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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여

“음침하게 여기 박혀 있었구만.”

목소리의 주인은 말끝에 묻어나는 불쾌감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미카모 네루 씨. 오랜만에 뵙는걸요.”

네루에게 불린 의문의 학생은 어깨 너머로 살짝 돌아봤다가 다시 하던 일에 몰두했다.

수십 개의 콘솔 사이에서 천천히 점등하는 빛을 받으면서, 그녀는 두 손만을 바쁘게 놀리고 있었다.

표정이 일그러진 네루가 총을 겨냥했다.

“뭘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당장 멈춰. 내가 장난이나 하러 온 걸로 보여?”

상대는 노리쇠와 사슬이 덜걱거리는 소리를 듣고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와 네루 사이에는 두꺼운 방탄 차단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했지?”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해. 네가 저지른 거지?”

“...네.”

낭랑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차단막 너머로 들려왔다.

“너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알긴 하는 거냐?”

“그럼요.”

“유우카는 네 가장 소중한 친구였잖아. 지켜 줘야 하는 거 아니었냐고.”

타닥 타닥. 뒷모습만 보이는 그녀는 계속해서 콘솔을 조작했다.

“널 믿어서 음식까지 만들어 건네 준 건데. 세미나의 사람들은 결국 다 이렇게 뒤통수를 치기 마련인가 보지? 음습하게 숨어서 음모나 꾸미고 말이야? 아앙? 너도 그런 놈이었냐?”

“...”

“대답해! 우시오 노아!”

타다당!

네루의 총구에서 굉음과 함께 불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탄두는 방탄 유리에 조금의 금을 만들고 박혀 뱅글뱅글 돌고 있을 뿐, 단 한 발도 관통하지 못했다.

“...다음엔 반드시 부술 거야.”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네루가 선언했다.

노아는 그녀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으리라는 걸 알았다.

“...유우카 쨩은 어때 보였나요?”

노아가 처음으로 손을 멈추고 물었다.

“웃자고 하는 소리야?”

네루가 이를 악물었다.

“미안한데, 전혀 안 웃기거든.”

“...그렇게 반응하는 걸 보니, 역시 무사히 깨어났나 보네요.”

노아가 마침내 뒤돌았다.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부드러운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지금의 네루에게는 더없이 아니꼽게 보이는 표정이었다.

“어머,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시는 거죠? 잘 된 일 아닌가요?”

“너… 네 친구에게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말할 것도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고개를 살짝 기웃거렸다.

얼굴에 띄운 완벽한 미소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였다.

“마음에 안 드는걸. 그 표정.”

“...후후.”

“마치 가면 같은 꼬라지잖냐. 아앙?”

“그럴지도요.”

“네가 유우카의 기억을 지운 거지?”

“맞아요.”

“...어떻게 했냐고는 묻지 않겠어.”

네루는 그 말과 달리 노아가 조작한 콘솔 한쪽에 작은 단말기가 놓여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몇 개의 전선들로 콘솔들과 연결된 그것은 주변 기계들과 명백히 다른 색과 모양을 갖고 있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밀레니엄에는 정말 셀 수 없는 발명품과 신기술들이 금방 나타났다 사라져 갔다.

무언가는 너무 위험해서. 무언가는 너무 비싸서, 무언가는 너무 황당해서.

노아 자신이 직접 심사했던 수천 가지 특허들은 지금 모두 잊혀지고 말았지만,

그녀는 서류의 가장 하찮은 부분 하나까지 아직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었다.

저건 고작 그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노아가 언제든지 할 수 있었던 일들의 극히 일부일 뿐이었다.

“하지만 대체 왜지?”

네루가 차단막을 쾅 쳤다.

“왜냐니요? 그야 당연하잖아요?”

네루의 위협에도 노아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네루 씨도 아실 텐데요. 그녀를 더 이상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에요.”

“상처받지 않게 한다고?”

“그래요. 유우카는 이제 슬픈 기억 같은 건 갖고 살지 않아도 돼요.”

오히려 벽 너머의 네루에게 여유로운 미소까지 건네 보이며 말했다.

“미카모 네루 씨도 역시 아직 잠들지 않으셨군요? 역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믿어서 그러신 건가요?”

“그걸 알고 있었구만? ...그냥 사라진 게 아니라, 통신을 도청 중이었냐? 아니면 희의실을? 쥐새끼처럼 숨어서, 남이 하는 말이나 엿듣고 있었던 거냐고.”

