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엄 #M #순애 #미도리
원본 by 春夏秋冬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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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짧아졌네.
미도리는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노을의 붉은 빛이 셀로판지처럼 투명한 남색에 감싸이고, 세계는 어둡고 고요한 밤으로 서서히 변해간다.
하늘 위에서는 까마귀 가족이 나란히 날면서 미도리는 알지 못하는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시각은 17시.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이 시간엔 밝았는데, 계절의 변화는 참 빠르기도 하다.
소매 끝으로 삐져나온 손가락 끝에 한기가 느껴져 미도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 하고 내뱉은 숨은 희미하게 하얬고, 가을의 끝자락이 그 색에 서려 있었다.
“날이 많이 추워졌네.”
그런 미도리의 모습을 보고 곁을 걷던 선생이 웃는다.
그러게요, 하고 미도리는 뺨을 완만하게 늦추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시선을 선생 쪽으로 향하자, 선생도 조금 전의 미도리처럼 하늘을 향해 작게 숨을 내뱉고 있었다.
흐릿하게 사라지는 백자 같은 입김을 바라보며 미도리는 살며시 눈을 가늘게 떴다.
거리를 걷는 사람의 수는 적었다.
마을을 가로질러 불어오는 바람이 보드랍게 뺨을 어루만지고, 그 바람에 실려 온 다양한 향기가 미도리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차갑게 가라앉은 가을의 잔향과 어느 집의 저녁 식사 냄새.
그리고 그 속에 섞인 화약 냄새.
밤의 향기다, 라고 미도리는 느꼈다.
잔광이 퍼지는 이 시간대 특유의, 한산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함이 섞인 공기가 키보토스의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저벅, 저벅, 두 사람분의 발소리가 아스팔트를 찬다.
선생과 미도리는 보폭이 다를 텐데도 발소리의 간격과 속도는 똑같았다.
선생님이 나에게 맞춰주고 있구나, 하고 가지런한 그 발소리에서 짐작한 미도리는 왠지 기분이 좋아져 볼 안쪽을 실룩거렸다.
선생과 같은 속도로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걷고 있는 지금이 너무나 행복했다.
선생님 덕분이야.
미도리는 생각했다.
샬레 당번 업무를 마치고 집무실을 나서려던 미도리에게 “데려다줄게”라고 말을 건네준 선생 덕분에 지금 이 행복한 시간이 있는 것이다.
“에헤헤…….”
저도 모르게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풀어질 대로 풀어진 입가에서 흘러나온 그 소리에 선생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
“네.”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미도리는 수줍게 웃었다.
폭신폭신한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꿈결 같은 기분이었다.
옷깃이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
올려다보면 쉽게 눈에 들어오는 선생의 얼굴.
저물어가는 노을이 가냘프게 늘어뜨린 두 사람의 그림자는 마치 연인처럼 바짝 붙어서 걷고 있었고,
아마 귀를 기울이면 서로의 숨소리조차 들릴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단둘이, 실없는 대화를 나누며 나란히 걷는다.
두근두근 고동치는 심장이 달콤하면서도 애틋해서, 선생의 얼굴을 올려다볼 때마다 가슴 깊은 곳이 꽉 조여지는 것만 같다.
데이트라고 자만할 수는 없지만, 지금 선생을 독차지하고 있는 여자애는 자기라는 사실에 아주 약간의 우월감을 느꼈다.
손을 잡고 걸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미도리는 생각했다.
만약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분명 견딜 수 없이 행복해서 사르르 녹아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선생의 손바닥을 움켜쥘 용기는 나지 않기에 미도리는 우선 지금의 이 거리감에 만족하기로 했다.
선생의 옆자리.
바로 그 곁에.
함께 있는 이 순간이 지금은 무엇보다 사랑스러우니까.
“선생님과 함께 있는 건 즐거워서 좋아요.”
선생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한다.
조금 대담한 말인가 싶기도 하지만, 둔감한 선생은 이 정도로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할 테니 괜찮다.
