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 나구사 오시 선생님들의 감상을 권하지 않습니다.
#헤비 #L #드라마 #의존 #나구사
원본 by Hai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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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8>
<1>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깊은 밤이었다.
“…후우. 고생 많았어, 나구사.”
“아니, 선생님이야말로.”
백화요란의 임무가 끝난 뒤, 왠지 모르게 그녀의 방에 들러서.
딱히 일 이야기도 아닌 일상적인 대화에 꽃을 피우며.
똑딱똑딱 흔들리는 추시계를 남자는 그저 한가로이 눈으로 좇고 있었다.
장지 문 틈새로는 지금이 절정인 듯 오렌지빛 만월이 비쳐 들었다.
곁에 앉은 학생이 길게 늘어뜨린 백발은 은은한 달빛과 무척이나 잘 어우러졌다.
“…아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선생님은 내일도 일이 있지?”
부디 이대로 시간이 영원히 이어졌으면.
저도 모르게 그렇게 소망하게 되지만, 9월의 밤도 어느덧 정점을 향해 가고 있다.
자신은 쉬는 날이지만, 분명 그는 바쁠 것이다.
그것을 모를 그녀가 아니었기에 나구사는 조금 목소리를 낮추면서도…서둘러 그를 배웅하려 한다.
하지만 그렇게 어색하게 웃는 학생을 보며─천천히 눈을 가늘게 뜬 뒤, 그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괜찮아. 조금만 더 여기 있어도 괜찮을까?”
“…그래? 물론 나는 대환영이지만.”
원래 앉아 있던 방석으로 되돌아오며 나구사는 내심 의구심을 품는다.
자신과 그의 관계는 말하자면 그저 ‘학생과 선생’으로 정리될 뿐이다.
진작에 업무가 끝난 지금, 자신을 상대해 줄 의미는 없을 텐데.
자신이야 기쁘지만, 사실 그는 당장이라도 돌아가 쉬고 싶을 텐데.
어째서 그는…나 같은 애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걸까.
그것이 나구사라는 소녀로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저기, 선생님?”
그래서 물어보려고 입을 열었다가…역시 이상한 질문인 것 같아 생각을 고쳐먹는다.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야.’라며 말을 마음속에 갈무리해 버린다.
단지 그것뿐인, 아무 일도 없는 듯한 밤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이때 제대로 그의 생각을 들을 수 있었다면.
투명한 진심을 엿볼 수 있었다면.
어쩌면─두 사람은 결코 그 결말에 이르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린들 모든 일은 이미 늦어버린 뒤.
일말의 후회조차 이 마당에는 허락되지 않는다.
그저…그저 추억이 있을 뿐이다.
“…저 꽃? 음, 임무 마치고 오는 길에 꺾어온 거야. 왠지─후훗, 예뻐서.”
두 사람의 밤이 밝기 전, 문득 돌아본 선반 끝자락.
남자가 가리킨 곳을 보며 나구사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이름조차 모를 듯한, 아주 작고 작은 물빛 꽃잎.
소박하게 꽂힌 한 송이 꽃은 분명 두 사람의 추억이었다.
잊어버린다 해도, 다른 무언가에 덧칠해져 사라진다 해도.
더없이 소중한─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은은하게 빛나는 추억이었다.
2 / 2<2>
백화요란의 위원장─나나카도 아야메가 설원에서 동사체로 발견되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물의 달 6월 무렵.
모든 것의 시작은 백귀야행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호외였음이 틀림없다.
누구나 거짓이기를 바랐고, 질 나쁜 유언비어라 단정 짓고 싶어 했다.
그럼에도 침묵을 지키는 백화요란이야말로 명료한 해답.
30년의 시간을 넘어, 동쪽의 거리는 기이한 정적에 휩싸여 있다.
그가 처음 나타난 것은 바로 그런 때였다.
“백화요란의 본부가…여기가 맞을까.”
수중에 든 태블릿의 안내를 받으며, 정적이 내려앉은 거리 헤매기를 반나절.
D.U.에서 멀리 찾아온 마른 체구의 남자는 퇴락한 저택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소중한 구성원이…그것도 다름 아닌 조직의 수장이 죽은 것이다.
치안 유지를 맡아야 할 백화요란은 이미 기능 부전에 빠져 있다.
특히 그녀와 소꿉친구였던 부위원장 같은 이는…안개라도 되어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고.
그런 소문이 공공연히 돌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는 이곳을 방문했다.
“실례할게. 누구─”
인기척 없는 정원을 지나고, 낡은 식당을 가로질러.
누군가 없는지 훈련장의 미닫이문을 연 순간이었다.
과녁으로 쓰이는 허수아비들 사이, 마치 황야에 피어난 한 송이 꽃처럼.
물빛 하오리를 입은 소녀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비단 같은 백발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주저하는 몇 초가 시시각각 흐른 뒤.
이윽고 스르르, 수정 같은 시선이 내방객을 포착한다.
“…누구?”
생기 없는 목소리였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고, 눈을 떼면 녹아내릴 것만 같은.
그런 생각이 들었기에 그녀가 누구인지는 일단 접어두고, 천천히 다가가는 몇 걸음 동안 슈트 차림의 남자는 짧게 자기소개를 한다.
“처음이지? 나는 샬레의 선생이야. 고민이 있다면 힘이 되어주고 싶어서.”
