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마에 사오리는 돌을 날랐다.
폐를 찌르는 듯한 뜨거운 공기 속에서, 제법 묵직한 돌덩이를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 아리우스 스쿼드의 리더로서 수많은 전투와 잠행으로 단련된 몸이었지만, 단순한 육체노동은 또 다른 종류의 부하를 근육에 선사했다. 통증이 팔과 어깨에 퍼져나갔다. 이마에는 이미 작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래도 이 정도 노동은 견딜 만했다. 아니, 견뎌내야만 했다. 이것이 지금 그녀가 선택한 '자아 찾기'의 방식이었으니까.
눈부시게 맑은 키보토스의 하늘 아래, 작열하는 태양이 머리 위에서 이글거렸다. 푸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고, 그 아래 공사장은 중장비의 소음과 사람들의 외침으로 분주했다. 사오리는 쨍쨍한 햇빛에 저절로 눈을 찡그렸다.
오늘 그녀가 맡은 일은 붉은겨울 연방학원의 용역부에서 급히 모집한 단기 노동이었다. 현상 수배범 신세인 사오리에게는 신분을 숨기고 하루 벌이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택지 중 하나였다.
“일 잘하는데?”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보니, 용역부 부장이라는 야스모리 미노리가 있었다. 이쪽 아르바이트 판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전설적인 인물. 함께 일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칭송하는 인물. 미노리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고맙다."
사오리는 짧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목소리에는 감정이 거의 실리지 않았지만, 타인에게, 그것도 일의 성과로 인정받는다는 사실에 가슴 한구석에서 작은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땀으로 축축해진 장갑을 고쳐 끼며 잠시 숨을 골랐다.
미노리는 만족스러운 듯 싱긋 웃었다.
"땜빵으로 급하게 온 사람이라 걱정했는데, 진짜 잘하는데? 그런데 이름이 뭐야? 명단에 적어야 해서."
미노리의 질문에, 돌을 내려놓던 사오리의 손이 순간 허공에서 멈칫했다.
이름...
사오리는 지금 도망자, 현상 수배범의 신분이다. 용병으로 일할 때면 몰라도 이럴 때라면 자신의 신분을 숨기는 것이 맞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가명을 생각하던 그녀의 눈앞에 얼마 전 만났던 한 소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리쿠하치마 아루다."
왜 하필 그 이름을 댔는지는 사오리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충동적으로,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이름이었다.
그 말에 미노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신기하네."
미노리는 검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오른쪽 뒤편을 가리켰다. 사오리도 무심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서는 자재 더미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햇빛이 반사되어 잠시 눈이 부셨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한 인물의 형체가 서서히 선명해졌다.
"저 애 이름도 리쿠하치마 아루인데."
그곳에는 한 소녀가 서 있었다. 공사장인 만큼 점프슈트를 입고 있는, 그 사이로 드러난 가녀린 실루엣과 대비되는 차가운 인상. 길게 늘어뜨린 회색 머리카락, 빛을 잃은 듯 탁한 푸른 눈동자와 그 중심에 박힌 흑백의 동공. 무표정한 얼굴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팍에 달린 명찰에는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리쿠하치마 아루'.
먼지 날리는 공사장 한복판에서, 두 소녀는 서로를 말없이 마주보았다.
~~~~~~~~~~~~~~~~~~~
며칠 후
사오리는 트리니티 구역의 한적한 공터 벤치에 앉아 있었다. 혹시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검은색 캡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모자의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 윗부분을 가렸고, 오직 굳게 다문 입술과 턱선만이 희미한 새벽빛에 드러났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이른 새벽.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시스터후드 소속 수녀들의 나지막한 기도 소리와 이른 잠에서 깬 새들의 지저귐만이 들렸다. 발치에는 공사 도구가 담긴 낡은 가방이 놓여 있었고, 안에서 금속 도구들이 부딪히며 작게 짤랑이는 소리를 냈다.
