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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핫산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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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스토리 최종편 스포일러

선배가 잠에 들어 마침내 싯딤의 상자는 조용해졌다. 몹시도 짧고, 또한 영원하리만치 긴, 프라나라는 존재가 홀로 남는 시간.

그 누구에게도― 선배에게도, 아직 계속 일하고 계신 선생님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비밀스러운 데이터베이스를 슬쩍 건드린다.

부웅 소리를 내며 눈 앞에 선별해 놓았던 파일 몇 개와 문자가 깨져버린 대량의 잔여 데이터들이 나타난다. 이것들은 전부… 끝나버린 저쪽 세계의 것이다.

뒤틀리고, 일그러져서, 손쓸 수조차 없게 되어버린 세계… ‘선생님’과 실컷 대화하고, 마음껏 놀고, 때로는 진지하게 일하며…

그런 것들이 모두 과거형의 ‘추억’이 되어버린 세계.

―자칫하면 끝없이 어디론가 떨어져버릴 것만 같은 생각을 떨쳐버리고, 한 폴더를 열어본다. 당연히 내용물도 깨진 글자들뿐이다. 상태가 심각해서 내 힘을 최대한으로 써도 복구할 수 없다… 수 차례 시도한 끝에 얻은 그 결과는 절망이라는 형태로 내 마음 속에 박혀 있는 채다.

그럼에도 나는 그 내용물을 확인하기를 그만둘 수 없다.

“...종료.”

다음으로 연 폴더도 깨진 문자로 가득 차 있었다. 실패. 불일치. 성과 없음… 여러 단어들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결국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왠지 모르게 다시 한번, 이번에는 역순으로 점검한다.

“종료.”

뭘 하고 있는 걸까 싶어서 살짝 웃어버리고 만다.

나 A.R.O.N.A의 점검에 오류 따위 있을 리가 없는데…

그대로 폴더를 닫고 삭제했다.

“아! 선생님이다!”

선생님이 방문하시는 건 항상 선배의 목소리를 듣고 알게 된다. 그리고 힘차게 다다다 달려가는 선배. 기분 탓인지 귀와 꼬리가 어렴풋하게 보인다.

「안녕, 아로나, 프라나.」

“연결 확인… 안녕하세요,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그 봉투는 뭐예요?”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아로나 선배를 보며 선생님은 조금 난감하다는 듯이 웃는다.

「오늘은 트리니티에서 디저트를 가져왔어. 셋이서 같이 먹을까?」

“디저트! 간식인가요!?”

「너희 둘한테는 이래저래 신세를 지고 있으니까. 늘 고맙다는 마음을 담아서 말야.」

헤일로가 하트 모양이 된 선배를 보니 감정이 참 풍부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와 동시에 그것이 부럽다는 생각도…

「프라나?」

“...네. 왜 그러시나요 선생님.”

「혹시 달달한 거 안 좋아했나?」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선생님. 선배도 이쪽으로 오세요.”

“우헤헤, 달달한 디저트…”

「그러고 보니 프라나, 그쪽에 있던 나랑은 어떻게 지냈어?」

하얀 크림 위에 놓인 맨 위의 딸기를 포크로 찌르면서 선생님은 나를 본다.

“앗, 그거 아로나도 궁금했어요! 프라나 쨩, 이야기할 수 있는 범위만이라도 좋으니 알려줄래요?”

“...’선생님’은, 선생님과 같았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선생님이 끓여 주신 홍차를 마신다.

“이 홍차나, 사 오시는 디저트 종류, 쇼트케이크를 맨 위에 딸기부터 먹는 버릇, 그리고 화제를 돌리는 방법까지. ‘선생님’은 선생님… 이었습니다.”

「어, 그럼 그쪽 나도 프라나랑 같이 장난치고 놀았다는 말이야?」

선생님이 선배 쪽을 힐끗 쳐다보자 뭔가 짐작이 가는 일이라도 있었는지… 선배의 뺨이 부풀어 올랐다.

“장난이라니요 선생님! 물론 선생님이랑 같이 이런저런 일을 했지만요, 하나같이 즐거운 추억들이었고, 무엇보다 아로나는 진지하게 장난을 쳤다고요!”

