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 #L #얀데레 #나기사 #미카 #세이아
원본 by Nv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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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트리니티의 오후는 호박색 홍차에서 피어오르는 김과 함께 사탕 세공처럼 달콤하고, 또 완만하게 흐르고 있었다.
선택받은 자만이 입실이 허락되는 티파티 전용 정원.
그곳에는 평소처럼 우아하면서도 어딘가 평화로운 권태를 머금은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레이스 커튼을 통해 부드럽게 걸러진 햇살, 화려한 자기 컵이 부딪치는 청량한 음색─그리고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구운 과자의 감미로운 향기.
그 모든 것이 이곳이 키보토스에서도 손꼽히는 격조 높은 장소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오늘의 공기에는 명확하게 이질적인 노이즈가 섞여 있었다.
“헤에—! 정말 대단해! 이게 그 기계야?”
미소노 미카가 그 사랑스러운 눈동자를 천진난만하게 빛내며 테이블 중앙에 자리한 ‘이물질’을 검지로 쿡쿡 찔렀다.
그것은 투박한 금속 덩어리였다.
트리니티의 유려한 아르누보풍 미의식과는 정반대의, 기능만을 추구한 밀레니엄 사이언스 스쿨제 도구.
무수한 배선이 혈관처럼 노출되어 있고, 중앙에는 액정 화면이 차가운 빛을 머금은 채 자리 잡고 있었다.
“취급에 주의해 주세요, 미카 씨. 아직 개발 중인 프로토타입이라고 하니까요.
폭발은 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만, 당신이 만지면 장담할 수 없습니다.”
“에이—? 나기 짱,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걸어 다니는 트러블 메이커입니다.”
키리후지 나기사는 우아하게 홍차의 향을 즐기며 시원스럽게 미카에게 못을 박았다.
하지만 그 세련된 몸짓과는 달리 그녀의 시선 또한 흥미진진하게 그 기계를 향하고 있었다.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세이아 짱 번역기』…였던가? 이름이 참 정직하네?”
“정식 명칭은 『초고밀도 언어 정보 요약 의도 추출 디바이스 Ver. 0.9』라고 합니다.
선생님이 엔지니어부의 우타하 씨에게 세이아 씨의…네, 그 ‘독특한 화법’에 대해 상담했더니 그녀들의 기술적 탐구심에 불이 붙었다더군요.”
나기사는 신중하게 단어를 골랐다.
본래라면 ‘말이 너무 길어서 뭔 소린지 모르겠다’라고 단정 지어야 할 대목을
‘독특한 화법’이라고 표현하는 점에서 그녀의 정치적 배려와 고상한 집안의 영애다운 교양이 엿보였다.
“아하하! 선생님도 고생했나 보네—.
뭐, 세이아 짱도 요즘은 좀 나아졌지만, 기분 좋을 때나 잠이 덜 깼을 때는 정말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는걸.”
“…철학적인 사색이라고 하면 듣기는 좋지만, 요컨대 세이아 씨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프로세스를 너무나 사랑하는 겁니다.
미로의 입구에서 출구까지 직진하면 될 것을, 모든 갈림길을 확인하고 막다른 길의 벽지 무늬까지 음미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니까요.
…상대해 주는 이쪽 입장도 좀 고려해 주었으면 하는군요.”
나기사의 말에는 오랜 세월 겪어온 뼈저린 실감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다.
세이아의 말을 들을 때 뇌 처리 영역의 90%를 셧다운하고,
남은 10%로 ‘과연’, ‘흥미롭군요’라는 맞장구를 자동 생성하는 절전모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래서 이거 어떻게 써?”
“간단합니다.
내장된 마이크를 향해 세이아 씨가 말하면, AI가 그 방대한 언어 데이터를 해석해서 불필요한 수식어, 비유, 인용, 비꼬기를 깎아내고…
‘결론적으로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만을 화면에 표시한다고 합니다.”
“우와, 편리해! 날 위해 있는 기계잖아!”
“평소 세이아 씨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미카 씨에게는 딱이군요.”
“너무해—! 나도 듣고 있다구? …처음이랑 끝 정도는.”
세이아의 말을 거의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예 대놓고 인정해 버린 미카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웃으며 롤케이크를 한입에 삼켰다.
그때, 정원 입구에서 작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오호. 둘이 모여 꽤 즐거운 티타임을 가지는 모양이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유리조노 세이아였다.
그 모습은 걸어 다니는 사전인가, 아니면 의인화된 해설인가.
그녀의 입이 열릴 때 세상의 시간은 지연되고, 듣는 이의 뇌세포는 완만한 산소 부족에 빠진다.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커다란 여우 귀가 기분 좋은 듯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발걸음은 가벼웠고 눈동자에는 지적인 빛이 서려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그녀의 컨디션은 매우 좋고 사고도 명쾌한─즉, 가장 말이 길어지는 최상의 상태인 듯 보였다.
‘주머니에 넣어서 숨겨둬야지.’
“아, 세이아 짱! 늦었어—!”
미카는 재빨리 번역기를 숨기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세이아 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홍차 준비는 되어 있어요.”
“흠. 미안하네.
오는 길에 길 잃은 오목눈이들이 내 어깨에 내려앉아서 말이지.
그들의 지저귐에 귀를 기울이며, 그 작은 생명이 자아내는 무구한 이야기에 사색을 잠기다 보니 시간의 개념이 다소 희박해진 모양이야.”
세이아는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자리에 앉아 찻잔을 들었다.
나기사와 미카는 서로 눈을 맞추며 소리 없는 신호를 주고받았다.
‘찬스예요, 미카 씨.’
‘맡겨둬☆’
미카는 씨익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밑에서 번역기 스위치를 몰래 켰다.
미세한 구동 음이 울렸지만 세이아는 눈치채지 못했다.
“있지 있지 세이아 짱! 우리 심심했거든—. 아무 얘기나 재밌는 것 좀 해줘! 뭐든 좋으니까!”
