아마 어느 정도는 상황을 진전시킬 수 있을거야. 아무 전조 없이 갑자기 다리를 못 쓰게 되었으니까......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란 건 알 수 있잖아? 그러니까 차라리 잘 됐어."
선생은 그렇게 말하며 옅게 웃어보인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조금의 틈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우시오 노아는 그런 선생을 향해 '발악' 에 가까운 고성을 질렀다.
"잘 되었다뇨. 다리를 못 쓰게 되어서? 그래서 모두를 납득시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 잘 됐다는 말을 입에 담을 상황이 아니잖아요!! 뭐가 잘 됐다는 건가요? 갑자기 어디 움직이시지도 못하게 됐으면서!"
"...노아, 나는--"
"--거짓말이잖아!! 보면 알아요! 지금 선생님의 표정도, 목소리도, 괴로워하고 절망하고 있는 걸 애써 숨기고 있다는 걸!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데요?!"
백 번 양보해서 모두를 속일 수 있더라도, 오직 우시오 노아만큼은 속이지 못 할 것이다.
지금처럼 억지로 웃으며 잘 되었다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은, 기억 속의 선생에 대한 모독일 것이다.
자신의 기억을 더럽히지 말라고, 진심으로 지어주던 웃음을 모독하지 말라고, 우시오 노아는 그렇게 그에게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선생은 그런 노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억울해보이기도 하고, 화가 나 보이기도 하고, 울적해보이기도 한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더 이상은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 노아야."
그렇기에, 선생은 목소리에서 힘을 빼 버렸다.
아마 자신의 기분에 제일 걸맞는 듯한...낮고, 울적하고, 절망적이며, 침통한 목소리였을 것이다.
"하루아침에 두 다리가 병신이 됐어. 더 이상 걸을 수 있을지도 없을지도 몰라. 아무 감각이 없어. 누군가 칼로 베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는 기분인데, 정작 만져보면 아무 상처는 없어. 부조화 속에서 머리까지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미칠 것 같아. 못 걸을까? 이젠 내 다리로 걸을 수가 없는 걸까?"
존재하지도 않는 환상통에 시달리고, 두 번 다시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것보다 더 무서운 건...날이 하루하루 흐를수록 정말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강해진다는 거야. 멀쩡했던 다리도 하루아침에 망가졌는데, 목숨이라고 제대로 붙어있는다는 보장이 있어?"
".....선생님......"
"정말로 죽나 봐. 8일? 8일 남았나? 다음에는 어디가 아프게 될까. 눈? 코? 입? 아니면 귀? 팔? 이런 생각에 미칠 것 같아. 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않아."
주변에서 아무리 난리를 치고 호들갑을 떨어 볼 지언정, 그 공포와 절망이 당사자에 비할 바 있으랴.
선생은 이미 그러한 공포에 잡아먹혔고, 코 앞까지 성큼 다가온 죽음의 냄새를 처음 실감했다.
자기 자신조차도 느끼던 아주 약간의 망설임이, 충격적일 정도로 확실히 날아가버린 순간이었다.
...죽을 것이다. 정말로.
누군가는 이야기했다.
'사람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아니고, 하루하루 죽어간다' 고.
지금의 자신이, 딱 그 꼴이었다.
"......그러니 이럴 때일수록, 내가 정신차려야 해."
비극적인 생각에 사로잡히면, 사람은 결국 비극으로 치닫게 마련이다.
후회와 절망 속에 빠져버린다면, 그나마 남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러니, 일어나야만 했다.
절망에 빠지기엔, 그의 책임은 너무 커다랬다.
공포에 먹히기엔, 그의 의무는 너무 중요했다.
실의에 잠기기엔, 그의 아이들이 아직 남아있었다.
고통에 꺾이기엔, 그의 학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른으로서 아이를 지킨다. 선생으로서 학생을 지킨다.
어른의 책임을, 선생의 의무를 다 해야 한다.