연방학생회의 증명을 내보이며 남자는 조금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중간에 말이 막힌 것은 그의─나아가 연방수사부 샬레라는 조직의 입지가 모호하기 때문이었다.
특정 권력에 얽매이지 않고 학생을 위해 키보토스를 자유롭게 누비는 것.
그가 맡은 역할은 그런 것이었다.
다만 그런 선생도 백화요란에 발을 들인 것은 이번이 처음.
다른 요인도 여러 가지 있겠지만, 소녀의 반응은 지극히 단순했다.
“…아니. 나는, 그…괜찮으니까 돌아가 줬으면 좋겠어.”
경계와 거절.
가느다란 흰 눈동자에서는 닮은 듯한 두 가지 감정이 역력히 드러났다.
─뭐, 그럴 법도 하다.
딱히 기분이 상하지도 않은 채 남자는 어딘가 먼 곳을 응시했다.
백화요란의 학생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앞뒤 재지 않고 출발 절차를 밟았던 터였다.
필요한 사전 교섭도 끝나지 않았고 이곳에서 자신의 존재가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한 그는 일단 손 닿는 곳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뭐야?”
몇 걸음의 간격을 두고 샬레의 선생은 눈이 부은 소녀의 곁에 주저앉았다.
퉁명스럽게 꽂히는 시선에도 그는 역시 웃으며 응답한다.
“딱히 무얼 하려는 건 아냐. 그저 조금…네 말동무가 되어줄 수 있을까 해서.”
머리 위에 의구심을 가득 띄운 채 백발의 소녀는 침묵을 지킨다.
그녀의 당혹스러운 속마음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해졌다.
실상 그날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무런 대꾸 없이 떠나간 백화요란의 소녀를 남자는 결코 뒤쫓지 않았다.
그 대신 이튿날도, 그다음 날도.
다시금 똑같이 그는 아무도 없는 연립주택의 문턱을 넘었다.
어떤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니고, 말하자면 그저 얼굴만 익히는 나날.
그런 기묘한 매일이 일주일가량 이어졌을 무렵일까.
근성이 다한 듯, 일단은 확실한 신분인 듯한 낯선 남자에게 백화요란의 고료 나구사는 말문을 열고 있었다.
어두운 밤 툇마루에 서서, 저물어가는 석양을 멀리 바라보며 띄엄띄엄 중얼거려 간다.
“…아야메는 말이야, 소중한 친구였어. 누구보다 대단하고, 누구보다 자랑스러운…나의 소꿉친구.”
공허한 시선 끝에는 이제는 없는 사람의 잔상이 비친다.
자칫하면 뒤를 따를지도 모를 정도로 그녀에게 나나카도 아야메라는 존재는 각별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이별의 방식조차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친구라고…생각했어. 하지만 사실은 달랐던 모양이야.
설원에서 발견한 그녀는 이미 너무 쇠약해져 있었고, 손을 쓰기엔 늦었다는 걸…깨달아 버려서.”
보랏빛으로 얼어붙은 손가락 끝을 쫓아온 친구에게 뻗으며, 죽음을 목전에 둔 백화요란의 위원장은 눈보라에 섞어 원망의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과도한 기대는 이제 지긋지긋하고, 무책임하게 의지해 오는 이들은 누구라도 싫었다고.
자신은 정말로─백화요란의 위원장으로서 자격이 있었던 걸까?
품었던 의구심에 쫓기듯 전설에 노래되는 대예언자를 찾아 나선 여정의 끝.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멍청하고 한심하게 썩어가고 있다.
서툰 노래처럼 흐르는 자조를 나구사는 마지막까지 멈출 수 없었다.
『있지, 나구사. 마지막이니까 말해두겠는데, 나는 너를…….』
친우와의 이별의 순간에 남겨진, 그 무엇보다 가혹한 저주가 될 검게 그을린 대사.
나구사는 그것을 잊지 못한다.
아무리 눈을 돌려봐도, 거짓이나 환청이라 치부하고 싶어도. 고막에 낙인찍힌 잔향을 그녀는 지금도 듣고 있었다.
『…너를 친구라고 생각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저주 있으라.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이 그렇게 뇌까리고 떠나간 순간. 고료 나구사의 정신 중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터져버린 것이리라.
무르게 깨진 유리 공예처럼, 뒤틀리고 어긋난 나무 세공처럼.
툭툭 떨어지는 독백에서는 아무런 색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됐어.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으니까.”
아직 죽음을 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구사에게는 오히려 의문이었다.
탁한 해자 바닥을 바라보며, 어두운 거리를 내려다볼 수 있는 천수각에서 몇 번이고 몸을 던지려 했지만, 간신히 남은 책임감이 제동을 걸고 있다.
그것도 분명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모든 전말을 알게 되었을 무렵, 남자는 깊이 생각지 않아도 깨닫고 있었다.
소녀는 이제 버티지 못하리라는 것, 당장이라도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돌아가 줘. 나 같은 애한테 상관하지 말고.”
자포자기하듯 내뱉은 이런 대사에는 결코 고개를 끄덕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에 지쳤던 깊은 밤, 올려다본 달을 기억한다.
깜빡임 한 번에 사라질 것 같은 초승달, 그 희미한 그 빛을 기억하고 있다.
<3>
“…어째서, 있는 거야……?”
포기했겠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눈앞에 나타난 어른.
부드럽게 미소 짓는 그 모습이 나구사에게는 역시 의문이었던 모양이다.
인적조차 드문 백화요란.