“재미있는 이야기라…….”
갑작스러운 미카의 무리한 요구에 세이아는 잔을 내려놓고 후우, 숨을 내뱉었다.
그 뜸 들이는 태도는 이제부터 시작될 독연회의 개막을 알리는 팡파르 같았다.
“…미카. 자네가 말하는 ‘재미’란 대체 어느 레이어에서의 개념을 가리키는 거지?
일시적인 향락으로서의 웃음인가, 아니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지적 유희인가,
그것도 아니면 운명의 비꼬기가 만들어내는 부조리극인가.
…뭐 좋다.
마침, 오늘 아침 내 침실 창가에서 일어난 실로 사소하나 우주의 진리 일면을 엿보는 듯한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려던 참이었으니까.”
─왔다.
나기사는 조용히 홍차를 들이켰고, 미카는 두근거리며 무릎 위의 번역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세이아의 입에서 끊임없는 언어의 분류가 매끄럽게 자아내졌다.
“동트기 전…세상이 아직 잉크빛 몽롱함과 동녘 사이에서 요동치고 있을 무렵의 이야기야.
나는 문득 유리창을 두드리는 미세한─그래, 주파수로 따지자면 수 헤르츠 정도의, 리듬을 갖지 않은 타격음에 의해 각성을 촉구받았지.”
‘우와, 시작됐다……. 아침에 일어났다고 짧게 말하면 되잖아. 길어…….‘
“흠 흠…미카 씨.”
“으, 응 응. 세이아 짱, 그래서 그래서?”
시작한 지 몇 초 만에 이미 질리기 시작한 미카를 나기사가 헛기침으로 다잡았다.
“아아, 처음엔 바람의 장난인가, 아니면 길 잃은 날벌레의 날갯짓 소리인가 생각했다만…….
자세히 관측해 보니 한 마리 참새가 창틀에 앉아 있더군.
하지만 그냥 앉아 있었던 게 아니야.
그 참새는 유리 너머로 보이는 내 방의 따스한 벽난로 잔불을 바라보고 있었지.
밖은 얼어붙을 듯한 추위야.
그는 갈구하고 있었던 거겠지.
생존을 위한 열원을.
하지만 그와 열원 사이에는 투명한…그러나 절대적인 단절인 ‘창문’이 존재했다네.
그는 필사적으로, 부리로 유리를 두드리지.
톡, 톡, 하고.
그 소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을 비는 기도 같기도 했고, 자신의 무력함을 한탄하는 저주 같기도 했어.
나는 생각했지.
우리 키보토스의 주민 또한 이 참새와 같지 않은가 하고.
평화라는 이름의 따스한 장소를 갈구하지만,
‘현실’이라는 이름의 투명한 벽에 가로막혀 그저 무의미하게 부리를 부딪치고만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야.
내가 창문을 열어주었다면 그는 온기를 얻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그를 ‘야생’이라는 가혹하나 자유로운 세계로부터, 길든 ‘가축’의 안녕으로 타락시키는 행위가 아닌가?
…간섭이란 늘 오만함을 품는 법이지.
나는 손을 뻗어야 할까, 아니면 관측자로서 그 비극을 지켜봐야 할까…….
그 갈등 속에야말로 주관과 객관의 틈새에서 요동치는 자아의 본질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결국 내가 사색의 바다에 잠겨 있는 동안 참새는 날아가 버렸다만.
남겨진 것은 유리에 붙은 작은 김 서림의 흔적과 내 마음에 남은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라는 이름의 쓴 찌꺼기뿐이었네.”
─마침내 세이아는 만족스러운 듯 이야기를 마쳤고, 식어가는 홍차를 머금었다.
시간상으로는 약 3분.
하지만 체감 시간은 나무늘보가 풀 마라톤을 완주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과 맞먹었다.
찻잔의 홍차는 완전히 식어버렸고, 나기사의 억지 미소는 석고상처럼 굳어지기 시작했다.
참새 한 마리 목격한 이야기를 하는 데 왜 우주의 진리와 자아의 경계선까지 이야기를 넓혀야 하는가.
그것은 키보토스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혀야 할 수수께끼였다.
“…그래서?”
물론 그녀의 이야기 따위 ‘참새’라는 단어 말고는 거의 듣지 않았던 미카가 번역기 화면을 본다.
미카에게 세이아의 육성은 이제 BGM의 일종이자 의미를 갖지 않는 기분 좋은 노이즈일 뿐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손안에는 그 노이즈를 ‘의미’로 정제하는 악마의 도구가 있다.
─그곳에는, 무기질적인 고딕체 폰트로 단 한 줄만이 표시되어 있었다.
『아침에 참새 봤는데 날아갔어.』
“푸핫…아하하하하하하!!”
─세이아가 온갖 몸짓을 섞어가며 장대하게 읊은 내용의, 다 우려낸 찻잎보다도 밍밍한 알맹이에 미카가 테이블을 치며 폭소를 터뜨렸다.
나기사 또한 입가에 손수건을 대고 파르르 떨리는 어깨를 숨기느라 필사적이었다.
우아한 가면 아래에서 그녀의 복근은 한계에 다다랐다.
“…뭐가 우스운 거지, 미카?
내 이야기의 어디에 그런 폭발적인 웃음을 유발하는 요소가 있었나?
나는 비극과 희극의 경계선에 대해 시사했을 뿐이다만……”
세이아는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 묘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 표정이 또 미카의 웃음보를 자극한다.
“미, 미안 세이아 짱! 최고! 방금 얘기 진짜 재밌었어! 아하하하!”
“흠…잘 모르겠다만, 자네의 감성은 때로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단 말이지.
뭐, 즐거웠다면 내 사색도 무의미하지는 않았다는 뜻인가.
희극이란 수용자의 해석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니까.”
미카의 반응에 미세한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세이아는 자신의 이야기가 친구를 즐겁게 했다고 해석하고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래서? 세이아 짱, 다른 얘기는 없어? 하고 싶은 말이라든가!”
