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토스.me
홈모음집마이페이지
SUBSCRIBED
EXPLORE
BA블루 아카이브BR봇치 더 록!ZZZ젠레스 존 제로GI원신HSR붕괴: 스타레일모든 채널 보기
문의하기
블루 아카이브
블루 아카이브소설 핫산) 붉은색이 교차할 때
/블루 아카이브
광고

#라이트 #M #우정 #스바루 #라브

원본 by 鬼瓦

=====================

<1> ~ <3>

<1>

“컨디션이 안 좋았니?”

아, 하고 숨이 새어 나온다.

오한으로 등에 소름이 돋는다.

미안하다는 듯, 조금은 쓸쓸한 표정을 지은 트리니티의 교원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지난번 쪽지 시험.

─그런 것쯤은 알고 있다.

지금은 그것을 돌려받는 시간.

얼른 받지 않으면 뒷줄이 밀리고 말 것이다.

그런데도 팔이 납덩이라도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뒷줄에 서 있는 사람이 무슨 일인가 싶어 이쪽 손을 들여다보는 기척이 느껴진다.

교원도 멋쩍은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더 이상 주변의 아가씨들에게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 건 피하고 싶어 삐걱거리는 팔을 억지로 움직여 힘없이 시들어 있는 종이를 받아 든다.

실로 가볍다.

뒤집힌 종이 너머로 언뜻 비친 붉은 글씨는 못 본 척하며 내 자리로 걷는다.

아아, 그 짧은 사이에 종이 쪼가리 한 장의 무게가 변할 리는 절대 없을 텐데.

─그렇다면 어째서 움켜쥐고 있는 손이 이토록 저린 걸까.

뒤집어 놓은 채 책상 위에 올려두어도, 채점란의 붉은색은 투명하게 비치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응시당하는 기분이 들어 팔과 책상 상판으로 만든 급조된 어둠 속으로 처박히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러지도 못한 채, 줄지어 성적을 받아 드는 클래스메이트에게 눈길을 던진다.

흥분으로 뺨을 붉히는 아이.

알기 쉽게 어깨를 늘어뜨리는 아이.

당사자들은 저마다 제각각의 액션이라 생각하겠지만, 이 자리에서 바라보고 있자면 모두 한결같았다.

이 종이 쪼가리도, 행렬도, 이 몸뚱이도, 이대로 바람에 실려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으면 좋겠다.

테스트에 대한 강평이 끝나고, 평소처럼 BD가 상영된 뒤 종이 울렸다.

다음이 종례라서 그런지 들뜬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한다.

조금씩 실내 온도가 상승하는 듯한 그 공기에 아직 적응하지 못해 책상으로 시선을 떨군다.

그곳에는 여전히 뒤집힌 시험지가 놓여 있다.

잉크는 중력에 거슬러 번져 있었다.

숨기려 해도 언젠가는 겉으로 드러나고 마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같은 처지일지도 모르겠다.

세련되지 못한 소란스러움 속에서, 채점란에 찍힌 새빨간 타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2>

방과 후가 되자마자 마주한 현관은 의외로 사람이 적다.

그것은 분명 이곳에 다니는 학생에게는 동아리든 위원회든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역할을 갖지 못한 인간이나 이런 어중간한 시간에 현관문을 나서는 것이겠죠.

들어줄 사람도 없는 가운데 자조한다.

학원을 나와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조금 떨어진 나무 그늘에 정자가 세워져 있었다.

이끌리듯 그 안에 주저앉자, 왠지 오랜만에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 들어 천장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하늘을 우러러보게 된다.

─니코메디아 트루프의 인솔자.

아리우스 자치구의 선도위원.

그리고 트리니티의 말단 전학생.

부여받은 역할은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을 완수하려 애쓰지만, 그 무엇도 되지 못한 어중간한 몸뚱이만이 여기 앉아 있다.

이루어내려 노력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거야, 라고 그 사람은 말할지도 모르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로서 몸에 밧줄 자국을 남기고 있다.

…어째서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린 걸까. 이 뇌는.

한숨을 내쉰다.

문득 머릿속에 스치는 것이 있어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통학용으로 새로 산 가방 안을 뒤적인다.

아아, 차라리 구겨져 버렸더라면 하고 바랐건만 세상일이 그렇게 마음대로 풀릴 리 만무했다.

예상보다 훨씬 깨끗한 종이 한 장이 의기양양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0점, 인가요.”

