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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비 #L #순애 #미카

원본 by もとり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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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 <5>

<0>

나는 『 』을 알고 있다.

수많은 이야기를 읽어왔으니까.

소년 소녀의 새콤달콤한 럽코에서

슬픈 이별이 기다리는 애절한 스토리,

그리고 나쁜 드래곤에게 잡혀간 공주님을 왕자님이 구하러 오는 동화까지.

정말이지 온갖 이야기에서 온갖 『 』을 접해왔다.

그렇기에 나는 『 』을 알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어라, 혹시 못 믿겠다는 표정?

후훗, 그렇다면 지금부터 말해줄게.

『 』이란 말이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돼서 그날부터 자기도 모르게 누군가를 의식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이미 늦은 거야.

닿기만 해도 두근거리고,

나중에는 말을 거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아지는걸?

그걸 스스로 깨닫고는 괜히 얼굴이 새빨개지고,

그래도 결국 종일 그 사람 생각만 하게 되고,

가끔 마음이 넘쳐흘러서 이상한 소리를 내뱉고는 또 얼굴을 붉히고─

응? 이제 됐다고?

에이, 아직 한참 더 말할 수 있는데.

뭐, 됐어.

어때? 내가 『 』에 대해 얼마나 잘 아는지 이제 알겠어?

후후후, 알아줬다면 됐어.

그래, 나는 누구보다도 『 』에 정통해.

이 키보토스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그것을 동경하고, 바라고, 원해왔으니까.

그러니까.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 』을 품게 될 날이 온다면,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그것을 전할 수 있어.

그야 세상에서 그걸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정작 때가 됐을 때 당황할 리가 없잖아.

그래.

그러니까 나는 동요하거나 하지 않아.

…동요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생각했었어.

<1>

창가에서 눈 부신 햇살이 비쳐 든다.

차가운 겨울 아침 햇살이 방 안을 채우는 가운데, 나는 침대 위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직이 “안녕”하고 인사해 본다.

…실내는 여전히 고요하다.

조용한 목소리만이 작게 스며들 뿐.

뭐, 감옥 같은 곳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정적 속에 공기를 들이마시며 천천히 기지개를 켠다.

무심코 귀를 기울이니, 밖에서는 참새가 짹짹거리며 마침내 찾아온 아침을 축복하듯 울고 있었다.

그렇게나 오늘이 기다려졌던 걸까?

─우연이네, 나도 그렇거든.

마음속으로 즐겁게 대답하며, 나를 놓아주려 하지 않는 이불을 살며시 걷어내고 조금 차가워진 천 소재의 슬리퍼를 신는다.

그렇게 일어나서 요즘 유행하는 크리스마스 송을 콧노래로 흥얼거리며 화장대 앞으로 이동했다.

거울 앞에 앉아 평소보다 훨씬 밝은 미소를 지으며 메이크업을 시작한다.

어째서 이렇게 기분이 좋냐고?

그 이유는 달력의 오늘 날짜에 붉은 글씨로 크게 적힌 ‘선생님과 데이트’라는 일곱 글자에 있다.

며칠 전 밤.

나는 문득 ‘선생님을 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해버렸다.

이유라면 있다.

사실 선생님이 왕자님처럼 나를 구해준 뒤로 한동안 그 사람과 만나지 못했다.

에덴 조약의 뒤처리, 세이아 짱의 예지 능력 상실, 그리고 타교 학생들에 대한 지원…….

선생님에게도 물론 사정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만나지 못하고 있다’라는 사실은 내 마음에 상상 이상의, 금이라도 갈 것만 같은 슬픔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죄인이다.

이런 어리광이 허용될 입장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넘쳐흐르는 마음은 멈추지 않았다.

‘보고 싶어. 그냥 보고 싶어.

시시한 수다라도 뭐든 좋으니까, 그냥 선생님이랑 직접 이야기하고 싶어.’

어찌할 수 없는 충동에 휩싸인 나는 그 기세 그대로 감옥으로 나기 짱을 불러냈다.

“나기 짱 부탁이야! 이번 한 번뿐이니까!”라며 꼴사납게 떼를 써서 외출 허가를 받아냈고,

서둘러 목욕하고 잘 준비를 마친 뒤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서 선생님에게 연락했다.

내용은 이렇다.

『오랜만에 밖에 나갈 수 있게 돼서 쇼핑을 하고 싶어.

선생님이 같이 가줬으면 좋겠는데?』

모모톡에 이 문장을 타이핑한 뒤, 10분 동안이나 검토하고는 떨리는 손으로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때의 두근거림은 정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여서, 유스티나 성도회에 맞섰을 때도 이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바보처럼 긴장하며 답장을 기다린 지 몇 분.

돌아온 “알았어”라는 세 글자에, “차갑기도 해라, 선생님도 참”이라며 싱글벙글 웃으며 스마트폰을 껴안고 잠이 들었던 나.