지금까지도 선생은 몇 번이고 반복했던 미도리의 에두른 대시를 알아차려 주지 않았다.
샬레에 갈 때는 평소보다 훨씬 정성스럽게 화장하고, 여자다움을 어필하기 위해 들고 다니는 소품도 선생과 만날 때만큼은 특별 사양이다.
조금이라도 귀엽게 보이고 싶어서 눈을 치켜뜨는 표정도 연습했다.
선생은 미도리보다 키가 훨씬 크니까 대화할 때는 올려다보게 되기 때문이다.
신체 접촉을 위해 앉을 때의 거리를 좁혀보기도 했고,
조금이라도 의식해 주지 않을까 싶어 스커트 길이를 짧게 해보기도 했다(부끄러워서 금방 그만뒀지만).
하지만 그런 미도리 나름의 필사적인 행동도 선생 앞에서는 백약이 무효했다.
“나도 미도리와 함께 있는 거, 좋아해.”
아니나 다를까, 아무렇지도 않게 되돌아오는 ‘좋아해’라는 말에 미도리는 ‘거봐’라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은 이런 사람이다.
조금 대담할 뿐인 에두른 고백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훨씬 더 알기 쉽고 직설적인 마음이 아니면 분명 이 사람에게는 닿지 않을 것이다.
치사해, 미도리는 생각했다.
선생은 멋있고 어른스럽고 존경할 수 있으며,
미도리의 작은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어주는 다정한 사람이고,
좋아하는 게임 이야기에도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어울려준다.
그뿐만 아니라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 미도리가 추천한 게임을 해줄 때도 있으니, 정말이지.
이래서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정하게 대해주고 소중히 여겨주며, 미도리라는 존재를 똑바로 바라보고 대해준다.
사춘기 소녀의 마음 따위, 그것만으로도 간단히 움켜쥐어 버린다.
계속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더 가까운 거리에서 닿고 싶고,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도 선생은 거짓말처럼 둔감하니, 사랑을 하는 쪽은 미칠 노릇이다.
일방통행인 ‘정말 좋아해’만이 넘쳐나 쌓이고, 둘 곳이 없어 몸부림치고 싶어진다.
하지만 선생은 그 다정함이나 멋짐 같은 매력을 당연하다는 듯 여러 학생에게 뿌리고 다니니까, 치사하다.
기대와 불안을 내려놓지 못한 채 라이벌만 늘어간다.
─나한테만 그랬으면 좋겠는데.
선생님의 시선이 자기에게만 향했으면 좋겠다. 옆을 걷는 건 자기만의 권리였으면 좋겠다.
미도리만을 생각하고, 미도리의 이름만을 부르고, 미도리만을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미도리가 아닌 누군가에게 선생의 다정함이 향한다고 생각하면 괴롭다.
하지만 선생은 모두의 선생이고, 미도리에게만 다정하게 대해주는 선생은 아마 미도리가 좋아하는 선생이 아닐 것이다.
누구에게든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다정하게 대해버리는,
그렇게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마는, 그런 ‘치사한’ 선생이라서 미도리는 좋아하는 것이다.
그래도 역시 독차지하고 싶다는 독점욕은 멈추지 않으니, 사랑이란 참 곤란한 것이다.
욕심쟁이가 되고, 눈이 멀고, 가끔은 괴롭다.
달콤하고 즐겁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닿지 않는 것이 안타깝고, 하지만 용기를 내는 것은 너무나 무섭고, 라이벌투성이라 조바심이 난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뜬금없이 중얼거린 미도리의 말에 선생이 눈을 깜빡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고 미도리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며 툭, 발밑의 작은 돌을 찼다.
캉캉, 소리를 내며 작은 돌은 배수로로 떨어졌다.
미도리는 그것을 바라보며 작고 무겁게 숨을 떨었다.
─만약 내가 좀 더 어른이었다면.
거리도 나이도, 지금보다 선생님에게 가까운 어른이 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무언가 달라질지도 모르니까.
