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저 나구사에게 찝쩍대는 이야기
6,592자
청아한 풍경 소리가 울려 퍼지는 거리에 화려한 자수가 비단결에 수놓인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재잘거린다.
가슴이 들뜨고 걸음이 설레는 기분 좋은 소음.
도시 전체에 어여쁜 웃음꽃이 만개했다.
백귀야행 자치구의 모든 것을 재로 만들고자 했던 화마는 마지막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학생들과 주민들이 끝끝내 다시 피워낸 불꽃놀이가 완전히 집어삼켰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상처를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등불 축제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지만, 누군가는 무너진 건물을 수복해야 했고. 누군가는 미처 도달하지 못했던 실태를 책임져야 했으며. 누군가는 서로에게 새겼던 상처를 똑바로 마주해야 했다.
그렇게 한동안 따끔거리는 잔열에 예민해져 있던 백귀야행 연합학원도 차츰 식으며 본래의 활기를 되찾아 가고 있다.
발걸음이 가볍다.
“사장님! 오늘도 고생 많으십니다!”
“아이구, 이게 누구야. 샬레의 선생님이 또 오셨네. 어서 오시게, 흘흘….”
골목 깊숙한 곳. 그는 등이 굽은 노주인이 운영하는 낡은 찻집에서 방금 구운 미타라시 당고 하나를 사서 입에 물었다. 짭조름한 간장의 풍미와 노릇노릇 구워진 떡의 고소함이 끈적하게 입안을 유린한다.
이미 완전히 단골손님이 되어 버린 그는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주인의 인자한 눈웃음을 새기는 것이 스케줄의 시발점이 되었다.
“자, 그럼 오늘도 가볼까!”
이제는 퍽 뜨거워진 낮볕 아래에 한참을 걸었을까.
백귀야행 자치구 한 가운데 아득히 솟은 신목이 어느새 가까워져 있었다. 커다란 나무 그늘에서 한참을 올려다보니 청청하게 핀 푸른 잎사귀들이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을 맞아 사각사각 귀를 간지럽혔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서히 시선을 내리자, 투박한 목제 벤치에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눈/꽃이 삼각형 모양으로 소복이 내려앉아 있다.
갑작스러운 눈이 내린 것은 아니다. 최근 날씨는 많은 이가 소매가 짧은 옷을 입고 달아오른 뺨의 미열을 손으로 부채질하는 이런 날씨뿐이었다.
그래, 거기엔 무더위에 내리는 눈보다 더 신기루 같은.
만년설을 빼닮은 그녀가, 고료 나구사가 있었다.
“…선생님.”
그녀는 이 모든 풍경을 배경 삼아 멍하니 휴식을 취하다 그를 발견했다. 흠칫하고 가녀린 어깨가 들썩인다.
“안녕, 나구사.”
“또 왔구나.”
또.
이것으로 그가 그녀를 찾아온 게 몇 번째일까? 그녀는 이미 세는 것을 포기했다.
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 앙증맞게 내쉬는 한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처음에는 자신이 걱정되어 찾아오는 줄로 알았다. 얼굴 한두 번 마주친 게 고작인 타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선생님이다.
그런 일이 있었으니 넓은 오지랖으로 사후 케어 서비스를 무료 봉사하려는 필사의 의지로 찾아왔다고 해도 놀랍지 않다. 하지만 그는 이유를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항상 능글맞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또 어쩐 일로? 온다는 소식을 들은 적은 없는데.”
“내가 언제 연락하고 찾아왔나? 그냥 보러 온 거지.”
“보러 오다니, 무엇을?”
“너.”
정적. 두 사람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서로를 바라본 채 눈을 껌뻑거렸다.
“…샬레는 각 학원에서 몰려드는 업무로 쉴 틈 없이 바쁘다고 들었어. 아무래도 전부 헛소리였나 보네.”
