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샬레로 돌아온 선생은 비서들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싯딤의 상자를 꺼냈다.
[시스템 업데이트 중 34%]-예상 소요 시간 3h 25m
오늘따라 어째 허한 기분이 들더니만 업데이트 중이었나.
한 가지 더 찝찝한 점은 업데이트 시간. 키보토스의 기술력으로도 대등한 존재가 없는 AI가 이 정도로 부재하는 일은 흔치 않다.
'아무래도 아로나랑 프라나 두 명분의 업데이트를 진행해서 느린 거 같은데'
헤일로에 등장한 숫자들도 업데이트의 산물이라 여긴 선생은, 조용히 저녁 있는 삶을 만끽한다.
"커흐으으~!"
하지만 에어컨 바람을 맞는 감탄사와 함께 저녁은 사라진다.
"모에?"
본능적으로 가슴과 얼굴 그리고 가슴으로 시선을 굴린 다음에야 헤일로를 확인해본다.
[59]
연이은 고점 갱신. 더더욱 숫자의 정체는 오리무중으로 빠져버린다.
"미안! 도저히 못참겠다고 선생님!"
상의를 살짝 올리고 가슴 밑에 찬 땀에 선풍기를 갖다 댄다.
갈비뼈까지 바람이 스며드는 감각에 모에는 거의 울듯이 웃기 시작한다
"여름의 절반 손해 봤어!!!"
촌티 나는 행동을 하는 친구와 묶이기 싫었는지 사키는 천천히 뒤따라왔다.
"하아... 동네 창피해서 같이 못다니겠네"
오늘 처음 만나는 거지만 바로 위화감을 감지한다.
상대방한테 안 들리는 목소리로 태클을 거는 건 WWE가 아닌 진짜 험담인데...
"사키랑 뿅코도 왔고... 한 명이 비는 느낌인데?"
"미야코는 온 김에 편의점 폐기 수거... 아, 인사가 늦었네."
"좋은 저녁 보내렴 사키"
[40]
'음 무난하군요'
사람이라면 숫자놀음과 순위 매기기에 재미들릴 수 밖에 없다.
아직 의미도 모르지만 벌써부터 숫자로 학생을 평가하는 나쁜 버릇이 생겨버렸다.
"바쁠 때 와서 미안하네~ 조용히 땀만 말릴테니까 우린 신경 쓰지 마"
"괜찮아. 마침 나도 한가할 때니까"
모에와 사키는 흘긋 선생의 책상을 염탐했다.
PC와 모바일로 분재 게임 두 개를 동시에 돌려 숙제를 수행하고 있는 모습
"헤에~ 분주해 보이더만 그냥 게임이었나."
59→58 40→39
"엣!?"
둘의 숫자가 1씩 감소했다.
더군다나 사키의 표정은 마치 백수 삼촌을 보는 듯한 측은한 눈빛.
"게임이 뭐가 나쁜데?!"
"아니 누가 뭐래... 선생님이 하니까 뭔가 의외라서 그렇지."
여자들이 싫어하는 남자 취미에 붙박이로 들어가는 게임과 애니메이션.
그 둘의 교집합인 서브컬쳐 게임 취급을 생각해보면, 혹시 저 숫자가 말하는 건...
괜히 부정하고 싶었던 선생은 억지를 부려본다.
'하락할 수 있는 수치가 하나 더 있잖아?'
"모에."
"응?"
"몸무게가 어느 정도야?"
확실히 여름철엔 땀으로 인한 수분 배출로 체중의 변화가 자주 보이지만
여자의 면전에 물어보는 건 NG
"흐음~ 글쎄 재본 지 오래돼서 말야. 공원에서 체중계를 구할 수도 없고"
"마지막으로 쟀을 때는 어느정도였어?"
"...한 번 맞춰볼래?"
살짝 서늘한 감각이 들지만 인간의 탐구욕은 강했다.
"음... 한 60?"
"헤에~ 무슨 근거로? 좀 찐 거 같아?"
"하하... 직감이려나"
"그럼 한 번 확인해볼래?"
"잠깐 죄송-"
모에는 선생을 소파로 끌고 가더니 냅다 바디 프레스를 갈겨 자신의 무게를 전부 실었다.
"크헉!"
"어때~? 60Kg의 하중이야?"
"뛰어올랐으니 아마 더-"
"헤에!~ 그렇구나?!"
