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금이 간 것들
“...히나,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일이라니?”
리오의 물음에 히나는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되물었다.
“진심으로 그를 믿은 거야? 그는 좋게 말해도 우리에게 호의적인 존재가 아니야.”
“그를 믿은 것이 아니야. 그것 말고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던 것 뿐이지.”
그 말에 토키가 끼어들었다.
“선생님으로부터 싯딤의 상자를 격리한 다음 그가 선생님을 납치했다고 해도 말이 됩니다. 그에게 뭔가 다른 속내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는 왜 굳이 이걸 돌려주러 왔다고 생각해?”
히나가 품 속에서 싯딤의 상자를 꺼내며 바라보며 말했다.
“더군다나 선생님을 우리로부터 격리하고, 무언가 소동을 일으키고 싶다면 지금보다 적기인 때는 없어. 그러나 그는… 그들이라고 하면 좋을까. 이상할 정도로 아무런 활동이 없지. 검은 양복은 자신들의 조직은 궤멸됐다고, 자기 역시 선생이 어딘가 있다면 찾고 싶다고 하더군.”
“그 싯딤의 상자가 진품인지 확인해 보셨습니까?”
“...이런 물건에 가장 정통할 것 같은 학생을 찾아갔었어.”
히나의 말에 무언가 감을 잡은 리오가 작게 탄식했다.
“설마…”
“그래.”
죄 지은 사람처럼 작은 목소리로 히나가 말했다.
“세미나의 집행위원 하야세 유우카야. 그녀에게 이걸 들고 갔었어.”
“그러면, 그러면 그녀의 심리 상태가 급격히 불안정해지기 시작한 게…”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리오로부터 시선을 피하기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히나가 고개를 돌렸다.
“미안해. 그녀에게도 그건 커다란 충격이었겠지. 그녀가 나와 접촉하고도 잠들지 않은 것은 의외였지만…”
분명 수면욕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이라. 히나 자신처럼.
“그런… 유우카는 그런 말은 조금도…”
“그녀가 모든 것을 확인해 줬어. 싯딤의 상자에 남은 것이 선생님의 지문이라는 것도, 그 지문이 마지막으로 남은 날짜가 선생님의 실종 날자와 일치한다는 것도.”
“아아…”
리오가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의 말대로 모든 작동 원리가 불명인 것이 맞다는 것도, 선생님 이외에는 누구도 구동시킬 수 없다는 것도…”
“어째서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았지?”
“뭐라고 말하지? 선생님이 지금 없다고?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 그러니까 다들 잠깐만 자고 있어 달라고?”
히나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런 식으로 설명을 시도했어야 한다는 말이야? 리오, 너는 할 수 있겠어?”
리오는 히나의 말이 마치 자신을 찌르는 칼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설명해도 들어 주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나는 알고 있어. 그러니 책임져야 해. 나 혼자라도…’
히나의 그런 생각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리오는 히나의 질책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히나를 비난할 수 없었다.
이 고통, 부담감, 무게는 부재의 증거를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그녀에게만큼 뼈저리게 다가올 수 없을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까?’
리오를 설득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선생님이었다. 그는 자신을 위기 속에 던져 몸으로 자신의 신념을 증명해 보였다. 그러나 리오는.
리오는 선생님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지금 없었다.
“...히나. 네 말을 들어 봤지만 역시 이건 아니야.”
히나는 리오의 부정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연유가 어찌 됐건 이건 옳은 방법이 아니야. 선생님이 안 계신다는 게 사실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아는 선생님이라면 이런 걸 원하셨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
“토키. 넌 선생님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네.”
토키의 말을 가라앉은 히나의 목소리가 잘랐다.
“뭐…라고요?”
“옳은 방법? 그건 누가 정하는 거지? 그건 너희들 의견일 뿐이잖아?”
“저는 선생님의 메이드입니다.”
토키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선생님의 가사를 돕고, 그리고 선생님을 지켜 왔어요. 선생님의 취향에 대해 무엇이든 알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생각을 알 수 있다고?"
"물론입니다."
“그건 네가 하고 싶었던 일일 뿐이잖아?”
히나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네?”
“선생님의 시중을 들고 싶고, 선생님과 함께하고 싶고, 선생님과 취향을 공유하고 싶었던 거잖아?”
가늘어진 히나의 눈매가 토키를 쏘아봤다.
“그게 선생님을 위해 일하는 거야? 네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게? 고작 그래 놓고 그분에 대해서 뭐든 안다는 것처럼 말하는 거야?”