유우카와 선생이 나란히 걷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유우카는 평소 학교 안에서 볼 수 있는 모습보다 몇 배나 더 기쁘고 즐거운 듯 웃고 있었고, 선생도 마찬가지로 미소 짓고 있었다.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구나, 하고 솔직하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을 기억한다.
미도리가 본 유우카는 무서운 면도 많지만 세미나로서 척척 일을 해내는, 미도리 같은 꼬맹이에 비하면 훨씬 더 어른스러운 여자였다.
선생 같은 멋진 어른의 곁은 분명 유우카 같은 여자가 더 어울릴 것이다.
선생의 연인으로 보이는 쪽이 누구냐고 미도리와 유우카의 이름을 댄다면, 분명 대다수의 사람은 유우카 쪽이 선생의 연인 같다고 대답할 것이다.
미도리 자신도 그 의견이 전혀 틀리지 않았다고 느끼고 있다.
미도리는 슬쩍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완전히 평평하지는 않지만 발육은 늦고 빈약하다.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작은 키였다.
미도리의 얼굴은 선생의 어깨에도 닿지 않는다.
뺨을 손바닥으로 덮는다.
자신의 얼굴을 싫어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동안이고 어린애 같다는 생각은 든다.
어깨에 닿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었다.
예전보다 길어진, 세미 롱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머리 길이.
하지만 그 길이에 어떤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른이라니, 아직 아득하다.
머리를 기르기 시작해도, 화장하고 소품을 예쁘게 챙기고 그렇게 태도만 어른스럽게 굴어봐도 결국은 어린애의 발돋움에 불과한 것이다.
생각해 보면 미도리만 바라봐 달라고 바라는 독점욕조차 결국은 어리광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래서 옆을 걷고 있는 이 시간으로 만족했다.
이것만은 진심이며 거짓이 아니다.
다른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둘만의 귀갓길을 사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같은 추억을 새기며, 행복을 되새기듯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싱글벙글 뺨이 제멋대로 풀어져 버리고,
기쁘다며 날뛰는 심장 소리는 멈추지 않아서 ,
그렇게 지금 이 순간 미도리는 온 힘을 다해 사랑에 빠져있다고 느끼고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갈망하게 된다.
허공에 떠 있는 손바닥을 잡고 싶다.
팔짱을 끼고 밀착한 채 걷고 싶다.
아무렇지 않은 일상 대화 속에 달콤한 연인끼리의 사랑의 속삭임이 있었으면 좋겠다.
미도리도 다른 누구도 본 적 없는, 연모로 열기를 띤 선생의 표정을 나에게만 보여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기에는 아직 거리가 너무 멀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선생의 손바닥을 잡을 용기는 나지 않았다.
당연하다.
미도리는 어린애고, 만약 미도리가 그 손바닥을 잡는다 해도 선생은 그것을 ‘어린애의 어리광’이라며 받아들여 줄 테니까.
손을 잡고 싶다.
하지만 잡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말로 원하는 건 그 의미다.
마음을 전하고 전해 받으며, 어리광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당당하게 가슴을 펼 수 있는 그런 의미를 원한다.
그렇다면 분명 미도리가 원하는 그것은 ‘자신감’이라 부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선생의 곁에 설 자신감.
곁에 서고 싶다고 그렇게 말로 내뱉기 위한 자신감.
자신은 이제 어른이며 이 사랑은 사춘기의─어린애의 어리광과는 다른 진짜 마음이라는 자신감.
그리고 그 자신감은 분명 어른이 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미도리 스스로도 인정할 수 없는, 선생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어린애라며 울고 싶어질 만큼 미숙한 자신을 어른스럽다고 인정해 주는 단어다.
그래서 미도리는 자신감을 원한다.
조금이라도 선생과 나란히 설 수 있는 자신이 되었다고 가슴을 펴고, 선생에게 이 사랑을 전하고 싶으니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빨리 어린애를 그만두고 싶었다.
유우카처럼 예쁘고 어른스러운 여자에게 선생을 빼앗기기 전에 그 출발선에 서고 싶은 것이다.
