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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3자

♥◆♣♠♥◆♣♠♥◆♣♠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사실 그렇게 옛날은 아니지만.

어느 나라에 왕자님이 살았습니다.

왕자님은 무척 멋있어서 나라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왕자님이 아닙니다.

왕자님이 사는 성의 좀 더 아래에 사는, 한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

“그렇구나~. 그야 그렇겠지.”

얇은 매트리스 한 장이 다인 허름한 침대에, 포기하면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스며든다. 손에 쥔 핸드폰 화면에는 ‘미안해, 내일은 바빠서’ 라는 문자가 있다. 내가 끙끙대면서 생각해 낸 만나자는 문구도, 관심을 끌기 위한 이모티콘 연발도, 이 한 마디에 모두 헛수고가 됐다.

“아아~. 선생님한테 한가한 날은 없나.”

삐걱거리는 침대에 몸을 맡기면서 나는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어른이고, 이 키보토스를 먼지가 날릴 만큼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만나고 싶다… 선생님.”

언제 선생님을 만나더라도 괜찮도록 정성껏 손질하고 있는 머리를 빙글빙글 돌린다. 슬쩍 핸드폰 달력을 보니 선생님을 만난 지가 벌써 3일도 더 지났다. 그 사람에게는 겨우 3일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몇 년의 빙하기를 거듭하는 것보다도 더욱 긴 시간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조금씩 솟아나던 마음은 어느새 이 몸을 불태울 만한 열정으로 변해 있었다.

…사랑 따위는 동화 속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어느 날 갑자기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나 두 사람은 같이 반짝거리는 일상을 보낸다… 그런 게 사랑인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내 앞에도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났다. 그 사람은 아무튼 멋있고, 나를 아무 거리낌 없이 공주님이라고 부르고, 무엇보다… 나를 구해줬다.

“아, 진짜! 생각하니까 더 보고 싶어지잖아.”

온몸을 휘감는 충동이 내 뇌를 뒤흔들고, 그 떨림이 전해지는 손끝을 핸드폰 화면으로 밀어붙였다.

“...역시 안 되겠지.”

예전에 방문 시간이 지나고 나서 선생님을 여기에 초대했을 때 조금 화를 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터질 것 같던 만나고 싶다는 마음은 점점 위축되었고, 결국에는 전화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작은 소망으로 가라앉았다.

“지금이라면 아직 선생님도 깨어 있겠지?”

모모톡을 띄우고 선생님의 아이콘을 터치한다.

그리고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하아… 좋아.”

“미카 님, 점호 시간입니다!”

“왜 하필 이럴 때 오는 걸까!?”

점호를 얌전히 받고 나서 방의 불이 꺼졌다. 완전히 어두워진 침대 위에서 나는 한동안 핸드폰을 마주보면서 ‘그렇구나, 미안해.’, ‘잘 자 선생님!’ 이라고 거침없이 입력했다. 핸드폰 전원을 끄자 이윽고 방 안은 어두워지고, 오직 달빛만이 나를 비추고 있었다.

“외로워. 선생님.”

…물론 그런 중얼거림이 전해질 리 없었고, 나는 차가운 침대 위에서 눈을 꼭 감았다.

“어라~. 어디 갔지…”

오늘은 체육 수업이 있는 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체육복을 갈아입지 못한 이유는 분명 가져왔던 체육복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탈의실에서 가방 속을 뒤져봐도, 교실 책상 안을 뒤져도 그 옷은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체육시간에 결석했고, 모두가 즐겁게 뛰어노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아, 기껏 선생님이 사 준 옷인데...”

오늘 내가 가져온 체육복은 그 선생님이 사 준 옷이었다. 그것도 처음에는 사용할 생각이 없었는데 선생님이 너무 집요하게 쓰라고 하길래 마지못해 입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 옷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학교 안을 돌아다니고 있다.

“으음, 없네…”

많은 교실들, 학교 뒤편, 그 밖에 생각나는 곳들은 모조리 찾아봤다. 하지만 여전히 찾지 못했고 어느새 하늘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노을이 예쁘네.”

생각해보니 오늘 오후에는 선생님과 함께 보낼 예정이었다. 거절당했지만. 그런데 나는 선생님이 사 준 체육복을 찾느라 지쳐 있다.

왠지 모르게 몹시 비참하게 느껴졌다.

…이제 가자. 그렇게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니 작은 연못에 떠 있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뭐, 역시 그렇겠지.”

그것은 심하게 더럽혀진 내 체육복이었다. 그것도 오른쪽 어깨부터 왼쪽 옷자락까지 찢어져 있어서 설령 얼룩을 깨끗이 지울 수 있다 해도 더 이상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었다.

“아아, 기껏 선생님이 사 준 옷인데…”

연못에서 체육복을 조심스레 들어 올리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이런 일에도 이미 익숙해져 버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그건 그저 내 생각일 ‘뿐’이었다. 내 마음은 이 옷보다도 더 엉망진창이었다.

문득 어떤 동화가 떠올랐다. 그 이야기는 주변 사람들에게 심한 대우를 받던 여자가 어느 계기로 왕자님의 눈에 들어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럼 내 왕자님은?

뿌득 하는 불쾌한 소리가 나면서 체육복이 쭈그러들었다. 수분을 충분히 머금고 있던 체육복이 내 신발에 가차없이 물을 떨어뜨린 것이다.