“히나 위원장, 저와 선생님의 사이는 그런 게 아닙니다.”
“...'저와' 선생님?”
그 말을 되뇌이는 히나의 태도는 방금 전보다 훨씬 날카로워져 있었다.
토키 본인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의도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가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히나의 박탈감과 절망감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설령 당신이라도 할지라도 저와 선생님의 관계에 뭐라고 할 권리는 없습니다.”
“토키, 됐어. 이제 그만…”
상대의 분위기가 심상찮은 걸 눈치챈 리오가 토키의 말을 말리려고 했지만, 조금 늦고 말았다.
“그렇게 하나하나 선생님 핑계를 대는 건 그만해!”
히나가 소리쳤다.
“...!”
“넌 지루한 서류 작성, 회의, 순찰, 인사와 장부 검토, 부서간 조율, 그런 것들을 선생님 대신 해 주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어?”
토키의 말문이 막혔다.
"그분의 짐에서 조금이라도 무게를 더 줄여 보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
“저는… 물론 그분이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내가 순찰 도는 동안, 서류의 산에 파묻혀 있는 동안,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만나며 수습하는 동안, 잠을 줄여 가며 그분의 피로를 어떻게든 덜어 보려고 노력하는 동안, 넌 그냥 선생님과 함께 있어서 재밌었다는,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히나가 비웃었다.
“내게?”
“...히나 위원장?”
울분 쌓인 히나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건 네 이기적인 욕구를 채우고 있었을 뿐이잖아!”
타인의 이기심은 용납하면서도, 자신의 이기심만큼은 수천 번 죽여 왔던 그녀의 자제심이 마침내 무너졌다.
“왜 관심은 항상 뻔뻔한 너희들이 독차지했던 거야. 선생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뭐든지 했던 나 대신에!”
“...”
“그 가면 쓴 것 같은, 기분 나쁜 남자의 말이나마 부여잡고 믿을 수밖에 없는 내 심정을 너희들이 안다는 거야? 마침내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선생님과 만나기로 한 날에, 목격한 게 텅 빈 샬레뿐이었던 내 마음을? 키보토스 전체를 헤집고 돌아다녔는데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던 내 절망감을? 그리고 할 수 있는 게 고작해야 ‘언젠가’ 그분이 ‘돌아올 거야’라는 말을 믿을 수 밖에 없는 내 심정을?”
히나가 이번엔 리오를 향해 물었다.
“리오, 넌 알 수 있겠어?”
리오는 히나의 이 잘못된 동기와 믿음이 어디서부터 온 건지 알 것도 같았다.
“...너만 선생님을 보고 싶어하는 게 아니야. 히나. 나 역시…”
“당장이라도 보고 싶단 말이야. 나도 선생님이랑 시간을 보내고 싶었단 말이야! 억지로 시간을 낸 날엔 항상 당번으로 지명해 줄 수 있냐고 묻고, 언젠가 만나 줄 수 있냐고 모모톡을 보냈는데, 항상 선생님과 만나고 싶었는데.”
히나가 기가 차다는 듯이 말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아?”
“무슨…말을 들었길래?”
“...밀레니엄과 트리니티에 심리 상태가 불안해 보이는 학생이 있어서, 당분간 내가 지켜봐 줘야 할것 같다…래. 웃기지 않아?”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각자 누구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너희들 모두 그런 식으로 선생님을 만났던 거야? 리오, 너 역시 선생님이 상냥한 사람인 걸 알고, 그런 같잩은 동정심 유발 작전으로 선생님을 꼬드겼던 거지?”
“아,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리오가 황급히 부정했다.
“오해야. 난 그저…”
“오해? 이것도 오해인가, 리오? 네가 불러 일으킨 수백 개의 오해 중에 이건 대체 몇 번쨰지?”
“히나 위원장!”
“사실은 경멸하고 있는 거 아니야? 너희가 그 동정심을 무기 삼아 진짜 선생님과 붙어 다니는 동안, 바보같이 선도부에나 붙어 있었던 저 멍청이는 상상 속의 선생님과 노는 게 최선이었다고 말이야. 그리고 내가 선생님의 마지막을 놓치고 비참한 처지가 되자마자, 날 놀리러 찾아왔지. 그렇잖아?”
“그럴 리가 없잖아! 믿어 줘 히나. 난 그저…!”
“난 항상 착한 아이였다고! 그게 내 유일한 자부심이었단 말이야!”