귀엽다가 아니라 예쁘다는 말을 듣고 싶다.
다른 예쁜 누군가에게 빼앗기기 전에.
어린애니까, 라는 한심한 이유로 실연당하기 전에.
─부디 1초라도 빨리 선생님에게 어울리는 어른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하듯 호흡을 엮어냈다.
내뱉은 옅고 가느다란 하얀 숨이 허공에 흔들리다 눈부시게 녹아내린다.
눈 같아, 라고 미도리는 생각했다.
역까지는 남은 거리가 수 미터였다.
이제 수십 걸음이면 도착할 샬레 근처 역 앞에서 선생이 문득 발을 멈춘다.
그러고는 무언가 결심한 듯한 분위기로 선생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말이야.”
미도리는 반걸음 정도 선생보다 앞서 나갔다가 빙그르르 뒤를 돌아보았다.
선생을 향한 시선 30센티미터 앞, 검은 눈동자가 미도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모호했던 잔광은 완전히 어둠 속으로 녹아 있었다.
짙은 밤에 거리는 집어삼켜졌고, 가로등 불빛이 어슴푸레한 푸른 빛으로 정적의 감옥에 저항하고 있었다.
선생의 눈동자는 똑바로 미도리를 꿰뚫고 있었다.
윤기 나는 검은색 속에 가로등 빛이 스며들어, 작고 아름다운 밤하늘을 그 수정체 측면에 흩뿌리고 있다.
“왜 그러세요, 선생님?”
미도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늦가을 바람이 머릿결을 어루만지고, 밤을 들이마신 연한 노란색이 흩날렸다.
눈에 들어온 앞머리의 감촉에 눈을 감고 미도리는 눈가를 훔쳤다.
그렇게 다시 눈을 떴을 때, 선생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
두근, 하고 놀라움에 심장이 울리고 뺨에 열이 오르는 감각이 든다.
한 박자 늦게 큭, 하고 찌르는 듯한 숨을 내뱉었다.
선생은 그런 미도리의 모습에 살짝 웃으며 미도리의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선생님?”
다시 묻는다.
선생은 아무 말 없이 부드러운 손길로 미도리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기분 좋게 빗겨 내려가는 그 감촉에 미도리는 스르르 눈을 가늘게 떴다.
선생이 만져주는 건 긴장되지만, 그 이상으로 기분 좋고 행복했다.
손바닥은 한 손의 손가락 개수만큼 머리 위를 왕복하고는 어딘가 아쉬운 듯 떨어져 나간다.
뭐였을까 싶어 선생에게 시선을 향하자, 선생은 깜짝 놀랄 만큼 온화한 미소로 미도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 많이 길었네.”
미도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채 주고 있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르고 있었거든요.”
“알고 있어. 잘 어울려.”
선생이 건넨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물론 설렜다는 의미로.
얼굴이 뜨거워진다.
그 체온과 바깥 공기의 차가움 사이의 괴리에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고, 하, 하고 열을 식히는 듯한 입김이 새어 나왔다.
“정말인가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생이 거짓말을 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응, 하고 선생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게 너무나 기뻐서 미도리는 저도 모르게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눈물은 흘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금 울어버리면 이 기쁨이나 행복 같은 소중한 추억이 눈물과 함께 빠져나가 버릴 것 같았으니까.
한 조각도 흘리고 싶지 않았다.
전부 다 예쁘고 소중한 순간이다.
울어서 줄어들게 하는 건 너무 아깝다.
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았다.
왜 울려고 하냐며 선생이 곤란한 듯 웃는다.
기뻐서 그래요, 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다시 머리 위로 선생의 손이 뻗어왔다.
다정하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준다.
그리고 선생은 입을 열어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정말 잘 어울려. 어른스러워 보여서, 예뻐.”
아아, 정말 치사한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또 미도리가 듣고 싶은 말을 해준다.
분명 아까 ‘어른이 되고 싶다’라고 중얼거린 걸 듣고 나서.