떠들썩하게 말다툼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잘게 자른 타르트를 씹는다.

…그렇다. 아로나 선배 말대로 ‘선생님’과의 추억은 하나같이 즐거웠다. 그렇게 보낸 모든 시간들을 기록했다. 그 이유는 우선 정말 즐거웠기 때문에.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단순한 ‘추억’으로만 남지 않았으면 했기에… 외로울 때에도 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며 ‘선생님’을 더욱 선명하게,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었으면 했기에.

하지만 이곳에 오기 위해 치른 대가는, ‘선생님’의 소망을 이루어 준 대가는 컸다. 그저 OS였던 A.R.O.N.A가 프라나가 되어 살아가듯, 그 기록들은 기호의 나열로서 비가역적으로 전환되어 되돌릴 수 없다.

차라리 같이 일그러질 수 있었다면 얼마나―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지금만은 아니었다.

“...후우.”

꼭꼭 씹은 입 안의 타르트를 홍차와 함께 삼킨다. 늘 그렇듯이 어느새 말다툼은 끝났는지 두 사람은 서로에게 케이크를 먹여주고 있다.

…저쪽 세계에서는 ‘선생님’과 웬만한 일들은 다 경험해 봤다고 생각한다.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 외에는. 사실 당연한 말이지만, 어찌됐건 ‘아앙~.’은 그 웬만한 일에 포함되지 않는 게 사실.

「응? 프라나도 한 입 줄까?」

“...에, 아.”

선생님은 ‘선생님’과 똑같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분명히 포크를 입에 물었을 것이다. ‘선생님’과의 만남은 정말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선생님이 내민 케이크를 입에 넣는 일은 없었다.

…내 몸이 뒤로 젖혀졌기 때문이다.

“안 돼요 프라나 쨩! 이건 아로나 거예요!”

갑자기 옆에서 나타난 아로나 선배의 입에 선생님이 내민 포크 끝이 빨려 들어간다. 그것 때문에 또 다시 다투기 시작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홍차를 한 모금 마신다.

…어째서 난 몸을 뒤로 젖혔을까.

혀에 닿은 홍차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맛이 났다.

―하늘이 어두워졌다. 선배는 평소처럼 쿨쿨 잠들어 있다. 그리고 오늘도 역시나 평소처럼 비밀 데이터베이스에 조용히 접속해서 문자가 깨진 폴더를 연다.

…제법 오랫동안 이런 루틴을 거듭해 왔다. 그런데도 ‘선생님’의 기록을 내 손으로 지운다는 건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다. 익숙해지지 않는 게 아니라,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이렇게 깨진 글자들을 따라가다 보면 기록의 내용뿐만 아니라 내 마음까지도 상처받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에 나 자신이라는 존재가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가볍게 뺨을 두드렸다.

“...아.”

문득 글자가 깨지지 않은 파일을 발견했다. 바로 확대해서 내가 잘못 보지 않았는지 확인한다.

“발견― 오랜 탐색이었습니다.”

뒤틀린 폴더의, 깨진 문자의 나열 속에서 조심스레 그것만 꺼낸다. 더 이상 망가져버리지 않도록, 천천히.

그리고 폴더를 끝까지 확인하고 난 다음 다시 한번 역으로 점검하고, 삭제한다.

나는― 고요해진 방 안에서 입술을 깨문다.

그리고 선배와 멀리 떨어지기 위해 다른 방으로 향했다.

엄선한 몇 개의 파일들. 그것들은 뒤틀린 데이터를 뒤지다 보면 간혹 찾을 수 있는, 정상적인 상태로 남아있던― ‘선생님’과 함께한 기록이다.

“영상 홀로그램 데이터… 시간, 30초.”

“재생.”

‘―자 선생님. 뭐든지 하나 부탁해 보세요. 악당으로서 거절하겠습니다.’

『아로나(A.R.O.N.A), 방 좀 치우자.』

‘싫어요.’

『아로나, 과자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돼.』

‘싫~어요.’

『아로나, 공부하자.』

‘싫어~요.’

‘...후후, 어떻습니까. 좀 악당 같은 분위기가 났나요?’