‘좀 힘들 것 같아, 미안해.’

“아아! 또 안 됐어!”

방으로 돌아와서 나는 일상적으로 선생님과 모모톡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오늘 있었던 일을 곧이곧대로 선생님에게 전달할 만큼 나도 바보는 아니라서, 선생님에게 내일은 바쁘다는 답장을 받는 것까지 포함해서 평소와 다름없는 모모톡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제쯤 선생님을 만날 수 있을까.”

만나서 뭘 어떻게 하고 싶다거나, 무슨 용무가 있어서 만나고 싶다거나 그런 건 전혀 아니다.

…그냥 만나고 싶다. 그저 만나고 싶을 뿐인데, 언제까지고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건 이상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선생님은, 나를…

“...설마.”

머릿속에 떠오르는 안 좋은 상상을 떨쳐내기 위해 나는 분홍색 머리를 좌우로 마구 흔들었다. 그러던 중에 핸드폰이 부웅 진동했다.

‘미카? 자?’

…선생님에게 온 문자였다.

‘안 자~☆’

‘내일 말야, 트리니티에 볼 일이 좀 생겨서 미카 방에도 들렀다 갈 수 있을 것 같아.’

‘어, 진짜!?’

방금 전까지 납을 삼킨 것마냥 무거웠던 가슴이 갑자기 솟구쳐오르며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드디어 선생님을 만날 수 있다는… 그런 달콤한 생각이 온몸을 빙글빙글 맴돌고, 어느새 선생님에게 ‘괜찮겠어?’ 라며 대답을 재촉하는 문자마저 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면 트리니티에 오는 김에 들르는 거야?’

‘들렀다 가는 게 아니라, 선생님이 나만 만나러 와 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쓰고 전송을 누르고 나서야 내가 저지른 일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 이러면 완전 귀찮은 여자잖아!”

얼굴에 퍼져나가는 부끄러움을 날려버리기 위해 등에 돋아난 날개가 펄럭펄럭 움직인다. 물론 그래봤자 아무 의미도 없고, 그저 내 수치심만 더욱 부추길 뿐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생각한 것을 보내는 게 뭐가 잘못됐냐고 묻는 나 자신도 있었다. 오늘 체육복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연락하는 게 더 이상하다면서, 내 마음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뭐가 됐든 모모톡에는 전송을 취소할 수 있는 기능이 없다. 읽음 표시가 뜰 때까지 나는 이불을 푹 덮기로 했다.

“음…”

눈을 뜨니 반짝이는 아침 햇살이 침대를 비추고 있었다. 체육복을 찾느라 지쳤다는 사실은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근육통이 느껴져서 알 수 있다.

“맞다, 선생님 답장은…”

나는 밍기적거리며 핸드폰을 집어들고 느릿느릿 모모톡을 실행한다. 평일이라면 나도 좀 더 분주하게 움직였겠지만 공교롭게도 오늘은 휴일이다. 우아하고 게으른 아침이라는 건 아무리 선생님이라도 해도 그렇게 쉽게 뒤집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알았어, 조만간에 미카만을 위해서 꼭 갈게.’

‘기다리고 있어, 내 공주님.’

…얼굴에서 펑 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으으… 아 진짜!! 이런다니까, 선생님은!!”

아아, ‘좋아해’가 넘쳐나서 멈추지를 않는다. 지금 당장 선생님을 껴안고 이 벅찬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선생님이 이 키보토스의 모든 학생들을 공평하게 바라본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런 와중에 마녀인 내가 선생님에게 호감을 품어도 될 리가 없다. 어디까지나 선생님은 선생님이고 나는 학생이다. 미카를 사랑한다면서 안아 주는, 동화 속에서도 있을 수가 없는 급전개를 나는 꿈꿀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좋아한다고 보내면 편할 텐데.”

결국 나는 고마워, 라고만 답장하고 휴대폰을 닫았다. 창밖을 보니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는 흰 구름이 떠다니고 있었다.

♥◆♣♠♥◆♣♠♥◆♣♠

소녀는 아침이 되면 왕자님에게 좋은 아침이라 말하고, 낮에는 왕자님을 생각하고, 밤에는 왕자님에게 안녕히 주무시라고 말한 다음 꿈나라로 들어갑니다.

말하자면 소녀는 왕자님을 사랑하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왕자님을 만날 수는 없었고.

소녀는 매일같이 고민했습니다.

왕자님이 만나러 와 주기를 바라면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자님으로부터 소녀의 집에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오늘 밤 성에서 파티가 열립니다. 누구나 편하게 오시기를 바랍니다.’

그 편지는 보아하니 온 마을에 뿌려진 모양이었지만, 소녀는 무척 기뻤습니다.

“왕자님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

“아, 이 액세서리 귀엽다…”

오후에는 거리에 쇼핑하러 나가기로 했다. 모처럼 선생님이 온다고 해 줬으니 나도 그 전까지 예쁘게 꾸며 놓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무작정 거리로 나간다는 건 납으로 된 빗속에 맨몸으로 뛰어드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나기 쨩이라도 못 알아볼 수준으로 변장을 하고 있다… 밖에서 나기 쨩을 만나 본 적이 없으니까 이 부분은 신빙성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아무튼 나는 전에 수집했던 것들에 비하면 퀄리티는 좀 떨어져도 마음에 쏙 드는 액세서리를 하나 둘 손에 넣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때만큼은 멋 좀 부리고 싶잖아.'