"내가 죽고 난 뒤에 너희들은 어른이 될 거고, 각자의 책임과 의무를 갖게 될 거야. 선생이란, 아이들이 그 때를 준비하고 잘 이겨낼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주는 사람이고. 그래서 난 일어나야만 해. 미래에 찾아 올 너희들의 세상을 위해서."
그것이 어떤 방법이라고 할 지라도.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 지라도.
"린. 나는 비대위에 참석할 거야. 참석해서 내 상황을 직접 이야기할게. 그게 아마 린 쨩에게도 도움이 될 거고."
"......그 몸으로, 정말 가셔야겠습니까."
선생의 각오를 말려선 안된다는 확신을 가졌음에도, 그녀는 답지않은 쓰라린 목소리로 그의 의사를 재차 확인한다.
그것은 아마도 모든 직책을 떠나, 한 명의 학생인 나나가미 린으로서의 걱정이었을 것이다.
"응. 가야만 해."
"......알겠습니다. 저는 시간이 촉박하니 먼저 가겠습니다. 천천히 추스르시고 오십시오. 이용하실 교통편은 곧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선생은 단호했다.
나나가미 린은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노아. 정말 미안하지만, 노아의 도움이 필요해."
그는 그렇게 말하며, 엉망진창인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노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병원에서 제공해 줄 휠체어로는 혼자 이동하기 버거워. 날 도와줄 수 있겠니?"
"......도와드릴 수는 있어요."
우시오 노아가 낮은, 낮선 목소리로 대답한다.
"선생님의 휠체어를 끌게 될 거라고는...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제 기억력이 평범했어도 두 번 다시 잊지 못 할 악몽이에요."
명백히, 처음 느껴보는 타입의 사람.
어쩌면, 본인이 좋아했을지도 모르는 사람.
아마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 할 타입의 사람.
분명히, 평생이 지나도록 잊지 못 할 사람.
낯선 모습의 낯익은 사람을 향해, 우시오 노아는 으르렁거리듯 작게 대답한다.
"선생님......당신은, 정말 최악이에요."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언제나 도움받아왔던, 소중한 학생의 가슴에 크나큰 상처를 새겨나간다니.
선생으로서, 사람으로서 할 짓이 못 된다고, 그 역시도 참담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난 가야만 해."
"네, 그러시겠죠. 그러니......어디까지라도 모실게요."
결단코 잊을 수 없을, 기억록의 잔인한 마지막 페이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기록으로 마무리한다.
우시오 노아는, 무너져내린 가슴을 대충 여민 채, 그녀 스스로의 각오를 다져나가는 모양이었다.
물은 엎어졌고, 주사위는 던져졌다.
펼쳐진 길이 가시밭길이라도, 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기에, 그는 작고 여린 그 아이의 손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며,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서막을 연다.
"......갈까. 총학생회로."
* *
"......무슨......"
키리후지 나기사가 저도 모르게 흘려버린 그 말이, 이 곳에 있는 모두의 심경을 대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아닌 휠체어에 앉아 있는 선생이었다.
그는 우시오 노아가 미는 휠체어에 의지한 채, 빙산마냥 얼어붙어버린 모두를 배경으로 천천히 회의실로 입장한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휠체어의 부품이 끼릭거리는 작은 기계음, 그리고 시계가 규칙적으로 울려대는 초침 소리. 오직 그 두 가지 소리만으로 회의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선생의 휠체어가 나나가미 린의 옆에 멈춰 설 때까지, 그 어느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미안. 채비가 늦었어."
샬레의 선생은 그렇게 말하며 두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평소에는 '서류 때문에 죽겠다', '퇴근하고 싶어서 마음이 아프다' 따위의 시덥잖은 핑계란 핑계를 다 대던 그는, 정작 진정으로 위기에 빠졌을 땐 아무렇지 않다며 어깨를 으쓱거리곤 했다.