더더욱 몸으로 짓누른다. 땀냄새와 줄어드는 호흡량에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하고
혼미해지는 정신 속에서 선생은 드디어 정답을 찾았다.
"새... 생각 보다... 가볍네에...... 40kg인가?"
"이제야 말이 통하네."
고통이 뇌로 생존 신호를 보내 좀 더 똑똑해지는 기분이다.
'생각해보니 린의 숫자는 37. 그 키에 몸무게가 37이면 뼈가 보일 정도로 앙상해야 정상이겠지. 헛다리 짚었나'
"실례하겠습니다."
도무지 해답을 풀지 못하고 있을 때, 설상가상 더 커다란 폭발이 혼란을 부추긴다.
"미야코- 히익!"
[93]
압도적인 수치 현재까지의 레이스에선 단독 선두이다.
"어째서 그리 놀라시는 거죠? 분명 모모톡으로 미리 연락했을텐데"
"그게... 실은..."
"선생님 방금 전부터 이상해. 우리들 머리 위를 자꾸 확인하고."
"헤일로가-"
본 것 그대로 실토하고 싶었으나 이성이 제동을 건다.
학생들이 자신의 숫자를 의식하고 선생을 찾아오기 시작하면,
해프닝이 눈덩이 굴러가듯 커져서 사태로 번질지도 모를 일.
"헤일로?"
"캔 유 히얼 미~"
"노잼"
"하하... 이제 다들 모였겠다 샤워 함 때리는 거 어때? 옷도 세탁하고 말야."
"그거 좋지! 새삼스럽지만 항상 고맙다구 선생님."
소대원들은 분신과도 같은 개인화기와 헬멧을 맡겨두고 떠난다.
이 잠시의 평화 동안 타이핑을 두드리며 상황을 정리한다.
1. 미야코 93
2. 모에 58
3. 사키 39
총학생회 아이들은 잠깐 배제하고, 이 숫자들이 뜻하는 건 무엇일까.
모에와 사키의 숫자가 줄어든 걸 보면 무언가의 카운트는 아니다.
셋 모두 같은 소속, 같은 나이인데 무엇이 차이를 만들었을까...
"계, 계세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또 다른 난민이 오아시스로 찾아온다.
"아아. 히요리. 너도 무더위 쉼터 공지를 본 거구나"
"아뇨. 그냥 쉬려고 왔는데요오... 안되는 걸까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 때문에 얕잡아 보기 쉽지만 히요리란 학생은 꽤나 치밀하다.
샬레에 볼 일이 있으면 인터넷이 없단 핑계로 연락 없이 일단 몸부터 도착.
항상 문을 연 다음 인사를 건네와서 거절할 길을 원천에 차단하는 스타일.
여러모로 난적이다.
"그으... 요즘 폭염 때문에... 자다가 자주 깨고... 수돗물만 마시니 어째 배도 아프고..."
"사양하지 마. 그럴 때를 위해 샬레를 개방했으니까."
"가, 감사합니다...! 히히..."
선봉이 길을 개척하자 미사키와 아츠코도 뒤따라 입장하기 시작한다.
제일 동정심을 유발하는 히요리를 앞세운 전략인가.
"성장했구나 리더."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덜컥 찾아온 것에 양해를 구할게."
"안녕. 선생님... 하루 정도만 여기 있어도 괜찮을까?"
"오~ 어서와 아츠코. 선생님이야 환영이지"
다들 물에 빠진 듯 머리카락이 이마에 찰싹 달라 붙어있다.
더위 때문에 겪었을 고난은 말 안해도 전부 알겠다.
"땡볕에 다들 긴팔이라니... 아츠코는 속에 입은 레오타드 복장이 편하지 않을까?"
"후훗. 내가 수녀도 아니고 그런 남사스러운 복장으로 어떻게 다녀"
뭔가 그릇된 정보를 습득한 거 같지만, 지금은 뒷전이다.
'역시 보이는 구나.'
미사키-56
히요리-42
아츠코-79
봐도 봐도 연관성을 모르겠다. 이번엔 제일 후배인 아츠코의 약진인가.
"그렇게 빤히 보지 보지 마. 씻기 힘든 환경이니까..."
미사키는 멋쩍은 표정으로 후드를 쓴다. 아무래도 비듬을 신경 쓴 모양이다.