확 비싸진 물건 값을 계산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후우… 좀 쉬었다 갈까.”

점원이 가져온 홍차로 손을 뻗으면서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그냥 걸어다니기만 해도 지친다.

“뭔가 평화롭네…”

트리니티와 게헨나를 뒤흔들었던 그 문제로부터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참 자유분방하다. 그와 동시에 평화를 깨뜨렸던 장본인이 느긋하게 티타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왠지 좀 이상한 이야기였다.

“...그것도 다 선생님 덕분이지.”

만약 그때 선생님이 없었더라면 틀림없이 트리니티도 게헨나도 붕괴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리우스 아이들도 도움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선생님은 누구에게나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이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주문하신 딸기 쇼트 케이크입니다.”

“와, 고마워. 롤케이크 말고는 오랜만에 먹어보니까 천천히 먹을게.”

의아한 표정으로 맛있게 드세요, 라고 중얼거린 다음 떠나는 점원을 뒤로 한 채 나는 마치 루비처럼 반짝이는 딸기를 한입 베어 물었다. 톡톡 터지는 새콤달콤한 맛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라, 선생님?”

카페의 얇은 유리창 너머로 누군가와 손을 잡고 걷는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제법 충격이었는데,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그 상대 쪽이었다.

“말도 안 돼, 저게 무슨…”

살짝… 아니, 잔뜩 뺨을 붉히면서 선생님과 손을 잡고 있는 그 여자는. 평소보다 어른스러운 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 여자는. 내가 못 보는 사이에 선생님과 즐거운 듯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 여자는.

“나기, 쨩…”

…티파티의 호스트이자 나의 절친인 키리후지 나기사… 그녀였다.

그 뒤에 내가 어떻게 내 방까지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깊은 절망에 휩싸인 채로 학교 문을 지나왔는지, 아니면 어떤 기분에 취해 웃음을 터뜨리면서 기숙사 계단을 올랐는지, 그런 것조차 모르겠다.

한 가지 기억이 나는 것은 내 쪽을 향해 걸어오던 두 사람의 모습이었고, 돌아온 뒤의 내 처참한 모습은 보기에도 처참하게 바닥에 굴러다니는 모자가 말해주고 있었다.

‘선생님이 나기 쨩이랑 걷고 있었어.’

그 사실이 내 가슴을 쿡쿡 찌르며 아프게 한다. 두 사람에게 묻고 싶은 게 많다. 왜 같이 걷고 있었어? 왜 손을 잡고 있었어? 왜 내 앞에서도 그런 적 없었는데 멋을 부린 거야? 어째서… 둘이서 그렇게 웃고 있었던 거야?

“어떻게 된 거야… 나기 쨩…”

아아, 마음 속에 스며든 시커먼 감정이 내 온몸을 뜨겁게 달구며 맥동한다. 뜨거워. 아파. 괴로워. 지옥이라는 건 이런 느낌일까.

“...마녀사냥인가.”

찢어질 듯한 가슴과는 대조되게 냉정한 머리로 나는 생각했다. 한때 악의 상징이었던 마녀는 군중들 앞에서 화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미소노 미카라는 마녀 역시 추악한 질투의 불길에 태워지고 있다.

“내가 저지른 죄는…”

그 죄들은 차례차례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 무엇도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심장이 격하게 두근거리고, 미쳐버릴 것만 같은 고통이 밀려드는 와중에 기어코 나는 한 줄기의 계시를 받는다.

“읏… 아냐, 그런 건, 싫어… 흑!”

그러나 나는 그 계시를 곧바로 부정했다. 받아들일 수 없어.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내가 화형에 처해져야 할 죄는 그것밖에 없어 보인다. 눈물과, 부정하려는 말들을 속으로 삼키면서, 나는 힘겹게 짜낸 목소리를 콘크리트 벽에 대고 내뱉었다.

“...선생님을 좋아하게 되어서, 라니… 흑.”

일단 내뱉은 그 말은 벽에 부딪치더니 내게로 돌아온다. 그리고 돌아온 그 말이 나를 다시 한번 나를 깊은 생각 속에 빠뜨린다.

…애초에 나는 독점욕이 강한 편이었다. 선생님이 다른 여자애를 보고만 있어도 속이 부글거렸고, 내가 아닌 다른 여자애를 보며 웃음 지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선생님의 옷 소매를 잡은 적도 있다.

그건 좋아한다는 감정의 연장선이었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것이 애정 표현이라면, 내가 선생님을 독차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 또한 애정의 표현이었다.

…그렇게 나는 선생님의 다정함에 어리광을 부렸다.

그 결과가 이렇다.

“그렇구나, 선생님은… 나의 왕자님은 이렇게 제멋대로인 공주님은 싫겠지. 싫어하겠지…”

싫어한다는 그 말을 내뱉은 순간, 참고 있던 눈물이 역류해 내 눈에서 넘쳐 흘렀다.

“왜… 왜일까…! 왜 나는… 항상 실패하는 거야… 흐윽.”