텅 빈 식당 안에 두 사람의 대화 소리만이 메아리치듯 울려 퍼진다.
“나는 선생이니까.
쓸데없는 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괴로워 보이는 학생을 두고 떠날 수는 없거든.”
“그럴 거라면, 좀 더…도울 가치가 있는 아이를 봐줘.”
이제 자기 자신에게서는 그 무엇도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리라.
생기 없는 목소리로 내뱉으며 소녀는 오늘도 자리를 피하려 한다.
잠시 생각에 잠겨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남자는, 유령 같은 뒷모습을 향해 살며시 말을 건넸다.
“…나는 아직 너에 대해 잘 몰라. 하지만 알 수 있는 건 있어.”
이렇게 나구사와 대화하는 것 외에도 선생은 이 자치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고민에 빠진 듯한 학생에게 말을 걸거나, 작은 문제를 해결해 주기도 하며.
그렇게 일상을 보내는 한편의 시야 사이에는…결코 당당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책망받을 수 있는 입장인데도,
아직 피로가 가시지 않았는데도.
너는 매일 이 주변을 순찰하고 있어.
그 정도는 내 눈에도 똑똑히 보였단다.”
뒤돌아보지 않은 채 나구사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차가운 바람에 물빛 하오리가 흔들릴 뿐.
대꾸 한번 없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사정은 전혀 몰라.
하지만 그런 네가…가치가 없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구나.”
조심스러운 진심은 그녀의 마음에 닿았을까.
서둘러 떠나가는 뒷모습에서는 역시 감정 하나 읽어낼 수 없다.
그렇다 해도 이 이상 할 수 있는 일도 없으니 내일 다시 오기로 하자.
그렇게 마음먹으며 선생 또한 거리의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4>
기적 같은 말은 보이지 않고, 병든 마음에 들일 약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매일이 있을 뿐이었다.
먼지만 쌓여가는 백화요란에서, 혹은 백귀야행의 길모퉁이에서 우연히.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선생은 학생에게 말을 걸었다.
결코 결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은은하게 따스함이 배어 있는 말을.
“…위험했어, 선생님. 다친 데는 없어?”
길을 잃고 흘러 들어간 교외.
나구사가 선생을 구한 것도 그런 나날의 한 장면이었다.
으스스한 괴이를 물리치고 소녀는 남자에게 손을 내민다.
그 눈동자에 힘은 없었으니, 본능적으로 몸이 먼저 움직였다고 하는 편이 옳으리라.
하지만 그것을 인간의 본질이라 하지 않고 무엇이라 평할 수 있을까.
한참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뒤 선생은 문득 그녀의 무기를 가리켰다.
‘백련’이라는 명칭이 새겨진, 상당히 낡은 라이플.
“그 총은 백화요란 위원장의 증표지?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이렇게 다루고 있다는 건─.”
─너에게는 분명 훌륭한 백화요란의 자격이 있어.
남자가 건넨 그런 찬사도 역시 솔직하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듯했다.
어쩌면 세상을 떠난 소꿉친구에 대한 부채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요란한 헛기침으로 애매하게 얼버무리며 나구사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혹은 남자가 우연히 들른 닭꼬치 포장마차.
계산하려 시선을 올리자, 숯불을 피우고 있는 것은 낯익은 그녀였다.
“…저기. 일손이 부족하다고 해서 부탁받았거든.”
머리띠를 질끈 동여맨 나구사는 거북한 듯 꼬치를 꿰고 있다.
‘고생 많네’라며 격려하고 건네받은 닭꼬치를 한입.
혀끝에 닿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아주 절묘하게 불을 다루었다는 것을.
씹을 때마다 육즙이 배어 나오고 코끝을 스치는 간장의 향긋함은 더할 나위 없다.
추가 주문을 하는 그 찰나, 남자는 슬쩍 본심을 전했다.
“정말 맛있었어, 나구사.”
“…그래.”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 때문이었을까.
땀방울을 흘리는 소녀의 표정은 남자에게 역시 잘 보이지 않았다.
조금 늦게 찾아온 해빙처럼.
순환하는 낮과 밤을 통해 샬레의 선생은 고료 나구사의 마음에 다가갔다.
그녀가 끝을 선택하지 않도록,
부디 조금이라도 웃어줄 수 있도록.
꾸밈 없는 찬사를,
분명한 자신의 본심을.
찰나의 만남 사이사이마다 금이 간 소녀에게 전하고 있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그것은 그녀에게 따뜻한 것이었고…그렇기에 분명 한계였다.
“…저기, 선생님?”
서로의 업무가 끝난 시간.
평소처럼 마루에 나란히 앉아 차오르기 시작한 보름달을 멀리 바라보며.
살며시.
불어온 바람에 숨기듯 나구사는 가만히 읊조렸다.
“나에게…다정하게 대하지 말아 줬으면 해. 왜냐하면, 왜냐하면…착각을 해버리니까.”
툭, 툭, 그을린 마루 위로 눈물방울이 떨어진다.
목소리는 진작에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듯 소녀는 자신의 전부를 하오리로 감싸고 있다.
곁에 있는 어른의 시선도, 온기를 더해가는 달빛도.
모든 것을 거부하듯 어둠 속에 머물려 한다.
“나에게 가치가 있다니, 웃어도 괜찮다니. 그럴 리 없는데…그렇게 생각하게 돼버리잖아.”