“…오늘 유독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응! 사실은 말이야~”
그대로 신이 나서 사정을 늘어놓으려는 미카를 나기사가 작은 목소리로 날카롭게 제지했다.
‘안 됩니다, 미카 씨. 여기서 정체를 밝히면 이 고도의 정보전의 우위가 상실됩니다.
게다가…이 장난감으로 조금 더 놀고 싶지 않으신가요?’
‘앗, 그렇네! 그것도 그렇네☆’
“…나기사, 미카. 뭘 그렇게 소곤거리는 거지?”
“으, 응. 아무것도 아니야!
…에헴. 있지, 사실 나기 짱이 『요즘 세이아 짱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더 깊이 알고 싶다.』고 해서—. 그치? 나기 짱.”
그 너무나 어색한 연기에 세이아는 의아한 듯 눈썹을 찌푸렸지만, 곧바로 훗, 하고 표정을 풀었다.
친구의 관심이 싫지 않은 모양이다.
“흠……. 나기사가 나에게 관심을 갖다니 드문 일이군.
평온무사를 최고로 치는 자네 성격상, 혼돈스러운 사색의 단편 따위 평온을 어지럽히는 노이즈로밖에 여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만.”
“오해입니다, 세이아 씨.
저는 언제나 친구의 내면에는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어요.
미카 씨나 세이아 씨는 제게 아주 소중한 친구니까요.”
“나도 세이아 짱에 대해 더 잘 알고 싶다고 얘기했었거든!
그래서 오늘은 세이아 짱 이야기를 듣고 싶어!”
속여 넘기는 데 성공한 미카는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손안의 번역기 감도를 최대로 설정했다.
이 기계는 감정의 기복조차 냉철한 텍스트 데이터로 변환한다.
‘자, 어떻게 될까요…….’
─보여주시죠, 세이아 씨. 당신의 그 난해한 언어의 갑옷 아래에 있는 본심을.
“…그런가. 너희가 그토록 열렬히 원한다면 말이 아깝지는 않겠군.”
그런 두 사람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채, 칭찬에 약한 세이아는 조금 쑥스러운 듯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했다.
그 뺨이 살짝 벚꽃색으로 물드는 것을 미카는 놓치지 않았다.
“그럼, 며칠 전 샬레에서의 당번 일을 이야기하도록 할까.
그것은 단순한 업무 수행이라는 틀을 넘어선, 일종의 『혼의 공명』을 확인하는 의식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
─시작됐다.
미카는 두근거리며 번역기 화면을 응시했다.
“선생이라는 존재는 키보토스의 특이점이야.
지독하게 바쁜 몸이면서도 나라는 일개 개인의 방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따스하게 맞아주었네.
서류 더미라는 이름의 『일상의 적』 앞에서 우리는 공투 관계를 맺었어.
잉크 냄새와 공조 장치의 낮은 구동 음만이 지배하는 정적의 공간.
그곳에서 교환되는 언어는 최소한이었지만 서로의 의사는 놀라울 정도로 매끄럽게 전달되고 있었지.
내가 필요로 한 자료는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의 손에서 건네졌고,
그가 원한 휴식 타이밍은 내가 차를 내놓는 타이밍과 완벽하게 동기화되어 있었지.
이것이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을 초월한 의식 레벨에서의 싱크로니시티…그래, 이심전심이라는 것 아니겠나.”
그리고 후우, 한숨을 내쉬더니 세이아는 황홀한 표정으로 허공에 떠 있는 누군가의 얼굴을 바라보며 뒷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오후의 햇살이 기울어 황혼이 집무실을 노을빛으로 물들일 무렵…문득 그의 손이 내 머리에 닿았다네.
그것은 결코 위압적인 지배의 동작이 아니었어.
나의 노고를 치하하고, 존재를 긍정하며 자애롭게 보살피는 듯한…지극히 섬세하고 따스한 접촉이었지.
그 순간 내 사고 회로는 쇼트라도 난 것처럼 정지했고, 예지 능력에 의해 혹사당해 온 뇌수가 진흙 같은 안식으로 침잠해 가는 것을 느꼈어.
거부할 수 없는 중력에 몸을 맡긴 채, 나는 그의 영역…즉 그 어깨에 나의 무게중심을 의탁하고 말았지.
그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받아주었네.
박동이 겹치는 거리에서 우리는 시간의 개념을 상실한 채 유한함 속의 영원을 보냈다네.”
세이아는 거기까지 한숨에 몰아치듯 말하고는 뜨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마치 장대한 로맨스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다 이야기한 듯한 달성감을 맛보고 있는 듯했다.
그 눈동자는 촉촉이 젖어 어제의 감미로운 기억의 여운에 젖어 있다.
“…그래서? 번역기 군의 판정은?”
미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나기사와 함께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열정도 시정도 일절 없는 무자비한 사실만이 표시되어 있었다.
『일 안 하고 선생한테 쓰담쓰담 받다가 꿀잠 잤어.』
“푸훕──!!!”
“큭, 후…… 윽!!”
참지 못하고 뿜어버린 미카와, 홍차를 내뿜을 뻔해서 필사적으로 입가를 억누르는 나기사.
‘쓰담쓰담’이라는 유아어의 파괴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 왜 그러지, 두 사람 다. 내 이야기에 또 무슨 이상한 점이라도 있었나?
나는 선생과 나 사이에 흐른 농밀하고도 신성한 시간에 대해 가능한 한 정확하게 묘사했을 뿐이다만…….”
두 사람의 반응에 세이아는 억울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나기사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필사적인 평온을 가장했다.
“아, 아니에요……. 세이아 씨. 너무나도…후훗, 너무나도 정확해서 가슴이 아플 정도라 그래요.”
“그런가? 그렇다면 다행이군. …아, 맞다. 한 가지 더, 특필해야 할 사건이 있었지.”
아직 더 남은 건가.
나기사와 미카는 너무 웃어서 아픈 배를 움켜쥐며 몸을 추스렸다.