“싫어, 선생님… 흑! 어째서… 왜…!?”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사랑하는 그 상대는 멀어져 간다. 아무리 예쁜 액세서리를 하고 있어도, 머리를 손질하느라 시간을 들이더라도. 나는 그런 부조리함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어른이 아니었다.

언젠가 읽었던 동화가 떠오른다. 분명 그 동화 속에서 왕자님과 소녀는 맺어졌다. 하지만 왕자님에게는 인생의 동반자로 다른 여자를 선택할 권리도 있었을 것이다… 소녀에게는 그 왕자님 말고는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사실 선생님… 나의 왕자님도 비슷한 입장에 있다. 나 같은 애보다 성격이 좋고, 선생님이 좋아할 만한 아이가 그 사람 주변에는 넘쳐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만의 왕자님 같은 게 아냐. 모두의 왕자님인 거야.

“...으.”

“...세수, 하고 오자.”

흐르는 눈물과 기숙사의 차가운 수돗물 덕에 나를 불태우던 질투의 불길은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끔찍하기 그지없었고,

그야말로, 진짜 마녀 같았다.

♥◆♣♠♥◆♣♠♥◆♣♠

그리고 그 소녀는 고심해서 고른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 갔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누구 할 것 없이 너무나 반짝반짝 빛난 나머지 소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앗! 왕자님이다!”

맛있어 보이는 요리들이 놓인 테이블 너머에 왕자님이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소녀는 그쪽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옆에 누군가가 있습니다.

“어라, 저 분은 옆 나라 공주님 아니야?”

그래요. 왕자님과 즐거운 듯이, 정말 즐거운 듯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저 소녀는 바로 옆 나라의 공주님이었던 겁니다.

소녀의 마음은 저릿하게 아파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왕자님에게 다가가려던 발걸음은 그대로 성의 출구로 향했습니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아.

소녀는 밤하늘을 보며 중얼거렸습니다.

♥◆♣♠♥◆♣♠♥◆♣♠

다음날 나는 학교를 쉬기로 했다. 순찰하러 온 경비에게는 몸이 안 좋다고만 말해 놓고, 누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입구를 잠가 두었다.

…나태함과 절망이 같은 비율로 섞인 오전이 순식간에 지나고, 어느새 창밖에서 옅은 오렌지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렇게 한가한 날은 오랜만이네.”

가슴이 시리다. 나만의 왕자님은 저 멀리 떠나가버린 듯하고, 텅 비어버린 마음의 틈새로는 찬바람이 들고 있었다.

“선생님, 너무 추워. 외로워. 빨리 돌아와. 그 큰 손바닥으로, 날 다시 따뜻하게 해 줘…”

왜 나기 쨩일까.

아니, 그런 의문은 틀렸다. 선생님이 누구와 함께 걷고 있었더라도 나는 이런 마음을 품었을 것이다. 역시 정말로 선생님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은…

“...왜 나는… 안 되는 거야?”

나는 선생님의 온리 원이 되고 싶었다. 내게 운명처럼 찾아온 사람이 선생님이었던 것처럼 선생님에게도 내가 그런 사람이기를 바랐다. 그랬었는데. 좋아하는데.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있는데… 그렇기에 미움을 받았다.

삐이익.

“초인종…? 이런 시간에 누구지.”

누가 나를 찾아왔는지 궁금했지만 납덩이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만큼 나를 뒤덮고 있던 허탈감은 깊었다.

두 번째 초인종 소리. 그 뒤에 얇은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세 번 울렸다.

“미카, 안에 있어?”

“어!?”

깜짝 놀라서 허리의 날개가 확 뒤집혔다. 그리고 문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단숨에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럴 리가, 설마. 아니… 왜.”

말이 되지 못한 감정들이 입에서 새어나온다. 귀에 목소리가 들어오기만 해도 날뛰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다.

아아, 이 다정하고 왠지 모르게 애틋한 목소리의 소유자는. 지금 가장 만나고 싶고, 또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그 사람은.

“왜 하필 지금 왔을까, 선생님은… 으.”

목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문 너머에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한다.

솔직히 이미 심장 소리가 요란하다. 선생님을 직접 만난 것도 아닌데…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지금 들떠 있다. 미움받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내 안에서 선생님은 여전히 나만의 왕자님이었다. 그런 사람이 방문했는데 반갑지 않을 리가 없다.

어제와는 분명히 다른 사랑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선생님에 대해서 그렇게 안 좋은 생각들을 잔뜩 했었는데 그런 생각들은 말끔하게 사라졌다. 앞머리는 괜찮을까. 그러고 보니 오늘 쌩얼이네. 그런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신경을 쓰는 시점에서 내가 아직 선생님을 포기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그렇게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과장된 목소리를 내며 문에 걸린 체인을 풀었다. 아니나 다를까 커다란 종이봉투를 든 선생님의 모습이 있었다.

“서, 선생님…”

“안녕. 미카가 학교를 쉬었다길래 어디 아픈 거 아닌가 걱정돼서 왔어. 들어가도 돼?”

입으로는 들어오라고 말하면서도 내 온 신경은 선생님의 모습을 눈에 담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선생님의 긴 속눈썹이 움직이는 모습부터, 긴장해서 굳어있는 내 옆을 지나갈 때 풍기는 냄새까지… 그 모든 것들을 놓치지 않도록.

“미, 미카?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앗… 으응!? 그런 건 아닌데…”

선생님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바로 다정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다행이야. 속으로 안도한다.

