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비 #S #순애 #노아
원본 by 春夏秋冬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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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할 도리 없이 밤이었다.
올려다본 하늘은 아이올라이트를 덧칠한 듯한 보라색.
별 무리가 깜빡이며 내 안의 체념 같은 그런 공백을 자극하고 있었다.
습기와 먼지를 머금은 비 개인 뒤의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나는 거북하고도 무척이나 아름다운, 그런 너의 눈동자를 바라본다.
“비, 그쳐 버렸네요.”
너는─우시오 노아는 웃고 있었다.
바스락거리며 흔들리는 가로수를 등 뒤에 가득 품고서, 아끼는 장난감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어딘가 쓸쓸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게.”라고 대답을 돌려주며, 나는 갈 곳 잃은 우산을 조심스레 접는다.
나는 비를 좋아했다.
귓가를 부드럽게 울리는 파문의 음색이나, 스쳐 지나가는 거리의 소란을 가려주는 길쭉한 보랏빛 베일 같은 느낌이 특히 더 좋다.
세계라는 이름의 넓고 숨 막히는 장소에서 비는 나를 떼어내어 좁고 아름다운 우산 속 개인실에 가두어 준다.
그리고 그 방 안에서만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비는 근사하고, 아름답고, 좋다.
하지만 비가 그친 뒤의 식어버린 풍경은 싫다.
비 온 뒤의 흙 내음은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거리 곳곳에서 춤을 추고, 무지개는 흐린 하늘을 걷어내며 탁하게 고인 햇살을 내게 과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비 갠 뒤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태양은 진작에 수평선을 넘어가 이 별의 반대편에 새로운 아침을 고하러 떠났고, 홀로 남겨진 밤하늘에 일곱 빛깔 다리는 걸리지 않는다.
젖은 골판지 같은 불쾌한 흙 내음이 발소리를 내며 다가오지만, 곁을 걷는 네 덕분에 그조차 거의 가려진다.
네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 싫어하는 풍경도 아름답게 보여─
그런 간지러운 말을 내뱉을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건 너에게 비밀이다.
만약 그걸 들켜버린다면, 분명 너는 나를 ‘좋아한다’라고 말을 자아낼지도 모르니까.
피부와 옷 사이를 파고들어 살갗을 할퀴는 가을비의 잔향은 차갑다.
가뜩이나 오늘은 추웠는데, 늦은 오후에 내린 소나기는 거리의 체온을 몽땅 앗아가 버렸다.
잊힌 채 방치되어 완전히 식어버린 커피처럼, 그런 쓸쓸함을 머금은 차가움을 안겨주고 있다.
뇌 한구석에 커다란 기만을 끌어안은 채 무의식의 매뉴얼에 따라 숨을 내뱉을 뿐인 나 같은 인간을 꾸짖는 듯한, 마음이 굳어지는 차가움이다.
“춥네.”
나는 차가워진 손가락 끝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어느샌가 옆에서 나란히 걷기 시작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내 말을 잠시 곱씹더니, 턱에 손가락을 대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가요?”
나와는 다른 말을 자아내는 입술을 바라보며 아아, 너는 나와는 다르구나, 하고 고개를 젓는다.
허리를 넘겨 매끄럽게 뻗은, 비단실보다 부드럽게 흐르는 백자색 머리카락.
정적과 고요, 그리고 다채로운 감정을 섞어서 가둔 실물보다도 맑게 빛나는 자수정 눈동자.
눈보다 하얗고 주름 하나 보이지 않는 피부에, 적당히 살집이 있으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매끄러운 이상적인 프로포션.
또각또각, 기분 좋은 리듬을 새기는 발소리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고귀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운 자세를 줄곧 유지하고 있었다.
너는 정말로 예쁜 아이였다.
나처럼 흔들리고 가라앉으며 숨을 쉴 때마다 울 것 같은 우울한 사람과는 다른, 고결하고 눈부신 매력이 가득한 아이다.
고고하게 핀 꽃.
그것은 분명 너를 위해 있는 말이었다.
겨진 정장에 잡아먹힌 자신의 모습을 빗물이 만든 웅덩이에서 발견하고,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숨을 내뱉는다.