노아는 부정하지 않았고. 그냥 화제를 전환했다.

“전 간단하게 생각했어요. 그리움을 지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 하고요.”

“...그래서?”

“누구나 생각할 법한 일 아닌가요? 그리움은 기억에서 온답니다.”

“그래서 친구의 기억을 다 지웠다고? 고작 생각해 낸 게 그거야?”

“어머. 네루 씨는 다른 좋은 방법을 알고 계신가 봐요?”

네루는 그 말에 눈썹을 약간 더 기울였을 뿐이었다.

“너 유우카가 어떤 상태인지 알기는 해? 걔가 어떤 모습인지?”

“네.”

“친구에게 해도 되는 짓이 있고 아닌 짓이 있어. 이건 명백히…”

“그럼 그녀를 그대로 두는 것은 해도 되는 일이었나요?”

노아가 웃는 낯 그대로 네루의 말을 받았다.

“네루 씨. 유우카를 위해 죽을 만들어 주신 건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그건 진심이에요.”

“...아주 눈물나는 감사로구만. 앙?”

“네루 씨는 유우카의 상태는 직접 보셨나요?”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사태가 터지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 선생의 행방을 찾아다니고 있었으니까.

“아니.”

“유우카는 하루 종일 휴대폰만 들여다봤어요.”

“휴대폰?”

“그래요. 휴대폰만요. 휴대폰… 오로지 휴대폰만 보는 거에요. 선생님이 사라진 이후로, 모든 수색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로, 유우카가 세미나에서 축출된 이후로. 그게 유우카의 안에서 서서히 커지다가, 결국 전부가 됐어요.”

“...상태가 정말 안 좋았다는 건 알고 있었어.”

“안 좋은 것 이상이었죠. 옆에서 말을 걸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요. 혼자 되뇌기만 했어요. 모모톡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어요. 넋이 나간 것처럼… 무언가 조작을 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녀의 세계에 그것만 존재하게 됐어요.”

“...”

“애원해도 소용없어요. 그녀와 제 사이에 너무나도 두꺼운 벽이 존재해서, 무슨 말을 해도 닿지가 않거든요. 선생님과 연결돼 있다는 환상을 쫒기 위해서. 선생님이 지금 곁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사무치고, 아파서… 그 작은 화면 밖을 결코 볼 수 없는 거죠. 그래서 메세지를 보내고, 메세지를 보내고, 메세지를 또 보내요. ‘읽음’상태가 될 때까지 결코 멈추질 않아요. ”

노아가 활짝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잖아요? 그야 선생님, 두 달 동안이나 자리를 비웠는걸요.”

“어이, 선생은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그걸 어떻게 장담하죠?”

“그야, 이런 식으로 우리 곁을 떠날 사람이 아니잖…!”

“그럼 언제요?”

노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네루를 추궁했다.

“억지로 물과 음식을 떠먹여도, 유우카는 날이 갈수록 초췌해져 갔어요. 선생님 언젠가 돌아온다고 해도, 그러기 전에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죠?”

“...하지만 유우카는 안개 때문에 잠들어 있었다고 했잖아!”

네루가 당연한 부분을 지적했다.

“히마리 말에 의하면 그 이상 신비 현상 때문에 잠들어 있는 동안은, 신체에 어떤 위해도 가해지지 않아. 그렇다면…”

“유우카는 안개 때문에 잠든 게 아니에요.”

노아가 네루의 말을 바로 잘랐다.

“뭐?”

“선생님과 자주 접촉했음에도 지금까지 깨어 있는 분들은, ‘책임감을 짊어진’ 학생들이기 때문이라고 했었죠.”

“확실히 그랬지.”

“아니면 의지력이 몹시 강하거나요.”

“...”

“유우카는 둘 다에요. 그녀는 자의로 잠든 적이 없어요.”

“...휴대폰만 보고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럼요. 휴대폰을 보는 것이 그녀가 해야 하는 일이었거든요. 재미있지 않나요?”

후후. 노아가 처음으로 소리내어 웃었다.

“선생님이 돌아오면 누구보다 빨리 그걸 알고, 누구보다 답장을 보내고, 누구보다 빨리 찾아가야 해요. 그게 자기 의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유우카는 결코 잠들 수 없었어요. 눈에 실핏줄이 터지고, 얼굴 전체에 검은 기운이 침범해도… 그 창백한 모모톡 화면을 봐야 했거든요.”

