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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속 3km, 오늘은 맑음
사람 수와 걷는 속도는 반비례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생각
열쇠를 시계 방향으로 돌려서 '딸깍' 소리가 나는 것을 확인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고리에 손을 얹어 문고리가 움직이지 않는 것도. 매번 열쇠를 잠근 후 이렇게 문이 열리지 않는지 확인한다. 평소 보안 교육을 받은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이렇게 확인하지 않으면 내가 문을 잠갔는지 아닌지 잊어버린다.
“그럼, 이제 갈까요?”
“응.”
물론 방금 나에게 말을 건넨 그녀에게 있어서는 그런 식으로 잊어버릴 수도 없고, 확인 따위는 필요 없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눈앞의 소녀, 우시오 노아는 말을 마치고 가방을 다시 어깨에 걸치고 내게 미소를 지었다. 짧지 않은 그녀와의 교제를 통해 그녀의 미소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그것은 그 중에서도 온화한 편으로, 그 표정을 보는 사람이 무어라 무어라 하기보다는 그녀 자신의 감정의 표현인 것 같았다.
그녀에게, 아니 학생에게 '갈까요'라는 말을 듣는 것은 나로서는 흔치 않은 일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그날의 당번이 끝나면 나는 이 집무실에서 학생들을 배웅한다. 작별인사를 하든, 손을 흔들든, 그 방법은 천차만별이지만, 내가 이 방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만은 공통적이다. 샬레의 거주구에 생활기반을 두고 있는 나에게는 이곳이 돌아갈 곳이고, 그런 의미에서 노아의 말은 부자연스러웠다.
샬레의 건물을 나서자, 그동안 흰색을 기조로 하고 있던 풍경에 한숨에 색이 입혀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실내에서 갑자기 밖으로 나왔기 때문일까, 외계의 눈부심에 눈의 안쪽이 따끔거려 눈을 가늘게 뜬다.
눈부신 시야에 발걸음을 멈추자 봄바람이 살갗을 어루만졌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부드러운 바람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편안함이 있다. 일 중의 기분 전환이라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지금 이렇게 밖으로 나온 목적은 그렇지 않다.
“선생님?”
조금 앞서 가던 노아가 돌아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따라잡기 위해 보폭을 조금 넓혀 걸음을 옮긴다.
샬레에 살고있는 내가 이렇게 노아와 귀갓길을 함께 하는 것은 그것을 노아에게 제안받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말하길 출퇴근 시간이 없고 일과 사생활이 구분되지 않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그녀의 퇴근길에 동행함으로써 유사 출퇴근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다고.....한다.
“물론 퇴근 후에는 업무 금지예요.”라며 양손의 검지로 가위표를 만드는 그녀의 미소는 방금 전과 달리 다소의 압박감이 느껴지는 미소였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내 일이 다 끝날 때까지 도와주는 이상 그를 어길수도 없었다.
“벌써 봄이네요.”
노아를 따라잡으려는 찰나, 그녀가 작게, 하지만 분명하게 중얼거렸다.
D.U. 교외라고는 하지만 이 일대는 제법 고층의 빌딩이 즐비한 지역이다. 예를 들어 시골 마을처럼 시선이 닿는 곳에 산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빌딩 숲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런 이 근처에서는, 계절에 따라 도시의 모습이 크게 달라지는 일은 없다. 기껏해야 보도의 가로수가 잎을 달았다가 떨어뜨리는 정도일 것이다.
“그런가.”
그러니까 그런 말이 흘러나온 것도 나에게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절기상으로는 이제 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다만, 이 주변을 중심으로 살고 있으니, 도무지 그 실감이 나에게는 닿지 않았다.
'어머' 하는 소리가 들려 옆을 돌아보니 노아가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이런 도시에서도, 눈을 크게 뜨고 보면 의외의 것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저기요.”
문득 노아가 멈춰섰다.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보면 셔터를 내린 가게 처마 끝에 제비집 같은 것이 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지 날아 온 집주인이 입에 물고 있는 나뭇가지를 서둘러 그 일부에 더하려 한다.
“아직은 아직 만들어가는 단계인 것 같은데.....저기라면 바람도 많이 불지 않고, 둥지를 짓기에 안성맞춤일지도 몰라요.”
“그렇지. 이곳이라면 사람의 왕래도 적당히 있고, 포식자에게 습격당하는 일도 없을거고.”
“그래요. 조만간 새끼들이 둥지에서 얼굴을 내밀겠지요. 기대됩니다.”
그녀는 빙긋이 웃으며 수첩을 꺼내 들었다. 두세 마디, 펜으로 무언가를 적더니 수첩을 덮었다.
“노아, 저 꽃 알아?”
“라넌큘러스군요. 마침 지금이 딱 개화 시기예요.”
다시 조금 걷다 보니 꽃집 앞을 지나게 된다. 가게 앞 인도에 살짝 튀어나온 채로 장식된 꽃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흰색, 노란색에 분홍색. 봄다운 빛깔이 가게 앞을 수놓고 있다.