새빨간 타원이 의식을 집어삼킨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렇군요, 부족하나마 성실하게 공부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은 갈 곳 없는 분노도 점수를 한탄하는 탄식도 아닌

노력해 봤는데요, 라는 과거를 미화할 뿐인 발전 없는 자기변명이었다.

“아아, 머리가 모자란 걸까요. 역시…….”

애써 외면해 온 가능성.

필사적으로 쥐어짜 낸 말조차 흙먼지가 묻은 콘크리트 바닥에 툭툭 굴러다닐 뿐.

결국 어디를 가나 어중간한 인간일 뿐이라고 깨닫는다.

마음먹고 결정한 사항도, 어렵사리 얻은 기회도 그 전부를 이 손으로 망쳐버린다.

그 아이들의 인생을 짊어지고 있는 것마저 무서워져 의연을 가장할 수 없었다.

있기를 바랐던 불안 가득한 희망 안에서 기적에 의해 살아가고 있는데도 어쩔 도리 없는 인간이 중력에 몸을 맡긴 채 그늘에 머물러 있을 뿐.

이 세상에 상징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분명 이 새빨간 타원이야말로 나를 나타내는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괴로웠다.

“…아? 뭐야, 너.”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드니, 검은 후드에 회색 롱스커트를 입은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 올 때까지 눈치채지 못했다니 상당히 정신이 피폐해진 모양이다.

그 사람은 잠시 이쪽을 훑어보더니 “뭐, 상관없나”라고 중얼거리며 딱 한 명분의 간격을 두고 앉았다.

“…방해라면 곧 비키겠습니다만.”

“방해? 아아, 아니야.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고.

여기에 사람이 있는 건 드문 일이라 좀 놀랐을 뿐이야.”

말하며 그녀는 천장을 올려다본다.

말로 잘 표현할 수는 없지만, 왠지 그 모습이 무엇보다 순진하고 무구한 것처럼 보였다.

헬멧 사이로 흘러내린 붉은 긴 머리가 찰랑이며 흔들린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아…….”

반장갑 사이로 드러난 가느다란 살결이 붙잡고 있던 프린트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가리킨다.

황급히 가방에 집어넣으려 했지만, 설상가상이라 해야 할지 손이 미끄러져 종이가 그녀의 발치로 팔랑거리며 날아갔다.

“조심해”라고 말하며 굳이 상체를 굽혀 주우려 하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건넬 수 없었다.

─용솟음치는 내면을 어떤 단어로 골라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겉면의 붉은 글씨가 그녀의 시선에 노출될 때도 응어리진 공기에 목구멍을 내맡기고 있었다.

“자.”

“…어.”

그녀는 뒤집어서 프린트를 내밀었다.

앞면은 분명히 보였을 터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

마치 그것이 놀랄 일도 낙담할 일도, 하물며 경멸할 일도 아니라는 듯이.

그럴 리가 없는데.

이것은 제시된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주어진 장소에서조차 피어나지 못하는 무능함의 상징이다.

‘공부하는 학생’을 완수하지 못한 가련한 인간의 증명서다.

그런데 어째서 당신은.

마음의 술렁임 그대로 낚아채듯 종이를 넘겨받는다.

그녀는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스커트 주머니를 뒤적였다.

“…덤으로 이것도 받을래?”

“왓, 앗.”

찰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투박하게 날아온 것은 작은 페트병.

몸을 내밀어 낚아채니 사과 사진이 반쯤 걸쳐진 라벨이 붙어 있었다.

“받아도 되나요.”

“신경 쓰지 마. 저기 자판기에서 운 좋게 당첨된 것뿐이니까.”

자, 보라며 그녀는 비슷한 페트병을 꺼내 뚜껑 부분을 잡고 흔든다.

반대편에 인쇄된 오렌지색이 좌우로 번졌다.

“기왕이면 좀 팡팡 당첨됐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다른 애들한테도 나눠줬을 거 아냐.

한 병뿐이면 좀 그렇지.”

“그렇군요. 떨어진 콩고물이라는 건가요.”

“그렇게는 말 안 했거든!”

마치 강아지가 앙앙거리는 듯한 태도에 헛웃음이 난다.

“왜 웃는 거야!”라고 다시 반발한다.

오랫동안 맛보지 못했던 대등한 말대꾸에 가슴속이 들뜨는 감각이 있다.