그날 이후로 안절부절못하며 시간을 보냈다.

당일 코디는 어떻게 하지?

인사는 어떻게 하지?

데이트 코스는 어떻게 하지?

머릿속에 수많은 ‘어떻게 하지’가 떠오르는 일상은 긴장과 불안으로 가득했지만…….

행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 “나의 왕자님을 만날 수 있어!”라는 기대에서 비롯된 감정인걸.

행복할 수밖에 없지.

그리고 기대로 가슴을 부풀리며 맞이한 오늘.

나는 엄청나게 좋은 기분으로 선생님과의 약속 날을 맞이한 것이다.

…나 자신이 생각해도 참 단순하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니 정말 구제 불능이다.

“메이크업 OK, 기도 OK, 패션 OK…….”

커다란 전신거울 앞에서 가볍게 한 바퀴 돈다.

교복 치마가 내 머리카락과 함께 부드럽게, 아주 살짝 떠오른다.

승부복은 한참을 고민했지만, 역시 공주님이라고 불러주었던 이 모습이 제일인 것 같았다.

예쁘게 한 바퀴 회전한 뒤, 은은한 장미 향이 코끝을 간지럽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화장이 번지지 않도록 살며시 뺨을 두드린다.

“좋아, 완벽! 출발하자……!”

들뜬 기분 탓에 평소보다 크게 보이는 출구로 향하자, 감시하던 아이가 정중하게 나무 문을 열어준다.

가볍게 목례하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죄책감과 행복감이 뒤섞인 듯한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그 감정에 휩쓸려 되돌아가고 싶어지기도 하지만, 그러면 오늘까지의 노력이 무의미해진다. 무엇보다 선생님과 나기 짱에게 실례다.

천천히 숨을 내뱉고 마침내 각오를 다진다.

그리고 아리우스 자치구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보다 더한 긴장감을 가슴에 품고, 힘찬 발걸음으로 문을 나섰다.

<2>

오전 10시.

평일 이 시간대에는 대부분의 학생이 등교해 있기에 트리니티의 대로라 해도 사람이 많지 않다.

아침의 서늘함이 조금 남아있는 공기를 마시며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감시하는 아이는 없다.

샬레의 선생님이 있다면 문제없다는 모양인데, 나기 짱이 배려해 준 것이 분명했다.

돌아가면 감사의 표시를 전해야지.

롤케이크면 되려나?

나기 짱의 질린 듯한 얼굴을 상상하며 혼자 웃고 있자니, 저 멀리서 낯익은 실루엣이 보였다.

그 인물은 이쪽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약속 장소인 분수대 앞에서 진지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다.

저런 표정을 짓는 걸 보면 분명 학생에 관한 일이겠지.

고민 상담이라도 받은 걸까?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기껏 마련한 데이트인데 지금은 내 생각만 해줬으면 좋겠다.

…뭐, 데이트라고 생각하는 건 나뿐일지도 모르지만.

조금 우울해지려 하면서도 웃으며 말을 건다.

“오랜만이야, 선생님! 아침부터 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어?”

나의 활기찬 목소리에 눈앞의 인물─선생님은 고개를 든다.

얼굴을 보고서야 비로소 나라는 걸 알아챘는지, 얼굴을 밝히며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아마 중요한 이야기였을 텐데, 방해받아도 싫은 기색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 이 사람의 멋진 점이다.

그렇기에 언제나 그 친절함에 어리광을 부리게 된다.

배신했을 때도, 포기했을 때도 나는 선생님에게 의지하기만 했다.

조금은 은혜를 갚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만나는 것조차 안 된다면 그런 건 불가능하다.

정말이지, 조금은 만회할 기회를 줘도 괜찮지 않나.

뭐, 본심을 말하자면 그냥 보고 싶을 뿐이지만.

그런 나의 이기심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선생님이 대답한다.

“오랜만이야, 미카.

잠깐 업무 연락이 왔던 것뿐이니까 신경 쓰지 마.

그리고 미안해. 좀처럼 만나러 가지 못해서…….”

“아, 전혀 괜찮아! 선생님 잘못이 아닌걸. 굳이 따지자면 잘못한 건 나고…….”

미안한 표정을 짓는 선생님에게 서둘러 고개를 젓는다.

그런 식으로 사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고맙다는 말을 하게 해줬으면 좋겠다.

내가 이렇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건 당신 덕분이니까.

“그래도 사과하게 해줘.

미카도 전하고 싶은 말이나 상담하고 싶은 게 많았을 텐데.

그걸 알면서도 만나러 오지 않았으니까.”

…정말이지.

그렇게 미안한 얼굴로 말하면 아무 말도 못 하게 되잖아.

“…응, 알았어. 용서해 줄게. 그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음…내용에 따라 다르려나?”

자기가 말해놓고 경계하는 듯한 말을 하는 선생님.

조금 상처받은 마음을 드러내듯 선생님에게 볼을 부풀려 보인다.