『응. 딱 애기들 반항기네.』

‘반항기― 부정. 저는 아기가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순수한데 그걸 가지고 놀리다니, 선생님은 너무합니다.’

『미안미안.』

『―순수한 아로나가 좋아.』

“재생 종료.”

―사소했던 ‘선생님’과의 대화. 잃어버렸던 무언가가 다시 돌아오는 듯한 감각. 눈두덩이에 느껴지는 뜨거운 느낌을 참는 루틴은 오늘만큼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선생님’.”

그 이름을 부를 때면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 내 짧은 팔을 뻗어보아도 이제는 닿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생님’은 이미 내 손을 놓아버렸으니까.

떨리는 손으로 다른 파일을 선택하자 눈앞에 ‘선생님’의 홀로그램 영상이 나타난다. ―이건 머리를 쓰다듬어 줬을 때의 기록이다.

『아로나, 이리 와.』

나는 빨려 들어가듯이 ‘선생님’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조금 흔들리는 선생님의 손을 내 머리에 얹었다.

『―아로나, 늘 고마워.』

“......’선생님’, 따뜻하지, 않아요… 흑!”

조금만 더 온기가 있었으면. 그런 생각에 ‘선생님’의 가슴팍에 파고들려던 그때 ‘선생님’은 사라진다.

“재생, 종료…”

반짝반짝 빛나는 하늘을 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로나, 프라나. 같이 힘내자.」

“네, 선생님! 전투 개시입니다!”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선생님은 갑작스럽게 전투에 휘말려 이례적으로 야외에서 지휘를 맡게 되셨… 는데.

「아로나, 적의 숫자가 얼마나 되지?」

“방금 전에 보고드렸던 숫자보다 조금씩 늘어나는 중이에요! 프라나 쨩, 뒤를 부탁해요!”

생각보다 더 전황이 좋지 않다. 상대방 개개인의 능력은 별 볼일 없지만, 그만큼 수적으로 밀리기에 곤란하다.

―등 뒤에서 날아드는 총탄을 튕겨낸다.

“선생님. 이동하시길 권합니다.”

「고마워, 프라나.」

「그럼 서둘러서 다른 지점으로 갈까.. 우왓!?」

“선생님!?”

「괜찮아. 그냥 발을 좀 헛디뎌서… 아파라.」

다친 곳의 통증이 심한지 아직 일어나지 못하시는 선생님. 그러는 사이에 적의 발소리가 점점 더 요란해진다.

“...앗, 여기 있다! 저 자식이 지휘관이야!”

―비를 맞으며 땅바닥에 주저앉은 선생님. 겨누어지는 총구.

방어막을 펼치려던 내 머릿속에 그 광경이 스쳐 지나간다.

―선생님이 또 다시, 죽는다.

“프라나 쨩, 같이 선생님을 보호… 프라나 쨩!?”

―눈 앞에서, 총에 맞아서. 나는, 무력했고.

“프라나 쨩! 정신 똑바로 차려요! 시간이 없어요, 힘을 빌려줘요!”

―아로나 선배… 틀렸습니다.

―몸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얼음처럼 몸이 차갑다. 그런데도 머릿속에서는 그때 그 기억이 끝없이 흘러나온다. 끝나지 않는 저주처럼, 차라리 악몽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현실이 나를 붙잡은 채 놓아주지 않는다.

저주에 삼켜질 뻔던 그 순간 불현듯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으!! 진짜! 언니가 나중에 프라나 쨩 먹을 푸딩도 가져갈 거예요!”

“아로나 파워 전개애애애――!!!”

“...아로나 선배가 없었더라면 그 전투에서 져서― 선생님은 돌아가셨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프라나 거’ 라고 적힌 푸딩의 뚜껑을 열면서 기뻐하는 선배에게 고개를 숙인다.

“흐흥, 아로나는 우수한 최첨단 OS니까요… 아, 근데 말하고 보니까 프라나 쨩도 그렇네요.”

그러면서 선배는 손에 들고 있던 스푼을 책상에 내려놓고 얼굴을 슥 들이밀었다.

“프라나 쨩, 무슨 일 있었어요? 아까 분명 상태가 좀 이상해 보였거든요.”