그 위태로운 억지 허세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마음이 어떨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 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의 나쁜 버릇이었다.
"서, 선생......그 다리......는......"
타카나시 호시노는 흔들리는 두 눈동자로, 현실을 믿지 못하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아, 응. 하반신마비래."
"하반신마비......?"
"응. 두 번 다시는, 걸을 수 없을 것 같아."
선생은 그런 호시노를 향해 담담하게 대답한다.
짐짓 섬뜩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평소대로의 얼굴에, 호시노는 그에게서 처음으로 기괴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엉망진창인 표정인 것은, 미소노 미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선생님, 누가 그런 거야? 대체 누구야?"
"아무도. 아무도 그러지 않았어."
자칫 누군가를 향한 적개심으로 변해버릴지도 모르는 그 목소리에, 선생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구태여 따지자면...내가 그런 걸까."
"......뭐?"
선생은 자세하게 답하는 대신, 옆에서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나가미 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마도 이게 그 카드의 대가이고 그 과정일 거라고, 저는 그렇게 조심스레 추측하고 있습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조차 몰라 당혹스러워하는 모두를 향해, 나나가미 린이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정리한다.
"사용자의 삶과 시간. 죽음. 그리로 향하는 과정. 지금 보시는 것처럼, 이미 그 과정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우타즈미 사쿠라코가 손을 들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하기까지 해 보이는 그 동작에, 린의 대답이 있기도 전에 사쿠라코 본인의 사족이 붙는다.
"...잠깐만요. '삶과 시간' 이 꼭 죽음인 건가요? 다른 걸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아까 선생님께서 꾸신 꿈을 근거로 내세웠던 거, 혹시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폭풍같이 진행되느라 미처 제대로 짚지 못했던 부분을, 나나가미 린이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그 꿈 속에서, 게마트리아라고 불리는 집단의 하나가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카드의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고, 10일 뒤에 죽게 될 거라고. 적어도 선생님께만은 그 대가가 죽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사쿠라코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무언가 반박을 하고 싶어도, 그러한 믿지 못 할 이야기가 눈 앞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으니, 무언가 말을 꺼낼 여지조차 찾지 못 한 것이겠지.
"앞 쪽의 스크린을 잠시 봐 주십시오."
린은 그렇게 말하며 문 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문 옆에 서 있던 이와비츠 아유무가 회의실의 모든 조명을 꺼 버린다.
행정원들은 창문의 커텐을 모두 쳐, 빛 한 줄기조차 들어올 수 없게 만들어둔다.
남은 건 하나.
천장에서 스크린 쪽을 비추고 있는 빔프로젝터.
나나가미 린이 그 리모컨을 조작한다.
화면에 뜬 것은, 한 서류의 스캔본이었다.
그것도 D.U. 시라토리 구에서 제일 큰 종합병원의 이름이 찍혀있는.
"오늘 발급된, 선생님의 소견서입니다. 병원 측에 요청하여 서류를 제공받았죠."
"......원인 불명의, 하반신마비......"
아오모리 미네는, 저도 모르게 문구 중 하나를 따라 중얼거렸다.
"척수나 신경에 손상을 입힐만한 외상의 흔적도, 갑자기 증상이 발현될 지병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없고, 현재 특별히 문제될만한 부분도 없습니다. 오직 단 하나. 하반신의 신경만 완전히 죽었죠."
나나가미 린이 짧디막한 한숨을 내쉬며 쉼표를 찍는다.
"...의사들도 처음 보는 상황이라고 하더군요. 전례없는 일이, 말도 안 되는 일이 정말로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아무 전조 증상도, 아무런 징조도 없이 이럴 수는 없다고.
담당의와의 통화에서 들었던, 마치 자기는 억울하다는 듯 들려왔던 소명이었다.
하기사,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럴 만도 하였다.