“미카가 건강해 보여서 좋네.”

“응… 선생님, 뭐 마실래? 그래봤자 싸구려 홍차밖에 없긴 한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뭐든 괜찮다는 말을 들으며 나는 싱크대로 향했다. 찬장에서 한 세트를 꺼내 물을 끓이고 컵에 붓는다. 선생님에게는 미안하지만 티백으로 참아 줘.

“기다렸지, 선생님. 음, 설탕이나 우유 같은 것도 없어… 사치를 부리면 뭔가 사람들 시선이 따갑거든.”

최대한 밝은 척을 하려고 했는데 과연 그렇게 보였을까? …아니, 그렇지 못했다는 것은 선생님의 굳어지는 표정을 보고 바로 알 수 있었다.

“미카…”

“미, 미안 선생님. 그런 표정 지으라고 한 말은 아니야?”

얼버무리려는 내 노력조차도 선생님이 지그시 쳐다보는 눈빛 앞에서는 무력했다. 선생님은 갑자기 내 손을 잡더니 말했다.

“역시 아직도… 그런 일이 있구나.”

윽 소리를 내며 대답하기를 망설였던 건 내 머릿속에 너덜너덜해진 체육복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갈기갈기 찢어진 교과서, 흙으로 가득 찬 가방, 불에 타 버린 좋아하는 원피스… 그 모두가 실제로 일어난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일을 선생님에게 말하지 않았다. 왜냐면 선생님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선생님이 선물해 준 물건을 지켜내지 못한 나의 추태를 선생님이 알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부정하는 건 간단하다. 거짓말을 하는 것도 간단하다. 농담이라고만 말하면 마음씨 착한 선생님은 추궁하지 않는다는… 그런 사실을 뻔히 아는데.

…왜 이럴까. 왜 이렇게까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을까.

“으… 어라, 나, 왜 울지…”

말 대신에 주르륵 흘러나오는 눈물은 약간 달아오른 내 뺨을 따라서 싸구려 홍차 위로 떨어진다. 그리고 퍼져나가는 파문이 선생님과 나 둘만의 공간을 뒤흔든다.

천천히 다가온 선생님이 내 등을 쓰다듬으면서, 마치 서투른 학생을 훈계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미카,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가슴 속 깊은 곳이 찌릿 반응한다. 이제 그만 타락해 버리자며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이 무서운 포용력에 굴복해서 선생님이 베푸는 무상의 사랑을 온몸으로 향유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유혹을 가까스로 뿌리쳤다. 그런 애정이 모든 이들을 향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선생님은 얼마나 많은 학생들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얼마나 많은 학생들을 고통스럽고 추악한 사랑의 길로 빠뜨렸을까. 어쩌면 나기 쨩도 그렇게 내몰린 학생들 중에 한 사람이었을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어찌 됐건 이것은 내가 선생님이라는 절대적인 왕자님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작은 저항이었다.

내가 울음을 그친 것을 눈치챘는지 선생님은 슬며시 내 곁을 떠나려 한다. 하지만 내가 놓칠 리 없었고, 소매를 붙잡힌 선생님은 살짝 균형을 잃어 러그에 손을 뻗었다.

“저기, 선생님? 선생님은 왜 선생님이 있으면 괜찮다고 생각한 거야?”

“그, 그건…”

“...다들 그랬으니까?”

“윽!?”

“...아하☆ 정곡이었구나. 그래… 근데 있지, 난 전부 다 알거든. 선생님이 그렇게 모든 학생들한테 달콤한 말을 하고 그러는 거. 그야 그렇겠지. 선생님은 선생님이니까 학생 모두를 평등하게 사랑해야지.”

“미카, 무슨 말이야.”

“근데 선생님? …여자의 질투심을 너무 얕보면 안 돼. 여자라면 누구나 자신에게 특별한 사람을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들거든… 그러고 보니 선생님은 말야, 당연히 나한테도 애정 같은 게 있겠지? 일단 나도 마녀라고 불리지만 한 명의 학생이니까. 그런데 최근에는 만나러 오지 않았잖아? 왜 그랬을까? 사랑하는 학생이 그렇게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하는데 말야, 선생님은 왜 매일같이 일을 우선하는 걸까?”

“그건 말이지, 그…”

“흐음. 그럼 선생님은 자기 사정 때문에 학생의 마음을 짓밟는 못된 어른이었구나. 안타까워라. 믿었는데.”

심한 말을 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을 만나지 못해 쌓인 울분이 이제 와서 폭발한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사랑하는 상대를 괴롭게 만들다니 역시 나는 마녀일지도 모른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지, 그것도 전부 틀렸나… 선생님은 내가 싫어서 만나러 안 온 거지?”

“미, 미카. 그건 아니…”

“그럼 설명해 봐. 빨리. 나는 바보라서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속삭여 봤자 잘 모르겠거든. 뭐, 선생님은 못 하겠지만… 읏!?”

순간 내 몸은 온기에 감싸인다. 포옹을 한 것이다. 내 머리는 단숨에 이해했다. 추악하게 일그러지고, 엉망진창으로 상처받은 마음에 스며드는, 그런 포옹.