무엇을 어떻게 속이든 소녀가 입은 상처는 분명 치명상이었다.
친우를 줄곧 괴롭게 했고, 끝내─죽여버리고 말았다.
깊게 새겨진 저주는 지금도 그녀의 마음에 뿌리내리고 있다.
샬레의 선생, 그가 오고 나서 보낸 몇 주.
조금씩 색채를 띠기 시작한 나날을 떠올리며 메마른 한숨을 내뱉고. 그리고…나구사는 소망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이제 됐어. 나는, 그러니까, 괴로워하고 있어야만 하니까.”
저주도 상처도 결코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마법 따위는 어디에도 없고 냉혹한 현실만이 눈앞에 치솟아 있다.
그렇기에 남자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라고, 그 무엇보다 명료한 다섯 글자를 전했다.
“…아니야. 나는 그런 게 아니라.”
“아니, 나도 이제야 분명히 알겠어. 너는 역시 멋진 사람이야.”
솔직한 긍정의 말은 그녀에게 아픔이었다.
부드럽고 따뜻하기에. 그만큼…소녀의 깊은 곳을 찌르고 있다.
그럼에도 남자는 계속 곁을 지키는 쪽을 택한 모양이다.
불행한 엇갈림으로 닫혀버린 미래를, 밝게 열려야 했던 그녀의 앞날을 부디 건져 올릴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말을 자아내고 있다.
“─나는 너에게 큰 도움을 받고 있어. 그러니 너도, 자신을 다시 인정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길었던 밤이 끝나갈 무렵. 무심코 흘린 한마디가 소녀의 무언가를 건드린 모양이다.
눈을 깜빡이고 실바람 같은 숨을 내뱉는다.
어딘가 빛이 돌아온 눈동자를 슬그머니 굴리며 나구사는 곁의 남자에게─앵무새처럼 되물었다.
“…내가. 당신의 도움이 되고 있다고?”
“응, 물론이지. 이상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늘 하던 순찰, 길모퉁이의 포장마차.
일상의 여러 장면을 꼽으며 샬레의 선생은 상쾌하게 웃어 보였다.
되돌아보며 이야기하자면, 그는 여기서 ‘모두가 도움을 받고 있다.’고 말했어야 함이 틀림없다.
위태로운 감정의 화살표를 좀 더 넓은 곳으로 돌려야 했다.
설령 그랬다 한들 주사위 눈이 바뀌었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분명한 건, 굳이 ‘나는’이라고 강조해서는 안 되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당신의.”
툭툭 떠오르는 공허한 말들을 소녀는 가만히 씹어 삼키고 있다.
어쩌면 이 순간, 뻥 뚫려 있던 마음의 구멍이 채워졌을지도 모른다.
어찌할 수 없는 상실로부터 고료 나구사는 다시 일어서려 하고 있다.
그 싹을 느꼈는지 선생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재생은─결코 축복받아야 할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마른 남자는 소녀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응, 알겠어. 당신의 힘이 될 수 있다면, 그렇다면…이런 나에게도 아직 의미가 있을지도 몰라.”
처음으로.
그 설원에서 소꿉친구의 임종을 지켜본 이후, 돌이켜보면 정말로 처음으로.
기울어가는 보름달이 뜬 밤, 나구사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눈이 녹아내리는 듯한 미소를 보며 남자 또한 어깨의 짐을 내려놓는다.
이대로라면 다시 평범해질 수 있겠지, 그런 안도감을 가슴에 품고…하늘이 밝아오기 전 그는 그녀와 헤어졌다.
그 예감이 절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마지막까지 깨닫지 못한 채.
<5>
그 후 한동안 나구사는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밧줄의 매듭처럼 엉킨 마음도, 암담한 먹구름이 드리웠던 자치구도.
당장 원래대로 돌아오지는 않겠지만 조금씩 톱니바퀴가 맞물려 가고 있다.
분명한 사실로서, 고개를 숙이고만 있던 소녀에게는 웃음이 늘어 있었다.
“…고생했어, 선생님. 응, 나도 마침 임무가 끝났거든.
맞다, 양손도 비어 있으니─괜찮다면 짐을 들어줄게.”
선생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기분 탓인지 늘어난 듯했지만…결코 24시간 내내 붙어 다니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도 그녀도 개의치 않았다.
그대로, 아무 일도 없는 듯 나날이 흘러갔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구사는 점차 깨닫게 된다.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던 ‘샬레의 선생’이라는 존재의 전체상. 우연히 D.U.의 샬레에 들렀을 때, 문득 보게 된 그의 주변에는─.
『수고하셨어요, 선생님. 예산안 수정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출장 고생 많으셨어요, 선생님! 괜찮다면 건강 상태 체크를──.』
…생각보다 훨씬 많은 학생이 있다.
왁자지껄 활기찬 모습을 보며 나구사는 저도 모르게 집무실로 들어가는 것을 주저했다.
천천히, 문고리에 얹은 손이 차갑게 식어간다.
조사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
머나먼 백귀야행까지 그 소문이 닿지 않았을 뿐─샬레의 선생이라는 존재는 이 키보토스에서 유명인이었다.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곤경에 처한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준다.
그렇기에 그 반작용처럼 그를 도와주는 이들 또한 별의 숫자만큼 많았다.
‘아아, 그렇구나. 저 사람의 힘이 되는 건…꼭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어….’
고료 나구사라는 인간은 본래 자신의 가치를 이상할 정도로 낮게 평가하곤 한다.