키보토스의 누구라도 알 법한 유명인사를 맡았더니 아무런 이상도 징조도 없던 이가 대뜸 중환자가 되어 나타나고, 그 진단명이 다름아닌 하반신마비라니.
의사로서 저의를 의심받고, 실력을 의심받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니, 그 의사 딴에는 짐짓 기가 막힐 상황이었다.
키보토스의 현대 의술로도 명백하게 소명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다른 원인을 찾아 볼 수밖에 없었다.
애석하게도, 그런 초현실적이며 비현실적인 전조는 이미 찾아 온 바 있었으며, 그렇기에 나나가미 린은 선생이 꾼 꿈이, 선생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환불, 은?"
주변의 살벌한 기운에 짐짓 눈치만 보던 쿠로미 세리카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며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저렇게 된 이유가 카드 때문이라며. 그, 그러면......결제 취소라거나, 환불을 하면 되는 거 아니야?! 환불하면 그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되잖아!"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것이 비단 린 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선생이 키보토스에서 제일 먼저 해결했던 일이 아비도스의 일이었고, 그렇기에 쿠로미 세리카는 이렇게 선생을 잃어야 한다는 것에 짐짓 열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세리카는 나름대로 머리를 열심히 굴려 본 끝에 도달한 한 가지 결론을, 간절히 기도하는 심정으로 던져내었다.
이 곳에 있는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제발 제 자신에게 동조해주길 바라는 심정으로, 애처로워보일 정도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그렇네요. 어쨌든 카드의 형태를 띤 물건이니까......듣고 보니 일리 있는 의견이네요."
전혀 신경쓰지 않던 인물의 의견이 생각보다 일리가 있다는 것이, 키리후지 나기사에게는 썩 예상 외로 다가 온 모양이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기사는 다시금 린을 바라보았다.
나나가미 린 역시도 그 생각은 못 하고 있었다는 듯 허를 찔린 표정이었고, 그렇기에 은근슬쩍 선생을 쳐다보고 마는 것이었다.
허나, 선생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고 말았다.
"...내가 카드를 사용했기에 어려운 일들을 헤쳐나갈 수 있었어. 결제 취소를 하려면 내가, 우리가 얻은 그 성공적인 결과들을 되돌려야만 하는 것과 다름없고. 시간을 되돌리는 방법 같은 건 없잖니? 애초에 청약 철회가 가능한 대상이 아닌거지. 그래, 마치 인터넷에서 산 신선식품같은."
자신의 삶과 시간을 바쳐서, 닥쳐 온 고난을 해결했다.
그렇기에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일상이 시작되고, 소소하고 평화로운 일들이 찾아왔다.
'거래' 는 확정되었고, '승인' 은 이뤄졌다.
시간을 되돌려 그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카드의 사용을 취소할 수는 있겠지. 이미 지불해버린 삶과 시간을 환불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허나 그렇다면, 카드를 사용함으로써 얻어낸 평화를 모두 없던 것으로 해야만 할 노릇이었다.
카드의 결제를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환불이라는 것은 초기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의미하니까.
무엇보다, 시간을 되돌리는 방법 같은 것은 없다.
그렇기에 이 카드의 청약 철회는 불가능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그 이후의 평화를 누렸으니까.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해도, 내가 얻은 너희들의 일상을 포기해야 한다면, 내 선택은 하나야."
"......같은 선택......"
스나오오카미 시로코의 머릿속에 누군가가 스쳐 지나간다.
자신과 똑같은, 그러나 전혀 다른 누군가가.
"그렇다면...선생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은 절대적이라는 이야기구나."
류우게 키사키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려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대가 카드를 사용한 까닭은 이해했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물론. 허나......그 대가가 이런 식으로 돌아온다는 것은......조금은 그대가 미워지는구나."
'이타적' 과 '이기적' 의 사이에서, 류우게 키사키는 곤혹스러운 심경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선생이 이타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물론 그 어느 누구도 부정치 못 할 사실이었다. 그는 진실로 자신보다 학생들을 위해 사는 것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가며 방방곡곡 뛰어다녔다.