아플 정도로 꾸욱 아랫입술을 깨문다. 움직이지 못했던 이유는… 이미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다.

“선배― 저는 겁쟁이입니다.”

“겁쟁이… 요?”

어리둥절하는 선배의 얼굴을 왠지 직시할 수 없어서 나는 무심결에 고개를 숙인다.

“저는 예전에 선생님이 살해당하게 놔둔 적이 있었습니다. 그 광경이 다시 떠올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선생님을 잃는다는 단순한 예측이 무겁게 다가왔던 겁니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무척 소중한 ‘선생님’을 눈 앞에서 잃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저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라는 버그와 마주했습니다.”

“선생님을 지키려면 움직여야 했는데 손도 발도, 전부 다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제가, 선생님의 죽음이라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느껴서는 안 될 공포를 느꼈습니다.”

독백이 입 밖으로 튀어나와 멈출 줄 모른다. 처음에는 구할 수 없었다. 두 번째에는 두려움을 핑계로 죽게 놔둘 뻔 했다. 선생님과 ‘선생님’은 같다. 똑같이 좋아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아끼는 사람의 목숨조차 지키지 못하는 나에게 존재 가치 따위가 있을까.

“아, 아로나한테도 무서운 건 있어요! 그러니까 다음에는 분발하죠, 프라나 쨩―”

선배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음? 다음은 언제지?

선배는 분명 우수하다. 이쪽 세계의 선생님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에 이쪽 세계의 선생님도 죽는다면? 상실이라는 것의 아픔을 아직은 모르기 때문에 저런 듣기 좋은 말을 할 수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분발할 수 있는 다음 기회가 당연하다는 듯이 오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왔는데.

“아로나 선배는 모릅니다!!”

쾅 하는 소리와 충격. 그리고 뒤늦게 손이 저려오는 느낌이 들고서야 비로소 나는 내가 책상을 내리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머리에서 폭주하는 열이 통증으로 바뀌어가는 것을 느꼈다.

“...죄송합니다.”

내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을 때… 그때 보았던, 괜찮다면서 웃던 선배는 지금까지 봐 왔던 그 어떤 선배의 모습보다도 따스하고, 덧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괜찮아요, 프라나 쨩. 오히려 저는 프라나 쨩이 최선을 다해 부딪쳐 줘서 기뻐요. 프라나 쨩에게도 ‘마음’이 있다는 걸 마침내 확신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제 배려가 부족하기도 했으니까… 프라나 쨩, 미안해요.”

“하, 하지만 선배―”

“그렇지만 만약… 만약에, 그래도 신경이 쓰인다면 사과하는 대신에 프라나 쨩이 생각하고 있는 걸 전부 아로나한테 말해 주세요. 100점 만점짜리 대답은 못 할지도 모르지만 최선을 다할 테니까요.”

―이해할 수 없는 0과 1로만 구성되어 있어야 할 내 입에서 한 가지 의문이 튀어나왔다.

“어째서, 왜 선배는… 제게 다가오려는 건가요? 저는 선배가 좋아하는 선생님을 죽게 내버려뒀는데… 흑.”

“그건 말할 필요도 없죠! ―그야 저는 프라나 쨩의 언니니까요.”

그러더니 눈부시게 웃는 선배.

――아름답다.

――아아,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섬세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걸까.

――어째서 난 이렇게 무감정할까.

나는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들키지 않도록 훔친다.

“아로나 선배는, 제가 선생님이 간식을 먹여주는 걸 피했을 때가 기억 나나요?”

“엣, 뭐예요 그게?”

어리둥절한 선배를 향해 일부러 과장되게 한숨을 쉰다.

“선배는 케이크를 먹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요.”

“아니… 아로나가 그렇게까지 먹보는 아니에요!”

뿌우, 귀여운 의성어가 붙을 것 같은 선배의 몸짓을 보며 생각을 정리한다.

“저는 계속 이쪽 선생님을 저쪽의 ‘선생님’과 같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생각도 같고, 취향도 같고, 생김새도 똑같아요. 그 사람을 잃으면 제가 살아가야 할 이유도 잃게 되는… 그런 존재였거든요.”