리오가 진심이 닿길 바라면서 소리쳤지만 히나는 듣지 않겠다는 듯이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히나가 훌쩍이기 시작했다.
둘은 그저 그 동안 침묵을 유지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 무거운 설움과 슬픔을 뚫고 자신들의 말이 닿을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야. 난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으니까. 이 꿈 속에서 선생님과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모두에게 선생님의 존재를 공평하게 선물해 주면 돼.”
“진심이야?”
“이제 더 이상 고민 같은 건 하지 않겠어. 그래… 그게 좋을 것 같아.”
“그건 안 돼!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아?”
“왜 안 된다는 거야? 내가 만든 꿈 속엔 선생님이 언제나 존재할 거야. 이 방식대로 하면 모두가 공평하게 선생님을 ‘가질 수’ 있어.”
“그야, 그건 진짜 선생님이 아니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꿈이던, 그건 결국 현실이 아니잖아!”
“그건 네가 선생님께 선택받은 사람이라서 할 수 있는 말이야.”
“그런 거랑 상관 없는 이야기잖아! ‘선생님도’ 그걸 바라지 않았을 거라고! 정신 차려, 히나!”
이번엔 리오가 히나의 역린을 다시 건드렸다.
말을 끝내마자자 그걸 눈치챈 리오였지만, 결코 주워담을 수 없었다.
“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리오는 히나의 머리 위 허공에서 무언가 금이 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너 혼자 선생님에 대해 뭐든 안다는 것처럼 말하지 마!”
탕!
“선생님이 없는 세상 같은 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야! 이게 최선이란 말이야!”
히나가 충동을 참지 못하고 발포했다.
히나가 발사한 총탄은 아비 에슈흐의 어깨를 향해 정확하게 날아가 맞았다.
피탄 경고음이 뜨자 토키는 황급하게 히나와 거리를 벌리며 전투 준비 태세를 했다.
히나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충격받은 것처럼 잠깐 동안 그걸 바라보더니,
“...”
그저 다시 이를 악물었다.
“모두를 위한 새 낙원을 만들 뿐이야. 현실이 행복할 수 없다면, 행복한 현실을 내가 직접 만들면 돼. 너희와 달리 선택받지 못한 학생들도, 얼굴 모를 수많은 학생들이 모두 공평하게 선생님과 함께할 수 있는 그런 낙원을.”
“히나, 선생님을 찾는 건 포기한 거야?”
“설마. 말했듯이 나는 믿고 있을 거야. 선생님이 ‘언젠가는’ 돌아오실 거라고.”
물론이었다. 히나는 한 순간도 그를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게 언제까지건 간에, 난 기다릴 거야. 반드시.”
앞으로도. 영원히.
“넌 정말 그런 걸로 괜찮은 거야?”
“선생님이 부재 중이신 지금 내가 찾아야 할 건 ‘왜’나 ‘어디로’같은 게 아니야. …그래서 ‘이제 어떻게’지. 그리고 이게 내 답이야.”
보란 듯이 한쪽 팔을 크게 벌려 보이며, 히나가 쓰디쓴 선언을 했다.
“그분의 빈자리를 지켜야 하는, 내 의무야."
리오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다는 것에 가까웠다.
뭐라고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어떤 심정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념에 가득찬 그녀의 모습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눈을 감아 리오. 그냥 눈만 다시 감으면 돼. 그러면… 행복한 꿈이, 낙원이 있을 거야. 내가 도와 줄게.”
이 세상 누구보다도 익숙한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보다 더 어두워진 지금 히나의 얼굴은커녕 발끝도 보이지 않았지만, 리오는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거절할게. 히나.”
“어째서야?”
히나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너는 선생님이 보고 싶지 않아? 선생님이 있는 그 행복한 일상 속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분의 목소리, 실루엣, 미소, 향기까지 느끼고 싶지 않은 거야? 아니면…”
“...”
“여기까지 왔는데도, 내가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런 게 아니야.”
리오가 조용하게 말했다.
“난 널 이해해. 히나 위원장.”
“그럼 어째서…!”
“이해하기 때문이야.”
무전기 너머의 리오가 괴로운 표정을 지었지만, 히나가 그걸 볼 수 있을 리 없었다.
“토키. 전투 준비."
리오가 가장 하고 싶지 않았던 명령을 토키에게 내렸다.
"히나 위원장을 여기서 제압한다.”
“예스 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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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나 한 마디 한 마디가 너무 마음아프네...
무한 츠쿠요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