“내가 가수면 상태에서 깨어난 뒤, 선생은 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네.
‘잠깐 바깥 공기라도 쐬러 갈까.’ 하고 말이야.
그리하여 우리는 땅거미가 내려앉는 거리로 나섰네.
목적 따윈 없었어.
그저 나란히 걷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철학적 산책이었지.
추운 하늘 아래 내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어.
그는 자신의 손바닥으로 내 손을 감싸 쥐고,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그의 체온을 나에게 이동시킨 거야.
나는 그 온기에서 물리적인 열량 이상의 의미…즉, 그가 나라는 존재를 수호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네.
게다가 그는 골목길 포장마차에서 대중적인 과자…붕어빵을 사서 나에게 나누어 주었지.
머리부터 먹어야 할지, 꼬리부터 먹어야 할지. 그런 사소한 토론에 꽃을 피우며 우리는 하나의 과자를 공유했어.
그 팥소의 달콤함은 단순한 당분의 자극이 아니었네.
공유된 체험이라는 스파이스가 더해짐으로써 뇌 내 마약 물질의 분비를 촉진하는, 지고의 미각 체험으로 승화되어 있었던 것이지.”
세이아는 황홀하게 어제의 붕어빵 맛을 떠올리는 듯했다.
고작 150엔짜리 구운 과자를 먹는 행위에 ‘열역학 제2법칙’이나 ‘마약 물질’을 들먹이는 건 키보토스 천지에 그녀 정도뿐이리라.
그리고 그 내용도 즉시 번역되었다.
『손잡고 데이트했어. 붕어빵 나눠 먹었어. 개꿀맛이었어.』
“아하하하하하……!! 이제 한계야! 배 아파!!”
결국 참지 못한 미카가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잔디 위를 뒹굴었다.
‘손잡고 데이트’, ‘개꿀맛’. 저 난해한 세이아의 입에서 절대 나오지 않을 법한 단어 선택이 갭 모에를 넘어 폭력적인 웃음으로 변한다.
“…미카? 괜찮나? 마치 무슨 발작이라도 일으킨 것 같다만.”
“미, 미카 씨는 신경 쓰지 마세요 세이아 씨…큭, 당신은…정말이지, 후훗, 사랑스러운 분이시네요…….”
나기사 또한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 세이아를 바라보았다.
평소 그렇게 어렵게만 굴던 그녀가 머릿속으로는 ‘개꿀맛’ 따위를 느끼고 있었다니,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녀의 귀여움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흠……. 자네들이 이토록 기뻐해 주니 나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도 나쁘지 않은 모양이군.”
그리고 세이아는 뒹구는 미카와 떨고 있는 나기사를 보고 ‘내 이야기에 감동해서 감정이 격해진 것’이라며 호의적으로 해석한 듯했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식어버린 홍차를 들이켰다.
그때─뒹굴고 있던 미카의 뇌리에 천계의 계시 같은 번뜩임이 스쳤다.
‘…어라? 잠깐만. 이거 단순히 긴 말을 짧게 줄이는 기계인 걸까?‘
방금 세이아의 번역 결과를 되새겨 본다.
확실히 세이아의 말은 길다.
듣기 괴로울 정도로 의미 모를 비유만 가득하고 정작 알맹이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쓰담쓰담’이나 ‘데이트’ 같은 단어를 설령 머릿속에서라도 직접 선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즉, 이 기계가 하는 일은 단순한 요약이 아니라 화자의 심층 심리에 있는 욕망이나 본심을 눈치 보지 않고 언어화하는─말하자면,
『초고성능 본심 폭로기』가 아닐까?
‘그렇다면…이거, 나기 짱한테 쓰면 어떻게 될까?’
악마적 호기심이 미카의 안에서 똬리를 틀었다.
평소 철벽의 미소와 겉치레로 무장하고 결코 빈틈을 보이지 않는 티파티의 호스트이자 소꿉친구인 키리후지 나기사.
그녀의 철가면 아래에는 대체 어떤 질척하고 날것의 본심이 숨겨져 있을 것인가.
미카는 테이블 밑에서 마이크의 조준을 우아하게 홍차를 홀짝이는 나기사에게 조용히 맞췄다.
세이아는 아직 방금 제 이야기가 먹힌 것에 기분이 좋아져 이 불온한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있지 있지, 나기 짱. 나기 짱은 말이야~ 선생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미카는 최대한 천진난만한 목소리를 가장해 물었다.
하지만 그것은 먹잇감을 덫으로 유인하는 사냥꾼의 음성이었다.
그 질문에 나기사의 손이 딱 멈췄다.
찻잔을 받침대에 내려놓는 달그락 소리가 정원에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
“…뜬금없이 참 돌발적인 질문이군요, 미카 씨.”
“그치만 세이아 짱 이야기만 줄창 들었잖아. 나기 짱은 어떨까 궁금해져서.”
“흠. 확실히 흥미로운 질문이네.
나기사, 자네는 항상 정치적 균형과 트리니티의 공익을 최우선 사항으로 삼아 행동하지.
하지만 선생이라는 이레귤러에 대해, 한 명의 소녀로서…아니, 한 명의 인간으로서 어떤 감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 나도 꼭 듣고 싶군.”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나기사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서늘한 눈동자로 미카를 응시했다.
그 표정은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습니다’라고 적힌 간판을 내건 정치인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 함께한 미카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등 뒤에 달린 날개가 극도의 긴장 탓에 고슴도치처럼 곤두서려 한다는 것을.
이윽고 나기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체념한 듯 미소 지었다.
그것은 완벽하게 계산된 티파티의 호스트로서의 미소였다.
“어쩔 수 없군요. 두 분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이야기해 드리죠.”
나기사는 허리를 곧게 펴고 연설이라도 하듯 낭랑하게 읊조리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우리 트리니티 종합학원에 있어 극히 중요한 전략적 파트너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에덴 조약 사건 이후 트리니티의 정세는 유동적이고 불안정해졌죠.