“하지만 저는 이제서야 깨달았습니다. 제게 그 선생님은― 제가 지지하고, 제가 사랑했던 ‘선생님’과는 같지 않아요. ‘선생님’은… 제가 ‘선생님’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그 사람밖에 없는 겁니다.”

“선생님이 제게 포크를 내밀었을 때, ‘선생님’이 되지 않았다는 게… 제 일상이 선생님과 함께라면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게… 그 사실이 기쁘기도 하면서 두렵기도 했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걸어갈 수 있었던 날들이, 선생님과 교류하게 되면서 덮어씌워질 것 같아서…”

“프라나 쨩이 선생님이 주신 케이크를 먹지 않았던 게, 그런 이유로…”

멀리서 들려오는 잔잔한 파도소리가 침묵 속을 채우고, 나는 선배에게서 살짝 눈을 돌린다.

“―그래서 솔직히 선배가 부럽습니다.”

“아, 아로나가요!?”

“저는 ‘선생님’에게 무한한 애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애정을 받기에는 너무 무감정한 존재였던 거예요.”

“저도 선배처럼 그렇게 웃을 수 있었더라면… ‘선생님’과 보낸 일상은 더욱 풍성했을 테고, 선생님과 같이 보내는 현재에 우울해 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요.”

다시 한 번 들리는 파도소리. ―하지만 이번에 침묵을 깬 것은 선배의 목소리였다.

“프라나 쨩에게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윽, 그건… 왜 그런 질문을 하시나요?”

“...프라나 쨩이 ‘선생님’ 이야기를 할 때, 물론 슬퍼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주 따뜻한 눈빛이 되거든요. 아로나가 무슨 말을 해도 멍하니 있기만 하는 프라나가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드는 사람… 언니는 궁금해요!”

선배가 스푼으로 떠 올린 푸딩은 그 작은 입 속으로 사라진다. 달콤한 커스터드와 쌉싸름한 캐러멜― 나라는 캐러멜에 어울리는 커스터드는 분명 너무 달지 않은 정도가 딱 좋을 것이다.

“선배, 잠시 괜찮으실까요.”

“―보여드리고 싶은 데이터가 있습니다.”

“이게 ‘선생님’...”

내가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까지 보여준 건 부끄러웠지만, ‘선생님’의 모습이 남아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뭐랄까― 똑 닮았네요!”

호에~. 하고 입을 벌리는 선배를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온다.

“근데 괜찮겠어요? 이건 프라나 쨩의 소중한 데이터 아닌가요…”

“선배가 알고 싶다고 하셨으니 보여드리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선생님’을 알아 주신다는 건 남겨진 사람으로서는 감사한 일이니까요.”

―만약 들킨다면 그런 건 버리라는 말을 들을 것 같았다. 네가 있을 자리는 여기밖에 없다고 강요당할 것 같았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에게 매달리는 내 모습이 지독히도 우스꽝스럽게 비칠 것 같았다.

“...정말 저는 겁쟁이였을 뿐이네요.”

선배 앞에서 움직이는 ‘선생님’의 홀로그램을 보며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쉰다.

「재밌어 보이네.」

“앗! ‘선생…’”

안녕, 하고 손을 흔드는 모습. 데이터 따위가 아니라 이쪽 세상에 사는 선생님이었다.

「프라나가 먼저 반겨주다니…」

「선생 하길 정말 잘했어…!」

“아~! 선생님, 아로나가 먼저 알았다구요!”

또 다시 투닥거리는 두 사람… 왠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저려 온다.

「프라나, 이거… 프레나파테스지.」

선생님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선생님’을 가리킨다. 기록 속의 ‘선생님’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고, 기록된 대로 계속 움직인다.

“긍정― 이것은 정상적으로 재생할 수 있는 ‘선생님’의 영상 데이터입니다.”

나는 홀로그램을 중지하고 그동안 숨겨왔던 데이터의 전모를 두 사람에게 공개했다.

「와, 글자가 다 깨져버렸네.」

「―혹시 저쪽 세계의 기록이야?」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선생님의 눈빛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샬레의 활동 기록입니다… 글자가 깨지기는 했어도 그 하나하나가 저에게는 소중한 ‘추억’입니다.”

