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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고파졌다…”
샬레 일로 출장을 마치고 나서 혼자 남으니 평소에 하는 업무 이상으로 허탈감이 몰려온다. 집무실에서 서류들과 씨름하는 것과는 또 다른 피로감에 내 마음은 이미 너덜너덜하다.
이제부터 다시 샬레로 돌아가 잔업을 할 기력은 없다. 그렇다고 이대로 바로 집으로 돌아가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도 살아있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바니타스, 바니타툼이다.
“...그래.”
모처럼 학원 자치구에 왔다. 지금은 일단 맛있는 현지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가자.
고개를 들자 마침 반짝이는 음식점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발효 버터 미트파이
트리니티 종합학원. 키보토스에서 1, 2위를 다투는 오랜 역사를 지닌 대형 학교. 동시에 키보토스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 아가씨들이 많이 다니는 상류층 학교이기도 하다.
오후에는 티타임을 갖는 게 전통인 트리니티는 디저트의 성지라 다른 학교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심지어는 원수지간인 게헨나 학생들도 몰래 먹으러 온다는데.
티파티에서 미팅이 끝난 뒤 오후 다과회에 초대받았다.
나기사가 직접 우려 주는 엄선된 홍차. 쌉싸름한 맛이 크림의 단맛을 도드라지게 하는 말차 롤케이크. 식감이 바삭바삭하고 고소한 아몬드 쿠키. 트리니티 내에서도 최고급일 이 티타임은 그야말로 우아하고 감미로운 시간이었다.
미카가 격리 중이라서 활기는 없었지만 그 덕에 세이아, 나기사와 차분하게 담소를 나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만족하지 못했다.
모자랐던 것이다.
소금과 기름이 모자라다.
나는 그녀들만큼 고급스럽지 못하다.
식욕에 이끌려 실컷 먹어치우고 싶다. 어른이라는 신분을 벗어던지고 맘편히 배를 채우고 싶다. 때마침 나타난 것은 The Holy Grail이라는 이름의 고풍스러운 간판을 내건 펍이었다.
펍. 미성년자는 출입할 수 없는 어른들의 공간.
나무로 된 문을 열고 의기양양하게 가게 안으로 들어선 내 머릿속에는 바삭바삭한 튀김이나 머스터드를 듬뿍 넣은 감자 샐러드라든가,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잔 같은 편견이 떠올랐지만 그런 가게와 이 펍은 역사적인 유전자부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뒤에서 문이 삐걱이며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카운터에서 현금과 교환해서 유리잔을 건네받는 손님들의 모습이었다. 로봇 머리를 한 바텐더가 나를 알아보고는 먼저 자리를 잡으라는 듯이 눈치를 주었다. 시키는 대로 빈 테이블을 찾는다. 의자 있는 테이블석도 있는 모양이지만 넓지 않은 가게 안에 손님 대부분은 서 있다.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 나는 일단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사이즈의 작은 테이블을 확보했다. 향신료 냄새가 나서 혀 밑에서 침이 고여 나온다.
“어서 오세요. 주문하실 때 계산도 같이 해 주세요.”
카운터에 붙어있는 메뉴판으로 시선을 내린다. 피시 앤 칩스, 셰퍼드 파이, 피시 케이크, 소시지 매시… 뭔가 이미지가 떠오르는 음식과 그렇지 않은 음식이 있다.
“오.”
‘발효 버터 미트파이’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버터와 미트… 지방과 단백질이 남자의 본능을 뒤흔들고 있다.
발효 버터와 그렇지 않은 버터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평범한 성인 남성인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발효’라는 관을 쓰고 있는 것만으로도 버터는 모종의 권위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아, 애석하게도 나는 그런 권위에 몹시도 약한 모양이다. 기름기 가득한 고기와 기름이 뱃속으로 흘러내려갈 모습을 상상하니 침이 꼴깍 넘어갔다.
“여기요. 발효 버터 미트파이랑 피시 앤 칩스 주세요.”