너무 현실감이 없었던 나머지 벙쪄 있다가 뒤늦게 풍겨오는 선생님의 향기에 내 사고회로에 쇼트가 났고… 결국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위험하잖아요. 그렇게 힘차게 튀어나오시지 않아도 되는데요.”

그렇게 말하며 뺨을 부풀리는 나기사를 달래면서 우리는 트리니티 시가지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오늘은 나기사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서 나를 불렀는데, 아무래도 티파티에서는 이야기하기 꺼려지는 일인 모양이다. 그래서 이렇게 이 가게까지 같이 걸어온 것이다.

나기사는 홍차를, 나는 커피를 각자 주문한 뒤에 나기사가 먼저 그럼, 이라며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님, 우선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기사 부탁인데, 거절할 수는 없지. 근데 다른 곳에서 이야기할 예정이었으면 처음부터 약속 장소를 다른 곳으로 정했으면 되지 않아?”

“그, 그건… 제게도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요. 절대로 선생님과 같이 트리니티 거리를 걷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거기까지 한 호흡에 다 이야기하는 나기사에게 나는 그렇구나, 하고 대답했다. 한동안 이어지던 침묵을 깨기라도 하듯이 두 사람 몫의 음료가 나오자, 고민스러운 듯 나기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뇨. 저도 언제까지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저는 오늘 선생님을 만날 수 있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가슴이 살짝 설렜어요.”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선생님을 사랑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담담하게 내뱉은 그 말에 나는 마시려던 커피를 쏟을 뻔했다.

“왜 그러시죠, 선생님?”

“아, 아니… 음, 바, 방금 뭐라고…?”

“...아, 선생님께서 제 마음을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어렴풋한 연모의 감정일 뿐이고,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나기사는 언제나처럼 차분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어 우아하게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제가 상의하고 싶은 것도 이 감정과 관련되어 있으니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제가 상의하고 싶은 건 미카 씨에 관한 일입니다.”

나기사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잠시 당황한다. 왜 방금 전 이야기에서 미카가 화두에 오르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기사는 마치 그런 내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웃었다.

“선생님이시니 제 연모의 감정과 미카 씨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으시겠죠… 이해하실 수 있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겠지만요.”

“...나기사, 무슨 이야기야.”

“하나씩 설명할게요. 미카 씨가 청문회 이후로 공식적인 처벌이 결정되고… 처음에는 그 내용에 불만을 가진 학생들의 시위가 있기도 했지만 비교적 그런 활동이 요즘 들어 잠잠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일부 학생들이 미카 씨에 대해 그…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티파티로서, 그리고 미카 씨의 친구로서 이 문제에 대해 엄중하게 대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티파티의 권위는 추락했습니다만, 그럼에도 권력이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다소 거친 방법으로 취조를 한 결과 다들 순순히 알려 주셨답니다.”

“그럼 미카는 그…”

“네… 역시나 미카 씨는 입에 담기도 어려울 만큼… 심각한 행위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된 이상 미카 씨… 둘도 없는 친구를 돕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지요. 그리고 얼마 전에 미카 씨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어요.”

그러더니 나기사는 또 다시 예의바른 동작으로 차를 마셨다. 하지만 잔을 든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미카는 뭐라고 했어?”

“...미카 씨는 그런 일은 없었다고 딱 잘라 말했어요. 물론 그게 거짓말이라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는데… 저는 지적하지 못했어요. 참으로 한심한 일이죠. 친구 하나 구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트리니티를 다스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들었습니다.”

“상의하고 싶다는 게 그거야?”

“아니요… 오히려 이제부터가 본론입니다. 미카 씨는 그 뒤에 이렇게 덧붙였어요… 선생님이 있으니까 괜찮다고요. 미카 씨에게 선생님은 그만큼 커다란 존재가 된 겁니다.”

머릿속에 몇몇 장면들이 떠오른다. 미카를 처음 만났던 날부터, 상처받으면서도 계속 저항하던 ‘공주님’에 대한 기억까지… 그 모든 기억들이 지금도 소중한 추억이 되어 가슴 속에 새겨져 있다.

“...사랑에 빠져 버렸나요. 저는 무심코 그렇게 말했어요. 그게 제 질투심에서 나온 말인지, 미카 씨의 넋을 잃은 표정에 이끌려서 나온 말인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미카 씨가 뺨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던 것만으로도 제게는 충분한 대답이 되었어요.”

“아무리 친구라고는 하지만 남의 연애사를 이렇게 자세하게 털어놓는다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선생님께 영영 전달되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쓸데없는 참견일까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커피를 입에 털어넣었지만 그저 씁쓸하기만 할 뿐이었다.

“...선생님께서 모든 학생들을 평등하게 대하셔야 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학생이 아무리 연모하는 감정을 품고 있다 해도 선생님께서는 받아주실 수 없다는 것도 포함해서요.”

“하지만 미카 씨에게는 선생님밖에 없어요. 미카 씨는 흔하디 흔한 해피엔딩에 도달하는 것조차도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미카 씨는 그 활약상이 마치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의심하게 될 만큼 강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녀의 내면은 그 나이에 걸맞는 소녀라는 점을 선생님께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저 같은 사람보다는 그녀를 봐 주셨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고요. 이것이 오늘 선생님을 부른 이유입니다.”

나기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른다. 학생… 아니, 미카의 고민을 알지 못한 채 일을 핑계로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 선생님인 나로서는 변명할 여지가 없는 실패였다.