그것만으로 미도리의 고민도 괴로움도 꿰뚫어 보고 해결해 버린다.
치사해, 치사해─아무튼 치사하다.
왜 그렇게 치사한 말만 골라서 하는 걸까.
이래서야 미도리만 자꾸 좋아하게 되잖아.
이렇게 미도리의 사랑을 부풀려놓고 선생은 대체 어쩔 셈일까.
자신감을 원한다고 생각했다.
선생의 옆에 서기 위해,
그 출발선에 서기 위해 누군가가 해주는 ‘어른’이라는 말이 필요했다.
그 소원을 하필이면 선생님 당신이 직접 들어주니, 싫어도 자신감이 생겨버린다.
“좋아해요.”
눈물은 이제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차라리 그 눈물까지 통째로 전해버리자고 미도리는 생각했다.
뜨겁게 젖은 눈가에 손을 댄 채 미도리는 가냘프게 반복한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과 함께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사랑을 전한다.
“좋아해요. 선생님이, 좋아요.”
내뱉는 말은 달콤했다.
말에 맛 따위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좋아해’라는 세 글자는 달콤했다.
사탕 같은 사랑이었다.
울어버릴 정도로 달콤하고 예쁜 그런 사탕을 핥고 있다.
부디 이 사랑의 맛을 당신도 알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달콤한 사랑의 밑바닥에서 당신과 둘이서, 녹아내리듯 숨을 쉬고 싶다.
“정말 좋아한단 말이에요…….”
부디 닿기를 바라며 비어 있던 손을 뻗었다.
그 손바닥이 선생의 정장에 닿았고, 놓치지 않으려는 듯 꽉 움켜쥐었다.
울면서, 떨면서 고백을 반복한다.
그런 미도리의 모습은 분명 주변 사람들에게는 어른에게 매달리는 어린 소녀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고 미도리는 생각했다.
어울리지 않는다고 모두가 고개를 젓는다 해도, 선생에게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어른스럽다는 말을 들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에게서 받은 말이다.
당신에게서 받은 그 말 한마디로 이 사랑에 진정한 의미가 생기니까.
“미도리.”
이름이 불린다.
그것만으로 마음이 들뜨고 사랑에 빠진다.
어디까지고, 어디까지고 되돌아갈 수 없을 만큼 깊은 곳까지 떨어진다.
바닥 따위 보이지 않았다.
한도도 한계도 없을 만큼 당신을 향한 사랑에 빠져있다.
이렇게나 일편단심으로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걸 몰랐다.
가르쳐준 건 선생님이란 말이에요, 미도리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선생이 좋다.
너무나도 좋다.
그러니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그것을 위해 전하는 이 사랑을, 제발 부디 받아줘.
눈물을 닦던 손을 멈췄다.
번지는 시야가 밤에 어지럽다.
하지만 선생만큼은 놓치지 않는다.
손을 선생의 뺨에 갖다 대었다.
그대로 꾹 끌어당긴다.
미도리의 입술이 닿을 높이까지.
거기서부터는 흐름.
놀라움에 크게 떠진 선생의 눈동자가 왠지 귀엽고 재미있었다.
─열기가 닿았다.
질척질척 뇌수가 녹아내린다.
서로의 경계선이 사라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눈꼬리에서 눈물이 넘쳐흘러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 감촉조차 사랑스러워서 미도리는 몇 번이고 당신을 향한 사랑을 반복한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사랑이다.
사탕조차 녹여버릴 듯한 열기를 머금은, 무엇보다 아름다운 사랑이었다.
“─아, 하.”
열기가 떨어진다.
멀어진다.
사랑의 틈새에서 숨을 쉬었다.
당신의 곁에서 숨을 쉬고 있다.
“정말 좋아해요, 선생님.”
눈동자를 떨었다.
잊을 수 없는 열기의 잔향을 가슴에 품고 몇 번이고 말을 엮는다.
당신을 좋아한다고,
이 사랑이 그 가슴에 닿을 때까지.
“키스하고 싶을 정도로…키스, 해버릴 정도로. 정말 좋아해요.”