“음료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앗, 그러네.”
음료를 잊고 있었다. 맥주, 위스키 같은 종류가 다양했다. 바텐더 뒤에 술통이 보였다.
소프트 드링크도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흑맥주를 주문했다. 어차피 한 잔 마시고 끝낼 생각은 없다.
바텐더는 처음에 나오는 거품을 잔에서 넘치게 한 다음 천천히 잔의 가장자리까지 맥주를 부어 넣는다. 언제쯤 가득 채워지려나, 기다리기 힘들었다.
하프 파인트 잔에 따라진 칠흑의 맥주는 푹신푹신한 거품을 일으켰고, 그 거품만으로 나는 목을 축였다. 내가 잘 아는 맥주와는 다르게 상온이지만, 온도 차이는 내 호기심에 작은 파도조차 일으키지 못했다.
음식은 완성되는 대로 테이블로 가져다주는 듯한데, 유리잔에 담긴 튀긴 파스타가 곧장 서비스로 제공되었다. 자리에 앉아 바로 한 개…
뿌득.
“음…”
앞니에 끼워진 가느다란 파스타가 느낌 좋게 끊어지면서 짭쪼름한 맛과 고소함이 입안 가득 퍼진다. 맛도 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나는 잔을 들었다. 은은하게 달콤하고 커피처럼 진한 향이 코를 가득 채운다.
“―――”
아아, 목구멍이 행복해진다.
맛있어.
맛있어.
맛있어!
혼이 떨려온다!
“푸핫… 어라?”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잔이 비어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나는 그저 딱 한 입만, 맛보려 했을 뿐인데.
아직 제대로 맛보지도 못하지 않았나.
“저기요, 흑맥주 한 잔 더 주세요.”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카운터로 돌아갔다.
생각해보니 샬레 고문으로 부임한 이후로 술은 아주 오랜만이다. 샬레 오피스 빌딩을 떠나기 직전까지 학생들과 같이 있을 일도 많았고, 저녁을 같이 먹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저녁 식사를 같이 할 때 대부분 학생들은 술을 마실 수 있게 배려해 줬지만 미성년자 앞에서 그럴 엄두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개나 고양이나 로봇 머리들뿐이지만 여기는 어른들밖에 없다. 선생이라는 체면을 계속 유지할 필요도 없다.
“꿀꺽… 꿀꺽… 푸하…!”
낙원은 이곳에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했던 음식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카운터에 접시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이미 버터의 달콤하고 향긋한 냄새가 테이블로 퍼져 왔고, 나는 그 모습을 보기도 전에 이미 좋아하는 여자와 첫 데이트를 앞둔 소년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일단 피시 앤 칩스부터 먹어볼까.”
테이블에 주의사항이 적혀 있었다. 맥아 식초를 축축해질 대까지 뿌리는 게 전통이라는 모양이다. 거스를 이유는 없다. 뿌리자. 이 정도면 되나. 아직인가.
“좋아…”
와그작, 바삭…
“오…!”
맛있다. 기름의 농후한 맛을 식초가 중화시켜 준다. 곁들여진 감자도 따끈따끈한 게 자신의 강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바삭거리는 튀김옷의 식감도 좋다. 신맛이 배어든 대구 튀김을 한 입 베어물자 기름기가 남은 입안이 맥주를 달라며 욱신거린다. 무엇 하나 물러설 이유는 없다. 단숨에 마셔버리자.
꿀꺽… 꿀꺽…
한 잔 더. 혼자여서 그런지 회전도 빠르다. 이성이 경종을 울리고 있지만 지금만은 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뒀으면 한다. 가끔은 자기 자신을 한껏 풀어주는 것도 좋잖아. 그렇겠지, 당연히 그렇지. 방해하는 자식한테는 펀치를 날려주겠어.
그리고― 미트파이다. 부채꼴 모양으로 서빙된 파이를 칼로 자르자 바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들어간다. 크리스피한 감촉에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조심스레 파이 반죽을 뜯어내자 찢어진 틈새 사이로 향신료가 섞인 다진 고기 냄새가 났다.