못 죽어서 사는 느낌이었던 그녀가 이젠 수치까지 느끼다니.
대견스러워서 샤워실이고 안방이고 전부 내주고 싶었다.
"꿉꿉하겠지만 샤워실에 사람이 있어서 잠깐 기다려야 해."
"어머. 방해한 걸까"
"그런 거 아니에요 공주님"
"후후. 장난이야."
넝마짝 같은 옷을 다시 입어봐야 씻은 보람이 없을테니 지갑에서 카드를 꺼낸다.
"엔젤 24에 가면 속옷이랑 간단한 운동복을 팔 거야. 기다리는 동안 갔다 오렴"
"아아... 괜찮은데"
"사양하지 말고."
미사키는 떨떠름한 기색을 보이며 후드를 더 깊숙히 내릴 뿐이었다.
얼굴은 가릴 수 있어도 헤일로의 숫자는 감추지 못한다.
56→59
딱히 의도한 건 아니지만, 한 가지 가설이 유력해지기 시작한다..
'금융치료에 바로 점수가 올라간다라... 저건 혹시 나에 대한 호감 아닐까?'
입꼬리가 올라간다. 정체를 모를 땐 주의했지만, 단순 호감도라면 다다익선. 올리면 일단 손해는 보지 않겠지.
'찰칵'
마침 샤워실 문이 열리며 김이 퍼져 나온다.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소대원들은 그제서야 1학년다운 뽀송한 혈색이 돌아왔다.
"미야코는?"
"머리 말려"
"아하. 생각해보니 드라이기 한 대였구나. 이참에 늘려야겠네."
숫자에 대한 의문도 어느 정도 해소했겠다. 이제 본업으로 복귀해야겠다.
"사키랑 모에말야."
"응?" "왜?"
"싸웠구나."
"응- 아니! 아니아니!!! 무슨 말이야 갑자기?"
사키는 격하게 부정하느라 아직 말리지 않은 머리에서 물방울이 튄다.
"둘이 꽁한 느낌이 풍기는데"
"무, 무슨 근거로? 증거 있어?"
"평소 보다 샤워 시간이 짧은 걸. 다들 어색한가 봐."
"어어...음... 헤에~ 그나저나 선생님 우리들 샤워하는 시간을 세고 있는 거야? 어떤 종류의 변태짓인지 원~"
사키의 강한 부정은 오히려 긍정이고 모에의 논점 일탈은 책임 회피성 반응.
이거 이거 너무 투명해서 순수해보일 정도다.
"문제 없다면 둘이 껴안아 봐."
"싫거든!"
"싸운 거 맞네 뭐"
"그게 무슨 상관이야?! 평소에도 서로 껴안는 짓 따위 안한다고!"
언성이 점점 격화되자 미야코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휴식을 제공해 준 선생님께 무슨 추태입니까! 정숙하십시오 둘 다."
"그, 그치만 선생님이-"
"RABBIT 2."
"으으...... 알겠다."
호오. 부모님이 풀네임을 부를 때처럼. 미야코가 콜사인으로 부를 땐 화났단 뜻이구나.
오늘도 좋은 걸 하나 배웠다.
"다녀왔어."
때마침 샤워실이 빈 타이밍에 아리우스 스쿼드가 돌아왔다.
처음 대면하는 사이라 시간이 어색하게 느려진다. 적당히 눈치를 보던 미사키는 카드를 돌려주고 씻기 위해 안쪽으로 향한다.
"그 사이에 손님이 왔군요."
"응. 너희들처럼 사정이 딱한 아이들이야. 카페 문을 닫아서 같이 지낼 건데 괜찮지?"
"저희가 그런 걸 따질 여건이 아니죠. 상관 없습니다 선생님."
"쓰읍~"
사키는 무언갈 골똘히 생각하듯 팔짱을 꼈다.
"...저 사람들 어디선가 본 거 같은데"
"뭣?"
생각해보니 SRT는 본래 치안을 담당하는 특수 학원. 지명수배자들을 기억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방심했다. 노숙자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래빗 소대의 진짜 정체성을 까먹었어'
"무언가 짚이는 게 있습니까 사키?"
"봤는데... 분명... 으음..."
다음 화에 계속
댓글 15
다음편 내놔!!!!!!!!

빨리 다음화
노숙자 대 테러리스트
이거 진짜 테러집단vs대테러집단 되어버렸자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