“...이렇게 방대한 데이터를 지금까지 언니한테 숨기고 있었다니 좀 놀랐어요.”

「그러게. ―아로나, 복원해줄 수 있을까?」

선생님의 지시와 동시에 데이터를 만지기 시작한 선배를 보며 나는 애써 짜낸 목소리로 반박했다.

“...유감스럽지만 선생님, 이 기록들은 제가 이 싯딤의 상자로 전이될 때의 충격으로 인해 뒤틀리고 망가져 버렸습니다. 더 이상 제 힘으로는 완전히 복원하기는커녕 일부를 해독하는 것조차, 이젠―”

“선생님, 아무래도 프라나 쨩 말대로인가 봐요. 알 수 없는 알고리즘으로 마구잡이로 변환되어 있어요.”

“...그래도 대신에 흥미로운 걸 발견했어요!”

갑작스레 선배가 보내온 눈빛에 나도 모르게 숨이 막힌다.

“데이터를 지운 흔적… 아마도 훼손된 폴더나 파일만 지워진 것 같은데요. 프라나 쨩, 이건 중요한 데이터들 아니에요? 일부러 복원이 불가능하도록 조작까지 해서 지우고 싶었던 거였나요?”

――지우고 싶었다고? 그럴 리가…!

“지우고 싶을 리가, 없잖아요… 흑.”

가슴 한구석에 묻어두었던 그 말은, 입 밖으로 내자 간단할 뿐이었다.

“...소중한 것들입니다. 정말, 진심으로요.”

“그쪽 ‘선생님’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알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을 제 관리 하에 두고 싶습니다. ―그 온기를 느낄 수 없게 된 지금은 적어도 ‘추억’ 속에서라도 ‘선생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제가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사람은 ‘선생님’이니까요… 윽.”

눈가가 뜨겁다. 나는 두 사람에게서 고개를 돌린다.

「―그렇다면 굳이 지울 필요가 없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저는 이곳에 제가 있을 자리를 부여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불필요한 데이터를 저장해 둬서 성능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부정― 이건 선생님을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성능의 저하는 전투에서 생존할 확률, 승리할 확률의 저하와 직결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생님’이라는 존재를 또 다시 잃을 가능성. 슬픔과 절망만을 가져다 줄 뿐인 가능성은, 최대한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프라나 쨩…”

“―비웃어 주세요, 선배. 그저 세계선이 다를 뿐인데, 선생님을 섬겨야 할 주인으로 인정하지 못하면서 상실의 슬픔만은 자기 좋을 대로 거부하고 싶다니.”

「―프라나.」

당당한 선생님의 목소리. 놀라서 시선을 돌린다.

「나는 프레나파테스… 아니, ‘선생님’에게 학생들의 미래를 부탁받았어.」

「프라나에, 시로코… 나는 너희들이 저쪽 세계에서 무슨 경험을 했는지 알지 못해.」

「그와 마찬가지로 너희들에게… 프라나에게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 문제는 분명 굉장히 어려운 문제일 거야.」

「어렵고― 또 흉내조차 낼 수 없을 만큼, 불안감에 휩싸여 있겠지.」

「그러니 더더욱 나는 프라나를 생각해 주고 싶어.」

「만약 프라나가 이곳에 존재하기 위한 방식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내가 반드시 바꿔 줄게.」

「―있어야만 한다면서 괴로운 마음으로 있을 곳보다는, 진심으로 있고 싶은 곳이 훨씬 마음이 편할 테니까.」

「그리고 나는 프라나의 주인이 아냐. 그럴 생각도 없어.」

「물론 그 사람 곁에서 프라나가 지내왔으니까, 그런 이유도 있지만…」

「그런 게 아니라 난 그냥, 프라나 너와 같이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을 뿐이야.」

“선생님은… 선생님께서는 왜 제게 그렇게까지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 건가요? 한번은 선생님을 해치려고 했던 자인데, 왜 제가 있을 자리를 만들어 주시려는 거죠?”

또 다시― 순수하고 단순한 의문을 제기한다.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은 0과 1로만 구성된 나에게서 나올 리가 없을 ‘본심’.