“선~생~님~?”

“아하하……. 미안 미안. 그래서 부탁이라는 게 뭐야?”

선생님의 질문에 나는 “으음”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며 고민하는…척을 한다.

이미 내용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대놓고 처음부터 정해놨어요~ 하고 티를 내면 뭐랄까, 너무 안달 난 것 같기도 하고 속이 뻔히 보인달까.

역시 좀 부끄럽기도 하고…아으, 정말!

어쨌든!

“데이트!”

“데이트……?”

“오늘 외출을 데이트라고 치기! 그게 내 부탁이야!! 됐지!?”

선생님이 교사라는 역할을 맡고 있는 이상, 학생이라는 역을 배정받은 나는 그 옆에 서지 못한다.

윤리라는 녀석이 가로막고 있으니까.

데이트 같은 건 꿈도 못 꿀 일이다.

물론 그것도 이해하고 있다.

이해하고는, 있다.

하지만 역할이니 뭐니 하는 것으로 꾸며대 본들, 역시 감정에 브레이크를 걸 수는 없다.

나는 알고 싶었다.

이 가슴 속에 싹트는 감정의 정체를, 이름을.

공주님이라 불렸을 때부터…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마음 깊은 곳에서 속삭여 오던 이 감정을 알고 싶었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그대로인 걸까.

아니면 엉뚱한, 혹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무언가인 걸까.

『 』을…나는 아는 척하고 있었던 걸까.

모르겠다.

그래서 알고 싶다. 알아야만 한다.

그것을 위한 해법─데이트.

마음 깊은 곳에서 엉켜 풀리지 않는 그 답을 풀어내기 위해 사용하는 공식.

물론 순수하게 선생님과의 시간을 즐기고 싶다는 마음도 있다.

그야 이렇게나 기대해 왔으니까.

지금도 봐봐.

선생님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뛰고 있는걸.

하지만 나는─

“데이트라…….”

고민하는 듯한 선생님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고개를 들자 왕자님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역시 안 되는 걸까.

선생님은 선생님이고, 학생인 나는 학생.

그 벽을 넘는 것 따위 결국…….

“좋아.”

“…아.”

“오늘은 평일이라 사람도 적으니 그런 걱정도 없을 테고, 응.”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한 미소를 나에게 보내주었다.

“데이트하러 갈까, 미카.”

<3>

“그립네……. 미카와 처음으로 이야기한 게 여기였지.”

“그립다니, 아직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뭐, 확실히. 그사이에 파란만장한 일들이 너무 많아서 벌써 한참 전 일처럼 느껴졌나 봐.”

“흐음……. 역시 교사라는 건 힘든 거구나.”

“그렇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야.

하지만 동시에 즐겁기도 해.

무엇보다 학생들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으니까.”

정적 아래 두 목소리가 울린다.

에덴 조약을 둘러싼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 보충수업부 아이들이 합숙에 썼던 장소.

그곳에 설치된 수영장에 나와 선생님은 왔다.

지금은 풀사이드에 걸터앉아 두서없는 잡담을 나누고 있다.

이곳을 데이트 장소로 고른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조용히 선생님과 둘이 보낼 수 있는 곳이 좋았기 때문.

또 하나는…추억의 장소니까.

“…….”

…그 아이들이 열심히 청소했던 수영장 안은 사건 이후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깨끗한 그대로였다.

구석구석 철저히 씻어낸 흔적.

그 아이들의 순수함과 절실함이 전해져 와서 어딘가 눈부시기도 했다.

내가 선생님에게 거짓말을,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약간의 본심을 털어놓았고 선생님이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주었던 장소.

비뚤어져 있던 나는 기뻤으면서도 그 손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때…….

“…….”

“…미카?”

“─앗, 왜 그래 선생님?”

“미카가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길래……. 무슨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어?”

“…아무것도 아니야. 그것보다 선생님! 뭐 재밌는 얘기 좀 해줘!”

“으, 응…?”

얼버무리듯 선생님에게 억지 부탁을 한다.

‘만약’ 같은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자.

그건 이미 끝난 일.

전부 정리되어 버린 거야.

이제 와서 생각해도 소용없어.

…소용없을, 터였다.

심장을 좀먹는 검은 감정에 뚜껑을 덮고, 나는 선생님에게 미소 짓는다.

“있지, 선생님! 뭐 없어~? 막 세이아 짱도 모를 법한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

과장되게 양손을 벌리자, 선생님은 웃으며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세이아도 모르는 이야기라…….

그건 좀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 사고 실험 이야기를 해볼까?”

“사고 실험……? 왠지 어려울 것 같아.”

너무 어려운 이야기는 사양하고 싶은데…….

질색하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는 나에게 쓴웃음을 지은 선생님은 “그렇지 않아”라며 손을 내저으며 대답한다.

“메리의 방(Mary's Room)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

“메리의 방?”