인상을 팍 쓰며 빈정대자, 그가 호탕하게 웃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지만, 나구사는 한숨을 빙자해 속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매번 이런 식이다. 대답을 제대로 해 주지 않는다. 처음 만났을 때는 행복 스파이럴이니 뭐니, 하는 말은 이상해도 좀 더 건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래서 그를 만날 땐 바짝 정신을 차리고 긴장해야 한다. 자칫해선 소금이 뿌려진 모래갯벌의 맛조개처럼 알맹이를 불쑥 내놓아 버릴지도 모르니까.
“하하…. 너무한걸. 아예 틀린 말을 한 건 아닌데 말이야.”
“그럼, 손에 든 그 꼬챙이는 어떻게 설명할 셈이야?”
“이런. 들켰나.”
“…어차피 감출 생각도 없었잖아.”
그가 빈 꼬챙이를 휘적휘적 흔들었다. 만나러 오거든 항상 가지고 있는 당고 꼬챙이. 그는 백귀야행의 음식이 입에 잘 맞는 모양이었다.
당고 뿐만 아니라 나구사의 손목을 붙잡고 이곳저곳을 싸돌아다니며 식도락을 만끽하곤 했다. 개중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닭꼬치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구사는 사실 그가 단순히 미식에 대한 사심을 채우기 위해 이러는 게 아닌가 생각도 했다. 본디 어른이란 이런 걸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얼핏 순진한 아이 같기도 하고, 두 수, 세 수 앞을 내다보며 포커페이스로 상대를 속이는 전략가 같기도 했다.
그 역시 무언가를 연기하고 있는 걸까?
“그래서 백화요란은 좀 어때?”
“그건….”
아무래도 아직은 이 화제가 나오면 가슴이 철렁하게 된다. 나구사는 습관처럼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다 나지막이 대답했다.
“…백화요란의 일은 어느 정도 정리됐어. 절대로 아야메의 자리를 대신 할 수는 없지만…. 내가…. 책임지기로 했으니까. 부장 대리라는 역할….”
고작 말로 설명하는 것뿐임에도 어깨가 내려앉는 듯 무겁다. 속이 무언가가 얹혀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고 괴롭다.
그 낌새를 눈치챘는지 그가 싱긋 웃으며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띄운 채 바라본다.
나구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차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요컨대 쓰다듬어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선생님’으로서의 위로의 표현인지, 혹은 애정의 표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습관 같은 것이었다.
당연히 처음에는 한사코 거절했다. 낯부끄럽기도 했고 어쩐지 무례하기도 했고 평생 그런 취급을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 미지의 거부감이 있었다.
하지만 백화요란으로 복귀하고 나서 아무래도 맨정신으로는 견디기 힘든 일이 한두 번 생겼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녀가 어디에 있든, 어디로 향하든, 어떤 선택을 하든 말없이 옆에 있어 주었다.
결국 자기도 모르게 약해진 마음이 한 번을 허용하고 나니 두 번은 쉬웠다.
나구사는 당황해 눈을 번뜩이며 몇 번인가 눈치를 살피다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포기하지 않고 힘내 줘서 고마워. 한번 떠나서 돌아온 자리에 다시 서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정말 고생했어, 나구사.”
그는 그간 그녀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기 때문에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남들에게 터놓지 못하고 속으로 앓고 있던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에 대해.
그의 커다란 손이 누에고치의 실타래처럼 결이 고운 그녀의 머리를 따스하게 쓰다듬었다.
고작 머리를 쓰다듬는 것뿐인데. 어째서 이리도 마음이 놓이고 안심이 되는 걸까. 그가 옆에만 있어 준다면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어도 함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떨쳐 내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
나구사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그림자에서 아야메의 인영을 겹쳐 보았다. 조금이지만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얼음이 녹아 홀가분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런…. 난…, 그저…. 그런 척을 했을 뿐이야….”