“어째서 여기에?”

무엇이든 좋았다.

대화를 끊기게 하지 않기 위한 말이었다.

침묵이 깔리면 조금 전의 답답함이 내습할 것 같아 분명 필사적이었을 것이다.

짧고 짙은 붉은 눈썹이 중앙으로 모이더니, 마치 한숨을 쉬는 듯한 “하아?” 소리가 들렸다.

“뭐야, 여기 오면 안 되는 거야?”

“그,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내가 여기 있든 말든 상관없잖아.”

그녀는 귀여운 라벨의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뚜껑을 닫더니, “나도 마찬가지야”라며 손바닥으로 페트병을 톡 쳤다.

“네?”

“네가 여기에 왜 있는지는 아무래도 좋아.

안다고 해서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난 나고, 넌 너로서 여기 앉아 있어. 그거면 됐잖아.”

말문이 막혔다.

인간은 무언가를 하려 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귀천을 막론하고 이성이든 감정이든 어떤 이유가 있어 행동에 나서는 법이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그것을 ‘아무래도 좋다’며 잘라버렸다.

아무래도 좋을 리가 없다.

의지할 곳이 먼저 있고 완수해야 할 역할이 있고 나서야 이 몸이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러니 근간을 확실히 확보해야 한다.

지켜야 한다.

그것을 온전히 해내지 못한 결과가 트리니티에 다니고 있는 현주소이며, 0점짜리 답안지를 보기 흉하게 움켜쥐고 있는 지금인 것이다.

괜히 화가 났다.

“…뭐, 너도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겠지만.”

“당신이 무엇을 안다는 건가요.”

“알아. 그거…봤으니까.”

“윽……”

“뭐, 그렇게 신경 쓸 거 없어. 시험을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장하다고 생각하니까.”

“학생이니까 시험 정도는 보겠죠.”

자격은 없지만.

자학의 얼음주머니가 달아오른 가슴을 어루만진다.

“세상에는 말이야, 학생인데도 시험을 안 보는 녀석들이 있다고.

귀찮다느니, 해봤자 어차피 못 풀 거라느니, 애초부터 포기해 버린.

─그러니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해.”

“…포기하는 쪽이 더 배짱이 있는 걸지도 몰라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손이 닿는 범위에만 관여하는 것. 그것이 적어도 제 눈에는 무척 현명하고 눈부신 것처럼 보입니다.

…이미 당신도 아시겠죠.

그런 인생을 보낼만한 머리가 역시 여기…에는 없다는걸요.

안 되는 거예요. 아주 오래, 오래전부터…….”

─어중간한 자신이 싫다.

그래서 힘껏 깎아내린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주어진 보금자리를 망가뜨리는 존재다.

그렇게 억지로 납득하고 다시 솜뭉치 같은 껍질 속에 틀어박히기 위해.

역시 햇볕을 쬐는 건 아프고 무서운 일이라며 그 아이들과 따뜻하게 껴안기 위해.

그저 그러고 싶을 뿐인데.

그것뿐인데.

손안의 종이가 소리를 내며 일그러졌다.

“나 참, 되게 축축한 녀석이네. 너 정말 트리니티 학생 맞아?”

“…….”

“0점 좀 맞았다고 그렇게까지 땅 파고 들어가는 녀석은 처음 봐.”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아아, 미안. 화나게 할 생각은 없었어.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

“─그나저나 아깝네. 이름 쓰는 걸 깜빡해서 0점이라니.”

하, 하고 얼빠진 소리가 난다.

귀를 의심하며 “방금 뭐라고” 하고 되묻자, 그녀는 머리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거의 똑같은 내용의 말을 돌려주었다.

구겨져 뭉쳐져 있던 답안지를 떨리는 손가락으로 펼친다.

“…아.”

공백이었다.

이름란이.

곧바로 시선을 아래로 옮겨 빨려 들어갈 듯 해답 부분을 다시 확인한다.

공부했기에 알 수 있다.

만점은 아닐지언정 납득할 만한 점수는 받았을 답들이 그곳에 있었다.

게다가 친절하게도 맨 아래 여백에는 “이름 적는 걸 잊지만 않았어도……!”라는 교원의 자필 메모까지 덧붙여져 있었다.

다시 시선을 채점란의 ‘0’, 그 왼쪽 이름란으로 돌린다.