“그래.”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가락을 세우고 교사답게 설명을…수업을 시작한다.

방금까지와는 다른 분위기.

이런 전환이 확실한 점도 어른스러워서 멋지다고 생각한다.

“어느 곳에 메리라는 소녀가 있었어.”

“…뭐야 그게, 옛날이야기?”

“옛날이야기…와는 좀 다르려나? 뭐 일단 들어보면 알 거야.”

“네에, 선생님.”

“응, 착하지……. 자, 설명을 계속할게?”

짧은 농담을 섞어가며 선생님은 해설을 이어간다.

“메리는 흰색과 검은색 이외의 색이 없는 방에서 태어나 자랐고, 오늘날까지 지내왔어.”

“흰색이랑 검은색뿐인 방…….

어라, 그럼 메리는 그 외의 색은 본 적이 없다는 거야?”

“오, 좋은 질문이야.

맞아, 메리는 흰색과 검은색 이외의 색을 본 적이 없어.”

“그건…좀 불쌍하네.”

이 세상에는 멋진 색들이 아주 많다.

나기 짱의 기품 넘치는 플래티넘 블론드 머리카락은 보고 있으면 한숨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고.

세이아 짱의 옅은 노을 같은 눈동자는 그 아이의 어른스러움과 아이다움을 훌륭하게 공존시키고 있다.

그 외에도 문득 눈에 들어오는 푸른 하늘이나 봄바람에 흐드러지게 핀 꽃들처럼, 이 세상은 수많은 멋진 색으로 가득한데.

그걸 모른 채 흑백뿐인 세상을 살다니…조금 가련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약간의 공감도 느껴진다.

묘한 감각에 사로잡힐 것 같았지만, 지금은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 것이 우선이다.

기껏 마련된 둘만의 특별 수업인데 아깝기도 하고.

그런 내 생각과는 아랑곳없이 선생님은 설명을 계속한다.

“하지만 메리는 색의 전문가야.”

“…저기, 그거 좀 이상하지 않아?

메리는 색을 본 적이 없잖아. 전문가가 될 수 있을 리 없어.”

“그렇지 않아.

메리는 시신경이나 눈의 구조, 빛의 특성, 빨간색은 어떤 상황에서 쓰이는 말인지 같은 색에 관한 지식이 풍부하거든.

즉 그녀는 본 적은 없어도 색이라는 것을 물리적으로…알고 있는 거야.”

“으음……. 과연?”

메리라는 아이는 빨간색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지식으로서 알고 있다.

피나 토마토 같은 물체는 빨간색을 띠고 있다고 본 적이 없어도 판단할 수 있고, 구조상 눈이 어떻게 빨간색을 비추어 내는지도 알고 있다.

메리는 빨간색에 관한 지식을 전부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빨간색 그 자체는 본 적이 없다.

즉 그런 이야기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만약 그렇다면…….

메리가 처음으로 빨간색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빨간색의 지식만을 전부 가진 그녀가 흑백의 방을 빠져나와 실제로 빨간색을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그것이야말로 이 실험의 본질이야.”

나의 사소한 의문에 “참 잘했어요”라고 말하는 듯한 미소로 선생님이 대답한다.

“메리가 처음으로 방에서 나와 바깥의 색을 보았을 때, 그녀가 무언가를 배운다고 생각하니?”

“메리는 색에 관한 지식을 전부 가지고 있으니까 물리적으로 말하자면 ‘배우지 않는다’가 정답이겠지.

하지만 그녀는 처음으로 색을 본 거니까, 물리적 사실을 배제한다면 ‘배웠다’가 되는 거네.

그런 거야?”

“맞아, 만점이야.

이건 물리주의…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이나 지식 같은 일반적으로 비물리적이라 불리는 것들까지 ‘물리적이다’라고 보는 생각에 대해 논하는 사고 실험이야.”

“…뭐랄까, 거 참 차가운 생각이네?”

나에게 마음이란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따뜻하고 기분 좋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결코 언어화할 수 없는 관념적인 무언가가 있기에 소중한 것이다.

그것조차 물리적으로 생각해 버리는 건 조금 슬픈 일일지도 모른다.

무의식중에 입술을 내미는 나에게 선생님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타이르듯 말한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메리의 방을 생각하면 이것도 아주 부정할 수는 없지 않을까?”

“으음……. 확실히.

메리가 무언가를 배웠는지, 아니면 배우지 않았는지 그건 본인밖에 모르는 일이니까.”

“어때? 심심풀이 정도는 됐어?”

불안한 듯 물어보는 선생님.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다.

새로운 지식이 늘어나는 감동도 맛보았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이야기 속의 메리는.

“…응, 물론이지. 고마워 선생님.

…나 잠깐 꽃 좀 따러 다녀올게.”

“아, 응. 조심해서 다녀와.”

“네에~”

선생님에게 가볍게 대답하고 나는 교내로 걸어간다.

언어화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을 품은 채로.