노아가 뒷짐을 다시 지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제가 재웠어요. 더 나빠지기 전에요.”

“기억을 지워서? 유우카가 잠든 건 그것 때문이었다고? 안개 때문이 아니라?”

“그런 셈이죠.”

“너 미쳤냐?”

네루는 처음으로 노아가 소름돋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내가 유우카의 상태를 본 적이 없을 거라고 했지. 그럼 넌 지금의 걔가 어떤 상태인지는 봤어?”

“아뇨. 하지만 짐작은 할 수 있…”

“머리를 부여잡고 있다고! 주변 사람들이 무슨 일이냐고, 선생님을 왜 기억하지 못하냐고 물을 때마다 깨질 듯한 두통이 찾아온다면서!”

쾅. 네루가 노아와 자신을 분리하고 있는 벽을 한 번 더 후려쳤고,

총탄에도 끄떡없던 차단막은 이번엔 눈에 보일 정도로 큰 금이 갔다.

“상처받지 않게 한다고? 지금 네가 걔한테 하고 있는 건 상처를 주는 게 아니야?”

그 말을 듣고 노아가 처음으로 조금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힘든 일이겠죠. 하지만 다 괜찮아질 거에요.”

“그딴 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앙?”

“모두 상정 범위 안이에요. 주변 사람들이 사라진 기억에 대해 추궁하면, 그녀는 두통을 느끼게 된답니다.”

“...뭐?”

“그러니 곧, 주변 사람들도 선생님에 대해 묻지 못하게 되면…”

노아가 다시 웃었다.

“유우카는 정말로 괜찮아지는 거죠. 그리고 그러기 위해 에리두의 시설을 찾아왔어요.”

뒷짐 진 노아의 뒤로 에리두의 송신탑 제어 콘솔이 불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 송신탑은 아비 에슈흐를 원격으로 지원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밀도의 전파와 에너지파를 발신할 수 있어요. 궤도에 뜬 위성들도 통제할 수 있죠. 그걸 이용해 유우카의 기억을 지웠던 것과 같은 파동을 키보토스 전역에 발사할 거에요. 드론들을 이용해 탑의 개보수도 마쳤답니다.”

“...네가 이 에리두에 쳐박혀 있던 이유가 그거였군. 권한이 모두 탈취당한 것도 그래서였어.”

“그래요. 리오 회장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네요. 이곳의 기술력은 정말이지 마법 같은 것들이랍니다. 저의 무모한 계획을 현실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요.”

노아는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선생님을 지우겠다’라고 말하는 계획을, 간식으로 뭘 먹을까 결정하는 것처럼 가볍게 말했다.

“그리고 네루 씨가 여기에 찾아오신 거고 말이죠. 정말 감이 좋으시네요.”

“그래. 어째선지 기억이 사라진 채 유우카가 돌아왔고, 에리두의 권한은 누군가가 탈취했고, 유우카가 잠든 날 이후로 아무도 네 행방을…”

“본 적이 없다는 거네요. 능력과 접점을 모두 갖춘 사람은 저 정도 뿐이었구요.”

“그래서 내가 찾아올 것까지 뻔히 알고 있었다는 거냐?”

노아가 한 마디 한 마디를 더할 때마다 네루의 적대감은 강해져만 가고 있었다.

“그런 뜻은 아니에요. 하지만 네루 씨는 정말로 감이 좋잖아요?”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안 든다고. 인마. 그 뭐든 안다는 듯한 말투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는 태도가.”

그러나 네루의 적개심 앞에서도 노아에게는 여전히 어떤 동요도 없어 보였다.

“네루 씨. 이 안개는 그리움의 집합체에요. 그걸로 만든 선생님의 ‘미메시스’랍니다. 그러니 제가 선생님의 기억을 모두 제거한다면, 안개는 더 이상 없게 돼요. 히나 위원장이 만든 미메시스를 무력화하는 거죠.”

“그건 네 생각일 뿐이잖아!”

노아는 다시 네루의 항변을 일축했다.

“아뇨. 이건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게 맞아요. 그도 그럴 게, 유우카가 깨어난 게 바로 그 증거잖아요?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없다면, 잠들 일이 없는 걸요?”