역시 몇 번을 봐도 그 흠결이,

이차원적으로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그 자리가 지금의 나라는 존재를 무엇보다 잘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아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아아, 나란 애는 정말 바보구나!

‘0’이라는 숫자에 한 눈이 팔려 그 외에는 전혀 확인하지 않은 것도 그렇다.

고작 그것만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마저 의심하기 시작한 것도 그렇다.

그러면서 내밀어진 손을 솔직하게 잡으려 하지 않고 나약함으로 모든 것을 내팽개치려 했던 것도 그렇다.

바보, 정말 바보!

시험지를 정중히 접어 가방 속에 넣은 나는 한 사람 분의 간격을 두고 앉아 있는 그녀를 곁눈질로 보았다.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고민이 어딘가로 날아가 버리는 경험은 왠지 선생님과 이야기할 때와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우리에게 그것은 의미 없는 일이며, 그녀가 말한 대로 아무래도 좋은 일일지도 몰랐다.

나는 일어섰다.

코트 주머니에 넣은 사과 맛 주스는 왠지 모르게 손을 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다려! 그…야구 안 할래?!”

<3>

정자에서 조금 걷다 보니 제법 넓은 운동장이 나타났다.

왜 와버린 건지조차 잘 모른 채 멍하니 서 있자니,

“자, 4번 타자 코마카제 라브 선수, 홈런 예고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의욕이 넘치시는 건가요?!

그보다 이런 상황에선 보통 제가 타자여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나무들을 등지고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총을 배트처럼 휘두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개머리판이 나를 향하고, 마치 도발이라도 하듯 총이 빙글빙글 회전한다.

…정말로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떠밀리듯 끼어버린 글러브가 익숙지 않아, 거뭇거뭇한 야구공을 이 손 저 손으로 옮겨 쥐며 감각을 익힌다.

“나 말이야, 날려 버리는 건 특기인데 던지는 건 별로 소질 없거든!

미안하게 됐네!”

“그렇다면 더더욱 왜 야구를…….

아니, 됐습니다. 전력으로 던질 테니까요!”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런 건 보통 우울해하는 사람이 공을 날려 보내며 기분 전환을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아직 바깥세상의 상식을 모르는 것뿐일까.

그걸 따지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귀찮아져 공을 쥔 손에 한껏 힘을 준다.

“전력 투구 대환영!

이 몸은 첨벙첨벙 헬멧단의 대장이란 말이야. 어설픈 공을 던졌다간 혼쭐을 내줄 테니까!”

“대장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거랑 홈런 치는 거랑은 아무 상관 없잖아요!”

“말은 잘하네, 얼른 던지라고 이봐!”라며 기세를 올리는 그─라브 씨.

그러고 보니 이렇게 공을 던져보는 건 처음이다.

아리우스에서는 오락이 금지되어 있었으니까.

대신 투척해 왔던 것이라면, 글쎄, 수류탄 같은 거?

그러니까 죄송합니다, 라브 씨. 힘 조절을 못 하겠거든요.

“갑니다─.”

“…잠깐만. 나는 알 수 있어.

수많은 수라장을 헤쳐온 몸인걸.

리조트 군도의 복면 녀석들에다, 메카 악어. 그리고 자경단의 그 뭐시기 화이트까지.

틀림없어, 너는 지금 걔네들이랑 똑같은 눈을 하고 있어.

어설프게 타석에 서 있다간─데드 엔딩.”

멀리서 뭐라 뭐라 외치고 있지만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다.

그저 던져서, 아웃시킬 뿐.

“하앗!”

크게 휘두른 팔은 무엇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만큼 가벼웠고,

릴리스 포인트에서 정확히 놓인 공은 내 마음이 부스트라도 된 것처럼 일직선으로 뻗어 나간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린다.

멀리 있던 라브 씨가 총 배트를 옆으로 풀스윙한다.

검은 개머리판에 감긴 붕대가 기세에 밀려 몇 가닥 풀려나간다.

스윙의 정중앙이 공을 포착한다.

세계가 슬로우 모션으로 흐른다.

“윽……!”

“이야아아아앗!!”

라브 씨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내가 던진 공은 엄청난 질량을 담고 있었고, 아무래도 그녀의 파워와 정면 승부를 벌이는 모양이었다.

가라, 가라, 그대로 꿰뚫어 버려!

라브 씨를 쓰러뜨려!