<4>

합숙소는 교내도 깨끗했다.

지금 걷고 있는 복도에도 먼지 하나 없다.

이 정도면 당장이라도 트리니티의 신교사로 쓸 수 있을 것 같다.

돌아가면 나기 짱에게 건의해 볼까, 생각하다가 곧바로 그만두었다.

이곳은 보충수업부 아이들의 추억의 장소기도 하지만, 저 수영장만큼은 나에게도 소중한 장소다.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 생각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메리의 방이라…….”

선생님이 가르쳐 준 사고 실험.

가상의 인물을 소재로 한, 가상의 방에서 있었던 이야기.

그것은 어째서인지 내 마음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니, 이유는 이미 알고 있다.

“메리…응, 나랑 좀 닮았네. 실제로 존재했다면 친해질 수 있었을까?”

미소 지어 보지만, 가슴 깊은 곳을 간지럽히는 이상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가상의 소녀, 메리.

그 아이는 색에 대한 지식만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마치 나 같았다.

이야기만을 읽고 다 안다고 착각하고, 정작 그때가 오면 정말 그런 건지 불안해하고.

분명 메리도 마찬가지였겠지.

처음으로 ‘색’을 눈에 담고, 과연 자신이 그것을 정말로 알고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분명 당혹스러워하고 고민했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만약 그 고민을 떨쳐냈다면.

만약 그 답을 찾아냈다면.

아아, 가르쳐줘 현명한 메리.

당신은 흑백의 좁은 방에서, 고독한 상자에서 밖으로 나와 진정으로 ‘색’을 알게 되었니?

그리고.

나는 정말로 『 』을 알고 있었던 걸까?

마음을 죄어오는 이것은…『 』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야?

제발 부탁이니 가르쳐줘.

어리석은 나에게 부디.

무지한 나에게 부디.

당신의 해답을─

“미소노 미카.”

“…….”

날카로운 목소리에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어렴풋이 눈치채고는 있었다.

선생님에게서 멀어진 것도 그 때문.

무례하고 명백한…적의.

마녀라 불리게 된 그날부터 몇 번이고 받아왔던 감정을 감지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 서 있었던 것은 한 명의 소녀.

트리니티의 교복을 입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여자아이였다.

그녀는 나에게 총구와 증오가 서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것을 본 나는…한숨을 내쉰다.

“…하아, 또 이거야?

저기, 오늘은 그냥 돌아가 줄래?

무척 중요한 걸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았거든.”

“…너, 나를 만만하게 보는 거냐!”

“하아…….”

이미 이런 일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남의 의견에 휩쓸린, 스스로의 방향성도 없는 증오.

처음에는 짜증스럽게 느껴졌지만, 점차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되었다.

딱히 내가 먼저 해를 가할 생각은 없다.

애초에 잘못한 건 모두를 배신한 나다.

아무리 불합리하더라도 증오를 받을 만한 이유가 있다.

그렇기에 평소처럼 공격은 대충 피하고 어디론가 숨자.

그러고 나서 선생님과 합류해 또 다른 장소로…….

가려고 했지만.

나는 깨닫지 못했다.

증오는 선동으로 부추겨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느껴온 나에 대한 증오의 상당수는 그것이었다.

아까 말한 주체성 없고 어리석은 감정.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다.

증오에는 종류가 있다.

그래, 예를 들어 곧고, 절대적이며, 정당한…증오도 존재한다는 것.

“너만 없었어도 그 애는 다치지 않았을 거야!!”

“──”

시간이 멈췄다.

그 애.

나는 그 아이를 모른다.

눈앞의 아이조차 처음 보는데 그 지인을 알 리가 없다.

하지만 지금 한마디로 알 수 있는 것도 있다.

그것은 그녀가 말하는 ‘그 애’가 그 사건의 피해자라는 것.

내가 방아쇠가 되어 일으킨 사건의…즉 나의 피해자.

그 아이의 친구, 혹은 가족이 지극히 상식적인 이유로 복수를 하러 왔다.

소중한 사람을 다치게 했다.

그런 상냥한 이유로.

처음으로 마주한 올바른 증오.

후회나 죄책감, 슬픔 같은 것들.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내 발을 지면에 꿰맨다.

너는 여기서 벌을 받아야 해.

마음의 소리가 그렇게 말하며 휘감긴다.

그리고 나는.

못 박힌 듯 굳어진 채.

탄환이 발사되는 것을 보며─

“기다려!!”

“윽!? 누구야!!”

“앗…….”

다정한 목소리.

언제든 나를 도와주는 그 목소리에 몸의 긴장이 풀린다.

복도 모퉁이에서 숨을 헐떡이며 나타난 것은 예상대로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다급하게 나와 총구를 겨눈 아이 사이를 가로막으며─잠깐,

“선, 선생님!? 위험해! 선생님은 총을 맞으면……!”

“선생님이라니…샬레의?

…아니, 상관없어!