그런 상황 속에서 선생님이 가진 조정 능력과 어른으로서의 지견은
우리 학교의 자치를 유지하고 대외적인 절충을 해 나가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리소스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관점에서 말씀드리자면
선생님의 지도자로서의 자질, 그리고 학생 한 명 한 명을 마주하는 성실함에 대해서 깊은 경의와 신뢰를 품고 있어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신뢰할 수 있는 협력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트리니티의 호스트로서 개인적인 감정으로 그를 독점하는 행위는 제 미학에 어긋나니까요.
네, 저는 공사 구분을 못 하는 누구와는 다르답니다.”
─완벽하다. 빈틈없는 교과서 같은 답변이었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명확히 하면서 상대에 대한 경의도 잊지 않고,
마지막으로 ‘어디까지나 협력자’라고 못을 박음으로써 연애사로의 발전 가능성도 견제했다.
이것이 바로 키리후지 나기사.
트리니티 티파티의 호스트다운 면모였다.
“흠……. 모범생 같은 답변이군.
하지만 나기사다운, 절도와 이성을 중시하는 자네 스탠스가 잘 나타나 있어.”
그 대답에 세이아는 깊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가련한 여우여.
그녀는 모르는 것이다.
눈앞에 있는 이 우아한 백조가 수면 아래에서는 마하의 속도로 발을 구르며 시커먼 욕망의 진흙을 휘젓고 있다는 사실을.
미카는 웃음을 참으며 홍차를 마시고, 무릎 위에 꺼내 둔 번역기를 응시했다.
기계의 화면이 경고등처럼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나기사의 장황한 연설, 그 이면에 숨겨진 시커멓거나 혹은 달콤하기 그지없는 본심이 지금 폭로된다─!
『매일매일 격무 때문에 죽을 것 같아요.
스트레스 때문에 위장에 구멍이 뚫릴 것 같아요.
그러니까 선생님, 빨리 와서 어리광 받아주세요.
이제 정치 같은 건 아무래도 좋으니까 선생님 무릎 위에서 하루 종일 뒹굴거리고 싶어요.
그리고 최근 히후미 씨가 선생님이랑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면 마음이 답답해서 포격 명령을 내리고 싶어집니다.
나만 봐주세요.
나만의 선생님으로 있어 주세요.
그리고 제발 제가 바치는 돈으로 먹고살아 주세요.』
“푸흡──!!!”
미카의 입에서 거대한 분출 음이 터져 나왔다.
단순한 웃음이 아니다.
너무나도 큰 충격과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무게에 대한 경악이었다.
“…미카 씨? 제가 뭔가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요?”
나기사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의 마음속 절규가 무자비한 디지털 문자가 되어 노출되고 있다는 것을.
“아, 아니?! 나, 나기 짱 참 대단하네…그, 뭐랄까…일편단심이구나……?”
“하아……? 당연한 것 아닙니까. 저는 언제나 트리니티를 위해 성심성의껏 다하고 있으니까요.”
『당연한 것 아닙니까. 저는 언제나 선생님의 사랑을 독점하기를 원하고 있으니까요.』
무자비한 번역기가 공세를 늦추지 않는다.
미카는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이것은 극약이다.
세이아 때는 훈훈한 코미디였지만, 나기사의 경우는 웃어도 되는 건지 알 수 없는 영역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
“흠. 미카의 반응은 불가해하다만…나기사, 자네의 그 성실함은 확실히 전달되었네.
선생도 자네를 신뢰하고 있을 거야.”
“네. 그렇다면 기쁘겠습니다만.
…다만 선생님은 바쁜 분이시라 좀처럼 시간을 내어주시지 않는 게 고민이군요.”
나기사는 수심 어린 표정으로 홍차를 바라본다.
『하아…지금 당장 샬레로 쳐들어가서 선생님을 납치 감금하고, 평생 나랑 티타임이나 하는 생활을 보내게 하고 싶네요.』
‘어둠이 너무 깊어 나기 짱?!’
차례차례 소꿉친구의 생각이 번역되는 바람에 마음속으로 절규하는 미카.
─바로 그때였다.
“─안녕, 미카, 나기사. 세이아. 용무가 있어서 트리니티에 왔다가 들러봤어. 다들 잘 지냈어?”
그 목소리는 티파티의 정원에 일종의 신의 계시처럼, 혹은 사형 선고처럼 울려 퍼졌다.
입구에 서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샬레의 선생이다.
손에는 편의점 봉투를 들고 평소처럼 조금 지쳤지만, 안심을 주는 미소를 짓고 있다.
미카는 나기사의 시커먼 본심을 알아버린 직후의 경직된 미소를 지은 채 굳어버렸고,
나기사는 자신의 내면이 폭로된 줄도 모른 채 우아한 포즈로 굳었으며,
세이아는 번역기에 의해 자신의 캐릭터가 붕괴한 줄도 모른 채 평소와 같은 얼굴로 굳었다.
‘큰일 났다! 선생님이 오셨어?! 하필 이 타이밍에?!’
미카의 뇌 내에서 경보가 울려 퍼진다.
이 번역기─아니, 본심 폭로기의 전원은 아직 켜져 있다.
게다가 감도는 최대 설정.
만약 지금 누군가 입을 열면, 그 심층 심리에 있는 욕망이 액정 화면에 큼지막하게 표시되고 만다.
“선, 선생님……!?”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나기사였다.
그녀는 순식간에 호스트로서의 가면을 고쳐 쓴다.
그 전환의 속도는 가히 일품이라 할 수밖에 없다.
“이, 이것은…무척 갑작스러운 방문이시군요.
미리 연락을 주셨더라면 최고급 찻잎과 선생님 취향의 과자를 준비하고 기다렸을 텐데.
…후우, 놀랐습니다.”
나기사는 완벽한 몸가짐으로 의자에서 일어나 선생을 맞이한다.
그 모습은 한 떨기 화초 그 자체─하지만.