재미없는 검은 곱슬머리, 딱히 설명할 필요도 없이 평범한 얼굴, 작게 웅크린 고양이 같은 등.
네 곁을 걷기에 이런 나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너는 나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다고 하니, 나는 기쁘고 또 기뻐서 지금 당장이라도 심장을 멈추고 네 곁에서 사라지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너는 나를 위해 울어버릴 테니까 오늘도 나는 네 곁을 걸을 수밖에 없다.
너를 울리는 게 가장 괴로우니까.
두 사람 사이를 흐르는 공기에 정적이 팽팽하게 울려 퍼진다.
또각또각.
어긋나는 듯하면서도 의외로 가지런한 발소리가 찰팍, 작은 바다를 밟고 지나가며 파문을 일으켰다.
“…저는 비를 좋아해요.”
갑자기 옆을 걷던 네가 웃는다.
그것만으로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가을밤이 부드럽게 풀려나며, 세상의 색이 너로 물들었다.
갑작스러운 화제의 전환은 분명 나에게 닿기 위해서.
춥네.
그런가요?
그렇게 한 번 끊겼던 대화의 끈을 다시 묶고, 이 쓰레기장처럼 잔혹한 비 갠 밤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그런 마음을 담은 작은 의식.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닐 네 말에 시선을 던지며, 나는 다음 말을 기다렸다.
“기억하시나요? 유리창에 시를 썼던 날.”
응, 기억하고 있어.
다독이듯 말을 내뱉으며 가깝고도 먼 과거를 본다.
그날도 아름다운 비가 내렸다.
유리창은 뿌옇게 흐려 있었고, 우리는 그 덧없는 페이지에 문장을 새겼다.
잊을 리가 없다.
기억은 네 특기지만, 나 역시 너와의 나날은 전부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으니까.
게다가 그날, 너는 나에게 ‘간직해달라’고 말했으니까.
나는 보잘것없고 한산한 이 마음 안쪽에 보물처럼 예쁜 포장을 씌워 그 추억을 넣어두었다.
“그날 이후로 비를 보면 마음이 설레게 되었어요.”
그거 영광이네, 라고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중얼거렸다.
너에게 ‘설렘’을 선사할 수 있었다는 게 무척 기쁘다.
멀리 있어 손이 닿지 않을 것만 같은 아름다운 너에게 나의 흔적을 남긴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너무나 슬프다.
네가 받고 다시 돌려주는 그 ‘좋아함’에 나는 응답할 수 없으니까.
“비가 내리면 기쁘고, 그치면 조금 쓸쓸해져요.”
너를 좋아해, 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랑의 크기를 가늠하는 데 ‘죽어도 좋다.’ 같은 말은 무겁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내가 가진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목숨이니 어쩔 수 없다.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너라면 주어도 좋다.
너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
만약 이 마음이 사랑이 아니라면, 나는 분명 앞으로도 다시 사랑 같은 건 할 수 없겠지.
“있죠, 선생님. 저, 선생님 덕분에 좋아하게 된 것들이 정말 많아요.”
소중한 것을 애지중지하듯 너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눈을 감고 고맙습니다, 라며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서.
“선생님과 함께 있는 게 좋아요.
선생님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게 좋아요.
아무렇지 않은 선생님의 동작이, 말투가 좋아요. 늘 피곤해 보이고 졸린 듯한 눈이 좋아요.
나보다 어른인데도 가끔 아이처럼 웃는 그 미소가 좋아요.”
네가 말한다.
그것은 분명 네가 좋아하게 된 것들이고, 게다가 모두가 나에 관한 것들이다.
내게서 좋아하게 된 점들을 너는 사랑스럽게 읊조린다.
나는 그것이 기뻐 가슴이 달콤하게 조여오고, 그래서 괴롭다.
그러니 부탁이야. 그 뒷말은 하지 말아줘.
말이 끊긴다.
생겨난 공백의 시간은 준비 기간.
정성스럽게, 아주 정성스럽게 너는 마음속에서 문장을 엮어낸다.
너는 나에게, 다 엮어낸 그 아름다운 실을 건네고 만다.