시선은 똑바로, 직구로.
어중간해서는 닿지 않는다.
변화구로는 통하지 않는다.
미도리의 마음 전부, 그 모든 것을 건네주기 위해.
선생의 표정은 동요로 흔들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분명─드디어 닿았다.
지금은 그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미도리, 나는─”
“대답은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말을 찾으려 움직이는 선생의 입술에 살며시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에헤헤, 하고 미도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짓궂게 미소 지으며 닿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덧그린다.
“하지만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요. 선생님이, 내 마음을.”
출발선은 여기였다.
꼭 고백으로 완성되는 사랑일 필요는 없다.
고백하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되는, 그런 사랑이 있어도 좋다.
“사랑해요, 선생님. 정말로 사랑한단 말이에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미도리는 키도 작고 가슴도 작고,
제멋대로에 독점욕이 강한 꼬맹이라서.
아직 전혀 선생의 옆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하지만.
조금씩이라도 변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을 수 있으니까.
잘 어울린다는 말을 해주었다.
어른스럽다는 자신감을 주었다.
그래서 미도리는 그것을 믿는다.
당신이 준 말을 가슴에 품고 당신을 사랑하고 싶다.
“그러니까 선생님. 언젠가 꼭, 꼭이면 돼요.”
지금은 아직 닿지 않는 짝사랑이어도 좋다.
당신을 좋아한다는 올바른 사랑을 전했으니 그걸로 됐다.
그 이후는─미도리 스스로 쟁취해 보일 테니까.
“언젠가 꼭 저를 좋아한다고 말해 주세요.”
선생의 입술에 닿아있던 손가락을 뗀다.
그 감촉을 잊기 전에 미도리는 자신의 입술에 그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거니까요.”
미소 짓는다.
그것은 누군가를 향한 선전포고.
선생에게,
자신에게,
그리고 그 외에 선생을 좋아하는 모든 학생에게.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다고 맹세하기 위한 사랑의 말.
밤바람이 불고 있었다.
달아오른 몸을 기분 좋게 식혀주고, 예쁘다고 칭찬받은 미도리의 머리카락이 고요하게 흔들린다.
하늘은 끝없이 멀고, 깊게 물든 남색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그런 밤의 캔버스에 보석 같은 별이 깜빡이고, 몸의 절반을 구름 천에 숨긴 보름달이 미소 짓고 있었다.
달빛은 하얀 비단 같은 청초함을 거리에 뿌리고, 그 정적의 심연에서 미도리와 선생은 살아가고 있다.
이 순간은 두 사람만이 숨을 쉬고 있었다.
서로의 시선이 교차한다.
깊게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 속에 미도리의 새싹 같은 보석이 떠 있다.
대기의 일렁임에 호응하여 떨리는 수정체 속에 미도리의 색이 살아 숨 쉰다.
이윽고 베일이 내려졌다.
밤보다 어두운 캄캄한 어둠에 시야는 삼켜지고, 당신의 숨소리만이 세계가 된다.
─한 번만 더, 용서해 주세요.
속삭이듯 그렇게 고했다.
미도리와 선생, 두 사람을 가로막는 차가운 거리를 살며시 떨쳐낸다.
열기가 닿는다.
사랑을 담는다.
기쁨에 몸이 작게 떨렸다.
달콤하고 아름다운 열기의 향기에 미도리는 몇 번이고 사랑에 빠진다.
사탕 같은 사랑이었다.
그 달콤한 사랑으로 이 영혼을 가득 채워줘.
“사랑해요, 선생님.”
간지럽히듯 사랑을 노래했다.
언젠가의 미래를 몽상하며.
부디 이루어지기를, 닿은 입술에 살며시 소원을 빈다.
사탕처럼 달콤하고 둥근 이 행성에서 살고 있었다.
언젠가 당신과 단둘이 녹아내릴 듯한 사랑을 하고 싶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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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이 버전 없어? 흑흑 흐규흐규
쓰신 분이 미도리 오시라 쟌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