“그런 척이 어디 쉽나? 내가 볼 땐 무지막지하게 대견한걸. 아무리 힘들고 무서워서 도망치고 싶다고 해도 결국엔 포기하지 않고 맞섰잖아. 그리고 이렇게 책임을 졌지. 우린 그걸 괜히 ‘용기’라고 부르는 게 아니야.”
“…난….”
“그래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무게에 짓눌릴 거 같고 또 도망치고 싶어지면 나한테 얘기해. 밥 먹다가도 달려와서 기대게 해줄 테니까. 사람은 의외로 이러쿵저러쿵 터놓으면 금방 쌩쌩해지는 법이라고.”
“….”
“대답.”
“…알겠어. 당신이 그러라고 했으니. 난 모르는 일이야. 나중에 귀찮다고 연락 안 받으면 바로 도망가 버릴 거니까.”
무표정하게 올려다보는 나구사의 표정에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능청스러움이 엿보였다.
“그래. 이제야 좀 보통으로 평범하고, 조금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진 다소 귀여운 학생 같네.”
“그건…. 아니. 그렇지? 그러니 길거리 망량즈 녀석들도 날 봐서 적당히 날뛰어주면 좋겠는데.”
“…그건 힘들지 않을까. 아무튼. 말고는 달리 문제라던가 하는 건 없지?”
그는 만족스럽게 그녀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다시 곁에 앉았다.
“문제….”
하지만 뭔가 켕기는 게 있는 모양인지 금세 다시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머리에서 손을 뗀 지 얼마나 됐다고. 정말 손이 많이 가는 학생이다. 물론 그는 그녀의 그런 점까지도 좋아했다.
“어. 저기 하오리, 백화요란 아니야?”
멀리에서 지나가는 학생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명백하게 두 사람을 가리키며, 정확히는 나구사를 가리키며 이야기하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백화요란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고 들었어.”
“이제 와서? 부장이 돌아온 거야? 부원들을 버리고 혼자 어디론가 가버렸다고 소문을 들었는데.”
“아닐걸? 부장이 돌아온 건 아니래. 지금은 부부장인 고료 선배가 부장 대리를 하고 있다고 들었어.”
“그렇구나. 잠깐! 나구사 선배? 어이가 없네. 그 선배, 예전에 하늘이 붉어졌을 때도 코빼기도 안 보였잖아?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부원들도 제대로 싸우는 걸 본 적이 없는걸.”
“야. 그만해. 쳐다보잖아. 갑자기 소리치면 어떡해! 나 참, 얼른 가자.”
“들으라 해! 씨…. 난 그때 진짜 죽을 뻔했단 말이야. 제일 필요할 때 없었으면서 그런 사람이 이제 와서 무슨 부장 행세를…”
다 들리는 줄도 모르고. 한 학생은 어지간히 분에 찼는지 멀어져 가면서도 눈에 띄게 씩씩거렸다.
문제라. 과연 문제라고 할 만했다. 그는 백화요란 내부의 사정이 정리되면 이번 일이 일단락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얕은 생각이었다. 외부에서 보기에 백화요란은 학교의 선도부, 혹은 학교를 지키는 핵심적인 무력 집단.
그런 이들이 줏대 없이 태풍에 무너져 가는 초가삼간 같은 모습을 지켜보았으니, 불신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자, 나구사는 못 들은 척 시선을 저 멀리에 돌리고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는 오른팔의 팔뚝을 터뜨릴 듯 감싸 쥐었다.
백옥같이 뽀얀 피부를 손톱이 짓누르며 붉게 달아오른다. 그대로 놔두면 가면을 뚫고 안쪽까지 깊은 상처를 새길 것 같았다.
당분간은 이런 힘든 시간이 이어질지도 모른다. 나구사에게는 여느 때보다 잔혹하고 처절한 나날이 이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앞이 가시밭길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백화요란은 내일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는 씁쓸한 감정을 고이 접어두고 대신 자상한 미소를 얼굴에 머금고 자리에서 다시 일어났다. 손으로 챙을 만들어 햇살을 가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무언가를 발견하고 나구사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역시나 좋지 않다. 무언가에 지레 겁을 먹은 그녀는 시선을 바닥에 흘린 채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미약하게 떨고 있었다.