“...큭…”

“모두 잠에서 깨어나고, 키보토스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어요. 그럼 이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나기사 씨 말대로 확실하지도 않은 카드와 타블렛에 남은 시간과 가능성을 모두 쏟아붓는 것보다는?”

네루는 끔찍한 계획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면서 안색 하나 변하지 않는 노아를 질린 듯이 바라봤다.

"그거야말로 근거도 확신도 없는 계획 아닌가요?"

노아는 대화를 시작한 이후로 오로지 미소만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조금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 작위적인 것이었다.

“모두의 기억에서 선생을 지우면 선생은?”

무슨 말에도 생글생글 웃기만 하던 노아가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이 키보토스에서 없었던 사람으로 만들 거냐?”

“...제가 기억할 거에요.”

“너 혼자?”

“그래요. 그분이 돌아오시면 누군가 그분을 맞이해야 하니까요. '언젠가' 여기 돌아왔을 때 왜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설명해 드릴 사람은 필요하지 않겠어요?”

“왜 그게 너여야만 하지?”

“음..."

노아는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댔다.

"저는 이기적인 여자니까요. 그 역할은 다른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가 않답니다.”

노아가 항상 들고 다니는 자신의 수첩을 펼쳐 보였다.

“하지만 이러면 네루 씨가 납득하기 힘들지도 모르니까. 이걸로 설득을 해 볼까요?”

그리고 그걸 읽기 시작했다.

“오후 다섯 시 이십육 분. 선생님께서 오늘도 야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오후 다섯 시 삼십이 분. 선생님께서 커피라도 한 캔 사 와야겠다며 샬레의 편의점으로 내려가셨다. 오후 다섯 시 사십오 분. 선생님이 조금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다며 모모톡을 보내 주셨다."

"뭔데 그게?"

"오후 여섯 시 십사 분. 선생님께서 그러고 보니 오늘은 히나와 만나는 날이었다고 모모톡을 한번 더 보내 주셨다. 오후 일곱 시 팔 분. 선생님께 모모톡을 보냈지만 답장이 없으셨다. ”

“어... 어이.”

또박또박. 메모들을 계속해서 읽어 나갔다.

"오후 일곱 시 삽십칠 분. 선생님께 모모톡을 한 번 더 보냈지만 답장이 없다. 오후 여덟 시 구 분. 히나 위원장이 찾아와 선생님이 어디 갔냐고 물어 봤다. 오후 아홉 시 십이 분. 당번이었던 학생이 선생님의 행방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냐고 희나 위원장이 질책했다. 오후 여덟 시 삼십팔 분…"

노아는 멈추지 않았다.

한 장 더. 한 장 더 넘기고,

시간이, 오전이, 오후가 바뀌고, 날짜가 바뀌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한 페이지 뒤에 무한한 숫자의 페이지가 더 있기라도 하는 것마냥 계속해서 읽었다.

“오후 아홉 시 이십이 분. 히나 위원장이 뛰쳐나갔다. 오후 열한 시 이 분. 선생님께서는 여전히 답장이 없으셨다. 오후 열한 시 삼십이 분. 여전히 선생님께서는 답장이 없으셨다. 오전 두 시 삼십칠 분. 잠자던 유우카를 깨워 선생님을 본 적 없냐고 물어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오전 세 시 사십이 분…”

종이 안에서 60일간의 날들이 쏜살같이 흘러갔고,

그렇게 현재를 향해 바쁘게 달리기 시작했음에도 누군가 말리지 않으면 의미도 기약도 없는 그 독백은 영원히라도 계속될 것 같았다.

“...이봐, 그만해!”

“...오후 세 시 이십이 분. 히나 위원장이 유우카의 방에 몰래 찾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우카의 상태는 훨씬 나빠졌다… 오후 네 시 오십오 분. 유우카를 직접 찾아갔지만 그녀는 핸드폰 말고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오후 다섯 시 오십구 분. 유우카가 무슨 말을 해도 반응하지 않기 시작했다…”

종이의 표면만큼이나 창백한 노아의 보랏빛 눈동자는, 그녀 혼자만의 절망적이고 끝없이 침잠하는 기록들만을 계속해서 좆고 있었다.

“야! 그만하라고!”

“...”

그건 선생님이 실종되던 날의 기록이었다.

선생님의 실종을 최초로 보고한 것은 히나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그 날 같이 있었던 건…

그 날의 당번이었던 노아였다.

“미안해요.”

노아가 수첩을 다시 닫으면서 사과했다.