마음속 외침이 귓가에 시끄러울 정도로 반향한다.

라브 씨의 기합 소리도 점점 커진다.

“가라. 가, 가라고─!!”

“우오아아아아아아아아아!!!!”

퍼억─! 하고 요란하게 무언가 박살 나는 소리가 나더니, 라브 씨는 그대로 스윙 방향으로 한 바퀴 회전한다.

그러고 나서 조금 뒤, 등 뒤의 나무숲에서 쿵─하는 몹시 무거운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지면에 주저앉아 있는 라브 씨에게 다가갔다.

“죄, 죄송합니다. 괜찮으신가요?”

“후냐아……. 고, 고마워…….”

내민 손을 라브 씨는 사양 않고 붙잡으며 일어난다.

그러더니 손잡이 부분이 처참하게 망가진 자신의 총을 보며 “아이고야”하고 중얼거렸다.

“그거, 변상하겠습니다.”

“됐어, 신경 쓰지 마.

공이라면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던 내 잘못이니까.

그나저나 내일 습격은 어쩌면 좋담…….”

“뭐,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불겠지”라며 라브 씨는 치마를 탁탁 턴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좋은 공을 던지네.”

라며 쾌활하게 웃었다.

“너, 정말 말도 안 되는 표정을 짓고 사라지려 하길래 나도 모르게 붙잡아버렸거든.

…그런 녀석을 그냥 못 지나치는 성미라 말이야.”

“위로해 주려고 하셨던 건가요?”

“바, 바보! 그런 건 눈치채도 말 안 하는 거야!”

발갛게 달아오른 라브 씨의 뺨을 보며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숨을 내뱉는다.

인생이 누군가의 창작물은 아닐지라도 솔직히 야구 이야기는 사족이라고 생각했다.

고민하던 건 정자 아래에서 이미 해소되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결국 그것도 ‘나’라는 존재를 ‘바보’라는 라벨로 환원해 버리고, 눈앞의 납득을 얻었을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짓을 해봤자 근본은 0점짜리 시험지를 받았을 때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니까.

진정으로 필요했던 건…당장의 구원 같은 게 아니라,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유치하지만 따뜻한 시간이었을지도.

─“스바루가 갖고 싶은 걸 사자!”

아아, 어째서 또 선생님의 목소리가. 나에게 아직 무엇이 부족하다는 걸까.

“…쳐보고 싶네요, 저도.”

문득 튀어나온 말.

이것은 욕심이다.

‘역할’에서 벗어난 행위.

나에게는 무척 위험하고, 무섭고, 스스로 서 있는 발판을 무너뜨리는 행위.

…하지만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실천해 보겠습니다.

“치고 싶어? 좋아.”

그것은 생각보다 싱겁게 실현되었다.

자, 자세 잡아, 라는 라브 씨의 지시에 따라 조금 전까지 타석이었던 자리에 선다.

배트가 없다고 묻자, 당연하다는 듯 나의 AR 소총이 턱 끝으로 지목되었다.

…거짓말이죠?

“배트는 총, 공은 수류탄. 이것이야말로 첨벙첨벙 헬멧단식 야구다!”

“이봐요?!”

농담이 아니라는 건 어디선가 꺼내 든 수류탄을 보고 확신했다.

눈앞에서 총이 대파되었던 조금 전의 광경이 플래시백 되어 정말 괜찮은 거냐고 비명을 지른다.

“안심해, 괜찮으니까.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던지는 건 소질 없으니까 토스 업으로 해줄게.

이러면 칠 수 있겠지?”

“아니, 이론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솔직히 말해 엉망진창이다.

먼저 제안해 놓고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이건 정말 바깥세상의 상식과도 한참 동떨어진 일이리라.

제발 그래 주길 바란다.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려던 순간.

“수류탄이나 야구공이나 둥그니까 똑같아. 사물은 보기 나름이지.”

그 말이 가슴에 툭 하고 떨어졌다.

정해진 무언가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보는 각도를 바꿔본다.

그러면 새로운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한다.

‘역할’은 나를 옭아매는 밧줄 같은 게 아니라 나 자신의 일면일 뿐이다.

아아, 라브 씨. 당신은 대체 어디까지 태평하게 남의 마음을 위로하는 건가요─.

배트를 움켜쥐고 공이 날아오길 기다린다.

간단하다.

나는 그저 띄워진 공을 하늘을 향해 치면 된다.