오늘은 트리니티 측에서 의뢰한 보수 공사에 참여하는 날이었다. 지난번 공사장에서 사오리의 일솜씨를 눈여겨본 미노리가 "네 실력이면 트리니티 공사도 문제없을 거야"라며 추천해 준 자리였다. 그 말을 떠올리자 사오리는 쓴웃음을 삼켰다. 만약 미노리가 자신의 정체를 알았다면, 자신이 과거 이곳 트리니티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았다면, 결코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트리니티...'
한때는 그렇게나 증오하도록 배웠던 곳.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불바다로 만들려 했던 곳. 베아트리체의 명령 아래, 아리우스 스쿼드를 이끌고 이곳을 침공했던 기억. 총성과 비명, 화염과 파괴.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냉혹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타앙!
"윽... 우웁!"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며 메스꺼움이 치밀었다. 사오리는 반사적으로 몸을 앞으로 숙였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려 했지만, 목구멍이 조여드는 듯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떨리는 손으로 벤치 가장자리를 꽉 움켜쥐며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저 멀리 트리니티의 종탑에서 종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그때, 등 뒤에서 서늘한 기척이 느껴졌다. 살육 기계로서 살아온 세월 동안 뼛속까지 각인된 감각이 경고음을 울렸다. 사오리는 본능적으로 경계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다가오는 존재에게서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
그곳에는 며칠 전 공사장에서 보았던, 자신과 같은 가명을 썼던 회색 머리의 소녀가 서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사오리에게 작은 생수병을 내밀고 있었다. 그녀의 긴 회색 머리카락이 새벽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고, 여전히 빛을 잃은 듯 탁한 푸른 눈은 감정 없이 사오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고맙다."
사오리는 망설이다 물병을 받아들었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격하게 치밀어 오르던 헛구역질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물병을 다시 건네주며, 사오리는 소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여전히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는, 마치 잘 만들어진 인형 같은 얼굴이었다.
"이름이 뭐야?"
그 질문에 사오리는 침묵했다. 지난번 서로 '리쿠하치마 아루'라는 가명을 썼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이 가명임을 서로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지하는 듯했다. 잠시 망설이던 사오리는, 모자를 더 깊게 눌러쓰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조마에 사오리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회색 머리의 리쿠하치마 아루는 표정 변화 없이 사오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예전에 어디선가 본 사람을 기억해내려는 듯한, 혹은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눈에는 놀라움도, 비난도, 분노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깊이를 알 수 없는 고요함만이 존재했다.
잠시 후, 소녀가 입을 열었다.
"스나오오카미 시로코."
스나오오카미 시로코... 들어본 이름이었다. 정확히 어디서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뇌리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이름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저질렀던 만행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학생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그 생각이 들자 사오리의 가슴이 다시 한번 무겁게 내려앉았다.
"...열심히 해."
짧은 말을 남기고, 시로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 햇살이 조금씩 강해지며 그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사오리의 발치까지 닿았다. 시로코가 들고 있던 작은 공구 가방에서 다시 한번 금속 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그 소리가 고요한 공터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미안하다."
사오리는 자신이 왜 그런 말을 내뱉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 말은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절로 굴러 나온 것이었다. 사오리는 황급히 고개를 더 숙여 시로코가 자신의 표정을 보지 못하게 했다. 모자의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 위로 더 짙게 드리워졌다.
시로코는 떠나려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돌아보지 않은 채 나지막이 대답했다.
"응. 나도."
그리고 시로코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 새벽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길 저편으로 천천히 사라져갔다. 그녀의 뒷모습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안개 속으로 스며들었다. 사오리는 한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앉아 시로코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죄책감과 혼란스러움 속에서, 이상하게도 아주 작은 평온함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는 것을 느꼈다.
트리니티의 종탑에서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햇살은 이제 제법 힘을 얻어 트리니티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을 눈부신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사오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치에 놓인 공구 가방을 집어 드는 손길에는 이전보다 조금 더 무게가 실린 듯했다. 오늘의 공사 현장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아주 조금이지만, 이전보다 가벼워진 것도 같았다.