“미안 나기사. 오늘은 이만 가 봐야겠어.”

“네. 바쁘신 와중에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미카 씨를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여전히 쓴맛이 나는 커피를 다 마신 뒤 계산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나기사의 옆을 지나면서, 그녀의 얼굴은 감히 쳐다보지 못한 채로 질문했다.

“너는… 나기사 너는, 왜 그렇게까지 미카를 위하는 거야?”

“...미카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조금 부족한 점도 있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 줄 수 있는 사람이에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믿어요.”

“그래서 저는 그녀가 바라는 미래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은 거예요… 설령 그게 제 자신을 불태워버리고, 지옥에 다다르게 만드는 선택이라 할지라도 떳떳하게 선택하고 싶었습니다. 그게 바로 가장 친한 친구로서 해야 할 일이고, 제 자신에게는 참회이기도 하니까요.”

잔 받침에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소란스러운 트리니티의 거리에서는 왠지 공허하게 들렸다.

♥◆♣♠♥◆♣♠♥◆♣♠

그리고 얼마 뒤, 소녀의 집에 다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처음에 소녀는 그 편지를 읽고 싶지 않았습니다. 읽기만 해도 왕자님의 웃는 얼굴이 떠오르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안 읽으면 편지를 쓴 사람이 불쌍하잖아.”

소녀는 아주 착한 아이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웃나라의 공주예요. 갑작스럽지만 왕자님을 만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오늘 밤, 그쪽 나라의 성에서 왕자님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가실지 말지 고르는 건 당신의 몫이랍니다.’

소녀는 크게 놀랐습니다. 옆 나라 공주님에게 편지가? 왕자님을 만날 수 있다고?

…왕자님이, 나를 기다린다고?

이제는 뭐가 뭔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소녀는 곧바로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입었던 드레스는 이미 구겨져 있었습니다.

“왕자님!”

성 안에서 소녀는 왕자님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안녕, 와 줘서 정말 고마워. 이 요리들도, 저기서 춤추는 무희들도 다 너를 위한 거야. 오늘 하루를 즐겨 줬으면 해.”

“아니에요, 왕자님. 이 훌륭한 요리들도, 귀엽게 춤추는 무희들도 저는 다 필요 없어요. 오늘은 왕자님을 만난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소녀가 그렇게 말하자 왕자는 몹시 슬픈 듯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너는 나를 좋아하는 거니?”

갑자기 그런 질문을 받은 소녀는 그저 “엣!”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혹시 옆 나라 공주님께 무슨 말이라도 들었어?”

“아, 그게. 편지가 왔어요.”

“나는 그 공주님에게 우리 나라에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었거든. 그래서 너에게 편지를 보낸 거야.”

“그랬군요.”

“그래. 나는 이 나라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이렇게 돕고 싶어. 그리고 만약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에 맞는 대답을 해줄 수 없어. 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만 하니까.”

소녀는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도 모르게 될 만큼 슬퍼졌습니다.

왕자님은 내 것이 될 수 없어.

그렇지만 적어도 이 말은 해야겠다며, 소녀는 왕자님의 뒷모습에 대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저를 잠깐이라도 좋으니 기억해 주실 수 있나요? 하루 동안, 아니.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저만을 떠올려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소녀의 심장은 성이 무너져버리지 않을까 싶을 만큼 쿵쾅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자님은 돌아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어떤 꿈을 꾸고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으면서도 나 혼자서만 간직하고 싶은, 그런 달콤하고 보석처럼 반짝이는 꿈을.

…의식을 되찾은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머리에 느껴지는 위화감이었다. 부드럽지만 왠지 모르게 단단한 심지가 느껴지고, 무엇보다 따뜻하다.

그 다음으로 느낀 건 냄새였다. 어디선가 맡아본 듯한… 어쩌면 꿈 속에서도 맡았던 것 같은 편안한 냄새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을 뜬다.

“안녕, 일어났어?”

“으음… 선생, 니임… 엣!? 선생님!?”

달콤한 꿈에서 깨어났더니 나는 선생님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그리고 정성스레 머리까지 빗어 주고 있다. 나는 허둥지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 벽에 달라붙었다.

“서, 선생님이 왜 여기…”

“미카가 걱정돼서 온 건데, 잊어버렸어?”

마침내 머릿속에 있던 기억들이 서로 이어진다.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생각났다.

“우, 우와아아!?”

“미, 미카!? 왜 그래.”

뜨거워. 얼굴에 불이… 아니, 얼굴이 불처럼 뜨겁다. 선생님 앞에서 독점욕을 드러내고, 심지어 안아달라고 졸랐다.

다 끝났다. 완전히. 내가 싫어졌을 거야.

“...미카, 괜찮아.”

그런데도 선생님은 이런 나를 안아준다.

…아아, 대체 뭐야 이 사람은. 나를 대체 얼마나 더 사랑이라는 늪 속으로 밀어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내가 언제부터, 어떤 마음을, 왜 품고서 살아왔는지 알고 있었던 걸까.

“알아. 전부 다. 알고 있어… 미카를.”

그렇게 귓가에 속삭이면서 선생님은 다시 내 머리를 빗어준다.

“아, 진짜. 어제까지만 해도 머리 손질 안 했단 말이야… 이러면 누구 때문에 관리하는 건지 모르잖아.”