그런 기질이 고개를 든 탓에 그녀의 지반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자신보다 강한 사람도,
계산이 빠른 사람도.
사무 처리가 능숙한 사람도,
교류나 외교에 뛰어난 사람도.
그의 주변에는 잔뜩 있다.
그러니 사실은 좀 더 훌륭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텐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는 나와 함께 있어 주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소녀는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백귀야행으로 향하는 긴 귀갓길.
홀로 야간열차에 몸을 흔들리며 고료 나구사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힘이 되고 있다.
말하자면 지금의 그녀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그 단 한 점일 것이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도 과거의 동료도─어쩌면 이제는 만날 수 없게 된 소꿉친구조차도.
그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는 나를 그는 필요로 해주었다─하지만…….
‘…그럼, 나의 가치는?’
그것이, 그것만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째서 그는 나 같은 애를 곁에 두는 걸까.
어째서 누구보다 열등한 나에게 잘해주는 걸까.
어째서, 어째서.
홀로 잠드는 밤, 고료 나구사는 생각한다.
저물어가는 반달을 멀리서 포착하며 잠들지 못한 채 마음을 쏟는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가치 따위는 없으니까.
나선형 미로의 막다른 길목에서 소녀는 줄곧 해답을 찾지 못했다.
“…저기, 선생님. 당신은 나를…가엽게 여기는 거야?”
너무나 나약해서 불쌍하니까, 적어도 격려해 주려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문을 불쑥 입 밖으로 내보자 그는 여우에게 홀린 듯 굳어버리더니, 이내 조용히 ‘그렇지 않아’라며 어깨를 안아주었다.
마음을 녹이는 온기가 말하고 있다.
그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니라고. 그렇기에─나구사는 아직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채로 다정함의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나는 그게, 외모만큼은 괜찮다고 생각해. 안는 느낌은 별로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둘만의 밤.
그도 ‘그런 목적’일 거라 짐작하고 기모노를 느슨하게 풀어본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슬픈 표정을 지으며 그는 ‘안 돼’라고 답할 뿐이었다.
살며시 옷 띠를 고쳐 매주는 그 손길에는 욕망 같은 건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가련함인가, 흑심인가.
차라리 정말 그중 하나였다면 이야기는 꼬이지 않았으리라.
어떤 형태든 납득해 버린다면 소녀의 걸음은 그곳에서 멈췄을 테니까.
‘─어째서……?’
하지만 그의 마음을 알 수 없었기에 저물고 떠오르는 나날의 한복판에서 나구사의 의문은 진흙탕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겨우 얻어낸 긍정은 따뜻해서 그것을 잃는 것이 무엇보다 무서웠다.
그런 불안을 씻어내기 위해 긍정의 이유가 필요했다.
명확한 이유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내일이나 모레라도 그는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기에.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녀는 물었고, 그때마다 그는 웃어주었다.
“나구사, 너에게는 줄곧 도움을 받고 있어.
물론…사람에겐 잘하는 것과 못 하는 게 있겠지.
하지만 너는 잘하는 게 훨씬 많아. 게다가─.”
진상을 말하자면 그런 말들은 거짓이 아니다.
명료한 사실로서, 설령 단순한 능력치만으로 골랐다 해도 고료 나구사라는 학생은 그의 주변에서도 상당히 상위에 속했을 것이다.
백화요란의 부위원장 자리까지 올라간 실력이 가짜일 리 없다.
다만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기에는…소녀의 그릇은 깨져 있었다.
끈기 있게 대해준 한 명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의 말도 닿지 않을 정도로.
칭찬도 감사도, 평가도 공적도. 치명적으로 금이 가버린 마음의 틈새로 모든 것이 포슬포슬 쏟아져 내렸다.
벌어져 버린 상처 자국은 이제 그가 건네는 말조차 붙잡지 못하고 놓쳐버린다.
“미안, 해. 당신은 이렇게나 잘해주는데, 나는…나는 아무것도 돌려주지 못하고 있어.”
그가 어떤 말을 건네든 소녀는 언제나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고료 나구사를 칭찬하는 말도, 주변의 객관적인 평가조차도.
그 사건으로 뻥 뚫려버린 구멍이 어둡고 어두운 그 바닥으로 빨아들여 간다.
‘선생’이라는 존재는 본질적으로 무상의 봉사와 가깝다.
그 성질을, 그것을 신념으로 삼는 그의 근저를…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두 사람은 공유하지 못했다.
그런 배경 또한 하나의 원인이었다.
색채를 띠기 시작한 세계가, 말하자면 색채를 띠기 시작했기에.
낡은 흑백사진처럼 희미하고 어둡게 그을려간다.
‘…싫어. 선생님이 떠나버리면 나는, 나는 이제…….’
이유가. 떨리는 육신을 달랠 이유가 소녀에게는 반드시 필요했다.
연민이라며 체념해야 할까, 아니면 아예 그에게 매달려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뇌하던 중─답을 얻은 것은 우연이었다.
평범한 흐린 하늘, 달이 보이지 않는 쓸쓸한 밤.
특별한 날도 무엇도 아닌, 사무 작업 도중에 있었던 이런 한 장면이었다.
“맞다, 미안. 지난번에 대신 내주신 거…갚는 걸 잊고 있었네.”
함께 갔던 축제에서 나구사는 지갑을 가져오는 걸 잊었었다.