멀리서 다른 작업자들의 목소리가 웅성거리며 들려오기 시작했다. 곧 시작될 분주한 하루의 소음 속에서, 사오리는 생각했다.
그래,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묵묵히, 더 열심히 일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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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휴식!"
미노리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시끄럽던 공사 현장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헬멧을 벗어 땀을 닦아내는 인부들, 그늘을 찾아 털썩 주저앉는 사람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짧은 휴식을 맞이했다. 사오리는 흙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장갑을 벗어 작업복 바지 뒷주머니에 욱여넣었다.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러나 의식적으로 한 곳을 향했다. 공사장 한구석, 녹슨 철골 더미에 등을 기댄 채 말없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회색 머리의 소녀. 스나오오카미 시로코.
아침의 그 짧고 기묘했던 만남 이후, 시로코는 조용히 제 할 일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 무표정한 얼굴. 자신과 같은 가명을 썼던 소녀. 어쩌면 자신처럼 과거를 숨기고 있는지도 모를 존재.
점심은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산 차가운 샌드위치 하나가 전부였다. 배를 채운다는 목적 외에는 아무 의미 없는 식사. 미노리가 저녁 식사를 약속했으니, 그걸로 됐다. 사오리는 시끌벅적하게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용역부원들의 무리를 흘끗 본 뒤, 자연스럽게 공사장 뒤편, 건물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으슥한 골목길로 향했다.
여전히 그녀는 도망자였다. 불필요한 주목은 피해야 했고, 타인과의 깊은 관계는 위험 요소일 뿐이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는 것은 예전부터 익숙했다. 골목의 서늘한 공기가 뜨겁게 달아오른 피부를 식혀주었다.
낡은 벽돌담에 등을 기대고 샌드위치 포장지를 막 벗기려던 찰나, 골목 더 안쪽에서 누군가 낮게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부탁한 물건은 전부 가져온 거지?”
“응. 약속대로. 이 정도 양이면 충분할 거야. 구조도 복잡하지 않아서 설치도 금방이고. 접촉 신호 방식이라 원격으로...”
‘...누가 있군. 다른 곳으로 가야겠다.’
사오리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단어 하나가 그녀의 모든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정확한 좌표에 설치만 하면 돼. 건물 기둥 쪽이 가장 취약할 거다. 타이밍만 잘 맞추면..."
그 순간, 사오리의 피가 식는다.
‘저건...’
폭약의 종류, 예상되는 위력, 기폭 장치의 방식, 목표 지점.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들이 순식간에 맞춰지며 끔찍한 그림이 완성되었다. 사오리는 그 폭 탄의 용도를 알았다. 자신이 고려했던 방법 중 하나였으니까.
이것은 명백히, '선생'이 있는 곳, 샬레를 노린 테러 계획이었다.
방금 전에 느꼈던 메스꺼움과는 다른 종류의, 차갑고 비릿한 공포가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자신이 저질렀던 파괴와 혼란의 기억이 떠올랐다.
타앙-!
귀에서 과거에 울렸던 총성이 울려퍼진다.
샌드위치가 힘없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흙먼지가 묻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의 손은 이미 본능적으로, 수없이 반복했던 동작으로 허리춤에 숨겨둔 소총의 손잡이를 향하고 있었다.
타다다다당!
망설임은 사치였다. 골목 안쪽으로 몸을 날리는 것과 동시에, 어둠 속에서 돌격소총이 번개처럼 뽑혀 나왔다. 목표는 둘. 위협은 제거하되, 불필요한 살상은 피한다. 오랜 훈련으로 각인된 대로, 총구는 정확히 그들의 어깨와 다리를 향해 불을 뿜었다. 총성이 골목 안에 메아리쳤고, 이내 두 개의 그림자가 비명과 함께 힘없이 쓰러졌다.