노아는 다가서서 꽃에 시선을 맞추듯 허리를 숙였다.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 올리며 꽃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다. 오똑한 코끝이 라넌큘러스의 향기를 받아들였는지,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얼굴을 이쪽으로 향했다.
“아세요? 라넌큘러스의 어원은 원래 라틴어로 개구리를 뜻하는데, 원예용으로 개량된 품종은 습기를 싫어한다고 해요. 그래서 봄에 꽃을 피우고 여름에는 휴면한다고 하더군요.”
“그렇구나. 하지만 그 기분은 알 수 있을 것 같네.”
“기분이라고요?”
“응. 덥고 습하면 쉬고 싶어.”
“후훗. 그렇군요. 저도 더운 건 조금 싫어해요.”
“동족의식이 싹트고 있는데 샬레에서 키우면 어떨까?”
“색감이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선생님은 잊지 않고 물을 주실 수 있나요?”
내가 거르지 않고 꽃에 물을 주는 모습을 상상하며, 나의 실상과의 괴리에 와르르 상상이 무너져 내렸다. 아무래도 나에게는 꽃을 돌보는 일은 어울리지 않는 모양이다. 힘없이 고개를 흔드는 나를 보며 “그럼 다음 기회에”라며 노아는 웃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밥은 제대로 먹고 있나요?”
“뭐, 띄엄띄엄...?”
다시 조금 더 걸어가자 식료품점 앞에 도착했다. 가게 앞에는 제철 식재료 코너라며 피망, 양배추, 쑥갓과 당근 등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다.
노아는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몇 가지를 집어 들고 가게 주인에게 말을 건다. 안에서 나온 주인에게 돈을 지불하고 곧 다시 돌아온다.
“요리할 거야?”
"네. 색이 좋은 게 몇 개 있어서, 이왕이면 먹어버릴까 하고.”
그녀는 기분이 좋은듯 봉투을 들어 보였다. “선생님도 어떠세요?”라는 그녀의 권유, 제법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제안이었지만, 그렇게까지 하는 것은 조금 망설여져 고개를 가로저었다. 틀림없이 기분이 상하리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그럼 다음 기회에”라며 가볍게 웃어 넘겼다.
그렇게 걷다 보면 지하철 역 입구가 보인다. 이 길의 종착지이다. 시계를 보니 거리에 비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흘러 있었다. 평균적으로 보면 천천히 걸었던 것보다 조금 더 느린 정도였을까.
“도착했네요.”
“결국 우회해서 시간이 오래 걸렸네.”
“네. 그래도 지루하지는 않았으니까요.”
“혹시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내가 끌려온건가?”
“아니요. 하지만 선생님.”
“무슨 일이야?”
“알고 계세요? 당번 퇴근은 기본적으로 혼자 하는 거에요.”
그럼 당연하지, 라는 말을 삼켰다. 당했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말로 표현하기에는 조금 멋없어 보였다.
“혼자지만, 돌아가는 길에는 많은 것들이 있어요. 제비집에, 라넌큘러스에, 제철 채소. 그 밖의 것들. 선생님은 이제 다시 샬레로 돌아가는 동안 그것들을 한 번 더 볼 수 있을 거예요.”
“저는 계속 기억하고 있어요. 어떤 모양이었는지, 어떤 색깔이었는지, 어떤 향기가 났는지. 일주일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잊을 수 없어요. 하지만 선생님은 언젠가 희미해져, 오늘을 망각의 세계로 보내실 거에요.”
“그러니 다음 당번 때 알려주세요. 여기서 돌아가는 길에 다시 한 번 그것들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은, 그냥 돌아가는 길. 알려주신다면, 아무 것도 아닌 것도 제가 기억할 수 있으니까요.....”
문득 봄바람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억누르고,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어디선가 흘러온 벚꽃이 우리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찰나 간, 나는 말을 기다렸다. 그녀가 계속하는 말을. 또 내일 또 만나자는 식의 인사말이 아닌, 무언가 말을.
“기대할게요.”
그럼 또 봐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노아는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그 하얀 머리의 꼭대기가 보이지 않게 되자, 원래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식료품점을 지나갔다. 채소를 손에 쥔 노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꽃집 앞을 지나쳤다. 라넌큘러스 향기를 맡던 노아가 떠올랐다.
제비집을 보았다. 그녀가 수첩에 적은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에 신경이 쓰이는 사이에, 정신을 차리니 어느덧 샬레에 도착해 있었다.
하얀 풍경이 나를 반겼다. 그 흰색이, 문득 그녀의 머리칼의 빛깔과 얽혀들어──둘이서 걸었던 길보다 훨씬 짧은 그 귀갓길에서, 노아를 떠올렸다고 솔직하게 전해야 할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으면, 오늘 하루의 특별하지 않은 귀갓길을 망각의 저편으로 밀어내기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짝.
아주 조금, 다음 노아의 당번까지의 날이 길게 느껴졌다.
***
나는 이 작가 작품이 가장 좋더라
어딘가 달콤쌉싸름한 다크초콜렛을 먹는 기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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