라브 씨는 내 얼굴을 보고 안심한 듯 웃으며 수류탄 핀을 뽑았다.

음, 그 얘기는 못 들었는데요.

“왜 핀을 뽑으시는 건가요 당시이이인!!”

“대답할 시간 없으니까 자, 던진다!

쳐, 얼른 쳐!

안 그러면 우리 둘 다 숯덩이가 될 테니까! 자, 간다─!!”

“으아아아아아 어떻게든 돼라아아──!!”

캉──! 하고 쳐 올린 수류탄 공이 태양과 겹친다.

신기하게도 그것은 눈부시게 느껴지지 않았고, 훌쩍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문득 채점란의 0점이 스쳐 지나간다.

새빨간 타원의 원 안에서 모든 것이 겹친 것처럼 보였다.

폭발.

인적 없는 광장에는 그 소리가 참으로 크게도 울려 퍼졌다.

그 후 러브 씨는 나의 불평을 “미안 미안~” 하며 웃어넘기더니, 단원들과 약속이 있다며 서둘러 돌아갔다.

그런 점이 정말이지 그 어른과 겹쳐 보여서 절로 신음이 나온다.

광장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느새 노을빛이 사방에 퍼져 있었고, 별인지 비행기인지 알 수 없는 깜빡임이 먼 곳에 떠 있었다.

하루의 에너지를 다 써버린 기분이라 목이 바짝 말라 있었기에 나는 코트 주머니를 뒤적였다.

언제 마실까, 고민하던 사과주스가 여전히 귀엽게 얼굴을 내밀었다.

뚜껑을 드르륵 비틀어 열고 한 모금 마신다.

“…미지근해.”

들러붙는 듯한 단맛과 인위적인 사과 향이 입안에 남았다.

하지만 뭐 이것도 나쁘지 않네, 라고 나는 생각했다.

Fin.

광고
BA블루 아카이브·26.04.06번역

소설 핫산) 붉은색이 교차할 때

#소설
좋아요 0댓글 4저장 0
광고
EP
ex_defe작가
게시물 26개
[DC
[캐서린]번역
외부 링크디시인사이드pixiv
게시일2026.04.06 00:19
조회0
광고

댓글 4

나
ㅇDC
ㅇㅇ126.04.06
디시콘
ㅇDC
ㅇㅇ226.04.06

애를 왜 학적 파서 트리니티로 보내부렀노

ㅇDC
ㅇㅇ326.04.06
디시콘
ㅇDC
ㅇㅇ426.04.06
디시콘
광고

ex_defe님의 다른 게시물

전체 보기 ›
TEXT
번역
소설 핫산) 외로움을 달래려고
Eex_defe014
TEXT
번역
소설핫산) 케이 "죽을 때까지 함께하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Eex_defe09
TEXT
번역
소설 핫산) 선물은, 저예요.
Eex_defe08
TEXT
번역
소설 핫산) 라면, 한 입만
Eex_defe08
번역
소설핫산) 미요쨩의 샬레 잠입 대작전
Eex_defe04
TEXT
번역
소설핫산) 유우카와 선생님이 대결을 하는 이야기
Eex_defe012
TEXT
번역
소설핫산) 이오치 마리 『선생님의 방은 어떤 느낌일까요?』
Eex_defe022
TEXT
번역
소설핫산) 아즈사와 선생님이 서로 엇갈리는 이야기
Eex_defe010

비슷한 태그의 게시물

번역
3
소설핫산) 샬레에 돌아가면 노아가 반드시 죽은 척을 하고 있습니다
Kkenronss037
TEXT
번역
소설핫산) 선생님이 성희롱을 그만둔 결과 전편
Yyume_moti0429024
창작
소설) 유우카가 작아졌다?!
Ccoly024
TEXT
번역
소설핫산) 아리스는 마왕이므로 선생님을 납치하겠습니다!
ククビキリサイクル033
번역
2
스포) 소설핫산) 「미소노 미카를 OO하지 마라! OO에게 OO를!」
Sswallow_leftyp023
TEXT
창작
소설) 아마우 아코에게 선생님 그만 둔다고 하는 이야기
데데스/모이네스!053
TEXT
창작
소설,피폐) 마지막 접속: 60일 전 (完)
EEmptyBox057
창작
2
소설) 나기사는 은근 몰카에 쥐약일듯...
아아로프라보테채널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