선생님이라도 그 마녀 편을 들겠다면…!”

단단히 각오를 다진 듯 총구를 겨누는 소녀.

안 돼!

선생님을 잃는 것만은 절대로 싫어!!

마음속 비명에 휩쓸리는 대로 총에 손을 뻗었다.

그 찰나.

“기다려……. 잠깐만.”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에 움직임이 멈췄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눈앞에서 선생님에게 총구를 겨누던 소녀도 굳어버렸다.

그리고 선생님의 뒤를 이어 나타난, 그 차분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어, 어떻게, 어떻게 네가 여기에…….”

그 반응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저 아이는 분명, 떨리는 권총을 쥐고 있던 소녀가 말했던 그 아이와 동일 인물.

나의…피해자.

그녀는 나와 선생님을 천천히 지나쳐, 몸을 떨고 있는 소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오른쪽 눈에는 하얀 거즈가 감겨 있었다.

한눈에 봐도 심각한 부상.

그 원인은 분명─

나의 경악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녀가 입을 열었다.

“네가 이 안으로 들어가는 게 우연히 보여서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어.

샬레의 선생님도 눈에 띄어서 몰래 따라왔지.”

그리고 이 현장을 발견했다.

친구가 자신을 위해 복수하려 하는 이 현장을.

가장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사람에게 들켜버린 복수귀 소녀는, 분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피했다.

“…난…….”

“괜찮아, 고마워. 나를 생각해서 그랬던 거지? …하지만 그것은 좋지 않아.”

“알아…알고 있다고.

하지만…미소노 미카가 없었다면…너는…네 눈은……!”

“난 괜찮아. 이 눈도…아마, 분명 나아질 거야.”

“…….”

아마, 분명.

그 말이 내 가슴을 찔렀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실감이 뼛속까지 전해졌다.

“그리고, 봐봐.”

안대를 한 소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친구에게 미소 짓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럽게 향해진 시선에 동요가 일었다.

무슨 말을 들을까,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패닉 속에서 파르르 떨며 고개를 움직이다가…깨달았다.

“아…나…….”

나는 울고 있었다.

후회와 고통, 그리고 비애로 뒤섞인 내 마음이 눈동자를 타고 이슬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한 번 터져 나온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죄책감과 함께, 검게 물든 마음을 씻어내듯 쏟아져 나왔다.

“미…미안…미안해요……!”

꼴사납게 끅끅거리며 사죄를 뱉어냈다.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는 사과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날, 그때처럼 그저 엉엉 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너는 죄인이고, 구제 불능인 쓰레기야.

그 사실을 긍정당하는 기분이 들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총을 들고 있던 소녀는 크게 당황했고, 안대를 한 소녀는…어째서인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조금만 더, 믿어볼까?”

<5>

노을빛에 물든 수영장은 조금 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광경은 평소라면 아름답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독이나 다름없었다.

옆에 앉은 선생님도 아무 말이 없었다.

“…….”

세계는 흑백이었다.

내가 저지른 죄의 크기.

다정한 사람까지 휘말리게 해 그 인생을 망가뜨렸다는 사실.

그것이 내 세계에서 색을 앗아갔다.

흑과 백만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나는 후회와 절망에 잠겨 있었다.

이미 그 두 사람은 돌아간 뒤였다.

떠날 때 보였던 복수귀 소녀의 허탈한 표정.

그리고 내 피해자인 아이의,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웠던 미소.

나는 그 장면들을 머릿속에서 계속 되새기고 있었다.

“선생님.”

“…응.”

내 목소리에 선생님은 작고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말을 걸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쪽으로 고개를 돌려 진지한 눈빛으로 다음 말을 재촉한다.

그 시선을 견딜 수 없게 된 나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그 상태로 띄엄띄엄 참회를 이어갔다.

“그 아이…다쳤더라.

아마 돌이킬 수 없는 상처일 거야.

적어도 친구가 증오를 키워 복수하러 올 정도의 상처.”

“…그렇네.”

부상의 원인은 알 수 없다.

유스티나 성도회에게 당한 건지, 낙석이나 눈먼 탄환에 당한 건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 아이가 내가 방아쇠를 당긴 사건의 피해자라는 사실만은 틀림없었다.

그래서 생각한다.

생각하고 만다.

“내가 반대 입장이었다면…….

나기 짱이 그런 일을 당했다면. 나는 증오했을 거야.

아니, 분명 증오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는 그만큼의 힘을 낳는다.

그것은 그날 내가 몸소 체험한 것.

증오는 너무나도 쉽게 사람을 죽이려 하고, 실제로 죽인다.

그만큼 강한 의지를 부여한다.

무엇보다 질 나쁜 것은…증오와 정의는 상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금 상황은 누가 봐도 그 소녀가 정의였고 내가 악이었다.

평소 읽던 이야기라면 분명 그 아이가 나를 쓰러뜨리고 복수에 성공하며 해피 엔딩으로 끝났겠지.