“하지만 이걸로 알아 주셨겠죠? 기억과 기록은 제 특기라는 걸요. 그러니까 이번 일도…”

"아니. 전혀."

‘...가면 같다고 생각했었나.’

표정을 일그러뜨리면서 네루는 생각했다.

이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 것 같았다.

이 덧씌워진 노아의 표정 뒷면엔, 틀림없이 비명을 지르고 울고 있는 다른 그녀가 얼핏 보였던 것이었다.

“...네 낯짝이 왜 그렇게 싸가지 없이 보였는지 이제 좀 알 것 같다.”

“네?”

“너 혼자 선생님의 기억을 짊어지고 기다리겠다고? 누구도 공감할 수 없고, 알아줄 수 없는 기억을 안고 언제까지고 기다리겠다고?”

네루는 노아의 생각을 부정해야 했다.

“그게 얼마나 외롭고 슬픈 일인지 알면서도?”

“...”

처음으로 노아의 표정에서 미소가 벗겨졌다.

“이기적이라는 둥, 자기만 알면 된다는 둥 포장했지만. 네 의도는 결국 그거잖아. 넌 혼자 짐을 짊어지려 하는 거라고. 그걸 기억하는 짐을.”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에요.”

“그게 아니잖아?”

퉤. 네루가 바닥에 침을 뱉었다.

“넌 이게 네가 ‘책임을 지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친구의 기억을 지우고, 모두의 기억을 지우고, 선생에 대한 기억을 혼자 가지고 가는 게? 그 죄책감과 슬픔을 짊어지는 건 혼자면 충분하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 아앙?”

“그게 왜 마음에 안 든다는 거죠?”

“당연히 마음에 들 리가 없잖냐. 짜샤. 아앙? 그럼 나는 뭐가 되는 거냐? 히마리 걔는 뭐가 되는 거고? 모두 너한테 떠넘기고 잊고 사는, 그런 속 편한 놈이 되라는 거냐?”

“네루 씨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거에요.”

“그게 문제라고!!!!”

네루가 차단막을 주먹으로 한 번 더 후려갈겼고, 금이 가 있던 차단막은 산산조각이 났다.

“모두 네 얄팍한 자기 만족을 위해서잖아! 희생양은 나 하나로 충분하다는, 그런 같잖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잖아!”

네루가 성큼성큼 다가와 멱살을 부여잡을 때까지 노아는 도망치지 않았다.

“너랑 히나 걔랑 뭐가 다른 건데? 그 바보 천지도 깨어 있는 건 자기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선생이 없는 동안 책임질 사람은 자기라고 생각해. 나만 힘들면, 나만 괴로우면, 나만 미움받으면 다 된다고 생각한단 말이야. ‘빈자리’를 지킬 사람은 자기 뿐이라고.”

“...”

“자기 혼자 세상 모든 고통을 다 짊어진 척. 나는 그런 궁상이 정말 꼴보기가 싫다고!”

노아의 얼굴에 시종일관 자리잡아 있던 미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네가 했어야 하는 건 유우카가 슬픔을 추스르고 정신을 차릴 때까지 곁에 있어 주는 거였어. 아니야?”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그래서 한다는 생각이 유우카가 목숨만큼 소중하게 여기는 선생의 기억을 지우는 거라고?”

네루가 숨마저 맞닿을 거리로 노아를 끌어당겼다.

"넌 슬픈 친구 대신 행복하고 활기찬 친구를 갖고 싶었던 거잖아. 그래서 유우카를 '바꾸려고'했던 거고!"

“그런 게 아니에요."

노아는 멱살이 잡혔음에도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 뒤에는 물러날 공간이 조금도 없었다.

“걔를 네 마음에 드는 ‘다른 누군가’로 바꾸고 싶었던 거잖아. 틀려?”

네루의 날카로운 눈매가 노아을 꿰뚫어봤지만, 노아는 거기서 눈을 돌리고 말았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에요.”

“아니. 맞아. 넌 유우카를 구해 주고 싶었던 게 아니야.”

“아니야. 그런 게 아닌걸요.”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유우카의 슬픔을 보고 고통받는 너 자신을 구하려고 했던 거지.”

“아니에요.”

노아가 고개를 마구 흔들면서 다시 부정했다.

“그런 게 아니에요!”

“아니. 맞아. 결국 널 위해서였다고!”

“아니야!”