때로는 현실의 돈을 써 가며, 때로는 그 연약한 몸이 상해가며, 때로는 제 명줄을 가를 카드까지 써 가며, 그렇게 학생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대가가 자신의 목숨이고, 그로 말미암아 수많은 학생들이 이렇게 당혹스러움을 겪게 되었다면, 그는 그의 행적만큼이나 이기적인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류우게 키사키는, 그 감정들의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대가 어떤 생각이었던, 앞으로 무엇을 할 생각이던, 지금 이 순간이 모두의 삶에 평생 새겨질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는가? 자아, 보아라. 지금 그대의 옆에 있는, 휠체어를 밀고 왔던 저 아이를."
키사키는 여전히 그의 옆에 서 있는 이를 가리키며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선생은 구태여 고개를 돌려보지 않았다. 그야 가리키는 그 대상이 우시오 노아였음이 자명했기 때문이며, 일그러짐을 숨기려는 그 침통한 표정을 차마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아마 이 곳의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겠나. [ 선생이 이렇게 된 게 우리 때문이다 ] 라는 그 생각을. 우리가 미숙하고 어리석은 탓에 혼자 그 짐을 짊어진 것으로 보여, 너무나도 분한 감정이로구나."
모두의 대변인같았던 그 말은, 제법 씁쓰름하게 와닿는 말이었다.
아무리 학생들을 구해내고 지켜내고자 한 일이라지만, 그 일들이 훗날 학생들에게 또 하나의 씻지 못할 상처로 돌아온다면, 그건 과연 학생들을 위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학생들에게도, 적어도 미래에 닥쳐 올 일 정도는 알려주고, 나름대로 선택의 여지를 주는 쪽이 옳았던 걸까?
"...그 방법 뿐이었으니까."
......아니.
그것은 너무 단편적인 이야기이고, 너무 근시안적인 이야기이며, 너무 편향된 이야기이다.
"...키사키, 난 말야. 어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책임을 지는 것' 이라고 생각해."
그는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몸으로, 허나 아직 죽지 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른은 아이들의 세계에 대한 책임이 있어. 너희들을 천천히 미래로 이끌어 줄 장기적인 책임이 있는가 하면, 지금 당장 닥쳐 온 위기를 해결해 줄 즉각적인 책임도 있어. 그 모든 것을 통틀어서 '어른의 책임' 이라고 부를 것이고. 그 책임을 또한 '의무' 라고 해."
"......책임과 의무, 라."
"카드를 사용했을 때는 촌각을 다투는 때였어. 너희들에게 간접적으로 힌트를 주어 정답으로 유도하는 것도 가능했겠지만, 그러기엔 너무나도 촉박하고 다급했던......그래, 위기였지."
닥쳐 온 문제를 해결하기엔, 평소대로의 통상적인 행동은 너무 느렸다.
어쨌든 아이들은 구해야 했으며, 그렇다면 가능한 다른 수단을 찾아야 했다.
"경찰관이 범인에게 노출된 행인을 보호하는 건 의무야. 부상입은 환자를 구조하는 건 구급대원의 의무고. 똑같아. 아이들을 보호하고 육성하는 건 선생의 의무이고, 그게 가능하게끔 아이들에게 안전한 세상을 만드는 건 어른의 책임이야."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지키고, 선생으로서 학생들을 지킨다.
그것이 그의 존재 의의이며, '선생' 이라는 이름에 대한 예의였다.
"그렇기에 난 망설임 없이 카드를 꺼내들었던 거야. 너희들이 미숙해서? 믿음직하지 못해서? 아직 어리석으니까? 아니, 천만에. 난 내 의무를 다 한 거야. 그 행동이 낳은 결과의 책임도 당연히 져야 하고. 그러니 이건 키사키가 바라보는 것과는 다른 문제란다."