그걸로 끝이어야만 한다.

내가 자비를 구하는 것 따위 허용될 리가 없다.

“…….”

“선생님.”

다시 한번 그 이름을 부른다.

언제나 해답을 주고, 언제나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용기가 생기는 그 이름에 나는 매달린다.

역시 나는 알 수 없었다.

아름다운 해피 엔딩을 동경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동화 속 이야기를 꿈꿨던 나에게는 악역이 구원받는 스토리 따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제발.

가르쳐 줘, 선생님.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변명의 여지도 없고, 일상을 돌려줄 힘도 없어.

이런 최악인 내가 그 아이들에게 무얼 해야…죄를 청산할 수 있을까.”

“…….”

쥐어짜듯 말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선생님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화가 났을까, 아니면 어이가 없을까.

어느 쪽이든 내가 원하는 모습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그 사실이 무서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정말 끝까지 한심하구나, 나는.

“미카.”

“윽.”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진지한 목소리에 어깨가 떨렸다.

듣고 싶지 않아.

들어야만 해.

정반대의 두 감정이 충돌하며 몸에 힘이 들어갔다.

꼴사납게 겁을 먹은 내게 선생님은,

“사과하자.”

예상치 못한 말을 건넸다.

“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농담이라도 하는 건가 싶었지만, 시선 끝에 닿은 선생님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고─그 어느 때보다 다정했다.

“응. 미카는 아직 그 아이들에게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잖아.”

“아…그, 응.”

그 자리에서 미안하다고는 했지만, 그것은 충동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고 그 아이들에게 향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모호한 사죄였다.

그것은 사과라고 부를 수 없다.

선생님도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하지만 사과한다고…….”

이미 모든 게 늦어버렸는데, 어째서─

“그래도 사과하는 거야.”

강한 의지가 담긴 말에 심장이 뛰었다.

“미카. 너는 반대 입장이었다면 용서할 수 없다고 했지.”

“으, 응…….

만약 나기 짱이나 세이아 짱이 그런 상처를 입었다면, 난 상처 입힌 사람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몇 번을 사과해도.”

“정말로?”

“어?”

선생님의 반문에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당연히 용서할 수 없을 게 뻔하다.

소중한 사람이 다쳤는데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 성인군자 같은 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분명 그 아이들도.

“그럼 미카, 그 가해자가 너에게 사과하러 온다면 어떻게 할 거야?”

“그건…쫓아버릴 거야. 다시는 얼굴도 비치지 말라고 외치겠지.”

“그래도 계속 사과하러 온다면?

그뿐만이 아니야. 상처 입힌 것에 대해 보상하려는 자세도 보여주고, 진심으로 후회하고 반성한다는 게 전해진다면?”

“그건…….”

용서하지 않아.

용서하지 않을 거야, 분명.

그래야 하는데.

내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눈앞에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이 진심으로 뉘우치는 광경을 상상하자, 어째서인지 가슴 깊은 곳이 가벼워졌다.

아주 조금은 이야기를 나눠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동요하는 나를 보며 선생님이 부드럽게 눈을 가늘게 떴다.

왠지 모르게 그 표정이 너무나 눈부셔서 다시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선생님은 그런 나를 나무라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분노는 언젠가 안개처럼 흩어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해가는 생물이니까.

증오는 영원하지 않아.

증오의 대상을 용서하든 없애버리든, 그것은 언젠가 사라지게 마련이야.

그러니까…사람은 서로 용서할 수 있어.

언젠가 분노는 변하고, 증오조차 사라져 버리니까.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언젠가 죄는 용서받을 수 있어.

그러니까 미카.”

선생님이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눈을 뗄 수 없다.

어른으로서의 조언에, 선생님의 가르침이라는 멍에에 묶여 나는 움직일 수 없게 된다.

동요하고, 굳어버리고, 혼란스러워하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내게 선생님이 선언한다.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정성스럽게 가르쳐 준다.

“그 아이들에게 사과하러 가자. 미안하다고 말하는 거야.”

세계에 색이 돌아온다.

“나, 나는…악역이고, 용서받지 못할 마녀니까…….”

“네 죄는 무거워.

하지만 너는 악역이 아니야.

마녀도 아니야.

자신의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남을 생각하며 고민할 줄 아는 여자아이일 뿐이야.”

노을이 오렌지색을 되찾고, 흑백의 세계가 번져 나간다.

“그, 상관없어! 사과해도 용서받지 못해! 괴로워해도 인정받지 못해! 나는……!”

“괜찮아. 네 진심은 반드시 전해질 거야.

그 아이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증오를 끊어낼 수 있어.

내가 보증할게.

왜냐하면 그 아이들도 너와 똑같은 다정함을 가지고 있으니까.”

철조망의 녹슨 색도, 붉게 물든 하늘도, 선생님의 눈동자도 모든 것이 색을 얻는다.