“맞다고! 그딴 건 절대 책임을 지는 게 아니야!”

“그러면…그러면…!”

“선생이 항상 말했던 어른의 모습은 그런 게 아니었다고!”

“그럼 제가 어쨌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멱살을 잡힌 노아가 마침내 소리질렀다.

“저도 슬퍼요. 저도 유우카만큼 힘들었어요. 저도 유우카만큼 힘들었다고요! 저도 선생님이 보고 싶어요. 저도 수백 수천 번 모모톡을 보내고 계속 기록했었다고요! 그런데…그런데! 저는 누구한테도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고요!”

처음 네루를 마주할 때 보였던 침착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잖아요! 누군가는 세미나를 지켜야 하고, 누군가는 유우카를 돌봐 줘야 하고, 그래서 저는 울면 안 됐단 말이에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보고 싶다는 생각 말고는,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만 고장난 축음기처럼 무한정 머릿속에서 반복되는데, 저보고 뭘 더 어쩌라는 거죠?”

노아가 멱살을 부여잡은 네루의 손을 뿌리쳤다.

“그럼요. 저는 기억력이 정말 좋아요. 무엇도 잊지 않아요. 정말로 하나도 잊을 수가 없었다구요! 하루 종일, 하루 종일, 원하는 것 이상으로. 다른 생각을 조금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계속해서 되새기고 만단 말이에요!"

가슴 깊은 곳에서 겨우 건져 올린 것 같은 헐떡이는 목소리로 노아가 절규했다.

"저는 그렇게 태어났으니까요.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요! 아시나요? 조금 늦은 오후, 단 둘이 남은 사무실에, 비는 내리고 있고, 불빛들과 물방울로 물든 창가에 손가락으로 그분과 필담을 나누고 웃던 그 날, 그런 날들만 계속 생각해 버리고 말아요!”

그러나 눈동자는 여전히 네루가 아닌 그 너머의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오직 그것들만요!!!!”

"그만 해!"

"저도 선생님. 선생님이 미치도록 보고 싶단 말이에요. 그런데 제 가장 친구마저 그렇게 되면, 저는, 저는요? 저는 누굴 의지해야 해요? 제 슬픔은 누구한테 던져 주죠?”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지만, 거기엔 방향성이 없었다.

그녀 자신조차 누구에게 호소해야 하는 건지 모르는 것 같았다.

선생 그 자신? 히나? 유우카? 혹은 세상의 불합리?

오로지 무한 번 되짚어 나가기만 했던 기억과 사실, 논리들이 다 원망스러웠다.

노력했지만 결국 무리였다. 그녀에겐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그녀가 견디기엔, 그분의 자리는.

이 세상 단 한 사람일 수밖에 없는 그의 빈자리는.

너무나도...

“이렇게 아플 줄 알았으면, 이렇게 가슴이 미어질 줄 알았으면…!”

“야! 그 말만큼은 하지 마!”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다면, 그런 사람을 몰랐더라면!"

노아가 무슨 말을 할지 직감한 네루가 뺨을 칠 기세로 손을 높이 올렸다.

“차라리, 그분의 기억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던 편이…!!!”

"우시오 노아!!!"

“거기까지야.”

네루의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싸늘한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린 노아가 하던 말을 멈췄다.

그리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말을 하려고 했던 자신에게 충격받은 것처럼.

“아. 아니에요."

무거운 죄라도 지은 듯이, 표정만이 아니라 전신이 이미 떨리고 있었다.

"..."

"저, 저는 그런 말을 하려고 한 게…”

“거기까지야 노아.”

분홍 빛의 머리를 한 키 작은 소녀가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오면서 말했다.

“그 다음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안 돼.”

노아만큼이나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타카나시 호시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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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블루 아카이브·24.07.15창작

소설,피폐) 마지막 접속: 60일 전 (20)

#소설#피폐
좋아요 0댓글 20저장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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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C
EmptyBox작가
게시물 33개
외부 링크디시인사이드
게시일2024.07.15 01:01
조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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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0

나
ㅇDC
ㅇㅇ124.07.15
디시콘
ㅇDC
ㅇㅇ224.07.15

그래 이런 노아도 보고싶었어

ㅇDC
ㅇㅇ324.07.15

어이 소코마데다

ㅇDC
ㅇㅇ424.07.15
디시콘
ㅇDC
ㅇㅇ524.07.15

역시 정신 건강은 네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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