자른 조각에 포크를 찔러넣은 순간 괜히 긴장이 되었다. 지금 이걸 떨어뜨렸다가는 나는 남들 보는 눈도 신경쓰지 않고 눈물을 쏟을지도 모른다.
와삭…!
여러 겹으로 겹쳐진 파이 반죽이 부서진다. 곧바로 밀려나오는 고기를 한입 베어물자 묵직한 감칠맛이 퍼져나간다. 마늘 향과 후추 맛이 뒤따라 왔고, 삼키고 나니 진한 버터의 잔향만이 남았다.
“으음…!”
이거 맛있다. 100점 만점에 250점.
다음 한 입으로 포크를 뻗는다. 생명체로서의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 그 누구도 나를 막을 수는 없다. 설령 유우카가 눈을 부릅뜨고서 미제출 서류를 두고 화를 낸다 해도, 린 쨩이 무덤덤하게 업무의 미비한 점을 지적한다 해도 부처 같은 미소를 지으며 온화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무적이다.
“우걱, 우걱, 우걱.”
미트파이. 맥주. 식초를 뿌린 튀김. 맥주.
감자. 맥주.
“꿀꺽, 꿀꺽… 푸하…!”
한 잔 더.
“꿀꺽, 꿀꺽.”
미트파이. 감자. 맥주.
지금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면 아마 얼굴이 엉망진창일 것이다. 선생의 위엄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타락한 어른의 모습이 분명 비춰질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식탁에 둘러앉는다는 건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혼자서 욕구를 채우는 시간 또한 소중하다.
이것은 구원이다―
나는 콧김을 내뿜으며 미트파이에 포크를 꽂고 있었다.
“왜… 먹으면 사라지는 거야… 으으…”
행복 중추가 충만해지는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나는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 좋은 부유감과 함께 트리니티 중앙 역을 향해 비틀비틀 걷고 있었다.
“아아, 그렇게 맛있는 게 잘못이지. 젠장… 왜 그렇게 맛있는 거냐고, 윽…”
중얼거리면서 자갈이 깔린 길을 걷는다. 나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기세 좋게 맥주를 마셨지만 한계는 넘기지 않았다. D.U. 행 막차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으니 가장 가까운 역에 도착하면 집에 갈 수 있다.
그래, 물을 마셔둬야겠다. 때마침 자판기 불빛이 몇 미터 앞에 보였다. 지갑을 꺼내면서 불빛으로 다가가자 불빛을 가리는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선생님?”
“으응? …아, 하스미?”
큰 키에 어울리지 않게 구부정한 자세로 하네카와 하스미가 고개를 돌렸다. 오른손에는 슈크림이 들려 있다. 껍질은 벗겨져 있고 황백색 커스터드 크림이 살짝 엿보인다.
“음, 저기… 이건,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서 가져온 겁니다. 봉사활동이에요. 절대―”
“헤헤, 맛있지. 슈크림.”
“서… 선생님?”
“음식이란 행복의 기초니까 말이야… 으읍.”
“호, 혹시 취하셨어요?”
“아아… 응. 지금, 엄청 기분이 좋아― 엇.”
다리가 휘청거리다가 갑자기 안정되었다. 몇 초 뒤 하스미가 어깨를 빌려주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런 시간에 선생님 혼자 다니시다니, 부주의하시네요.”
“음, 아… 그, 그렇지. 미안…”
“밤에 순찰을 다니다 보면 가끔 술에 취하신 분들을 발견할 때가 있어요. 선생님, 역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자, 걸으세요.”
“고… 고마워… 아하하.”
하스미는 나를 부축하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두통과 복통에 시달리며 무거운 발걸음으로 샬레로 가게 되었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다.
계속.
댓글 12
술취한채로 하스미랑 으흐흐

마싯겠다
...정말 역으로 데려간 거 맞아?

이런 소설도 재밌네