모든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어느새 사오리의 얼굴에는 익숙한 마스크가 씌워져 있었다. 땀과 먼지에 절어 있던 용역부원 조마에 사오리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냉혹한 살육 인형, 아리우스 스쿼드의 전 리더만이 존재했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몸뚱이를 망설임 없이 짓눌렀다. 사오리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크흐흐흑...”
“당장 말해.”
마스크를 통해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감정의 온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너희들의 소속, 정보, 이 테러의 정확한 목적, 실행 시간, 그리고 배후 지시자."
아마 그것은 차가운 분노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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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쿠하치마 아루, 자칭 게헨나 학원의 무법자이자 흥신소 68의 카리스마 넘치는 사장은 지금 자신이 처한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시작은 창대했다. 흥신소의 위 상을 단숨에 드높일 절호의 기회! 카요코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호기롭게 미팅 장소로 향했다. 그래, 그 시작점까지는 완벽했다. 머릿속으로 구상했던 대로, 위풍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약간 삐딱하게 선 자세로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그녀가 들어선 대저택의 사무실 안은 적의로 가득 차 있었다. 수십 개의 차가운 총구들이 그녀의 등 뒤, 옆구리, 심지어 미간까지 빈틈없이 겨누고 있었다. 식은땀 한 줄기가 척추를 타고 또르르 흘러내리는 감각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물론, 며칠 전 이름 모를 용역 알바가 우연히 아루의 이름을 도용했고, 그 이름을 하필이면 이 마피아 조직의 운반책들이 똑똑히 목격했으며, 그 운반책들이 계획을 망친 범인으로 아루의 이름을 보고했다는, 이 오해의 전말 따위를 아루가 알 턱이 없었다.
“리쿠하치마 아루.”
사무실 가장 안쪽, 거대한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은 보스가 입을 열었다. 탁하고 중후한 목소리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질문이 떨어지는 순간, 아루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덕분에 주변의 부하들은 볼 수 없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이미 통제 불능 상태였다. 눈동자는 까뒤집어져 흰자만 덜렁 보였고, 입은 뻐끔거리며 의미 없는 소리를 낼 뻔했다. 머릿속은 이미 새하얗게 타들어 가 재만 남은 듯했다. 평소 당황할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그 특유의 얼빠지고 멍청해 보이는 표정이 얼굴 전체에 만개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핑핑 돌기 시작했다.
‘어, 어디까지? 뭘? 뭘 안다는 거야?! 아니, 뭘 묻는 건지를 먼저 구체적으로 설명해줘야 할 거 아니야! 혹시... 설마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뭔가 엄청난 비밀이라도 알아버렸다는 건가? 역시 난 대단... 잠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정신 차려, 리쿠하치마 아루! 그래! 최근에 있던 일부터 생각해보자! 어제는 라멘을 먹었... 이건 아니잖아!’
아루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용량 초과 상태였다. 온갖 잡다한 생각과 어제의 식단과 사소한 후회들이 뒤죽박죽 엉켜 회로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리쿠하치마 아루."
보스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패닉에 빠진 아루의 뇌는 생존 본능에 따라 아무 말이나 내뱉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최근의 기억을 헤집던 그녀의 머릿속에, 아주 희미하게, 하지만 강렬하게 남아있던 '경고 문구' 하나가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래, 그거!
“가, 가, 가방! 안 열어봤어!”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 순간, 아루는 깨달았다.
아, 망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총알 세례나 싸늘한 비웃음 대신, 사무실의 분위기가 바뀐다. 부하들이 서로 "뭐야?" 하는 듯한 눈빛을 교환하고, 몇몇은 불안하게 보스의 눈치를 살폈다. 총구의 각도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응? 뭐지? 이 반응은? 내가 방금 뭐라고 했더라...? 가방? 그래, 가방이라고 했지. 그런데 왜 저렇게 동요하는...?’