나는 그것을 밀어낼 수밖에 없는데.
“─저, 선생님을 좋아해요.”
네가 말한다.
말해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잎사귀다.
너라는 아름다운 꽃에 달라붙은 싱그럽고 선명한 감정의 잎.
너는 분명 그 감정을 사랑이라 부르겠지.
총명하고 순백한 네가 이름 붙인 그 감정은 너를 닮아 무척이나 아름다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어떻게든 저항하고 반항하기 위해 나는 네게서 눈을 돌린다.
미안, 미안해.
모르는 척해서 미안해.
하지만 부탁이야.
부디 나의 거짓말을 용서해 줘.
왜냐하면 나는 네 선생이니까.
너에게 떳떳한 어른으로 남고 싶어.
아아, 밤이다. 밤이었다.
울고 싶을 정도로 깊은 밤이다.
잔광이 죽고 별 무리가 태어나, 눈부시고 얄미운 해님에 업혀 가는 달님이 빛나고 있다.
소나기를 내려준 구름은 하늘 끝으로 쫓겨났다.
숨김없이 모든 것을 드러내는 밤하늘의 어둠이 나에게는 너무 밝아서 무섭다.
있지, 너는.
내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이런 밤도 무섭지 않다고 웃어넘길까.
만약 그렇다면 역시 너는 아직 아이고, 하지만 역시나 아름답다.
“고마워. 나도 노아가 좋아.”
연기를 잘한다는 소리를 예전에 들은 적이 있다.
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를 유지하며, 너와는 다른 ‘좋아함’을 전한다.
미소는 분명 평소와 같을 것이다.
목소리는 기쁜 듯이 들떠 있을 것이다.
몸을 태우며 괴로워하는 연모가 아니라, 상쾌하고 맑은 우애의 말을 너에게 건넸다.
모르는 척해서 미안하다고 마음속으로 사과하면서.
“선생님, 저는…….”
너는 매달리듯 말을 찾다가 도중에 그만두고 입을 다문다.
상냥하네, 라고 그 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너는 영리하고 착한 아이니까 사실 내 거짓말도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추궁하지는 않기에 나는 비겁하게도 그 다정함에 응석을 부린다.
“가자.”
아하하, 웃으며 건넨 말이 끝을 알리는 신호.
비겁한 나는 그것으로 이야기를 매듭짓고, 대화의 흐름 속에 멈췄던 발을 움직였다.
또각또각.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맞물리던 발소리가 이번에는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발밑에 반사된 밤하늘의 한복판, 새하얀 달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시끄러워, 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그 얼굴을 짓밟았다.
발끝이 차가운 물에 젖고, 꼴좋다며 그렇게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미안해, 노아. 정말 미안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너에게 사과를 되풀이한다.
아아, 밤이다. 밤이었다.
죽고 싶어질 만큼 깊은 밤이었다.
달이 보고 있다.
별이 보고 있다.
맑은 하늘이라니 바보 같다.
나의 사랑을 내가 죽이고, 네 사랑을 가벼이 여기고 있다.
사실은 네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이런 밤도 무섭지 않다고 웃고 싶어.
하지만 나는 너와 다르게 이미 어른이 되어버렸으니까.
더러워지고 닳아서 더는 아이가 아니게 되어버렸으니까.
있지, 노아.
좋아해. 정말 좋아해. 사랑해.
이 세상 누구보다도, 무엇보다도.
그러니까 부탁이야.
이기적이고 잔인하다는 건 알지만.
─적어도 좋은 선생으로, 좋은 어른으로 남게 해줘.
너를 보고 있다.
너를 사랑하고 있다.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내 마음이 가라앉은 어두운 심연의 바닥에서.
사랑의 꽃이다.
때 묻은 꽃잎에 추악한 나의 남빛을 싣고, 시들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너는 고고하게 핀 꽃이었다.
스노플레이크. 하얗고 아름다운 사랑의 꽃.
네가 지금 피운 아름다운 꽃도 언젠가는 시들어 주기를.
“자, 노아─언젠가 나를 잊어줘.”
어찌할 도리 없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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