무자비한 기계는 음성을 포착해 순식간에 연산 처리를 수행한다.
『거짓말!? 선생님!? 잠깐만, 마음의 준비가!
화장 안 지워졌나!?
머리 모양 이상하진 않아!?
그보다 왜 연락 안 준 거예요!?
하지만 만나서 기뻐요!
아아…선생님 냄새가…이대로 선생님을 내 날개 안에 가두고 두 번 다시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해버리고 싶어…….』
“푸흡……!”
미카는 다시금 뿜어버릴 뻔한 것을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필사적으로 참았다.
‘나기 짱, 무거워! 너무 무겁다고!? 날개 안에 가둔다는 게 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점이 무서워!’
“오호, 선생. 기막힌 우연이로군.”
이어서 세이아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나기사와 대조적으로 동요하는 기색 없이, 하지만 기쁜 듯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우리가 마침 자네라는 존재의 특이성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토론을 나누던 찰나에 등장했군.
이것을 융이 말하는 싱크로니시티라 불러야 할지,
아니면 인과율이 자네를 중심으로 수렴하고 있다는 증거로 보아야 할지…흠, 실로 흥미로운 사상이야.”
여전한 장광설.
선생은 쓴웃음을 지으며 ‘또 어려운 소리를 하네’라는 표정을 짓고 있다.
하지만 번역기는 가차 없다.
『선생이 내 앞에 나타나 줬어.
이건 혹시 나랑 선생이 운명의 상대라는 거 아냐?
일단 다시 한번 그 따뜻한 손으로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워 줬으면 좋겠어.』
‘세이아 짱은 이제 완전히 반려동물이잖아…….’
눈앞에서 펼쳐지는 겉치레와 본심의 괴리.
그리고 그것을 아무것도 모른 채 싱글벙글 듣고 있는 선생.
이 지옥 같은 콩트 공간에서 미카의 복근은 붕괴 직전이었다.
“다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그런데 미카, 무릎 위에서 꼭 쥐고 있는 건 뭐야?”
“엑, 아, 이거!? 이건 말이지, 그러니까 저기 어어…….”
숨겨두었던 것이 들키고 말았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다.
“이거 나기 짱이랑 세이아 짱의 질척한 욕망을 표시하는 기계야☆”라고 말하는 날에는 트리니티에 제3차 대전이 발발하고 만다.
“그것은 말이죠, 선생님.”
그때 나기사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아직도 이것이 단순한 번역기라고 믿고 있다.
“선생님께 빌렸던 세이아 씨의 말을 알기 쉽게 번역해 주는 디바이스예요.
조금 전 실제로 시험해 보았습니다만, 굉장히 높은 정밀도로 가동하고 있더군요.”
“…그런 일을 하고 있었나? 과연, 그래서 두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걸었던 거군.”
“네, 미안해요 세이아 씨.
하지만 모처럼이니 선생님도 보시겠어요?
자, 세이아 씨. 선생님께 한마디 인사 부탁드려요.”
“흠. 시험해 보겠다면 응하지 않을 수 없지.”
세이아가 자세를 바로 하고 선생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눈동자에는 심오한 지성과 숨길 수 없는 친애의 정이 깃들어 있었다.
“선생. 자네가 이 키보토스라는 혼돈의 바다에 나타난 이래, 내가 바라보는 세계는 극적인 변용을 이루었네.
한때는 잿빛으로 보이던 미래가 이제는 자네라는 불확정 요소를 거침으로써 극채색의 가능성으로 충만하게 느껴진다네.
자네가 있는 한, 나는…이 불확실하지만 사랑스러운 현재를 두려움 없이 걸어갈 수 있을 것 같군.
감사하네, 선생.
그리고 앞으로도 나의 관측자로서 곁에 있어 주길 바라네.”
─아름답고 시적인 고백이었다.
이것이 바로 유리조노 세이아의 진면목.
난해하지만 그 중심에는 순수한 신뢰가 있었다.
선생도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이려다─문득 미카가 든 번역기 화면에 시선을 떨구었다.
『선생 너무 좋아. 사랑해.
이제 선생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어.
책임져 줘.
그리고 평생 나 보살펴 줘. 절대로.
바람피우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에?”
선생의 미소가 딱 하고 굳어버렸다.
세이아는 ‘어때? 내 마음이 전달되었나?’ 하는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다.
“저, 저기…세이아……?”
“음? 무슨 미비한 점이라도 있나?”
사태는 최악의 방향으로 굴러떨어진다.
여기서 나기사가 선생의 굳어버린 표정을 눈치채고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
“선생님? 왜 그러시죠? 설마 번역 결과에 무슨 결함이라도……?”
나기사가 화면을 들여다보려고 몸을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 또한 실시간으로 변환되어 갔다.
“혹시 세이아 씨의 사고가 너무나 복잡괴기해서 AI가 버그라도 일으킨 걸까요.
…후훗, 역시 그녀를 다루는 데에는 기계조차 애를 먹는 모양이군요.”
『아아, 선생님이 곤란해하고 계시잖아요.
세이아 씨의 사랑이 너무 무거워서 정나미가 뚝 떨어진 거예요, 분명.
꼴 좋네요.
선생님 옆에 어울리는 건 포용력과 재력과 권력을 가진 나인데.
그쵸 선생님?
오늘 밤 비어 있죠?
호텔 예약해 뒀으니까요.
거부권은 없고 놓치지 않을 거니까요♡』
─화면에 표시된 전문을 선생과 나기사가 동시에 목격했다.
“나, 나기사……?”
“…어?”
나기사의 사고가 정지했다.
자신이 내뱉은 말과 화면에 표시된 말의 의미가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다.
아니, 동떨어져 있지만…….
그 내용은 분명 그녀가 밤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외치던 망상 그 자체였다.
“아, 아, 아……?”
나기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삶은 문어처럼 새빨갛게 물들어 간다.
자존심 높은 그녀에게 이 이상의 굴욕과 추태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아, 아니…이, 이것은…오작동입니다!! 오해예요!