"......그렇다면, 그 사실들을 어째서 우리에겐 이야기해주지 않았지?"
"간단해. 너희들이 아닌 나의 의무였을 뿐이니까. 너희들은 어른이 되어가며 자연스레 알게 될 사실들이니까."
만약 그 때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면, 아마 그는 그 때라도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자신이 죽고 나면 그 사실을 언제나 알게 될 지 모를 일이니까.
"......나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는 걸 막고 싶어."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그러나 그 시간이 지나 자신의 시간이 멈추더라도, 세상의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그래서, 선생은 이제 이 모든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혼자 잘 크는 아이는 존재하지 않아. 설령 잘 컸더라도, 그게 제대로 된 어른이라는 보장은 없어. 그렇기에 학교가, 사회가, 어른들이 아이들을 책임져야만 하는 거야. 때로는 혼내고, 때로는 투정도 들어주고, 때로는 칭찬도 해 주고, 그렇게 바른 길로 서서히 이끌어주는......어른이 필요한 이유란다."
"...선생님의 이야기네."
미소노 미카가 중얼거리듯 그의 이야기에 긍정했다.
단순히 흘려보낼 만한 그 중얼거림이,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공감을 샀다는 것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나는 죽게 될 거야. 책임이라는 건,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무겁고 중요하니까. 그게 목숨이 될 수도 있고 직책이 될 수도 있겠지만...적어도 지금의 내게는 그 책임의 대가가 내 목숨인거지."
강한 확신.
언뜻 들어보면 현실성없겠지만, 앞뒤를 따지다보면 맞는 이야기.
키보토스이기에 가능한, 이 세상만의 이야기.
"너희들에게 책임과 의무에 대해 가장 확실하게 알려 줄 수 있는 상황이지. 내 죽음으로 그걸 가르쳐 줄 수 있다면...나는 그걸로 괜찮아. 나는 이미 어른이지만 너희는 어른이 되어야 하고, 개인적으로는 어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게 책임과 의무라고 생각하거든."
"확실한 충격요법, 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아마치 니야의 나지막한 물음에,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너희의 다음 아이들은? 내게 그걸 제대로 배우지 못한 다른 아이들은?"
비단 지금의 아이들만이 키보토스의 학생인 것은 아니다.
지금의 학생들이 어른이 된다면, 그 이후의 학생이 될 다른 아이들은?
"...책임과 의무에 대해 배울 기회가 없다는...이야기구나."
류우게 키사키는 제법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모르게, 매화원의 아이들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죽고 난 뒤에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어. 신기하리만치 그 전의 기억이 많이 없으니까. 새로운 선생이 오게 될지 아닐지도 확신할 수 없어. 온다고 해도 그건 그것 나름대로 걱정이야. 그건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니까."
한 사람.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제대로 된 어른이 있었다면.
한두 번 했던 상상이 아니다.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은 많고, 선생은 자신 혼자.
여기저기 도움의 손길을 뻗치다 보면, 한스러울 정도로 손이 부족한 적이 많았으니까.
"...나 혼자서는 부족하니까, 그걸 최대한 해결하기 위해 카드를 더 썼는지도 몰라."
"그리고 그 대가가 죽음......이 되었다는 이야기인가요?"
"응. 나는 그렇게 생각해."
나기사의 목소리에 긍정을 표했다.
실력이 됐건 인력이 됐건, 부족한 면을 스스로 메우기 위해 삶과 시간을 대가로 지불했다.
어른이니까. 책임이 있는 존재이니까.
그 책임을 나누어주고 도와주는 이가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있었다면...모든 이를 곤혹스럽게 할 이 죽음을 조금이라도 미룰 수 있지 않았을까.
"...선생님이 언제나 그러셨죠. 힘들 때는 주변에 의지해도 된다고. 도움을 청해도 된다고."