자신이 무심코, 아니, 거의 발작적으로 내뱉은 '가방'이라는 단어에 저들이 저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목격한 순간. 아루는 혼란스러웠다. 자기가 왜 가방이란 말을 불쑥 꺼냈는지조차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저들의 반응은 명백했다.
‘가방... 설마? 그 가방?!’
아루의 머릿속 전구 하나가 팟!-하고 격렬하게 켜졌다. 얼마 전, 정말로 사소했지만. 그녀의 배달 의뢰의 기억이, 마치 마지막 퍼즐 조각처럼 현재 상황에 딱 들어맞는 느낌이었다! 그래, 이거였어!
“후후후”
순간이었다. 방금까지 얼빠지고 세상 하찮아 보이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마스크를 바꿔 쓰듯. 대신 그 자리에는 한껏 끌어올린 의기양양함과 약간의 표독스러움, 그리고 치밀하게 계산된 듯한 냉철함이 절묘하게 뒤섞인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가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수십 번씩 연습하는 바로 그 표정, ‘궁극의 무법자’ 얼굴이 완벽하게 장착된 것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아루는 여유만만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보스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흥. 역시 그 건이었나.”
아루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목소리는 연습한 대로 최대한 낮고 침착하게, 약간의 조소를 담아서 깔렸다.
“그 가방 말하는 거지?”
또다시 ‘가방’이라는 키워드가 튀어나오자,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던 사무실 안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술렁였다. 부하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것이 느껴졌다.
아루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그 일이 맞는 모양이었다.
완벽한 대사 선택과 자신감 넘치는 태도. 아루는 이제 확신이 생겼다. 지금이야말로 몰아붙일 때였다.
“가방은 안 열어봤어.”
~~~~~~~~~~~~~~~~~~~~~
“자, 여기. 그럼 수고해, 사장.”
때는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카요코는 아루에게 크로스백 하나를 건넸다.
오늘의 흥신소 68 의뢰 내용은 간단했다. 이 가방을 게헨나 학원 구역에서 트리니티 종합학원 구역까지, 내용물 손상 없이 안전하게 배달하는 것. 딱 봐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잡일이었다. 하지만 의뢰서의 요청 사항 중 유독 눈에 띄는 문구가 하나 있었다.
‘가방을 열어보면, 사형이야!’
‘뭐, 그냥 절대 열어보지 말라는 걸 강조하는 거겠지.’
아루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녀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트리니티행 전철에 몸을 실었다.
약속 장소인 트리니티의 한적한 공원 벤치에는, 의뢰인이 미리 알려준 인상착의대로 핑크색 머리카락의 작은 소녀가 앉아 있었다. 작고 귀여운 인상이었지만, 아루의 날카로운 눈썰미에 무언가 위화감이 포착되었다.
‘저 옷... 정의실현부?’
그 핑크 머리 소녀의 가녀린 몸에는 분명, 트리니티의 무력 집단, 정의실현부의 검은색 제복이 걸쳐져 있었다. 트리니티의 자치경찰이자 실질적인 공식 무력 기관. 그런 곳의 인물이라고? 저렇게 작고 어려 보이는 꼬맹이가?
“가방… 안에 있는 거, 혹시 안 열어봤지?”
소녀가 약간 불안한 듯 물었다.
“응. 의뢰인의 물건에 손대는 건 내 방식이 아니니까.”
아루는 최대한 무게를 잡으며 대답했다.
정의실현부 소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방을 휙 낚아채듯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스마트폰으로 약속된 보수를 송금했다. 모든 과정이 순식간이었다. 소녀는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듯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
“트리니티.”
다시 현재, 아루가 던진 두 번째 키워드에 사무실 안의 술렁임이 더욱 커졌다.
“보면 사형인 물건.”
아루는 페이스를 잃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입꼬리가 경련으로 파르르 떨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 더욱 힘주어 표독한 미소를 지었다.