저는 이런…호텔이라든가, 감금이라든가… 거, 그런 파렴치한 짓은……!”
『들켜버렸어요!? 창피해! 죽고 싶어!
하지만 본심이에요!
호텔에 가고 싶어요!
선생님이랑 이런 짓 저런 짓 하고 싶다고요!!』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실시간으로 본심을 대변하는 무자비한 번역기에 나기사가 들어본 적도 없는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고 뒹군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나기사……?”
세이아는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어 고개를 갸웃거린다.
운 좋게도 세이아의 번역문은 읽히기 전에 나기사의 목소리가 마이크에 들어가는 바람에 덮어씌워진 것이다.
그리고 그 카오스를─
“아하하하하!! 최고! 정뚝떨은 나기 짱이었고요!!”
배를 잡고 웃어젖히는 미카가 깬다.
그녀만이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안전지대에서 친구의 자폭을 조롱한다.
이것이야말로 유열이다.
타인의 불행은 꿀맛이라지만, 절친의 사회적 죽음을 지켜보며 먹는 롤케이크만큼 맛있는 것은 없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다.
자신만은 신의 시점을 가진 관객석에 앉아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희극의 무대에서 안전지대는 존재하지 않는 법.
그리고 각본가는 가장 신이 나 있는 광대에게야말로─최대의 함정을 준비하는 법이다.
“미, 미카 씨!! 당신, 알고 있었군요!? 이 기계의 정체를!!”
“알고 말고가 어디 있어, 보면 알잖아!
이야~ 나기 짱이 이 정도로 음란할 줄은 몰랐네—! 아하하☆”
눈가에 눈물이 맺힌 나기사에게 미카는 승리 선언이라도 하듯 내뱉었다.
─그리고 미카는 잊고 있었다.
이 기계는 음성을 포착한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번역기는 중앙 테이블에 놓여 있고, 그녀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나기 짱처럼 게걸스럽지 않으니까 여유만만이지—.
나기 짱이랑 다르게 나는 순수한 소녀인걸☆”
『나기 짱도 세이아 짱도 방해돼!
선생님은 내 공주님이니까 말이야.
뭐, 정 안 되면 수면제로 잠재워서 덮친 다음에 기정사실을 만들면 되겠지☆
저번에 선물한 액세서리에 GPS 넣었고, 최근 일주일간의 행동 이력도 전부 파악하고 있으니까 내 사랑에선 도망칠 수 없어.
그치 선생님?
내 생각만 해 줘?
나를 위해서 상처받아 줘?
나를 위해서 엉망진창이 되어 줘?
그럼 내가 평생 새장 속에서 길러 줄 테니까 말이야, 왕자님♡』
쏴아아…….
정원에 완벽한 정적이 찾아왔다.
너무나 고요한 나머지 멀리서 참새가 우는 소리조차 폭음처럼 울려 퍼진다.
오늘 아침 세이아가 날려 보내준 참새일까.
그 또한 이 지옥도를 가엾게 여기며 울었는지도 모른다.
“…아.”
미카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다.
그리고 다음 순간, 폭발적인 홍조가 그녀를 덮쳤다.
“아, 아니……! 방금 건…그러니까……!!”
변명하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는다.
본심이, 그것도 가장 숨기고 싶었던 소녀의 마음과 얀데레성이 백일하에 드러나 버린 것이다.
선생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저기…그럼, 급한 용무가 생각나서 나는 이만……! 다음에 봐, 다들!!”
선생이 꽁지 빠진 새처럼 도망쳤다.
그 등 뒤로 소녀들의 갈 곳 없는 절규가 뒤따랐다.
“기, 기다려 주세요 선생님!!
오해예요!! 오해라고요!!
스위트룸 예약 같은 거 안 했어요!! 아직은!!”
“와아앙!! 아니야! 아니니까 선생님 기다려어어!!
나는 나기 짱이랑 다르단 말이야!!”
“설득력이 없어, 둘 다!?”
─변명하면 할수록 무덤을 파내려 가는 소녀들의 절규가 허무하게 메아리친다.
트리니티의 우아한 티타임은 이렇게 아비규환의 지옥도로 변했다.
훗날 이 번역기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저 엔지니어부 부실 앞에 가루가 된 전자 부품과 엄청난 양의 롤케이크가 보내져 왔다는 소문만이 무성하게 떠돌 뿐이다.
“…흠. 갑작스럽게 발생한 집단적 혼란과 선생의 전략적 철수.
그리고 뒤에 남겨진 것은 존엄을 잃은 두 친구와 사고를 포기한 나인가.
…결국 이 카오스는 대체 어떤 문맥으로 해석해야 하는 거지?
누가 이 상황 좀 번역해 주지 않겠나?”
Fin.
<0>
“흠……. 과연. 그렇군.
그대의 고막을 진동시키는 공기의 파동이 나의 뇌수까지 도달하여 전기 신호로 처리된 결과…
도출된 결론은 실로 개탄스러우며, 한편으로는 일종의 흥미로운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겠어.
자네는 지금 나의 말을 길다고 단정 짓고, 설마하니
저 격정적이며 사고보다 주먹이, 논리보다 감정이 음속을 넘어 도달해 버리는─
내가 사랑해 마지않지만, 지성에 브레이크 거는 법을 조금 잊어버린 친구, 미카의 정신 구조에 스스로를 동조시켰다는 말인가?
‘흘려듣는다’…….
그 행위는 정보라는 이름의 분류(奔流)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 본능으로서는 어떤 의미에서 합리적일지도 모르지.
정보의 과다는 처리 지연을 초래하니까.
미카의 뇌 내 메모리에서 나의 고해상도 언어 데이터가 다 처리되지 못해 오버플로를 일으키고,
결과적으로 청각 정보의 차단이라는 긴급 조치가 취해지는 것은 그녀의 스펙상 어쩔 수 없는 물리적 현상이라고 이해하고 있네.
하지만 말이야, 선생.