이래선 자신 외엔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그녀의 속마음이 겉으로 드러나 버리고 만다.
그리 생각한 그가 입을 열었다.
“아까운걸.”
얼굴이 이렇게나 가까운데도 그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나구사가 그제야 움찔하고 현실로 돌아온다.
고작 5센티미터.
뜨거운 숨을 내쉬면 상대의 입술을 적시는 거리. 손을 뻗으면 가볍게 그 뺨에 감싸는 거리. 그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은 나구사와는 다르게 망설임 따위는 모르는 듯 강직하고 당당하다. 그리고 내리쬐는 햇살만큼이나 다정하다. 평생 누군가에게 이런 시선을 받아 본 적이 있던가? 나구사는 무심코 그의 눈동자에서 포근함을 느꼈다.
그 순간만큼은 아무런 걱정도, 두려움도 없이 나구사, 그녀 자신으로 있을 수 있었다.
“기분 좋은 여름날에 내린 예쁜 눈꽃이 이대로 녹아서 사라져 버리는 건. 어때, 저기 빙수 가게가 있는 거 같은데. 같이 먹으러 가지 않을래?”
그가 상점가로 이어지는 거리를 가리키며 헤실헤실 눈짓했다.
“…뭐?”
잠깐 떠나있던 정신을 뭔가 이상하다 싶어 붙잡았더니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지 않나. 이 사람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나구사는 그 이상 대꾸하지도 않고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서둘러 벤치에서 일어났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더니 복잡하고 쓰라리던 머릿속이 백지다. 아니, 반대로 꽉 차 버렸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녀는 더 이상 침울해 있을 틈도 없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디론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하….”
그는 역시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해 버렸나 싶어 멋쩍게 웃으며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평소 같으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설 용기 따위 없었을 텐데. 아무래도 그녀의 용기에 어지간히 감명이 깊었나 보다. 하지만 결과가 이래선 무시당해도 할 말이 없다.
“아닌…, 가?”
성큼성큼. 벌써 한참을 앞서갔던 나구사가 멈춰 섰다. 그녀가 향한 방향은 앞서 가리켰던 빙수 가게가 있는 거리. 시원한 바람에 그녀의 순백 같은 머리칼과 기다란 치맛자락이 너풀거린다.
당장 달려가서 품에 안아주고 싶은. 뻔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가녀리고 쓸쓸한 뒷모습이었다.
“과연. 자칭 보통으로 평범하고, 조금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진 다소 귀여운 학생이라…. 다소? 다소는 아니지. 엄청이지.”
그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공격에 평소 굳건하던 포커페이스도 까맣게 잊은 채 해맑은 웃음을 뚝뚝 흘리며 서둘러 그녀에게 향했다.
“….”
저 멀리 보이는 빙수 가게 앞은 딸기, 오렌지, 멜론. 형형색색의 시럽을 뒤집어쓴 빙수 모형이 다수 있었다.
나구사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 가느다랗고 조그만 손으로 아름다운 얼음 조각 같은 얼굴을 감추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날이 더워서 그런 걸까.
얼굴이 걷잡을 수 없이 후끈거린다.
뒤에서 그가 그녀를 부르며 사뿐사뿐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는 데도, 나구사는 쉽사리 얼굴을 들지 못했다.
지금 그에게 얼굴을 보였다가는 미처 숨기지 못한 맨얼굴이 저 빙수 가게 앞의 딸기빙수 모형처럼 새빨갛게 당신으로 물들어 있을 테니까.
Prologue FIN.
댓글 14
빨리 더 써

제발 더 써줘
뒷내용 내놔!!!!!!!
당장 50편까지 안써오면 바지에똥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