‘신경 쓰지 마’라며 사양을 듣긴 했지만, 무려 닭꼬치를 수십 개나 해치운 것이다.
역시 갚지 않을 수는 없다며 나구사는 선생님 쪽으로 다가갔다.
그렇게─해진 종이 몇 장을 꺼내 든 찰나였다.
거친 감촉이 손가락 끝을 타고 전해졌고, 어린 소녀는 문득 깨달았다.
깨닫고 말았다.
‘…이거라면. 나에게 가치가 없다고 해도……. 그래, 이거라면……?’
이 세상에 절대적인 가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고, 생각하는 것 또한 열 가지로 묶어낼 수 없으니까.
다만,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
세상 만물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있는, 근대 사회에 걸린 불가사의한 마법.
호화로운 저녁 식사도, 눈부신 궁전도.
푸르고 푸른 바다도, 아득한 창공도─혹은 멀리 가리켰던 별들의 대지조차도.
모든 것의 가치가 되는 하나의 마법.
그것이, 그것이야말로─.
“…나구사?”
남자의 입에서 당혹스러운 중얼거림이 터져 나온 것은, 내민 그것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구깃구깃하게, 한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여전히. 그의 손에는 수많은 종이 조각들이 쥐여 있었다.
당혹감을 품은 채 시선을 올리자…나구사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마침내 답을 얻은 듯이, 마치 홀린 것이 떨쳐나간 듯이.
소녀는 그저 웃고 있다.
수많은 돈을 내밀면서, 바람에 흩날리는 눈송이처럼 웃고 있었다.
<6>
자신이 긍정받는 이유, 바꿔 말하자면 자신의 가치.
굽이굽이 휜 길의 끝에서 그녀는 그것이 ‘돈’이라고 믿어버리고 말았다.
발로 차면 굴러가는 작은 금속, 불면 날아갈 듯한 한낱 종이 조각.
그러나 그것들은 이 사회에서 절대적인 마법이 되기에.
설마 그것을 받고 싫어할 사람 따위 있을 리 없고, 그것은 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구사는 선생에게 돈을 건넸다.
“─연방학생회 규정을 확인해 봤는데. 여기서 하는 활동, 신청하면 일부 보조금이 나온대.”
선생이 줄곧 칭찬했던 고료 나구사라는 학생의 총명함.
저주스럽게도…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명석한 두뇌를 십분 활용하여 자치구마다 다른 법과 규칙을 낱낱이 파악하고, 그녀는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돈을 마련해 왔다.
꽃이 피듯 웃고 있었다.
무수한 지폐 다발을 흩날리던 소녀는 언제나 행복한 듯 웃고 있었다.
“맞다, 백야당 축제에 갔었지. 그 지출도 ‘지역 진흥’이라는 명목으로 올리면─.”
지갑은 제법 두툼해졌고, 남자는 월말마다 머리를 싸매며 고민할 일도 없어졌다.
그 대신, 추억이.
둘이 닭꼬치를 베어 물고 뺨에 붙은 솜사탕을 보며 서로 웃어주던, 온화하게 흘러갔던 오후가 모두 돈으로 환치되어 버린 것만 같아서.
차마 솔직하게 기뻐할 수 없었던 남자를 과연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연방학생회 규정에 말이지?
출장 중인 임원에게는 현지 활동비가 지급되게 되어 있어.
학생회장이 실종된 탓에 모호한 부분도 있지만, 그것을 역이용해서─연방수사부의 입지를 전항의 것으로 해석한다면─.”
D.U.와 백귀야행을 왕복하는 나날조차 남자는 이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규칙의 허점을 찌르는 면도 있었지만, 강압적인 수단을 쓴 것은 아니다.
본래라면 기뻐해야 할 일이고, 실제로 마음이 가벼워진 구석도 있었다.
하지만 절차를 마치고 나구사와 둘이 돌아가던 길.
신청 보고서를 품에 안고 행복하게 웃는 소녀를 보고 있자니…남자의 뇌리 어딘가에서는 불길한 경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선생이 면전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은, 그 모든 것이 정당한 절차의 범위 내였기 때문이었다.
어디까지나 간접적으로, 자신의 부담이 줄어드는 방식으로 나구사는 지혜를 짜내고 있었다.
그 마음을 알았기에 그 또한 웃으며 감사의 말을 건네곤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금전적 가치로 환산되어 가는 나날은…점차 그에게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서늘했기에.
차라리 한 번쯤 모든 것에서 멀어지고 싶었음이 틀림없다.
여름의 냄새가 가까워져 오던 어느 주말.
혼자 가면 곰 같은 게 나와서 무섭다는 식의 적당한 구실을 붙여 선생은 나구사와 레드윈터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응, 좋아. 당신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가루눈 섞인 바람이 불어와 하얗게 비치는 긴 머리카락을 흔든다.
만년설이 쌓인 백은의 대지는 정령 같은 소녀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딱히 용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이라면 일도 무엇도 잊을 수 있다.
돈다발이나 통장이 비치지 않는 풍경이 남자에게는 어딘가 편안했을 것이다.
“…저기. 선생님은, 즐거워?”
“아아, 물론이지. 학생과 시간을 보내는걸, 최고의 휴일이야.”
진심으로 그렇게 대답한 찰나, 설경이 햇빛을 반사한 탓에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즐거워하고 있으리라.
그렇게 판단한 그를 어찌 나무랄 수 있을까.