자네는 어른이자 인도하는 자이지 않은가?
그런 그대가 사고의 포기라고도 볼 수 있는 흘려듣기를 긍정하고, 복잡한 사상을 단순화하는 것에서 쾌락을 찾아내는 그녀의 편에 선다는 것은…
후후, 이것은 내가 그대에게 품고 있던 ‘이성적이고 인내심 강한 해석자’라는 환상에 대한 도전장으로 받아들여도 상관없다는 뜻인가?
하지만 생각해 보게나.
언어라는 것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기호에 불과한 것이 아니야.
그 장황한 장식, 우회적인 비유, 결론에 이르는 길을 굳이 멀리 돌아가는 과정…
그 여백이야말로 정서나 화자의 진의, 혹은 말로 다 하기 힘든 감정의 기묘함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미카는 언제나 ‘그래서 요점이 뭔데?!’라고 외치며 귀를 막아버리지만 말이야.
효율이나 결론만을 추구하며 그 과정에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잘라내 버리는 것은 너무나도 풍류가 없고, 빈곤한 정신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네.
언어를 겹겹이 쌓고, 수식하고, 비유라는 이름의 옷을 몇 겹이나 입히는 것은 결코 자네를 혼란시키고 싶다는 가학적인 취미 때문이 아니네.
진실이라는 것은 항상 다면적이고 유동적이며, 한마디로 다 말할 수 없을 만큼 단순한 형상을 하고 있지 않지.
‘A는 B이다’라는 단락적인 명제로 세계를 도려내는 것은 용이하나,
그것으로는 A가 내포한 C의 가능성이나 B의 배후에 잠긴 D라는 문맥이 모두 깎여 나가 버리네.
그것은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정보의 살해나 다름없다고 생각지 않나?
내가 자아내는 이 장황한 언어의 미궁은 자네를 헤매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함께 그 복잡함을 거닐며 그 여정에 있는 풍경을 공유하고 싶다는 나의 사소한…그래, 굳이 평이한 말을 빌리자면 어리광의 일종이라네.
그것을 ‘길다’라는 한마디로 치부하고, 미카처럼 ‘모르겠어!’라며 벽을 부수고 직진하려 하는 것은
정원사가 정성껏 가꾸어놓은 미로를 불도저로 평평하게 다져버리는 것과 같은 몰상식한 행위지.
게다가 언어라는 것은 단순한 정보의 전달 수단─0과 1로 구성된 무미건조한 신호가 아니야.
그것은 혼돈스러운 세계로부터 사상을 도려내어 인식이라는 이름의 액자에 가두기 위한, 지극히 섬세하고 창조적인 의식이라네.
자네가 구하는 간결함이나 요약이라는 것은 확실히 효율적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사물의 행간에 잠긴 무한한 그라데이션을 흑백의 이원론으로 몰아넣고,
본래 그곳에 있어야 할 풍요로운 의미와 정서, 그리고 가능성의 일렁임을 무자비하게 깎아내는 행위라고 나는 생각하네만.
그렇게 과일의 껍질을 벗기고 과육을 도려내어 그저 중심에 있는 딱딱한 씨앗만을 내미는 것을 자네는 대화라고 부를 건가?
그것은 영양소의 수치를 기록한 영양제를 삼키는 것과 같은, 실로 멋없고 문화적 향취가 없는 생존 활동에 불과해.
한 점의 아름다운 회화 앞에서 ‘이것은 물감의 집합체다’라고 한마디로 일축하는 것이 과연 정답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 단언컨대 아니네.
필치 하나하나, 색채의 중첩, 빛과 그림자의 대비…그 모두를 면밀히 파헤치고 언어화하고 재구축해야 비로소 그 본질에 닿을 수 있는 법이야.
나의 말이 길어지는 것은 내가 세계를 사랑하고, 그 복잡함을 성실하게 기술하려고 시도하기에 발생하는 필연적인 귀결이라네.
그것을 자네는 ‘길다’라는 한마디로 정리하고,
미카처럼─‘있지, 결론만 말해줘! 모르겠어!’라고 외치며 언어의 미궁 벽을 맨손으로 파괴하며 최단 거리를 돌진하려 하겠지만─
그 야만적인 행진에 가담하겠다는 것인가?
지성 있는 어른의 대표 격인 자네가 사고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을 두려워하며 얕은 물가에서 첨벙첨벙 물놀이하는 것에 만족해 버리다니…
이런, 이래서야 교육적 지도가 필요할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뭐, 좋네.
자네가 나의 말을 BGM─환경음처럼 흘려듣고 있다는 사실 또한 하나의 관측 결과로서 받아들이지.
중요한 것은 자네가 이해하느냐 마느냐가 아니야.
내가 계속해서 말함으로써 자네라는 관측자의 주변에 의미의 입자를 계속 표류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니까.
설령 귀를 막을지라도 나의 언어는 무의식 영역에 침투하여, 언젠가 자네의 사고 회로를 좀먹고…엇, 실례. 표현이 조금 과격했나?
…어라? 뭐야, 그 ‘이제 됐으니까 결론이나 말해’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은.
아무래도 자네도 그녀에게 너무 물든 모양이군.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말이야.
나의 말이 긴 것은 그만큼 자네와 오랫동안 시간을 공유하고 싶다는 나만의 서툰 접근이라네.
그것을 흘려듣는다니…미카 이상으로 죄 많은 사람이군.
…하지만 선생. 말이 길다고 투덜거리는 그 입으로 자네는 아직도 나와의 대화를 멈추지 않았어.
그것이 모든 답이라는 것이네.”
“…에─ 그러니까, 세이아 짱이 하는 말은
‘말이 긴 건 선생님이랑 계속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런 거야! 무시하지 말고 내 말 좀 잘 들어줘 바보야!’라는 뜻이지? 아마도!
너무 길어서 모르겠어 세이아 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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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 gps는 뭐야 위험하잖아 세이아 마지막 본심 귀엽네
간만에 재밌는 소설 나왔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