되찾는다.

선생님이 말을 자아낼 때마다 세계는 색을 돌려주며…아니, 가르쳐 준다.

“분명 안 될 거야…….

난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했으니까…….

용서받지 못할 거야…….

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없애려 들지도.

난 증오의 대상이니까…….”

“말했잖아?

그 아이들은 너와 똑같은 다정함을 가지고 있다고.

그러니까 괜찮아.

몇 번이고 사과하자.

상처를 고칠 방법도 찾아보자.

분명 이해받을 수 있을 거야.

용서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는…진심으로 죄를 씻기 위해 마음 깊이 반성하며 그렇게 할 수 있는 아이니까.”

그리고.

“그러니까…사과하자, 미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너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나는─알게 되었다.

아아, 알겠어, 메리.

분명 이것이.

이것이 내가 알고 싶었던 『 』이구나.

“죄를 갚아나가자.

너는 겉보다 훨씬 어린애 같고 감정에 휘둘리곤 하니까 고생할지도 몰라.

책임이라는 의미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선생님, 말넘심.”

“사실이니까.

하지만 괜찮아.

내가 가르쳐 줄게.

책임의 의미도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도.

그걸 가르쳐 주기 위해 내가 너희들의 선생이 된 거니까.”

“그렇구나.”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 자신의 의지로, 나의 죄를 짊어지고 일어선다.

이제 괜찮아…라고는 말할 수 없다.

죄가 너무나도 커서, 속죄하는 법도 사과하는 법도 모른다.

지금 당장이라도 짊어진 십자가에 짓눌려 여기서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하지만.

아니.

그러니까.

“선생님, 부탁해…아니. 부탁드려요.”

“응?”

나처럼 자리에서 일어난 선생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이제 피하지 않아.

결정했어.

마주하기로, 짊어지기로.

그러니 이제 도망치지 않아.

부드럽게 미소 짓는 선생님에게 나는 고개를 숙였다.

“가르쳐 주세요.

나는 바보 같고, 유치하고, 책임을 지는 법도 잘 모르니까…선생님. 부디 부탁드려요.

제가 죄를 씻는 데 필요한 것들을 가르쳐 주세요.”

“너무 의지하기만 하면 안 돼.”

“알고 있어요.

당신에게 그걸 배우고 나면…분명 나는 내 손으로 책임을 질 거야.

내 눈으로 직접 죄와 마주할 거야.

선생님 뒤에 숨지 않을게. …내 죄는 내 것이니까.”

그것은 오늘 확실히 배운 것.

나 자신의 잘못을 직시하며, 나 이외에는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나의 진심 어린 소원을 들은 선생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네게 책임을 가르쳐 줄게.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응…고마워요.”

고개를 든다.

변함없는 미소가 있었다.

그 사실에 조금 전 깨달은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느낀다.

“그럼…우선은 그녀들에게 사과하러 가자.

험한 말을 들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것 또한 책임이니까.”

“…응.”

그리고 선생님은 걷기 시작했다.

나도 그 뒤를 쫓는다.

죄의 무게에 짓눌릴 것 같은 기분은 여전하다.

하지만 마음은 어딘지 모르게 상쾌하다.

분명 그것은 속죄의 실마리를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속죄의 길잡이를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생~님~☆”

“와앗…미카? 손을 잡는 건 딱히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때, 어때서!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지 않아?”

“하아…금방 또 들뜬다니까.”

한숨을 내쉬는 선생님을 보며 가슴 깊은 곳이 따뜻해진다.

두근두근 요동치는 심장은 내 감정의 정체를 주장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정말이지, 그렇게 재촉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어.

오늘 드디어 배울 수 있었으니까.

메리.

네가 흑백의 상자 밖으로 나와 처음으로 색을 보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몰라.

하지만 분명.

너는 기뻤을 거라고 생각해.

그걸 알고 있었든, 몰랐든 말이야.

왜냐하면 지금의 나는 계속 맺혀 있던 감정을 찾아내서 이렇게나 기쁘니까.

노을 지는 수영장.

사람 없는 고요한, 그리고 추억이 깃든 이 장소에서.

나는 알게 되었어.

아니, 알고 있었다는 게 더 정확할까?

음, 둘 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틀린 것 같기도 해.

뭐, 굳이 말하자면…찾아냈어.

그래, 찾아냈어.

나는 찾아낸 거야.

동화 속에서나 알던 감정을.

계속 가슴 속에서 맴돌며 잡지 못했던 고동의 해답을.

어딘지 상쾌하고 따스한, 그런 『사랑』을 찾아낸 거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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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블루 아카이브·26.08.15번역

소설 핫산) 상자 밖의 메리

#메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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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
motorina_blue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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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DC
고관위번역
외부 링크디시인사이드pixiv
게시일2026.08.15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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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나
ㅇDC
ㅇㅇ126.08.15
디시콘
ㅇDC
ㅇㅇ2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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