눈의 나라를 한껏 즐기고 그녀와도 서로 웃음을 나누고. 그렇게 돌아온 백귀야행.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들을 되돌아보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은은하게 빛이 나는 듯했다.
“…응. 이 북극곰도 여우도 정말 귀여웠네.”
갓 인화한 사진 한 장을 쓰다듬으며 나구사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이걸로 팽팽했던 긴장도 풀렸을까─남자가 그렇게 판단하려던 순간이었다.
빙판 위를 달리는 균열처럼, 소녀의 입꼬리가 기이하게 치켜 올라간다.
설국에서 보낸 그 어떤 시간보다 행복한 듯이, 이 순간만을 무엇보다 기다려 왔다는 듯이.
두툼한 무언가를 내밀며 나구사는 해바라기처럼 웃고 있었다.
파직, 하고 무언가에 금이 간다.
“그래서, 이거!
선생님도 알지 모르겠지만, 기회비용이라는 게 있거든?
요컨대 원래라면 얻을 수 있었던 이익을 놓쳤으니까, 결과적으로는 손해를 보고 있다는 개념인데.”
그 후로 흐른 몇 분간은 남자에게는 이제 희미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나 같은 애와 시간을 보냈으니까.
신경 쓰게 만들고, 그 결과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게 했으니까.
적어도 되돌려주고 싶다─그렇게 말하며 내미는 황금빛 과자를 그는 마지막까지 받으려 하지 않았다.
거절해야 했다, 아무리 그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 아니. 받아줘, 그렇지 않으면, 나는, 나는…….”
어영부영 얼버무리며 떠나려 하자 그녀는 힘없이 매달려 왔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한, 위태롭게 무너져버릴 듯한 공허한 미소.
빛이 없는 눈동자가 두려워서,
눈앞의 고통을 피하고 싶어서.
그는 결국 내민 돈을 받아버리고 말았다.
어둠 속에 잠긴 갈색 봉투, 그 무게를 느껴버린 순간. 온몸의 감각이 문득 사라지고 추억이 담긴 사진들이 흩어져 간다.
나구사가 주워 모아 준 그것을 남자가 한동안 받아 들 수 없었던 것은…소중한 무언가가,
은은하게 따스했던 무언가가 이미 사라져 버린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여행지에서 보낸 평범한 시간은 나구사에게도 분명 즐거웠으리라.
다만 그 이상으로─자신을 부정하는 충동은 억누를 수 없는 것이었고, 고통을 달래주는 절대적인 가치는 요람과도 같았다.
봉투를 내민 그녀에게도 거짓은 없다.
그렇기에 남자는 슬펐다.
“아니야, 나구사. 너는 좀 더, 너는…….”
내밀어지는 돈을 거절하려, 그것을 대신할 말을 전하려 남자는 몇 번이고 말을 걸었다.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려 애썼다.
하지만 소녀는 움직이지 않는다.
건넨 가치로 남자가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도 흔들림 없는 사실이다.
그렇게 되자 이제 자신의 일그러짐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려서.
언제나, 언제나 소녀는 행복한 듯 웃고 있다.
달이 보이지 않는 흐린 밤, 서로 웃음을 나누었어야 할 평소의 툇마루.
남자는 이제 웃을 수 없었다.
“…응. 나랑 있으면 재미없지. 그래, 그렇다면!”
기운을 잃은 남자를 보고 소녀는 더욱 자신감을 잃고. 그렇게 내미는 봉투는 그에게는 맹독이나 다름없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백은의 눈동자.
그것을 망연히 들여다보며 선생은 끝없이 생각을 거듭한다.
어디서, 어느 시점에서.
우리들은…나는, 잘못된 길을 선택한 것일까.
신념과 선의로 가득 찼던 남자는 두 눈을 양손으로 가린다.
가능하다면 귀까지 막아버리고 싶었다.
“고마워, 선생님. 당신이 필요로 해주니까 나는 나로 있을 수 있어.”
떨리는 마음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되기 전에 나는 무언가 손을 써야 했다.
이토록 매력이 넘치는 아이가 자신의 빛을 깨달을 수 있도록.
좀 더, 좀 더…많은 말을 들려주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 또한 결코 본질은 아니리라.
좀 더 과거를 더듬어 본다면, 나구사가 좀 더…모두의 감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어떻게든 이끌어 주어야 했다.
메마른 남자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애당초 근원은…….
“…선생님?”
“미안해, 나구사. 아마…내가 너를 망가뜨렸나 봐.”
멍하니 얼빠진 표정을 짓는 소녀를 앞에 두고 어른은 드디어 깨달은 모양이다.
신념대로 향했던 선의가,
남들보다 앞서 내밀었던 손길이.
이토록 보상 심리로 몰아넣을 만큼 어린 소녀를 의존하게 만들어버렸다.
과도한 간섭은 도리어 독이 된다는 것을 어른인 그가 모르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라고, 야윈 어른은 미소 지어 보인다.
“네가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야. 하지만 이대로는 너에게 좋지 않아.”
돈은 세상 거의 모든 것과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진부한 이야기일지 모르나…돈으로 바꿀 수 없는 것 또한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다.
사람의 마음도, 추억도. 시간 따위로 묶어낼 수 없을 만큼 살아가는 데 있어 소중한 것들.
그렇기에 학생이 그것을 치명적으로 잃어버리기 전에. 무엇보다 큰 원인이 멀어져야 한다고 선생은 판단한 모양이다.