나기사는 무언가 알 것 같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것이 정작 선생님에게는 불가능한 이야기였군요. 일상적인 도움이면 몰라도, 선생의 본분이며 어른의 책임에 대해서는요."
"...그렇군요. 혼자였으니까요. 그 의무를 지고 있는 사람이. '선생' 의 의무를 진 어른이."
유리조노 세이아도, 그 옆에서 고개를 끄덕인다. 이 비현실적이며 뜬구름같았던 이야기가, 조금씩 조금씩 기틀이 잡혀만 가는 것 같았다.
"...결국 이 상황을 근본적으로 고치지 않는다면 제 2, 제 3의 내가 나올 거고, 어른에의 보살핌의 범위에서 벗어난 아이들도 점점 더 많아지겠지. 그래선 안 돼."
선생은 굳은 얼굴로 회의실의 모두를 둘러보았다.
그것은 화가 났다거나 기분이 나쁘다거나 따위의 감정보단, 큰 일을 앞에 둔 채 결의를 다지는 것에 가까웠다.
"내가 너희들을 불러모은 건......내가 죽은 이후의 키보토스를 위해서야."
"......선생이 죽은 이후의, 키보토스......"
"나는 죽어도 너희들은 계속 성장할 거야. 졸업하고, 키보토스를 떠나건 남건 어른이 되고, 또 다른 학생들이 너희의 자리를 메우겠지. 키보토스는 학원도시들의 세계이고, 그렇기에 언제나 수많은 학생들로 가득 찰 거야."
타카나시 호시노는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은 미래를 중얼거렸다.
유메에게 얽매여있던 과거를 떠나, 선생에게 의지하는 현재를 지나, 언젠가 찾아 올...유메도 선생도 없는 그러한 미래를.
"이 곳이 학원도시인 이상, 학생들의 세계인 이상, 일개 교직원이 아닌...'스승' 의 의미인 선생은 꼭 필요해. 그렇지만 지금과 같은 세계라면 '카드' 는 꼭 필요할 거야. 그리고 그 힘을 빌려서 문제들을 해결하고 해결하면...나와 같은 결말을 맞게 되겠지. 그래선 안 돼. '선생' 이 '학생' 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지금이 반복되어선 안 돼."
선생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서, 이 세계의 룰을 깨 볼 거야."
"......룰을, 깬다구요?"
"응. 지금까지의 키보토스와는 다른, 새로운 '룰' 을 만들어보려고."
나츠메 이로하는 그 위태로워보이는 단어들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즉각적이고 단호한 그 제스처는...아마도, 지금껏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시도를 앞둔 각오일 것이다.
"......구태여 '카드' 따위 필요 없이도 아이들을 지켜낼 수 있는......그런 새로운 '룰' 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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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아직 떡밥이 덜 풀린 것들이 들어가다보니까, 내 스스로의 떡밥 해석이 들어갈 것 같음
이런게 제법 호불호가 갈린다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지 않나 싶다
학생이 주인공인 게임이니까 책임과 의무도 되게 생각해볼만한 주제 같음
스토리 보면 제작진도 그걸 어느 정도 의식하는듯?
그러니 선생이 정말 죽음을 눈 앞에 뒀고 그걸 인지한다면,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하겠지
죽었음에도 학생을 구하고자 발악하는 초인이니까
1화 당 분량은 거의 이 정도일듯
사실 쓰자면 더 쓸 수는 있긴 한데...글자수제한 한 번 걸리고 나서부턴 너무 빡세다
아니 유식아 ㅅㅂ 21세기에 글자수제한이 말이냐 방구냐?

댓글 13
청휘석을 스팀월렛으로 쌀먹한다는 룰을 만든다
와 단순히 죽어가는 모습을 묘사해갈줄 알았더니 블아에서도 브금 바뀌면서 반격하듯이 드리프트를 꺾네

이야 맛있다
크아악 너무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