“헤헤헤... 역시 아루 님, 저런 상황에서도 침착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한편, 대저택 밖 낡은 승합차 안에서는 이 모든 대화가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수상한 미팅에 아루를 혼자 보낼 수 없었던 카요코는, 만약을 대비해 아루의 코트 주머니에 위치추적기와 도청기를 겸하는 장비를 몰래 넣어놓았다.
그리고 지금, 카요코, 무츠키, 하루카는 숨죽인 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아루의 허세 가득한 대화를 듣고 있었다. 무츠키는 흥미진진하다는 듯 눈을 빛내고 있었고, 하루카는 불안한 듯 손톱을 깨물고 있었다.
카요코는 깊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통이 밀려오는 듯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하아... 무츠키. 내가 신호하면 바로 전선 전부 끊어줘. 그 틈에 나 혼자 들어갈게.”
“오케이! 맡겨줘, 카요코 쨩!”
무츠키는 마치 재미있는 놀이라도 되는 듯 발랄하게 대답했다.
“하루카는 차 지키고, 혹시 모르니 주변에 지뢰 좀 깔아두고.”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카요코 과장님, 혹시 그 가방 안에 정말로 위험한 거라도...?”
하루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카요코는 다시 한번 깊은 한숨과 함께,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피로와 체념이 묻어 있었다.
“가방 열어보니까 야설만 가득하더라.”
사무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아루는 속으로 ‘완벽했어!’를 외치며, 경련 직전인 입꼬리를 필사적으로 끌어올려 의기양양한 미소를 유지했다. 등 뒤에서는 여전히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흐르고 있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 굳게 믿었다.
그러나 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댄 보스는 미동도 없었다. 잠시 동안, 아루의 심장 소리만이 사무실 안에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의 침묵이 흘렀다. 보스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처리해.”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방아쇠에 손가락을 거는 금속성 마찰음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수십 개의 총구가 다시 한번 아루의 전신을 빈틈없이 겨눴다. 이번에는 경고가 아니었다.
“엑! 자... 잠, 잠시만!”
아루의 비명 같은 외침, 무법자의 위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처절한 애원이 터져 나오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앗-
대저택 전체가 완전한 암흑에 휩싸였다. 전기가 끊어진 것이다.
“무츠키! 내가 신호하면 하라고 했잖아!”
“에? 나 아닌데?”
"...뭐?”
그때였다.
타다다다다다당!
정적을 깨고, 돌격 소총의 연사음이 어둠 속에서 터져 나왔다.
카요코는 혼란스러웠지만,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그녀는 대저택 안으로 뛰어들었다.
어둠 속 대저택 안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크윽! 누구냐!”
타다다당!
대답을 대신하는 것은 또 한 번의 사격음이었다.
총구가 터져 나올 때마다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불빛이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한 인영의 실루엣과, 그녀의 얼굴을 가린 검은 마스크, 그리고 그 너머의 차갑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를 비출 뿐이었다. 신음 소리와 몸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젠장! 지원! 전부 여기로 불...”
보스가 다급하게 무전기를 붙잡고 외치려던 순간.
콰과과과과과광!
폭발음이 들려온다. 대저택이 격렬하게 흔들리고, 천장에서 먼지와 파편들이 쏟아져 내렸다. 폭발의 충격에 남아있던 조직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그리고 저 멀리, 폭발의 섬광이 아직 가시지 않은 밤하늘 아래, 한 소녀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폭발이 만들어낸 바람으로 흔들리는 잿빛 머리카락. 가슴이 트여있는 검은 드레스와 겉옷.
“응.”
그리고 얼굴에 쓰고있는 파란 복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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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 보고 나중에 회지로 만들 수도 있는 소설임... 재밌게 봤으면 댓글 부탁함....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projectmx&no=18876343&page=1
댓글 15
장면 전환이랑 설명이 넘 많지만 재밌는데?
아루 특) 일단 나오면 개꿀잼임
개맛있잔아

개재밋음 하루에 3편씩 써오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