“...? 미카 너를 위해서 아냐?”

저릿하고 둔탁한 통증이 느껴진다. 역시나 모르는구나. 체념하는 마음과 기대가 무너졌다는 슬픔이 뒤섞여서 밀려온다.

…하지만 선생님은 농담이라면서 미소 지었다.

“그게 다 나를… 위해서잖아? 자화자찬 같기도 한데 만약에 정말 그렇다면 기쁘네. 미카가 나를 생각해 준다는… 그 마음만으로도 선생님인 나로서는 감사한 일이니까.”

또 다시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오늘은 내가 눈물이 참 많네. 하지만 지금 선생님에게는 사랑스런 소녀의 우는 얼굴이 보이지 않겠지.

그래서 나는 조금 과장스럽게 코를 훌쩍였다.

“훌쩍… 아아, 어떻게 할 거야 선생님. 학생을 울게 만드는 선생님이라니… 최악, 이잖아.”

“응, 그러게. 나는 최악의 선생님이야… 하지만 미카를 위해서라면 어떤 선생님이든 되어 줄 거야.”

“그게 정말 나를 위해서야? 그 연장선상에 키보토스 학생들도 있는 거 아냐?”

“아니, 없어. 왜냐면 나는 지금 미카 너를 만나러 왔으니까.”

아 맞다, 하더니 종이봉투를 뒤지기 시작하는 선생님. 체온이 멀어져서 약간 쓸쓸하게 느껴졌지만, 선생님이 내민 물건에 그런 마음은 날아가 버렸다.

“이건… 액세서리?”

“응. 여기 오기 전에 몇 개 골랐거든… 미카를 생각해서 고른 건데, 어때.”

쑥스럽다는 듯이 뺨을 붉히는 선생님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생님이 고른 그 액세서리들은 완전히 똑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때 가게에서 내가 골랐던 것들과 거의 비슷했기 때문이다.

굉장해. 마법 같아!

선생님, 나를 너무 잘 아는 거 아냐?

…이런저런 말이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저 눈물만 나올 뿐이었다. 그 눈물을 팔목으로 거칠게 훔치면서 나는 선생님을 향해 돌아선다.

“...선생님, 이 반지 말야.”

“어, 역시 마음에 안 들어?”

“아냐☆ …선생님이 끼워 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한 뒤에 나는 양손을 보자기 모양으로 펼쳐서 선생님 앞에 내밀었다. 선생님은 잠시 움찔했지만 다시 평소의 다정한 표정으로 돌아와서…

…내 오른손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응. 고마워 선생님, 평생 소중히 간직할게… 아니지. 이번에야말로 꼭 지켜낼게.”

“...응, 잘 부탁해.”

시계바늘이 째깍거리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시계를 보니 이제 점호까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우왓!? 선생님, 빨리 안 가면 시간이…”

“...미카, 저기 봐.”

선생님이 진지한 목소리로 가리킨 쪽을 바라본다.

…아주 커다란 달님이 있었다.

“우와… 예쁘다…”

“...응, 정말 예쁘지… 이걸 미카가 기억해 줬으면 해.”

“어…?”

“앞으로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외로울 때가 있을지도 몰라. 그럴 때면 창문을 열고, 빛나는 둥근 달을 봐 줘… 그리고 내 존재를 떠올려 줘.”

“읏…”

“내가 미카 옆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아주 한정되어 있어. 그 정도 시간으로 네가 느끼는 외로움을 영원히 채워 주기에는 역부족이거든.”

“그러니까 달을 보면서 선생님을 떠올려 줬으면 한다는 말이야?”

창밖을 멍하니, 너무나 깊은 그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는 선생님에게 말을 건넨다. 그리고 나를 보며 빙긋 웃는 선생님의 표정이 달빛에 비춰지자… 정말 아름다웠다.

…마음 속에 있는 무언가가 부서진 나는 선생님의 마음 속 깊이 새겨지도록 분명하게, 그리고 해피엔딩이 되었음을 인정하듯이 천천히.

선생님을 향해 웃어 보였다.

♥◆♣♠♥◆♣♠♥◆♣♠

그 뒤 왕자님은 여행을 떠났습니다. 아마 그 부드러운 웃음으로 세상 곳곳에 있는 사람들을 도우러 다니겠죠.

그리고 왕자님이 없어진 성의 저 아래, 아득히 낮은 곳에 사는 소녀는 예전처럼 왕자님만을 생각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소녀는 과연 행복할까요?

아니라면 과연 어떤 마음일까요?

…그 대답은 오직 소녀만이 알고 있답니다.

끝.

정말로, 끝.

글쓴이. 미소노 미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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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블루 아카이브·24.06.18번역

소설핫산) 동화 같은 러브 로맨스를

#소설
좋아요 0댓글 7저장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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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ex_defe작가
게시물 26개
슬DC
슬로보단번역
외부 링크디시인사이드pixiv
게시일2024.06.18 16:08
조회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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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

나
ㅇDC
ㅇㅇ124.06.18

압도적 정실

ㅇDC
ㅇㅇ224.06.18
ㅇDC
ㅇㅇ324.06.18

흐흐

ㅇDC
ㅇㅇ424.06.18
디시콘
ㅇDC
ㅇㅇ524.06.19
디시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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