“작별이야, 나구사.”
한 줄기 바람이 휘몰아치고 하늘을 덮고 있던 구름이 흘러간다.
드러난 하늘은 어두웠다.
달이 보이지 않는 신월의 밤, 별이 아름다운 초여름의 계절.
작아져 가는 사랑스러운 뒷모습을 소녀는 그저 망연히 배웅하고 있었다.
그 잔상이 아침 안개 속에 녹아들어도 언제까지나 계속 눈으로 좇고 있었다.
<7>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실책이었다.
소녀에게서 멀어진다는 선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최선의 길이었음이 분명했으나…아마도 시기가 너무나 나빴다.
그런 정답을 택하기에 그녀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상태였으니까.
일단 자신에게서 떨어져서, 그녀가 냉정하게 스스로를 되돌아봐 준다면.
이별의 밤으로부터 보름 남짓.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남자는 백화요란을 다시 찾았다.
“다른…아아, 다른 누군가를 불러야 했어. 우리들은 이미 진작에 정상이 아니었던 거야.”
미숙한 자신을 저주하며 그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밤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다.
휘영청, 번뜩이며.
절정에 달해 빛나는 긴 9월 밤의 달 아래─그녀는 서 있었다.
숨을 들이킨 순간, 거액의 지폐 다발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낡은 가방에 난폭하게 채워지고, 터질 듯이 밀어 넣어진 채─그리고도 소녀의 양팔에 가득 안겨서.
서툰 꽃다발처럼 피어난 그것을, 나구사는 눈앞의 남자에게 내밀고 있었다.
먼 하늘에서 까마귀가 울었다.
“죄송, 해요. 하지만 이걸로, 제발…이걸로.”
부디. 잠시라도, 한순간이라도 좋으니 꼭 곁에 있어 달라고.
엉망으로 울음이 터진 채로, 기침과 오열도 아랑곳하지 않고 백발의 소녀는 간청하고 있었다.
여전히 굳어있는 남자를 보며 혹여 모자란 것이라 겁을 먹은 것일까.
몇 장이고, 몇십 장이고…몇백 장이고. 고요한 밤하늘에 종이 조각이 춤추고, 떨리는 간청이 밤안개에 녹아든다.
“…선, 생님?”
산사태처럼 쏟아진 지폐 다발을 헤치고, 정신을 차려보니 남자는 여자를 껴안고 있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리 총명한 나구사라 해도 이 짧은 기간에 이토록 큰돈을 마련할 수 있을 리가 없다.
1초도 지나지 않아 알아챘다.
하얀 피부 마디마디에 엿보이는 상처 자국과, 투명한 종이 너머에 잠복한 달콤한 향기─순진했던 그녀가 어떻게 돈을 벌어왔는지를.
“괜찮아, 선생님. 왜냐하면 나는 이제, 이제…….”
밤바람에 날려가는 종이 조각들, 그것이 분명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여자의 마음도, 남자의 신념도─둘이 보냈던 부드러운 바람이 불던 밤조차도.
한 번 환치되어 버리면 그것은 이제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변해버린 제자를 저버릴 만큼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함께 타락하는 것을 마다할 만큼 현명하지도 못했다.
종이 조각으로 만들어진 꽃길을 짓밟으며 남자는 여자를 방으로 끌어들였다.
“아, 아아, 그렇구나. 그런 거였구나, 선생님.”
어두운 침소에서 입맞춤을 나눈 그 순간, 그녀에게서 툭 떨어진 한마디가.
행복한 듯 일그러진 뺨이 남자의 심장을 더욱 죄어온다.
이것뿐이었다.
돈을 대신해 그녀를 긍정해 줄 수단은, 이 마당에 이르러서는 이 정도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가 아직 인정받고 있는 부분, 가루눈 속에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그 지체.
살며시 안으며, 남자는 건조한 소리를 듣고 있었다.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해두었던 무엇보다 귀한 신념.
그것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야윈 남자는 망연자실하게 듣고 있었다.
<8>
바람에 날린 종이 조각 한 장이 만월의 밤하늘을 가로질러 간다.
어떤 우연일까.
활짝 열려 있던 장지문 사이를 빠져나온 그것은, 백화요란의 어느 방에 다다랐다.
선반 끝에 방치된 화병, 그 옆으로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간다.
이름조차 모를 듯한, 아주 작고 작은 물빛 꽃잎.
소박하게 꽂혀 있던 한 송이 꽃은 이미 진작에 검게 썩어 있었다.
썩은 물도 말라붙어 화병 가장자리에는 먼지만 쌓여가고.
이제는 그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게 된 그것은 이대로 녹슬어 사라질 운명이리라.
언젠가의 추억 곁에서 삼지닥나무는 줄곧 빛나고 있다.
달빛에 비쳐 둔탁하고 어둡게 빛나고 있다.
*역주 : 삼지닥나무의 껍질은 종이와 지폐의 원료로 사용됩니다.
Fin.
댓글 6
숭배형은 보통 나기사로 묘사되는 편인데 나구사는 신선하네 하필 초성이 같아서 묘하다
이 친구도 위태위태하다가 잘 넘긴 편인데 여기서는 그만..
마지막에 몸팔았다는 엔딩 너무찝찝하네..
이분 상업동인지들 읽어보면 필력도 좋고 플롯도 재미있는데 하하호호 엔딩이 별로 없어서 갤에 잘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ㅋㅋㅋ
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