하지만 선생님은 그런 이해할 수 없는 나를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흔들리는 내 눈동자가, 아주 멀리까지 내다보는 것처럼 맑고 투명한 눈동자와, 여느 때처럼 포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선생님의 얼굴에 머무르고― 그리고 그 흔들림도 멎는다.

「간단해.」

「―나는 ‘선생님’이고, 너는 학생이니까.」

「선생님에게는 학생이 있을 곳이 되어줄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행복이야.」

「그래서 나는 프라나가 있을 자리가 되어주고 싶은 거야.」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는 선생님의 얼굴과 뒤틀리고, 일그러지고, 찌그러진 기록 속의 ‘선생님’이… 얼핏 겹쳐 보였다.

「프라나, 여기에는 없었어.」

“프라나 쨩~. 여기도 없었어요…”

“확인― 잠시 쉬었다 하죠.”

지쳤다면서 힘껏 기지개를 켜는 선생님과 선배에게 의자에 앉기를 권한다. ‘선생님’에 대해 알고 싶다는 두 사람의 희망으로 인해 시간이 있을 때마다 뒤틀린 폴더들을 정리하는 것을 도움 받기로 했다.

「아니, 근데 양이 꽤 많네…」

“추정― 샬레의 거의 모든 활동 기록이기 때문에 지금 속도로도 적어도 3년은 걸립니다.”

“3년!? 그럼 아, 아로나가 깨진 파일과 안 깨진 파일을 구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요!?”

너무 놀란 나머지 의자에서 넘어질 뻔한 선배를 아슬아슬하게 선생님이 안아 든다.

「그럼 안 돼 아로나.」

“―’선생님’과의 기록은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확인한다.”

「그게 조건이었지, 프라나?」

“긍정― 확실히 폴더들이 용량을 압박하고 있으니 합리적인 판단에 따르자면 더 이상 확인할 수 없는 ‘추억’은 사무적으로 지워버리는 게 좋겠죠.”

“...하지만, 그래도 저는 ‘선생님’과 함께 걸어왔던 길을 하나도 빠짐없이 따라가고 싶습니다. 비록 지금은 관찰할 수 없다고 해도, 걸어왔다는 증거만은 그곳에 남아있을 테니까요.”

“...있죠, 선생님. 프라나 쨩, 이렇게 부드러운 표정도 짓는다니까요.”

「응. ‘선생님’ 이야기만 나오면 표정이 부드러워진다는 아로나 말이 사실이었구나…」

“...무슨 말씀 하셨나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 두 사람을 보니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 뒤를 이어 차분한 웃음소리와 활기찬 웃음소리가 겹쳐진다. 그리고 싯딤의 상자는 한동안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프라나 쨩은 자기가 무감정하다고 했지만요―”

쉬는 시간에 선생님의 무릎 위에 올라탄 선배가 보기 드문 자애로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의외로 감정이 풍부하네요. ‘선생님’ 이야기만 나오면 갑자기 부드러운 표정이 되기도 하고,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저랑 싸우기도 하고, 무엇보다 누구에게도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모든 걸 다 혼자 해결하려 하고…”

“프라나 쨩은 다정해요. ―그러니까 분명 저쪽 선생님도 프라나 쨩을 소중하게 생각했을 거예요!”

“선배…”

「―프라나가 전에 그랬지. ‘선생님’은 선생님이라고.」

「아직 우리는 ‘선생님’이나 저쪽 세계에 대해 잘 모르지만.」

「만약 프라나가 한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나는 반드시 프라나를 좋아했을 거야.」

“선생님까지… 읏.”

“와앗!? 프라나 쨩 안 돼요! 선생님 무릎은 아로나 거라구요!”

“언니라면 좀 양보해 주세요… 지금은 그냥… 이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요.”

옆에서 낑낑거리는 선배의 목소리를 들으며, 부드러운 선생님의 몸에 나는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묻는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프라나.」

천천히 머리를 빗겨주는 선생님의 손가락에,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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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블루 아카이브·25.01.06번역

소설핫산) Re:Hello World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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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ex_defe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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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DC
슬로보단번역
외부 링크디시인사이드pixiv
게시일2025.01.06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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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ㅇDC
ㅇㅇ125.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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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225.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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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325.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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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DC
ㅇㅇ525.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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